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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우와, 정말 군사님 말대로 됐네요?”
“역시 군사님이시구먼.”
“난 이렇게 될 줄 이미 알았다니까?”
“하아, 군사님 멋져. 우리 군사님, 어쩜 저렇게 잘생기고 머리도 좋을까?”
“얘가 시도 때도 없이 군사님, 군사님. 아주 시집을 가라, 시집을 가.”
“엄마! 아파!”
세란이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나를 숭배하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뭔가 이상한 말이 들린 것도 같은데…….
“진실인 것처럼 보이면서 거짓으로 속여 협곡으로 유인한다라… 정말 그 계책대로 되다니, 너는 정말…….”
한편, 글로리아는 뭐라 중얼거리며 부끄러워질 정도로 한참이나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세란아, 다들 너를 칭찬하고 있어. 대단한 군사님이래.’
[어? 어, 에헤헤, 뭘 그렇게까지…….]
멋쩍은 기분에 글로리아의 시선을 피해 텔레파시를 전하자, 아닌 척하면서도 기뻐하는 세란이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나는 매번 이렇게 사람들의 감사와 칭찬을 대신 전달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왜냐고? 저 말들은 내가 아니라 동생이 들어야 할 것이니까.
“기석.”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글로리아가 작게 나를 부르며 협곡 끝을 가리켰다. 내 눈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마을 사람들까지 몸을 숙이는 터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적군이 왔다는 걸.
“…우오, 많구만.”
“개미 떼 같네그려.”
한참을 엎드린 채 숨죽이고 있자, 어느새 좁은 골짜기 사이로 길게 띠를 이룬 사람들이 나타났다. 만약 여기서 통나무를 떨어뜨려 퇴로를 막고 쇠뇌를 발사한다면, 적은 아무것도 못하고 몰살당하겠지.
적이 협곡으로 들어온 이상 이미 승부는 판가름 낫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우린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적을 전멸시키는 건 쉬운 일이나, 그랬다간 아무 잘못도 없는 노예들마저 전부 죽고 만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애써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약자를 돕겠다고 맹세했기에.
그래서 세란이는 다른 대안을 준비해 주었다. 그건 바로…….
“글로리아.”
“그래, 드디어 내 차례인가.”
내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글로리아.
그녀는 여유롭게 어깨를 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그녀를 홀로 적진에 보내려 한다. 우리와 적, 모두의 목숨을 일대일 결투로 결정짓기 위해.
“괜찮겠어요?”
내가 걱정스러워하며 묻자, 그녀는 또 그 소리냐고 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는 이미 다 나았다고 했지 않았더냐.”
“그것 말고요.”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 글로리아.
그러다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아름답게 눈웃음을 지었다.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거라 말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나를 걱정해 주는 거냐?”
“윽, 하지만 저 많은 적 앞에 혼자 나서는 거예요. 역시 위험할지도 몰라요.”
“기석, 네가 가능하다고 믿고 내린 결정이니, 나를 믿고 다루면 될 뿐이다.”
“네?”
내가 눈을 깜빡이자 글로리아의 눈썹이 살짝 좁혀졌다.
“벌써 잊었나? 나는 너의 검이 되겠다고 말했을 텐데?”
그 말을 듣고서야 난 내 검이 되겠다며 의지를 밝힌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한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혹시 아니었다는 건가?
“저기, 그건 무슨 의미…….”
“다녀오겠다.”
글로리아는 내 말을 툭 잘라 버리곤 경악스럽게도 협곡을 사뿐히 뛰어내렸다.
“우왁! 글로리…아아?”
기겁해 소리 지르려던 나는 멍청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세상에, 저 가파른 절벽을 산양처럼 뛰어내리고 있어…….
“어라? 저기 봐. 절벽에서 뭔가가 떨어지고 있는데… 사, 사람?”
“뭐, 뭐냐! 저게 사람이라고?”
“우, 우와…….”
병사들도 절벽을 타는 글로리아의 모습을 보았는지, 서커스를 구경하듯 멍하니 절벽만 올려다보았다.
‘진짜 사람이 아닌 거 같네.’
[뭐가?]
‘아무것도 아냐. 아, 맞다. 그런데 세란아.’
[응?]
‘적군의 총대장 말이야. 게런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 강해? 브렌터스 영지의 기사단장이라며? 설마 글로리아처럼 대단한 영웅이라거나?’
[아니, 쩌리.]
