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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네놈, 지금 뭐라…….”

당장에라도 베어버릴 듯 날카로운 기세로 말하던 글로리아는 순간 멈칫하더니 슬쩍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저었다.

차, 참아요. 지금 죽이면 일이 틀어진다고요.

“…후우, 명심해라. 한 번만 더 그딴 말을 지껄이면, 그땐 주저 없이 베겠다.”

글로리아가 줄기줄기 살기를 뿜어내며 말하자, 게런은 움찔 어깨를 좁혔다.

아마 그는 자신의 목을 벨 거란 의미로 알아들었겠지만, 세란이에게서 책 내용을 들은 나는 그녀가 어디를 벤다는 건지 정확히…….

으아,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여, 여자 주제에 감히 어디서 협박을! 네년이 가당찮은 소릴 지껄이니까 그런 것 아니냐!”

“가당찮은 소리라… 과연 그럴까?”

글로리아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이번엔 대놓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의미를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적군은! 들어라!”

내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자,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라는 병사들.

나는 팔을 좌우로 뻗으며 계속 말했다.

“너희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내 신호에 줄곧 몸을 숙이고 있던 마을 사람들 모두가 쇠뇌를 아래로 겨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수가 무려 300에 달하자 압박이 대단했는지, 골짜기 아래 줄지어 있는 병사들에게서 엄청난 동요가 일어났다.

“뭐, 뭐야? 포위…됐어?”

“언제 저렇게 많은 복병이…….”

“협곡 위에 매복병이 가득하잖아! 도, 도망쳐야 해!”

“어림없는 소리! 길을 막으세요!”

내 명령에 협곡 끝에 자리한 이들이 일시에 통나무를 굴려 떨어뜨렸다.

“으아악!”

“살려… 커흑!”

묵직한 통나무가 굴러 떨어지며 협곡 끝에 자리한 병사들을 그대로 짜부라뜨리며 길을 막아버렸다. 비록 단단히 틀어막은 건 아니지만, 그 정도만 해도 대군이 빠져나가기엔 꽤나 애먹을 것이 분명했다.

“단장님, 큰일입니다! 후방이 막혔습니다!”

“뭐, 뭐라?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째서 이런 곳에 저렇게나 많은 매복병이! 게다가 통나무까지 준비하다니! 마치 우리가 이리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지 않느냐!”

“그래! 전부 알고 있었다!”

내가 말을 받듯 외치자, 게런은 핏기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놈은 그때 그… 우, 웃기지 마라! 그럴 리가 없다! 이곳은 정해진 길이 아니다! 나는 한순간의 판단으로 이곳을…….”

“그 모든 행동을 내가 유도했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내가 말을 잘라 버리며 외치자 한없이 혼란스러워하는 게런.

“유도…했다고? 나를? 이곳…으로?”

“그 첫 번째!”

내가 손가락을 들며 외치자, 모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나는 세란이가 일러주는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병사의 수를 속여 당신의 인식(認識)을 가렸다!”

“병사의 수를 속여? 웃기지 마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너희가 싸울 수 있는 농민은 100명 남짓이 틀림없을 터! 그런데 우리를 속였다니, 말도 안 된다!”

“당신의 말이 맞다! 우리 쪽에서 싸울 수 있는 수는 100명 남짓이다! 여성과 노인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자신감 넘치는 내 말에 쇠뇌를 들고 있던 노인과 여성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응답해 주었다. 그제야 병사들은 매복병이 젊은 남성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여성이 있다고?”

“노인들까지 싸움에 참여했어?”

“그렇구나! 그래서 매복병을 운용해도 이만한 수가!”

매복병에 대해선 쇠뇌의 이점을 이용한 것이지만,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요가 없기에 나는 손가락을 하나 더 펴며 외쳤다.

“그리고 두 번째! 전날 만들어놓은 발자국으로 의도를 숨겨 당신의 사고(思考)를 가렸다!”

