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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로젤리아는 거듭 거울을 보았다. 오늘따라 치장을 돕는 하녀들에게 완벽한 모습으로 만들라 채근하며 평소보다 긴 시간 동안 단장했다.
바로 오늘이 공작에게 후처를 들이는 결정을 재고하라고 주었던 일주일의 기간이 끝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날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제 모습을 가다듬었다.
그동안 저를 피한 채 잠잠하던 태도를 보면 뻔히 결과가 예측되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기로 다짐하며 찌푸려지려는 얼굴을 의식적으로 웃는 얼굴로 바꾸었다.
한참이나 거울 앞에서 옷차림과 표정을 점검한 뒤 로젤리아는 공작을 만나기 위해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에서도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품위를 잃지 말고, 침착해지자는 자기 암시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겨우 떨리는 손을 들어 노크할 수 있었다.
“들어오시오.”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었다.
로젤리아는 떨리는 손을 치맛자락에 숨기고 애써 태연한 척 그의 앞에 섰다.
“일주일이 지났어요. 그동안 생각은 마치셨겠죠?”
그녀의 물음에 공작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리아,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이 없소.”
“기어이 뜻대로 하시겠다는 말인가요?”
“정인이 후처로 들어온다 해도 로젤리아 당신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오. 나 또한 여전히 그대를 지금처럼 존중할 것이니, 이제 그만 당신이 받아들이면 안 되겠소?”
“알렉스, 당신 진심인가요? 내 권리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요? 하하, 그런 말이 여기에 왜 필요한 거죠? 당신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여기는 내 집이고, 라인하르트 공작의 유일한 자식이 나인데 후처를 들이겠다면서 내 권리는 보장해 주겠다고요? 일주일 동안 생각한 게 겨우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요?”
“로젤리아…….”
“당신은 후처를 들이는 게 귀부인에게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군요. 첩이 들어오는 것만 해도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인데 정부인을 들이겠다고요? 이 로젤리아 에스터 라인하르트에게 후처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가요?”
차분하게 말하면서도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로젤리아를 보며 알렉스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어렸지만, 그는 애써 그녀의 말을 외면했다.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에겐 지금과 똑같은 대우를 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어째서 내 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오? 어차피 애정 없는 결혼이지 않소. 그렇다고 해서 내 행복까지 놓칠 수는 없지 않소.”
알렉스는 그녀를 설득하고자 해서는 안 될 말을 뱉어 내고 있었다.
“당신만 받아들여 주면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오. 어차피 결혼한 지 5년이나 지난 지금도 후사가 없어 걱정이지 않소. 정인이 들어오면 그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무엇보다 그녀는 좋은 여자요. 당신에게도 좋은 동무가 되어 줄 것이오.”
말도 안 되는 그의 말에 드디어 그녀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모두 행복해질 것이라고요? 그 말이 진심이라면 당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멍청한 사람이었네요. 거기다 그 여자의 자식으로 후사를 잇겠다고요? 이 라인하르트 공작가를? 하, 기가 막혀서 어디서부터 반박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보고 그 여자랑 말동무나 하면서 당신들이 내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지켜보라는 소린가요!”
로젤리아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를 말리려 일어난 알렉스는 언제나 귀족적이고 차분한 모습만 보이던 부인의 격양된 모습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제일 나은 길을 찾자는 것이오. 그러니 제발 진정하시오. 이런 모습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소.”
공작의 말에 로젤리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당신 생각에 나는 남편과 바람난 여자를 집에 들인다는데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나요? 가면 갈수록 가관이군요.”
“어차피 공작으로서 일만 잘 해내면 당신은 나에게 큰 관심도 없지 않았소. 나는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반대하는지 잘 모르겠소.”
“정말 말이 통하질 않는군요.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신중하게 답하시길 바랄게요. 당신 정말로 그 여자를 후처로 들이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나요?”
모든 것을 포기한 로젤리아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가며 말을 내뱉었다.
“내 결심은 변함……없소.”
알렉스의 대답에 밀려오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로젤리아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좋……아요. 당신의 뜻은 확실히 알았어요. 그 결심이 절대 변하지 않을 거란 말이죠?”
로젤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잡으며 억지로 말을 꺼냈다.
알렉스는 그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부축하려고 나가는 손을 억지로 다잡았다.
“그렇소. 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오.”