‘쩌, 쩌리?’
뭔가 어린아이가 쓸 법한 가벼운 말투에 되레 당황스러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세란이는 그런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책에서도 글로리아랑 게런이 결투하는 장면이 나와.]
‘뭐?’
[일단 들어봐. 고블린 무리를 홀로 무찌른 글로리아는 잘린 팔 때문에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잠시 브렌터스 영지에서 머물거든? 그때 고블린을 홀로 전멸시킨 공적을 높이 사 브렌터스 남작이 자신의 가신으로 들어오길 권하지만, 여자를 성 노리개로만 보는 남작의 성정을 익히 잘 아는 글로리아는 단칼에 거절해 버려. 그에 노한 남작이 게런과 기사들을 시켜 글로리아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그 남작, 정말 몹쓸 인간이네.’
[맞아. 하지만 신경 쓸 거 없어. 1년 뒤에 전국 곳곳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는데, 그 남작은 크라이 산림에서 발생한 몬스터 군단에 의해 죽으니까.]
‘몬스터… 웨이브?’
[그건 설명이 길어지니까 나중에 말해줄게. 아무튼, 남작의 명령을 받은 게런은 다섯 명의 기사를 대동해 숲에서 글로리아를 기습하지만, 전부 단칼에 죽어. 거기다 게런은 그… 으음, 남자의 소중한 곳이 잘려서 죽는 치욕을 당해. 그게… 사실은 영지에 있을 때 게런이 어지간히 치근덕거렸거든. 그에 대한 복수 같은 거려나? 그런 식으로 외팔이였던 당시에도 압도적인 무위로 이긴 그녀야.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본능적으로 가랑이를 오므리며 지상에 가볍게 착지한 글로리아를 돌아보았다.
응, 그래. 앞으로 웬만하면 그녀를 화나게 하지 말자.
“뭐지? 적?”
“에이, 적진 한가운데로 혼자 싸우러 오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저 여자는 뭐야?”
“당신, 누구요?”
뜬금없이 나타난 글로리아로 인해 병사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여기까지 보일 정도였다. 글로리아도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적진 한가운데 홀로 서 있음에도 여유롭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일부러 늘어지게 말을 끊자, 모두의 시선이 글로리아에게로 집중되었다.
그제야 만족한 듯 글로리아는 검을 뽑으며 이어 말했다.
“화전 마을을 대표하는 검사다.”
“…어?”
“화, 전… 크흡!”
“푸흐읍!”
“크핫! 뭐? 화전 마을의 검사? 심지어 여자가?”
“우핫핫핫! 이거, 대단한 검사 나으리셨구만!”
“그럼 난 브렌터스 남작령을 대표하는 검사다!”
“파하하하하!”
주위가 한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얼마나 목소리가 컸으면 줄지어 뒤따라오던 후속 부대가 의아해하며 글로리아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 정도였다.
보다 못한 나는 신호를 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글로리아가 손을 들어 내 행동을 멈춰 세웠다.
뭐지? 작전대로라면 우리가 포위했다는 걸 보여줘 겁먹게 한 뒤, 일을 벌이는 것일 텐데?
어찌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그때, 글로리아가 웃고 있는 병사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래, 네가 브렌터스 남작령을 대표하는 검사라고 했나?”
“그럼 당연하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남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목이 베어졌기 때문이다.
“헛!”
“주, 죽었어?”
“으허헉!”
병사의 목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오자, 이를 뒤집어쓴 병사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글로리아는 피 묻은 검을 바닥에 털어내며 씩 웃었다.
“다음. 또 나를 상대할 검사가 있느냐?”
“저, 적이다! 아군이 죽었다!”
“공격해! 죽여 버… 끄악!”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도 당황스러워하며 나를 돌아볼 정도였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심정이라 세란이에게 급히 물어봤더니, ‘하핫, 역시 글로리아네’라는 답변만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글로리아는 머리카락이 불꽃의 잔상으로 보일 만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병사들을 베어 나갔다.
“뭣, 속도가… 악!”
“너무, 빨라!”
앞을 가로막은 자는 여지없이 목이 잘려 나가고, 등을 노린 병사들은 미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글로리아의 뒤꽁무니만 쫓기 바빴다.
순식간에 죽은 병사의 숫자가 스물을 넘기자, 비로소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를 상대할 검사는 벌써 끝인가? 재미없군.”
