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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스테판 백작가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은 잘도 흘러 어느새 오후가 되었다.
백작가에는 손님들의 마차가 하나씩 도착하고 있었다. 초대객들이 거의 다 도착할 때쯤 화려한 하얀색의 마차가 백작가의 정문을 통과했다. 먼저 도착해 주인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가고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마차에 집중되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건장한 두 명의 기사가 먼저 내린 뒤 기사의 손을 잡고 로젤리아가 땅으로 내려섰다.
그녀는 은은한 아이보리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다른 부인들처럼 틀어 올리지 않고 붉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푼 그녀는 옆머리를 조금 땋아 뒤에서 묶어 작은 핀을 꽂아 평소의 화려함보다 청순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장신구도 화려한 보석이 아니라 화이트 펄의 간단한 것만을 착용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수수해 보이거나 존재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되레 평소보다 부드러워 보이고, 청순해 보였기에 은근히 눈길을 잡아끄는 모습이었다.
로젤리아를 따라 수행 시녀까지 마차에서 내리자 백작 부인이 달리듯이 다가왔다.
“공작 부인, 환영합니다. 티 파티에 참석하신다는 답장을 받고 깜짝 놀랐답니다. 제 여식도 어찌나 기뻐하던지요.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시면 좋겠어요.”
“스테판 백작 부인, 환대 감사해요. 이렇게 반겨 주시니 참가하길 잘한 것 같네요. 레니, 부인께 선물을 전해 드리렴.”
두 여인은 은근히 뼈가 느껴지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로젤리아의 말을 끝으로 뒤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마차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백작 부인에게 전달했다.
“얼마 전 경매에 나왔던 일루니아의 팔찌랍니다. 저보단 마리아 영애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가져왔으니 기쁘게 받아 주신다면 좋겠군요.”
“세상에 일루니아의 팔찌라니!”
한동안 부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엄청난 가격의 장신구였다. 백작 부인은 그것이 제 손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선물 상자를 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귀한 것을 받아도 될까요? 오전에도 선물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고가의 선물에 공작가의 어마어마한 재력을 느낀 백작 부인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조심스레 묻자 로젤리아가 여유 있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답장을 늦게 보낸 것에 대한 사과의 표시였고, 이것은 초대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니 엄연히 다른 것이지요. 부인이 기꺼이 받아 주셔야 제가 오늘 하루 마음 편히 파티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으니 부담 갖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이런 귀한 선물은 처음 받아 봅니다. 마리아가 정말 좋아할 거 같네요. 마리아에게 꼭 따로 인사를 시키겠습니다. 그럼 다른 손님들께서도 다 도착하셨으니 바로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로젤리아는 백작 부인의 거듭된 인사에 웃음으로 답하며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습관적으로 완벽하게 걸으면서도 가볍게 말아 쥔 주먹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복잡한 감정에 속이 거북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모습을 만들며 응접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넓은 응접실은 커다란 발코니와 연결이 되어 활짝 연 창문 너머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한 장식들로 벽면을 꾸며 놓은 방 한가운데에 꽃으로 장식한 하얀 원형 테이블이 사람 수에 맞게 의자가 놓인 채 준비되어 있었다.
벌써 도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로젤리아를 보고 일어나 먼저 인사했다. 그 인사에 답하며 초대객들을 살펴본 로젤리아는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자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저희를 포함하고도 한 자리가 비는데 아직 오지 않은 분이 계신가요?”
로젤리아의 질문에 그제야 잊고 있던 한 명이 떠오른 백작 부인이 서둘러 대답했다.
“어머나, 공작 부인을 모시고 오느라 그분께 파티 장소로 오라는 전언을 보내는 걸 깜박 잊고 말았네요. 마리아, 손님을 모셔 오렴. 자, 그럼 먼저 앉으세요. 남은 손님께서도 바로 옆방에 계시니 바로 오실 거랍니다.”
백작 부인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는 동안 마리아 영애가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정말 옆방에 있었는지 바로 잠시 후에 마리아 영애가 한 명의 여인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 여자의 실루엣을 보는 순간 로젤리아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냉정한 눈으로 여자의 모습을 낱낱이 살폈다.
여전히 특이할 정도로 새카만 검은 머리와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얼굴형은 동그란 편이며 아직 젖살이 덜 빠진 것처럼 볼이 통통했다.
아몬드형의 눈은 큰 편이나 쌍꺼풀이 있는 듯 없는 듯 얇아 실제로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고 코와 입술은 모두 작은 편이었다.
