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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내 어깨를 밟고 하늘을 날던 그분의 모습은 마치 화산 꼭대기에 사는 고고한 불사조를 보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흩날리는 불꽃, 우아한 날갯짓 속에 담겨 있는 강직한 기개.

비록 나보다 왜소한 여성이지만, 그분은 나 같은 놈이 감히 우러러볼 수조차 없는, 절벽 위의 불꽃이셨다.

사실 그렇게 생각한 건 그분을 본 처음 순간부터였다. 홀로 절벽을 타고 내려와 화전 마을을 대표하는 검사라고 이름을 밝힐 때부터 나는 그분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던 것이다.

어째서일까?

그 고민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런 단장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며 그분이 일갈할 때였다.

“3년 전, 동서전쟁 발발 당시! 수만의 서부 군대에게 포위당해 죽음에 몰린 철벽의 장군 메가톤은 저 홀로 병사들 앞에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영민을 지키는 것이 병사의 역할이며, 그런 병사를 지키는 것이 지휘관의 역할이라고! 그런데 네놈은! 제 목숨이 아까워 병사들을 방패막이로만 쓰려 하다니! 지휘관으로서 실격이다!”

그 말은 어쩐지 나를 꾸짖는 것만 같았다.

떳떳하게 살아오지 못한 내 인생을.

그래, 알고 있다. 나는 소위 나쁜 놈이었다는 것을.

처녀만 고집하는 영주 때문에 매일 밤 어린 여자들을 납치했고, 게런 단장의 명령에 세금을 내지 못한 영민을 찾아가 해코지하는 일도 허다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노라고, 이것이 인생이며, 이것이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했다.

그렇게 애써 핑곗거리를 만들며 현실에 눈을 돌리고 있던 내게 그녀가 꾸짖어준 것이었다.

기사로서 부끄러운 줄 알라고.

동시에 깨달았다. 저분이야말로 내가 어릴 적 동경하고 꿈꿔오던 기사의 참모습이라는 걸.

그렇기에 나는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것이다.

“승부는 결정 났다! 뭐 하느냐! 무릎 꿇어라!”

그분의 일갈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어느새 다른 기사와 병사들이 나만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패배를 받아들입니다.”

게런 단장이 죽은 지금, 병사들을 지휘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미 승패는 결정 났고, 나 자신도 굴복한 지 오래기에 고개를 숙인다는 데 망설임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내가 머리를 숙이자, 그제야 다른 병사들도 하나같이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기 시작했다. 내 뜻을 알고 다들 포로가 되길 자처한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포로로서 어떤 대우를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죽는 것보단 낫겠…….

“이름이 뭐냐?”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들려온 단조로운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기에 누구에게 말한 건지 몰랐는데, 뒤늦게 내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나서야 그분이 나에게 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샤미드입니다.”

그분은 잠시 숨죽인 채 나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돌연 손을 뻗었다.

“샤미드, 내게 검을 바쳐라.”

너무도 놀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분을 바라보았다.

그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손을 뻗은 채 나를 지그시 내려다볼 뿐이었다.

“왜 저 같은 놈을…….”

“싫으냐?”

순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검을 바치라는 의미는 가신으로서 따라오라는 뜻이기에.

어찌 싫으랴. 내가 동경하던 그분께 검을 바치는 것이건만.

“기꺼이! 제 검은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풀어 공손히 두 손으로 바쳤다. 그분은 내 검을 검집째 받아 들더니, 가볍게 내 어깨를 한 번 툭, 건드리곤 다시 돌려주었다.

그 무뚝뚝하면서도 시원한 태도에 나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나는 일평생 다시없을 진정한 주인을 섬기게 되었다.



***



영문도 모른 채 이세계로 떨어진 나는 곧바로 도적들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몇몇 남성 동료들이 함께 있었는데 전부 쓸모없다며 목이 잘려 죽었고, 그나마 나는 운이 좋은 건지 노리개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몇 날 며칠 동안 수치를 당했다. 견디지 못해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해 보았지만 죽을 용기조차 없어 매번 실패했고, 도적들은 그런 나를 비웃었다.

그때는 담당 환자가 가져온 양장본 책을 무심코 열어보았을 뿐인데 왜 이런 수치를 당해야 하느냐며 신에게 한탄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결국 자포자기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적들의 성노리개로서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런 내게 질린 걸까, 도적들은 나를 브렌터스 영지의 노예 시장으로 데려가 헐값에 팔아버렸다.

그 후, 영주의 직권 아래 우리 노예들을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이유 같은 건 당연히 들려주지 않아 몰랐고, 그저 하염없이 산을 타게 되어 지쳤을 뿐이다.

그 와중에 나름 수인 노예들과 친해졌다. 그들은 북쪽 산림에서 살아가던 작은 부족의 주민이라고 하는데, 어느 날 노예 사냥꾼들이 쳐들어와 이런 신세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붙잡혀 있는 가족을 만나게 해주기로 영주에게 약속을 받았다나. 하지만 그런 희망에 찬 미소도 오래가진 못했다.

“하아, 하아…….”

“조금만 쉬게 해줘.”