눈 깜짝할 새에 주변을 시체로 쌓았음에도 글로리아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이질적인 모습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제3자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는 우리 또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럼 다시 소개하지. 나는 화전 마을을 대표하는 검사다.”
똑같은 말이지만, 이번엔 비웃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 우와! 역시 검사님.”
“저 압도적인 위엄 봐. 나까지 주눅이 들 정도야.”
“우리 군사님과 검사님은 모두 대단하시다니까.”
여기저기서 넋을 잃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하… 사실은 나도 같은 심정이다. 수백 명의 적을 혼자서 압도하다니, 정말 웃음밖에 안 나오네.
“다, 당신이 뭔데 이러는 거요?”
“그래! 대체 목적이 뭐냐!”
“너희 잔챙이들에겐 볼일 없다. 총대장을 불러라.”
대놓고 총대장을 부르라는 글로리아의 명령에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갈팡질팡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소식을 알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탄 기사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 헉!”
기사들 중 유난히 갑옷이 번쩍거리는 한 명이 주변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턱이 길고 눈이 얇아 영락없이 여우를 닮은 인상의 기사.
기억난다. 처음 마을에 와서 항복을 권유하던, 게런이란 기사였다.
“이걸 혼자…서? 너는 누구냐! 무슨 일로 여기서 행패를 부리는가!”
게런의 물음에 글로리아는 피 묻은 검을 겨누며 말했다.
“나는 화전 마을을 대표하는 검사, 글로리아. 네 녀석에게 전쟁의 승패를 건 일대일 결투를 신청한다.”
너무도 진지한, 결의마저 느껴지는 글로리아 말에 한순간 전장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흐, 흐핫, 흐하하하핫! 뭐라는 거냐! 부관, 방금 들었나? 화전 마을의 검사? 전쟁의 승패를 건, 뭐? 결투? 흐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얼마나 큰지, 협곡 가득 메아리칠 정도였다. 하나 글로리아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가에 맺힌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여자 주제에 기개가 대단하구나! 하나 참으로 안타깝도다.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 검사라니. 그대는 검이 아니라 내 남근을 쥐는 게 더 어울리지 않겠나?”
성적으로 비아냥대자, 글로리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지워졌다.
우와, 그녀의 살기가 여기까지 느껴졌어.
“우와, 정말 군사님 말대로 됐네요?”
“역시 군사님이시구먼.”
“난 이렇게 될 줄 이미 알았다니까?”
“하아, 군사님 멋져. 우리 군사님, 어쩜 저렇게 잘생기고 머리도 좋을까?”
“얘가 시도 때도 없이 군사님, 군사님. 아주 시집을 가라, 시집을 가.”
“엄마! 아파!”
세란이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나를 숭배하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뭔가 이상한 말이 들린 것도 같은데…….
“진실인 것처럼 보이면서 거짓으로 속여 협곡으로 유인한다라… 정말 그 계책대로 되다니, 너는 정말…….”
한편, 글로리아는 뭐라 중얼거리며 부끄러워질 정도로 한참이나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세란아, 다들 너를 칭찬하고 있어. 대단한 군사님이래.’
[어? 어, 에헤헤, 뭘 그렇게까지…….]
멋쩍은 기분에 글로리아의 시선을 피해 텔레파시를 전하자, 아닌 척하면서도 기뻐하는 세란이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나는 매번 이렇게 사람들의 감사와 칭찬을 대신 전달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왜냐고? 저 말들은 내가 아니라 동생이 들어야 할 것이니까.
“기석.”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글로리아가 작게 나를 부르며 협곡 끝을 가리켰다. 내 눈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마을 사람들까지 몸을 숙이는 터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적군이 왔다는 걸.
“…우오, 많구만.”
“개미 떼 같네그려.”
한참을 엎드린 채 숨죽이고 있자, 어느새 좁은 골짜기 사이로 길게 띠를 이룬 사람들이 나타났다. 만약 여기서 통나무를 떨어뜨려 퇴로를 막고 쇠뇌를 발사한다면, 적은 아무것도 못하고 몰살당하겠지.
적이 협곡으로 들어온 이상 이미 승부는 판가름 낫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우린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적을 전멸시키는 건 쉬운 일이나, 그랬다간 아무 잘못도 없는 노예들마저 전부 죽고 만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애써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약자를 돕겠다고 맹세했기에.
그래서 세란이는 다른 대안을 준비해 주었다. 그건 바로…….
“글로리아.”