알렉스의 확고한 답에 로젤리아는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제 남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펴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다시는 이런 질문은 하지 않도록 하죠. 이게 당신과 나 사이의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은 알아 두세요. 그리고 이제까지 내가 당신에게 보여 준 말 없는 기대와 무조건적인 지지를 짓밟았다는 것도요.”
빛을 잃은 황금빛 눈동자 속 검은 동공이 오늘따라 더 날카롭게 빛났다.
“제 아버지의 믿음과 라인하르트 일가의 신뢰도 같이 내버린 것 또한 결코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요.”
어느새 분노를 갈무리한 로젤리아의 차가운 기세를 마주하자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것은 없잖소.”
“아니요.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거예요. 이제부터 제가 당신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깨닫게 해 줄 테니까요.”
로젤리아는 조금 전 흥분했을 때 붙잡아 주름진 드레스를 손으로 몇 번 털어 모양을 바로잡았다. 곧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느 때처럼 우아하게 뒤돌아 집무실을 벗어났다.
“로젤리아! 로즈!”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놀란 공작이 뒤늦게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멈추려 했지만 로젤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제야 급하게 따라 나온 공작이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런 말을 내뱉고 그대로 가 버리는 게 어디 있소!”
돌아선 로젤리아가 자신을 붙잡은 공작의 팔을 다른 손으로 세게 쳐서 떨어뜨렸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어디까지 우습게 봤는지 모르겠군요. 앞으로 내 몸에 함부로 손대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저라면 어떻게 할지 말이에요. 또다시 붙잡는다면 이번엔 기사들을 부르겠어요.”
사납게 일갈한 로젤리아가 날카로운 경고를 남기고 다시 돌아섰다.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냉정한 태도에 놀란 알렉스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벌인 일이 생각보다 크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발밑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거친 발걸음으로 집무실 겸 응접실로 쓰고 있는 공작 부인 전용 서재로 들어온 로젤리아가 집사를 호출했다.
잠시 후, 급하게 공작 부인이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집사가 달려왔다. 로젤리아는 은발의 노집사를 보자마자 명령을 내렸다.
“집사, 지금 당장 백부님을, 루인 백작님을 불러 줘요.”
“백작님 말입니까? 지금 당장 오시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네. 최대한 빨리 와 달라고 전해 줘요.”
“알겠습니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시녀장을 시켜 따뜻한 차를 올릴 테니 마시면서 기다려 주십시오. 백작께는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로젤리아의 떨리는 목소리와 굳은 표정을 본 집사가 범상치 않은 사태임을 깨달았는지 공작가 어딘가에 있을 백작을 찾아 서둘러 방을 나갔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주전자를 든 시녀장이 인기척을 내고 서재로 들어왔다.
시녀장은 찻잔을 내려놓다 로젤리아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세요. 손도 이렇게 차가우시고, 집사 할아범은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던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푸짐한 덩치의 중년 여인은 로젤리아의 손을 잡았다가 너무 차가워 놀라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제 손바닥으로 로젤리아의 손을 잡고 비비며 체온을 전해 줬다.
그녀는 로젤리아에게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제 곁을 지켜 준 시녀장의 따듯한 손길을 받자 로젤리아는 굳게 먹은 마음이 흔들리면서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녀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무너지려는 표정을 숨기며 폭신한 배에 얼굴을 묻었다.
“매기, 나 이제 어떡하지?”
로젤리아는 귀족으로서의 예절을 중요시했기에 시녀장인 마거릿과 긴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도 말 한 번 편하게 하지 못했다.
그런 아가씨가 다 커서는 처음으로 울먹이며 품에 안기자 마거릿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고,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우리 아가씨가 어찌 이러실까?”
마거릿이 로젤리아의 등을 토닥이며 이유를 물었으나 그녀는 마냥 고개만 내저을 뿐 대답이 없었다.
포근한 살냄새를 맡자 자연스레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로젤리아가 겨우 마거릿을 안고 있는 팔을 풀었다.
“매기, 일단 차를, 따뜻한 차를 한 잔 주겠어?”
“네, 아가씨. 그러지 않아도 로빈 할아범이 히야차를 준비하라 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어디 아프신 건 아니시죠?”