많은 수인 노예 중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탈진해 죽는 이들이 나왔다. 이틀째는 열사병으로, 셋째 날엔 영양실조로 죽어 나갔다.

물론 나도 당장 쓰러질 것 같지만, 생전 간호사로 살아온 책임감 때문인지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죽기 살기로 대장이라 추정되는 기사에게 따졌다. 조금만 쉬게 해달라고.

당연히 그 기사는 듣지도 않았지만.

그 뒤로는 의식을 겨우 붙잡고 가라는 대로 걸은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그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너희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나를 일깨워 준, 강대한 목소리.

절벽 위에서 당당히 말하던 남자는 놀랍게도 고등학생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눈치지만, 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명백히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정말 오랜만에 만난, 나와 같은 지구의 생존자였다. 너무도 반가워 눈물이 흐를 정도지만, 한편으론 부끄러운 감정도 들었다.

그저 한탄하며 모든 걸 포기한 채 살아가던 나와 달리 이렇게 많은 병사들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나보다도 어린 학생이었다. 그럼에도 저리 당당한 모습이라니. 그에 비해 나는 이렇게나 초라한데…….

“여기 소녀의 증상이 뭔지 아는 사람 없나요!”

그 외침에 뼛속 깊이 노예가 된 것만 같아 우울해하던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까지고 좌절한 채 살아가기는 싫었다. 할 수 있다면 나도 저 학생처럼……!

“저, 저기! 제가 볼게요! 저는 간호사예요!”

내 외침에 그 학생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뒤늦게 서로 죽여 한 명만 살아남으라고 한 나레스의 말이 떠올라 불안해졌다. 혹시 저 학생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까 하고.

“다행이에요!”

하지만 그건 괜한 우려였다. 그 학생은 너무도 해맑게, 반갑다는 듯 웃어주었다. 마치 ‘그동안 힘내서 살아남았구나. 참으로 대견하다’라고 말하듯.

그 따스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나는 구원받았다.



***



‘이것으로 일단 안심인가.’

전쟁이 일단락되자 줄곧 가르벤 연대기를 껴안고 있던 세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머리를 썼는지, 그녀의 이마엔 마치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앞으로의 상황이 중요한지라 땀을 훔칠 생각도 않고 노트와 펜을 꺼냈다.

‘여기까진 생각대로야. 그럼 앞으로 늘어난 병력을 어찌 사용하느냐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간략한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그녀는 서부 대륙 남서쪽에 위치한 마카로니 왕국을 펜 끝으로 툭, 건드렸다.

‘마음 같아선 오빠를 존셀이 있는 곳으로 보내고 싶어. 그 사람 곁에만 있으면 안전은 확보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주인공격인 영웅이니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겠지.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고. 그렇다면 용병왕국은 어떨까?’

이번엔 펜 끝이 지도 중앙으로 향했다.

‘용병대장 가터라면 평민 출신이니 화전민도 받아주겠지. 하지만 문제는 2년 후에 다시 일어나는 동서전쟁 때문에 멸망한다는 건데…….’

2년 뒤, 동서전쟁이 다시 발발하여 대륙 중앙에 위치한 용병왕국은 고작 세 달 만에 무너진다. 때문에 선뜻 그리로 가는 게 꺼려졌다.

‘정해진 미래였다면 충분히 대책을 마련해 용병왕국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2년 후라면 책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을 거라 불가능해. 나와 오빠가 벌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분명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을 테니까. 잘하면 봉건적 신분 제도가 폐지되고 순식간에 근대사회로 넘어갈지도 몰라. 무기도 완전히 뒤바뀌어 검은 사라지고 소총이 그 자리를 대신할지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신세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소총.

세란은 당시 철포라 불리는 총을 이용해 절대무패를 자랑하던 다케다 기마대를 말살시킨 오다 노부나가를 떠올렸다. 그 정도로 소총이란 무기는 최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화약을 만들 수 있는 지식만 있다면 총은 지금 당장이라도 구현이 가능하다. 별로 어려운 지식도 아니어서 분명 조만간 등장하리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이미 그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야. 역시 용병왕국은 위험이 큰가.’

괜한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용병왕국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러다 문득 가르벤 연대기 책을 돌아본 그녀.

조금이지만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해. 어째서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책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왜 그 전장이 이 책이어야 하며, 나레스는 왜 그러한 실험을 강행한 걸까? 아니, 그전에 나레스의 정체부터 알아야겠지만. 우선 이 책을 저술한 작가에게서 무슨 큰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걸 조사할 수 있는 건 현실에 있는 나밖에 할 수 없어.’

지금 실종자들이 대체 어디에 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 유일하게 자신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이 분명 현실에 존재할 거라고 세란은 믿었다.

처음엔 이 같은 사실을 경찰에 알릴까 고민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포기했다. 그런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누가 믿어주겠는가. 오히려 세란을 정신병자 취급할 것이다.

분명 그럴 만한 과거도 가지고 있고, 이미 거의 정신이상 비슷한 병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걸 그만뒀다.

‘내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어. 그러기 위해선…….’

고이 접혀 있는 휠체어를 돌아본 그녀는 묵묵히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