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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의 화려한 응접실.
붉은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차가운 분위기의 여인과 갈색 머리에 처진 눈을 가진 순하게 생긴 남자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다시 한번 말해 주시겠어요?”
“로젤리아, 정인을 후처로 받아 줬으면 좋겠소.”
자신이 없는 듯 우물거리며 내뱉는 남자의 말에 여자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알렉스 당신 제정신인가요? 지금 공작가에 저 말고 부인을 또 들이겠다는 말이에요?”
여자는 어이없는 남편의 요구에 날카롭게 따졌다. 고개 숙인 남자가 주먹을 꾹 쥐더니 시선을 들고 눈을 마주치며 선언하듯 크게 말했다.
“그렇소, 당신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의견에 따라 주었으면 좋겠소. 나는 이미 정인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소. 그러니 당신만 허락해 준다면 내 곁에 두고 그녀를 지켜 주고 싶소.”
남자의 결연한 태도에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 진심인가요?”
“진심이오.”
진지하게 묻는 여자에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속에서 치밀어 오는 분노를 누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제가 끝까지 받아들일 수 없다면요?”
여자의 물음에 남자가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 찌푸린 얼굴로 쳐다보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소. 나는 이미 마음을 먹었고,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믿소. 난 이제부터 라인하르트 공작으로서 이 일을 추진할 것이니 반대하지 말고 부디 받아들여 주시오.”
남자의 굳건한 태도에 여자는 드디어 사건의 전말을 깨달았다. 분노보다 허탈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실상은 통보로군요. 그런 파렴치한 요구를 하면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당신에 대해서 내가 매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왜 내가 당연히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당신은 그동안 한 번도 내 말에 반대한 적이 없지 않소? 그러니 처음엔 좀 불쾌하더라도 당연히 이번 일도 내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다오.”
남자는 여전히 여자의 기분을 파악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 갔다.
“나야말로 당신이 이런 질문을 할지 몰랐소. 정인이 후처로 들어온다고 해도 나는 당신과 공작가에 충실할 테니 다른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소. 그러니 그만 내 청을 들어주지 않겠소?”
남자는 어떻게든 제 뜻대로 여자를 설득하려 애썼으나 말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싸늘해질 뿐이었다.
“그동안 당신을 믿고 따라 준 보답을 이런 식으로 한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알렉스, 당신이 아주 커다란 것을 잊고 있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공작 자리에 앉아 있으니 정말 이 라인하르트 공작가가 다 당신 것처럼 느껴지는 건가요?”
허탈함을 넘어 어이없음을 느끼는 여자 앞에서도 남자는 당당했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말해도 벌써 우리가 결혼한 지 5년이나 지났소. 그 말은 내가 공작위에 오른 지도 5년이란 말이오. 내가 공작가를 위해 해 온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소? 가문의 원로들도 현 공작인 내 말을 따라 줄 것이라 나는 믿고 있소.”
절대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본 후 여자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뼈아픈 배신이 가슴을 후벼 팠지만 높은 자존심을 꺾을 순 없었다. 여자는 겉으로 그 상처를 한 톨도 드러내지 않고 도도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 정말 갈 데까지 갔군요. 저야말로 당신에게 시간을 주겠어요. 일주일 동안 다시 생각해 봐요. 그때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저도 제 입장에 맞는 대처를 시작하겠어요.”
여자는 차가운 제 말에 대꾸하려는 남자를 뒤로하고 그대로 돌아서서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그동안 들려오는 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에 여자는 치욕스러운 기분이 밀려들어 붉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정략결혼이었지만 타의 모범이 될 정도로 무난한 결혼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전대 공작인 아버지의 제자였던 남편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녀와 결혼했고, 사랑은 아니라도 서로에게 충분한 존중과 경의를 표해 왔었다.
사랑은 없었지만 오히려 다른 난잡한 귀족들에 비하면 아름다울 정도로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 서정인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여자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후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훤히 다 보이는 남색의 짧은 치마와 한 벌로 보이는 소매 길이가 짧은 밋밋한 흰옷 차림.
처음 보는 복색으로 황궁 연못에 떨어져 내린 그 여자.
여자라고 부르기도, 소녀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묘하게 어린 티가 나던 그 여자는 보기 드문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마침 황실에서 열린 가든파티 중이라 많은 귀족이 특이한 현상을 목격했고, 그 자리에 있던 황친과 대신관이 그 여자를 연못에서 건져 냈다.
“신께서 황실에 내려 주신 성녀가 분명합니다!”
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신관이 먼저 큰 소리를 치는 바람에 그때부터 그 여자는 성녀로 불리기 시작했다.
성녀를 떠올리자 여자는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여자는 자신이 너무나 방심했음을 깨달았다. 아직 신전에서 정식 인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성녀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기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겨우 화를 내리누르며 방으로 돌아온 여자가 드디어 아무도 없는 공간에 와서야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짚으며 남편의 뻔뻔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후처를 들이고, 그 사실이 사교계에 퍼진다면 제 평판은 바닥을 칠 것이었다.
그녀를 부러워하며 시기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남편을 성녀에게 빼앗긴 여자라며 하이에나처럼 물고 뜯어 댈 것이 뻔했다.
물론 남편이나 성녀 또한 남들의 입에 쉴 새 없이 오르내릴 것이고, 사교계에서 다시 지금 같은 위치에는 오르지 못할 일이었다.
여자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절대 남편을 다른 여자와 나누지 않으리라.
그녀는 결코 자신의 것을 남과 나누지도, 빼앗기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빼앗기기 전에 차라리 제 손으로 부숴 버리고 말 것이라 다짐했다.
만일 남편이 제멋대로 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는 제가 당한 것은 배로 갚아 주겠다 다짐하며 이를 갈았다.
상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성녀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