로젤리아는 성녀의 얼굴에서 빼어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단지 약간 노란 빛이 도는 흰 피부만은 광택이 날 정도로 좋아 보였다.
성녀는 처음보다 제법 긴 까만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틀어 올리고 광택이 도는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보통의 귀족 영애보다 어두운 피부색에 푸른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체구가 조금 작았지만 빼면 전체적으로 몸매는 좋아 보였다.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를 저와 비교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로젤리아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저 여자가 나보다 뭐가 나은지, 또는 나보다 얼마나 모자란 지 찾아보려 한 것이었다.
로젤리아가 한없이 작아진 제 내면을 살피고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때 백작 부인의 눈짓을 받은 성녀가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이며 선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분하게도 성녀라는 이름을 받은 서정인입니다. 이곳의 형식으로는 가문의 이름이 ‘서’입니다. 정인이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어요.”
그동안 받은 예절 교육의 결과를 보여 주듯 꽤 그럴듯한 자세로 인사를 하는 정인을 백작 부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성녀의 등장을 신기해하는 손님들 사이에서 로젤리아만이 정인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당신이군요. 과연 성녀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한 사람인지를 오늘 저에게 꼭 증명해 내야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정인까지 백작 부인의 옆에 자리하자 집사가 준비한 차를 각자의 앞에 놓아 주었다. 손님들은 생각지도 못한 두 유명인과 함께하게 되어 놀라면서도 약간은 들뜬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차를 마시며 가볍게 날씨와 소소한 이야기로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호기심 많은 젊은 부인들이 슬슬 평소에 만나기 힘든 성녀에게 먼저 관심을 드러냈다.
“성녀님,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을 듣고 어떤 분이실지 너무 궁금했는데 소문처럼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지신 분이네요.”
황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해 성녀를 처음 본 스팅어 남작 부인이 두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정인을 바라보았다. 정인은 그런 부인의 눈길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신비하기는요. 편하게 정인이라고 불러 주세요. 성녀라 불리는 것이 아직 어색해요.”
“어머나, 그래도 될까요? 하지만 그렇게 부른다면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정인이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하자 선뜻 부르지 못하고 망설이던 남작 부인을 보고 정인이 다시 한번 요청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남작 부인이 어색하게 정인의 이름을 불렀다.
“정인 님, 이름도 성도 저희와 부르는 방식이 달라 신기하네요.”
그렇게 부인들과 정인이 말문을 트기 시작하였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백작 부인과 로젤리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스테판 백작 부인은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인에게 예절 교육을 하며 성녀로서의 고고함을 지키라고 그리 당부를 했건만 비슷한 또래가 호감을 보이자마자 냉큼 격식을 내던져 버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로젤리아도 정인의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성녀라는 지위는 현재 주신의 신전에 단 한 명만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지체는 교황의 바로 아래, 대신관과 신성으로만 따져도 위아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신관이란 무릇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미덕이지만 성녀쯤 되는 위치라면 신을 대표하는 신전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성녀가 제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마치 철없는 아가씨처럼 구는 것이 평생을 공작가의 공녀로서, 또 공작 부인으로서 지위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로젤리아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젤리아가 정인을 관찰하는 동안, 정인 또한 저를 흘끔흘끔 훔쳐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티 나지 않게 서로를 지켜보는 와중에 영애들도 부인과 정인의 이야기에 끼어들었고, 로젤리아는 나이가 지긋한 러셀 후작 부인과 스테판 백작 부인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애들과 젊은 부인들은 정인의 외모와 생활에 대해서 줄기차게 질문을 해 댔다. 그녀들은 어느 정도 호기심이 풀렸는지 요즘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는 소문으로 주제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글라디스가 마리아에게 문득 생각난 것을 물어보았다.
“마리아, 그런데 저번에 만났을 때는 세린 백작 부인께서도 티 파티에 참가한다고 하시지 않았니?”
“맞아. 그런데 며칠 전에 갑자기 개인적인 문제로 참가할 수 없다는 편지를 보내셨지 뭐야.”
“그래? 요즘 들어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더니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하신 건가?”
영애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피에트 백작 부인이 냉큼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두 분께서는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소문이라니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런데…….”
“무슨 일인데요? 말씀해 주셔요. 다른 곳에는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소문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는 영애들이 백작 부인의 말에 덥석 미끼를 물었다. 백작 부인은 형식적으로 밀고 당기는 겉치레를 한 뒤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글쎄 일주일쯤 전에 백작가에 커다란 소동이 있었답니다. 세린 백작님의 정부가 남산만 한 배를 내밀고 백작가로 들이닥쳤다지 뭐예요.”