그제야 깨달았는지 눈을 부릅뜨는 게런.

나는 지체하지 않고 손가락을 하나 더 펴며 외쳤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간을 버는 척 통나무로 길을 막아놓아 당신의 판단(判斷)을 가렸다!”

“토, 통나무까지 전부 유인작전이었다고?”

게런은 처참할 정도로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이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지만, 나는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인식과 사고와 판단이 가려진 지휘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루는 것이 어찌 어려우랴! 당신은 메헤… 뭐? 어, 응. 메헤지아 왕과 다를 바 없구나!”

“뭐, 뭣이라……!”

뭔지는 몰라도 대단한 욕설이라도 되는지, 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게런이었다.

‘그런데 메헤지아 왕이 누구야?’

[신하의 말만 믿다 죽은 왕. 성령의 힘 덕분에 뱀독이 퍼져도 안 죽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독사를 든 채 신도들과 예배를 드리다 결국 물려서 죽거든. 그래서 그 왕은 멍청함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어.]

‘아아, 그래서 저렇게 분노하는 거구나.’

“감히, 감히 나한테 메헤지아 왕이라고?!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뭐 하고 있느냐! 당장 가서 저놈의 목을 가져오지 않고!”

채앵!

게런이 뽑아 든 검으로 나를 겨누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만, 행동에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까마득한 높이의 협곡을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이미 승패는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 당신들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 무기를 버리고 즉시 항복한다! 둘, 끝까지 항전하다 몰살당한다!”

두 번째 선택지에서 병사들은 또 한 번 동요했다. 반대로 게런은 얼굴을 붉히며 노발대발했지만.

“웃기지 마라! 누가 항복 따위를 할 것 같으냐! 적의 기만책을 들을 필요 없다! 병력은 우리가 우세하다! 협곡만 벗어나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포위망을 뚫고 나간다’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야기시킬지 잘 알고 있는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숨을 들이켰다. 저들로선 지휘관이 항복해 주기를 기대했겠지.

뭐, 여기까진 세란이가 생각한 대로인가.

“하지만 우리 또한 무의미한 희생은 원치 않는 바!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하겠다!”

실낱같은 희망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던 병사들이 번뜩 고개를 쳐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게런이 아니라 병사들에게 이르듯 뒷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이 전쟁의 모든 승패를 걸고 결투를 신청한다!”

“겨, 결투?”

“아아, 그래서 저 여검사가 결투라고 했던 거구나!”

결투 신청 제안에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떠냐? 아직도 내 결투 신청이 가당찮은 소리로 들리는가!”

줄곧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기다리던 글로리아가 내 말을 건네받았다.

“크, 크윽!”

한 방 먹었다고 느꼈는지, 신음을 삼키는 게런. 그러다 그는 돌연 입꼬리를 추켜올리며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핫! 그래! 부관! 저 여검사를 잡아라! 인질로 쓰면 적도 동요할 것이다!”

“네? 하, 하지만 그건 기사로서 명예가…….”

“전쟁의 승패보다 명예가 더 중요한가! 뭐 하느냐, 어서 움직이지 않고! 총대장의 명령에 불복할 셈이냐!”

게런은 부관에게 검을 겨누며 재촉했다. 그에 부관과 몇몇 병사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결국 머뭇거리며 글로리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낭패다. 설마 저렇게까지 비열하게 나올 줄은 나도, 그리고 세란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세란이는 뜻대로 안 될 것 같으면 위협 시범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제길, 정말 쏴야 하는 걸까?

“부끄러운 줄 알거라!”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잠자코 있던 글로리아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갈했다.

너무도 큰 성량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귀를 막을 정도였다. 나 역시 저렇게 성난 글로리아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3년 전, 동서전쟁 발발 당시! 수만의 서부 군대에게 포위당해 죽음에 몰린 철벽의 장군 메가톤은 저 홀로 병사들 앞에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영민을 지키는 것이 병사의 역할이며, 그런 병사를 지키는 것이 지휘관의 역할이라고! 그런데 네놈은! 제 목숨이 아까워 병사들을 방패막이로만 쓰려 하다니! 지휘관으로서 실격이다!”