걱정스레 로젤리아의 이마를 짚어 보고 열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아직 따뜻한 찻주전자를 챙기는 마거릿을 보고 로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
로젤리아의 말에도 마거릿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로젤리아는 거듭 거울을 보았다. 오늘따라 치장을 돕는 하녀들에게 완벽한 모습으로 만들라 채근하며 평소보다 긴 시간 동안 단장했다.
바로 오늘이 공작에게 후처를 들이는 결정을 재고하라고 주었던 일주일의 기간이 끝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날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제 모습을 가다듬었다.
그동안 저를 피한 채 잠잠하던 태도를 보면 뻔히 결과가 예측되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기로 다짐하며 찌푸려지려는 얼굴을 의식적으로 웃는 얼굴로 바꾸었다.
한참이나 거울 앞에서 옷차림과 표정을 점검한 뒤 로젤리아는 공작을 만나기 위해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에서도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품위를 잃지 말고, 침착해지자는 자기 암시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겨우 떨리는 손을 들어 노크할 수 있었다.
“들어오시오.”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었다.
로젤리아는 떨리는 손을 치맛자락에 숨기고 애써 태연한 척 그의 앞에 섰다.
“일주일이 지났어요. 그동안 생각은 마치셨겠죠?”
그녀의 물음에 공작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리아,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이 없소.”
“기어이 뜻대로 하시겠다는 말인가요?”
“정인이 후처로 들어온다 해도 로젤리아 당신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오. 나 또한 여전히 그대를 지금처럼 존중할 것이니, 이제 그만 당신이 받아들이면 안 되겠소?”
“알렉스, 당신 진심인가요? 내 권리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요? 하하, 그런 말이 여기에 왜 필요한 거죠? 당신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여기는 내 집이고, 라인하르트 공작의 유일한 자식이 나인데 후처를 들이겠다면서 내 권리는 보장해 주겠다고요? 일주일 동안 생각한 게 겨우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요?”
“로젤리아…….”
“당신은 후처를 들이는 게 귀부인에게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군요. 첩이 들어오는 것만 해도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인데 정부인을 들이겠다고요? 이 로젤리아 에스터 라인하르트에게 후처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가요?”
차분하게 말하면서도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로젤리아를 보며 알렉스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어렸지만, 그는 애써 그녀의 말을 외면했다.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에겐 지금과 똑같은 대우를 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어째서 내 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오? 어차피 애정 없는 결혼이지 않소. 그렇다고 해서 내 행복까지 놓칠 수는 없지 않소.”
알렉스는 그녀를 설득하고자 해서는 안 될 말을 뱉어 내고 있었다.
“당신만 받아들여 주면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오. 어차피 결혼한 지 5년이나 지난 지금도 후사가 없어 걱정이지 않소. 정인이 들어오면 그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무엇보다 그녀는 좋은 여자요. 당신에게도 좋은 동무가 되어 줄 것이오.”
말도 안 되는 그의 말에 드디어 그녀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모두 행복해질 것이라고요? 그 말이 진심이라면 당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멍청한 사람이었네요. 거기다 그 여자의 자식으로 후사를 잇겠다고요? 이 라인하르트 공작가를? 하, 기가 막혀서 어디서부터 반박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보고 그 여자랑 말동무나 하면서 당신들이 내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지켜보라는 소린가요!”
로젤리아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를 말리려 일어난 알렉스는 언제나 귀족적이고 차분한 모습만 보이던 부인의 격양된 모습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제일 나은 길을 찾자는 것이오. 그러니 제발 진정하시오. 이런 모습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소.”
공작의 말에 로젤리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당신 생각에 나는 남편과 바람난 여자를 집에 들인다는데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나요? 가면 갈수록 가관이군요.”
“어차피 공작으로서 일만 잘 해내면 당신은 나에게 큰 관심도 없지 않았소. 나는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반대하는지 잘 모르겠소.”
“정말 말이 통하질 않는군요.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신중하게 답하시길 바랄게요. 당신 정말로 그 여자를 후처로 들이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나요?”
모든 것을 포기한 로젤리아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가며 말을 내뱉었다.
“내 결심은 변함……없소.”
알렉스의 대답에 밀려오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로젤리아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좋……아요. 당신의 뜻은 확실히 알았어요. 그 결심이 절대 변하지 않을 거란 말이죠?”
로젤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잡으며 억지로 말을 꺼냈다.
알렉스는 그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부축하려고 나가는 손을 억지로 다잡았다.
“그렇소. 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오.”