“그래, 드디어 내 차례인가.”
내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글로리아.
그녀는 여유롭게 어깨를 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그녀를 홀로 적진에 보내려 한다. 우리와 적, 모두의 목숨을 일대일 결투로 결정짓기 위해.
“괜찮겠어요?”
내가 걱정스러워하며 묻자, 그녀는 또 그 소리냐고 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는 이미 다 나았다고 했지 않았더냐.”
“그것 말고요.”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 글로리아.
그러다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아름답게 눈웃음을 지었다.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거라 말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나를 걱정해 주는 거냐?”
“윽, 하지만 저 많은 적 앞에 혼자 나서는 거예요. 역시 위험할지도 몰라요.”
“기석, 네가 가능하다고 믿고 내린 결정이니, 나를 믿고 다루면 될 뿐이다.”
“네?”
내가 눈을 깜빡이자 글로리아의 눈썹이 살짝 좁혀졌다.
“벌써 잊었나? 나는 너의 검이 되겠다고 말했을 텐데?”
그 말을 듣고서야 난 내 검이 되겠다며 의지를 밝힌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한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혹시 아니었다는 건가?
“저기, 그건 무슨 의미…….”
“다녀오겠다.”
글로리아는 내 말을 툭 잘라 버리곤 경악스럽게도 협곡을 사뿐히 뛰어내렸다.
“우왁! 글로리…아아?”
기겁해 소리 지르려던 나는 멍청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세상에, 저 가파른 절벽을 산양처럼 뛰어내리고 있어…….
“어라? 저기 봐. 절벽에서 뭔가가 떨어지고 있는데… 사, 사람?”
“뭐, 뭐냐! 저게 사람이라고?”
“우, 우와…….”
병사들도 절벽을 타는 글로리아의 모습을 보았는지, 서커스를 구경하듯 멍하니 절벽만 올려다보았다.
‘진짜 사람이 아닌 거 같네.’
[뭐가?]
‘아무것도 아냐. 아, 맞다. 그런데 세란아.’
[응?]
‘적군의 총대장 말이야. 게런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 강해? 브렌터스 영지의 기사단장이라며? 설마 글로리아처럼 대단한 영웅이라거나?’
[아니, 쩌리.]
‘쩌, 쩌리?’
뭔가 어린아이가 쓸 법한 가벼운 말투에 되레 당황스러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세란이는 그런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책에서도 글로리아랑 게런이 결투하는 장면이 나와.]
‘뭐?’
[일단 들어봐. 고블린 무리를 홀로 무찌른 글로리아는 잘린 팔 때문에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잠시 브렌터스 영지에서 머물거든? 그때 고블린을 홀로 전멸시킨 공적을 높이 사 브렌터스 남작이 자신의 가신으로 들어오길 권하지만, 여자를 성 노리개로만 보는 남작의 성정을 익히 잘 아는 글로리아는 단칼에 거절해 버려. 그에 노한 남작이 게런과 기사들을 시켜 글로리아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그 남작, 정말 몹쓸 인간이네.’
[맞아. 하지만 신경 쓸 거 없어. 1년 뒤에 전국 곳곳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는데, 그 남작은 크라이 산림에서 발생한 몬스터 군단에 의해 죽으니까.]
‘몬스터… 웨이브?’
[그건 설명이 길어지니까 나중에 말해줄게. 아무튼, 남작의 명령을 받은 게런은 다섯 명의 기사를 대동해 숲에서 글로리아를 기습하지만, 전부 단칼에 죽어. 거기다 게런은 그… 으음, 남자의 소중한 곳이 잘려서 죽는 치욕을 당해. 그게… 사실은 영지에 있을 때 게런이 어지간히 치근덕거렸거든. 그에 대한 복수 같은 거려나? 그런 식으로 외팔이였던 당시에도 압도적인 무위로 이긴 그녀야.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본능적으로 가랑이를 오므리며 지상에 가볍게 착지한 글로리아를 돌아보았다.
응, 그래. 앞으로 웬만하면 그녀를 화나게 하지 말자.
“뭐지? 적?”
“에이, 적진 한가운데로 혼자 싸우러 오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저 여자는 뭐야?”
“당신, 누구요?”
뜬금없이 나타난 글로리아로 인해 병사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여기까지 보일 정도였다. 글로리아도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적진 한가운데 홀로 서 있음에도 여유롭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일부러 늘어지게 말을 끊자, 모두의 시선이 글로리아에게로 집중되었다.