“무, 무슨…….”

“너희는! 정녕 저런 자격조차도 없는 지휘관 밑에서 따르기를 원하느냐!”

“그, 그건…….”

“뭐, 뭣 하는 거냐! 저런 검사인 척하는 여자의 말을 들을 필요 없다! 어서 잡아라!”

당황한 게런이 병사들의 등을 떠밀며 보챘지만, 병사들은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크게 노한 게런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눈앞에 있던 병사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었다.

“명령 불복은 사형이다! 또 죽고 싶은 자가 있느냐!”

발악하듯 내지르는 소리에 게런의 주위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거리를 벌렸다. 더욱 놀라운 건 글로리아를 포위한 병사들이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몇몇은 아예 대놓고 게런을 질타했다.

“나, 나는… 싫어.”

“그, 그래! 왜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당신이 싸워!”

“기사라며!”

“결투에 응해라!”

하나둘, 반항의 목소리가 파문처럼 퍼져 나가더니, 이내 커다란 반향이 되어 돌아왔다. 병사들이 무기를 바닥에 팽개치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웃긴 건 게런을 따르던 기사들조차도 검을 거두고 물러난다는 점이었다.

“이이익! 이것들이! 전부 사형이다! 부관! 어? 부관? 네놈, 뭣 하고 있는 거냐! 설마 네놈마저?”

“꼴사납습니다.”

검을 거둔 부관이 투구를 벗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투구를 벗자 스포츠머리 형태로 바짝 깎은 얼굴이 드러났다. 여우처럼생긴 게런과 달리 제법 인상이 시원한 미남형 인물이었다.

“네놈, 감히 지금 나에게 뭐라고…….”

“저는 지금껏 비열한 단장님의 발을 핥으며 따랐지만, 기사로서 명예를 저버리진 않았습니다.”

“뭐, 뭣이라?”

“저기 있는 이는 비록 여성이긴 하나 홀로 우리 앞에 설 만큼 패기와 명예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장님은 그게 무슨 추태입니까! 다수가 공격해 인질로 잡으라니, 기사로서 수치를 아십시오!”

“뭣, 뭣!”

부관이란 자가 투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하자, 게런은 당황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네놈이, 네놈이 감히 나를 깔봐아아!”

결국 분노에 눈이 돌아갔는지, 게런을 말을 몰아 부관에게 돌진했다.

부관은 크게 당황해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게런이 검을 휘두르는 게 더 빨랐다.

바로 그때, 제비처럼 날렵하게 뛰쳐나가는 글로리아.

그녀는 낭패스러워하는 부관의 어깨를 밟고 뛰어오르더니, 달려오는 게런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소리 같은 건 나지 않았다. 단지 게런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녀의 붉은 머리칼만이 잔상처럼 일렁일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게런의 얼굴은 영문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고, 그의 몸조차도 돌격 자세를 유지한 채 몇 미터나 더 나아가더니… 끝내 스르륵 낙마했다.

“…….”

“…….”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엉거주춤 서 있던 부관조차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글로리아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천하태평한 그녀는 여유롭게 피 묻은 검을 털어내는가 싶더니, 이내 힘차게 바닥에 꽂아 넣으며 외쳤다.

“승부는 결정 났다! 뭐 하느냐! 무릎 꿇어라!”

우렁찬 일갈에 퍼뜩 정신을 차린 병사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몰라 부관을 돌아보자, 부관은 주저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패배를 받아들입니다.”

새로이 최고 지휘관이 된 부관이 머리를 조아리자, 그제야 나머지 기사와 병사들도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쟁은 끝이 났다.





― 생존자 : 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