알렉스의 확고한 답에 로젤리아는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제 남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펴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다시는 이런 질문은 하지 않도록 하죠. 이게 당신과 나 사이의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은 알아 두세요. 그리고 이제까지 내가 당신에게 보여 준 말 없는 기대와 무조건적인 지지를 짓밟았다는 것도요.”
빛을 잃은 황금빛 눈동자 속 검은 동공이 오늘따라 더 날카롭게 빛났다.
“제 아버지의 믿음과 라인하르트 일가의 신뢰도 같이 내버린 것 또한 결코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요.”
어느새 분노를 갈무리한 로젤리아의 차가운 기세를 마주하자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것은 없잖소.”
“아니요.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거예요. 이제부터 제가 당신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깨닫게 해 줄 테니까요.”
로젤리아는 조금 전 흥분했을 때 붙잡아 주름진 드레스를 손으로 몇 번 털어 모양을 바로잡았다. 곧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느 때처럼 우아하게 뒤돌아 집무실을 벗어났다.
“로젤리아! 로즈!”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놀란 공작이 뒤늦게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멈추려 했지만 로젤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제야 급하게 따라 나온 공작이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런 말을 내뱉고 그대로 가 버리는 게 어디 있소!”
돌아선 로젤리아가 자신을 붙잡은 공작의 팔을 다른 손으로 세게 쳐서 떨어뜨렸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어디까지 우습게 봤는지 모르겠군요. 앞으로 내 몸에 함부로 손대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저라면 어떻게 할지 말이에요. 또다시 붙잡는다면 이번엔 기사들을 부르겠어요.”
사납게 일갈한 로젤리아가 날카로운 경고를 남기고 다시 돌아섰다.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냉정한 태도에 놀란 알렉스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벌인 일이 생각보다 크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발밑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거친 발걸음으로 집무실 겸 응접실로 쓰고 있는 공작 부인 전용 서재로 들어온 로젤리아가 집사를 호출했다.
잠시 후, 급하게 공작 부인이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집사가 달려왔다. 로젤리아는 은발의 노집사를 보자마자 명령을 내렸다.
“집사, 지금 당장 백부님을, 루인 백작님을 불러 줘요.”
“백작님 말입니까? 지금 당장 오시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네. 최대한 빨리 와 달라고 전해 줘요.”
“알겠습니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시녀장을 시켜 따뜻한 차를 올릴 테니 마시면서 기다려 주십시오. 백작께는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로젤리아의 떨리는 목소리와 굳은 표정을 본 집사가 범상치 않은 사태임을 깨달았는지 공작가 어딘가에 있을 백작을 찾아 서둘러 방을 나갔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주전자를 든 시녀장이 인기척을 내고 서재로 들어왔다.
시녀장은 찻잔을 내려놓다 로젤리아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세요. 손도 이렇게 차가우시고, 집사 할아범은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던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푸짐한 덩치의 중년 여인은 로젤리아의 손을 잡았다가 너무 차가워 놀라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제 손바닥으로 로젤리아의 손을 잡고 비비며 체온을 전해 줬다.
그녀는 로젤리아에게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제 곁을 지켜 준 시녀장의 따듯한 손길을 받자 로젤리아는 굳게 먹은 마음이 흔들리면서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녀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무너지려는 표정을 숨기며 폭신한 배에 얼굴을 묻었다.
“매기, 나 이제 어떡하지?”
로젤리아는 귀족으로서의 예절을 중요시했기에 시녀장인 마거릿과 긴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도 말 한 번 편하게 하지 못했다.
그런 아가씨가 다 커서는 처음으로 울먹이며 품에 안기자 마거릿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고,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우리 아가씨가 어찌 이러실까?”
마거릿이 로젤리아의 등을 토닥이며 이유를 물었으나 그녀는 마냥 고개만 내저을 뿐 대답이 없었다.
포근한 살냄새를 맡자 자연스레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로젤리아가 겨우 마거릿을 안고 있는 팔을 풀었다.
“매기, 일단 차를, 따뜻한 차를 한 잔 주겠어?”
“네, 아가씨. 그러지 않아도 로빈 할아범이 히야차를 준비하라 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어디 아프신 건 아니시죠?”
걱정스레 로젤리아의 이마를 짚어 보고 열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아직 따뜻한 찻주전자를 챙기는 마거릿을 보고 로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
로젤리아의 말에도 마거릿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