스테판 백작가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은 잘도 흘러 어느새 오후가 되었다.
백작가에는 손님들의 마차가 하나씩 도착하고 있었다. 초대객들이 거의 다 도착할 때쯤 화려한 하얀색의 마차가 백작가의 정문을 통과했다. 먼저 도착해 주인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가고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마차에 집중되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건장한 두 명의 기사가 먼저 내린 뒤 기사의 손을 잡고 로젤리아가 땅으로 내려섰다.
그녀는 은은한 아이보리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다른 부인들처럼 틀어 올리지 않고 붉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푼 그녀는 옆머리를 조금 땋아 뒤에서 묶어 작은 핀을 꽂아 평소의 화려함보다 청순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장신구도 화려한 보석이 아니라 화이트 펄의 간단한 것만을 착용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수수해 보이거나 존재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되레 평소보다 부드러워 보이고, 청순해 보였기에 은근히 눈길을 잡아끄는 모습이었다.
로젤리아를 따라 수행 시녀까지 마차에서 내리자 백작 부인이 달리듯이 다가왔다.
“공작 부인, 환영합니다. 티 파티에 참석하신다는 답장을 받고 깜짝 놀랐답니다. 제 여식도 어찌나 기뻐하던지요.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시면 좋겠어요.”
“스테판 백작 부인, 환대 감사해요. 이렇게 반겨 주시니 참가하길 잘한 것 같네요. 레니, 부인께 선물을 전해 드리렴.”
두 여인은 은근히 뼈가 느껴지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로젤리아의 말을 끝으로 뒤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마차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백작 부인에게 전달했다.
“얼마 전 경매에 나왔던 일루니아의 팔찌랍니다. 저보단 마리아 영애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가져왔으니 기쁘게 받아 주신다면 좋겠군요.”
“세상에 일루니아의 팔찌라니!”
한동안 부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엄청난 가격의 장신구였다. 백작 부인은 그것이 제 손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선물 상자를 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귀한 것을 받아도 될까요? 오전에도 선물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고가의 선물에 공작가의 어마어마한 재력을 느낀 백작 부인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조심스레 묻자 로젤리아가 여유 있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답장을 늦게 보낸 것에 대한 사과의 표시였고, 이것은 초대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니 엄연히 다른 것이지요. 부인이 기꺼이 받아 주셔야 제가 오늘 하루 마음 편히 파티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으니 부담 갖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이런 귀한 선물은 처음 받아 봅니다. 마리아가 정말 좋아할 거 같네요. 마리아에게 꼭 따로 인사를 시키겠습니다. 그럼 다른 손님들께서도 다 도착하셨으니 바로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로젤리아는 백작 부인의 거듭된 인사에 웃음으로 답하며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습관적으로 완벽하게 걸으면서도 가볍게 말아 쥔 주먹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복잡한 감정에 속이 거북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모습을 만들며 응접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넓은 응접실은 커다란 발코니와 연결이 되어 활짝 연 창문 너머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한 장식들로 벽면을 꾸며 놓은 방 한가운데에 꽃으로 장식한 하얀 원형 테이블이 사람 수에 맞게 의자가 놓인 채 준비되어 있었다.
벌써 도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로젤리아를 보고 일어나 먼저 인사했다. 그 인사에 답하며 초대객들을 살펴본 로젤리아는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자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저희를 포함하고도 한 자리가 비는데 아직 오지 않은 분이 계신가요?”
로젤리아의 질문에 그제야 잊고 있던 한 명이 떠오른 백작 부인이 서둘러 대답했다.
“어머나, 공작 부인을 모시고 오느라 그분께 파티 장소로 오라는 전언을 보내는 걸 깜박 잊고 말았네요. 마리아, 손님을 모셔 오렴. 자, 그럼 먼저 앉으세요. 남은 손님께서도 바로 옆방에 계시니 바로 오실 거랍니다.”
백작 부인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는 동안 마리아 영애가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정말 옆방에 있었는지 바로 잠시 후에 마리아 영애가 한 명의 여인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 여자의 실루엣을 보는 순간 로젤리아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냉정한 눈으로 여자의 모습을 낱낱이 살폈다.
여전히 특이할 정도로 새카만 검은 머리와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얼굴형은 동그란 편이며 아직 젖살이 덜 빠진 것처럼 볼이 통통했다.
아몬드형의 눈은 큰 편이나 쌍꺼풀이 있는 듯 없는 듯 얇아 실제로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고 코와 입술은 모두 작은 편이었다.