그제야 만족한 듯 글로리아는 검을 뽑으며 이어 말했다.
“화전 마을을 대표하는 검사다.”
“…어?”
“화, 전… 크흡!”
“푸흐읍!”
“크핫! 뭐? 화전 마을의 검사? 심지어 여자가?”
“우핫핫핫! 이거, 대단한 검사 나으리셨구만!”
“그럼 난 브렌터스 남작령을 대표하는 검사다!”
“파하하하하!”
주위가 한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얼마나 목소리가 컸으면 줄지어 뒤따라오던 후속 부대가 의아해하며 글로리아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 정도였다.
보다 못한 나는 신호를 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글로리아가 손을 들어 내 행동을 멈춰 세웠다.
뭐지? 작전대로라면 우리가 포위했다는 걸 보여줘 겁먹게 한 뒤, 일을 벌이는 것일 텐데?
어찌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그때, 글로리아가 웃고 있는 병사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래, 네가 브렌터스 남작령을 대표하는 검사라고 했나?”
“그럼 당연하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남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목이 베어졌기 때문이다.
“헛!”
“주, 죽었어?”
“으허헉!”
병사의 목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오자, 이를 뒤집어쓴 병사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글로리아는 피 묻은 검을 바닥에 털어내며 씩 웃었다.
“다음. 또 나를 상대할 검사가 있느냐?”
“저, 적이다! 아군이 죽었다!”
“공격해! 죽여 버… 끄악!”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도 당황스러워하며 나를 돌아볼 정도였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심정이라 세란이에게 급히 물어봤더니, ‘하핫, 역시 글로리아네’라는 답변만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글로리아는 머리카락이 불꽃의 잔상으로 보일 만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병사들을 베어 나갔다.
“뭣, 속도가… 악!”
“너무, 빨라!”
앞을 가로막은 자는 여지없이 목이 잘려 나가고, 등을 노린 병사들은 미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글로리아의 뒤꽁무니만 쫓기 바빴다.
순식간에 죽은 병사의 숫자가 스물을 넘기자, 비로소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를 상대할 검사는 벌써 끝인가? 재미없군.”
눈 깜짝할 새에 주변을 시체로 쌓았음에도 글로리아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이질적인 모습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제3자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는 우리 또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럼 다시 소개하지. 나는 화전 마을을 대표하는 검사다.”
똑같은 말이지만, 이번엔 비웃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 우와! 역시 검사님.”
“저 압도적인 위엄 봐. 나까지 주눅이 들 정도야.”
“우리 군사님과 검사님은 모두 대단하시다니까.”
여기저기서 넋을 잃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하… 사실은 나도 같은 심정이다. 수백 명의 적을 혼자서 압도하다니, 정말 웃음밖에 안 나오네.
“다, 당신이 뭔데 이러는 거요?”
“그래! 대체 목적이 뭐냐!”
“너희 잔챙이들에겐 볼일 없다. 총대장을 불러라.”
대놓고 총대장을 부르라는 글로리아의 명령에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갈팡질팡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소식을 알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탄 기사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 헉!”
기사들 중 유난히 갑옷이 번쩍거리는 한 명이 주변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턱이 길고 눈이 얇아 영락없이 여우를 닮은 인상의 기사.
기억난다. 처음 마을에 와서 항복을 권유하던, 게런이란 기사였다.
“이걸 혼자…서? 너는 누구냐! 무슨 일로 여기서 행패를 부리는가!”
게런의 물음에 글로리아는 피 묻은 검을 겨누며 말했다.
“나는 화전 마을을 대표하는 검사, 글로리아. 네 녀석에게 전쟁의 승패를 건 일대일 결투를 신청한다.”
너무도 진지한, 결의마저 느껴지는 글로리아 말에 한순간 전장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흐, 흐핫, 흐하하하핫! 뭐라는 거냐! 부관, 방금 들었나? 화전 마을의 검사? 전쟁의 승패를 건, 뭐? 결투? 흐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얼마나 큰지, 협곡 가득 메아리칠 정도였다. 하나 글로리아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가에 맺힌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여자 주제에 기개가 대단하구나! 하나 참으로 안타깝도다.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 검사라니. 그대는 검이 아니라 내 남근을 쥐는 게 더 어울리지 않겠나?”
성적으로 비아냥대자, 글로리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지워졌다.
우와, 그녀의 살기가 여기까지 느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