로젤리아는 성녀의 얼굴에서 빼어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단지 약간 노란 빛이 도는 흰 피부만은 광택이 날 정도로 좋아 보였다.
성녀는 처음보다 제법 긴 까만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틀어 올리고 광택이 도는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보통의 귀족 영애보다 어두운 피부색에 푸른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체구가 조금 작았지만 빼면 전체적으로 몸매는 좋아 보였다.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를 저와 비교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로젤리아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저 여자가 나보다 뭐가 나은지, 또는 나보다 얼마나 모자란 지 찾아보려 한 것이었다.
로젤리아가 한없이 작아진 제 내면을 살피고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때 백작 부인의 눈짓을 받은 성녀가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이며 선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분하게도 성녀라는 이름을 받은 서정인입니다. 이곳의 형식으로는 가문의 이름이 ‘서’입니다. 정인이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어요.”
그동안 받은 예절 교육의 결과를 보여 주듯 꽤 그럴듯한 자세로 인사를 하는 정인을 백작 부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성녀의 등장을 신기해하는 손님들 사이에서 로젤리아만이 정인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당신이군요. 과연 성녀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한 사람인지를 오늘 저에게 꼭 증명해 내야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정인까지 백작 부인의 옆에 자리하자 집사가 준비한 차를 각자의 앞에 놓아 주었다. 손님들은 생각지도 못한 두 유명인과 함께하게 되어 놀라면서도 약간은 들뜬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차를 마시며 가볍게 날씨와 소소한 이야기로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호기심 많은 젊은 부인들이 슬슬 평소에 만나기 힘든 성녀에게 먼저 관심을 드러냈다.
“성녀님,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을 듣고 어떤 분이실지 너무 궁금했는데 소문처럼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지신 분이네요.”
황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해 성녀를 처음 본 스팅어 남작 부인이 두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정인을 바라보았다. 정인은 그런 부인의 눈길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신비하기는요. 편하게 정인이라고 불러 주세요. 성녀라 불리는 것이 아직 어색해요.”
“어머나, 그래도 될까요? 하지만 그렇게 부른다면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정인이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하자 선뜻 부르지 못하고 망설이던 남작 부인을 보고 정인이 다시 한번 요청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남작 부인이 어색하게 정인의 이름을 불렀다.
“정인 님, 이름도 성도 저희와 부르는 방식이 달라 신기하네요.”
그렇게 부인들과 정인이 말문을 트기 시작하였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백작 부인과 로젤리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스테판 백작 부인은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인에게 예절 교육을 하며 성녀로서의 고고함을 지키라고 그리 당부를 했건만 비슷한 또래가 호감을 보이자마자 냉큼 격식을 내던져 버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로젤리아도 정인의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성녀라는 지위는 현재 주신의 신전에 단 한 명만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지체는 교황의 바로 아래, 대신관과 신성으로만 따져도 위아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신관이란 무릇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미덕이지만 성녀쯤 되는 위치라면 신을 대표하는 신전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성녀가 제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마치 철없는 아가씨처럼 구는 것이 평생을 공작가의 공녀로서, 또 공작 부인으로서 지위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로젤리아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젤리아가 정인을 관찰하는 동안, 정인 또한 저를 흘끔흘끔 훔쳐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티 나지 않게 서로를 지켜보는 와중에 영애들도 부인과 정인의 이야기에 끼어들었고, 로젤리아는 나이가 지긋한 러셀 후작 부인과 스테판 백작 부인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애들과 젊은 부인들은 정인의 외모와 생활에 대해서 줄기차게 질문을 해 댔다. 그녀들은 어느 정도 호기심이 풀렸는지 요즘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는 소문으로 주제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글라디스가 마리아에게 문득 생각난 것을 물어보았다.
“마리아, 그런데 저번에 만났을 때는 세린 백작 부인께서도 티 파티에 참가한다고 하시지 않았니?”
“맞아. 그런데 며칠 전에 갑자기 개인적인 문제로 참가할 수 없다는 편지를 보내셨지 뭐야.”
“그래? 요즘 들어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더니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하신 건가?”
영애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피에트 백작 부인이 냉큼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두 분께서는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소문이라니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런데…….”
“무슨 일인데요? 말씀해 주셔요. 다른 곳에는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소문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는 영애들이 백작 부인의 말에 덥석 미끼를 물었다. 백작 부인은 형식적으로 밀고 당기는 겉치레를 한 뒤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글쎄 일주일쯤 전에 백작가에 커다란 소동이 있었답니다. 세린 백작님의 정부가 남산만 한 배를 내밀고 백작가로 들이닥쳤다지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