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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어헉!”
“컥!”
가장 선두에 서서 다가오던 병사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쓰러졌다.
“…어?”
일반 화살과는 달리 직선의 형태로 쏘아진 화살이기에 날아오는 궤적을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덕분에 뒤에 있던 병사들은 영문도 모르는 표정으로 쓰러진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화살?”
“무, 무슨…….”
“으악! 도망……!”
뒤늦게 죽은 병사들의 몸과 땅에 박힌 화살을 보고 상황을 인지한 병사들이 기겁해 도망가려 했지만, 내 명령이 더 빨랐다.
“2열 발사!”
2차로 대기하던 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바꿔 앞으로 나서며 쇠뇌를 발사했다. 몸을 숙이거나 뒤돌아 달아나는 병사들이 많아 그다지 큰 피해는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열 명 정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뭐, 뭐냐?! 화살이라니! 어디서 날아오는 거냐!”
“다, 단장님! 아무래도 장난감처럼 보이는 기구에서 발사되는 것 같습니다!”
“뭣이라? 그럴 리가! 어찌 시위를 당기지도 않고 쏠 수 있는 활이 있겠느냐!”
“그, 그건 저도 잘…….”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뭐 하느냐! 물러나지 마라! 전쟁도 한 번 치러보지 않은 농민들이 활을 잘 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시하고 앞으로…….”
“으악!”
“크억!”
그의 명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우리는 3차 사격을 개시했다. 그로 인해 또다시 열 명가량의 병사가 쓰러지자, 여우 같은 게런의 얼굴이 더욱 홀쭉하게 변했다.
“어, 어째서냐? 어째서 저리 잘 쏠 수 있단 말인가. 고작 농민, 고작 농민 주제에!”
“단장님, 이대론 전멸합니다! 어서 후퇴 명령을!”
“안 돼… 안 돼! 안 돼! 농민 나부랭이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가다니! 이대로는 영주님을 뵐 면목이 없어!”
게런은 악에 받쳐 소리 질렀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 병사들은 도끼를 내던지고 나 살려라 도망가기 바빴다.
그럴 만도 하지. 고작 1, 2, 3차로 나눠 쏜 것만으로도 병사들 대부분이 죽어 나갔는데, 어느 누가 태평하게 울타리를 부수고 있겠느냔 말이다.
“단장님, 이러다 다 죽겠어요!”
“끄으윽! 젠장! 젠자아앙!”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게런은 결국 후퇴를 외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겼다! 이겼어!”
“기사 놈들! 꼬랑지 감추고 도망가는 꼴 보슈! 우핫핫핫핫핫!”
너무도 통쾌한 승리에 웰던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성을 내질렀고, 오직 나만이 길가에 쓰러진 병사들을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싸움은 시작한 지 불과 10분도 안 돼서 끝나고 말았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남은 건, 수십 구의 시체와 무기뿐이었다.
보통 공성전을 할 때, 수성하는 병사보다 몇 배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보다도 숫자가 적을 뿐 아니라 활에 대한 방비조차도 없었으니, 이런 참상이 빚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역시 군사님입니다요!”
“군사님만 있으면 우린 무적이라니까!”
마을 사람들은 통쾌한 승리에 취해 당장 축제라도 벌일 것처럼 좋아했다.
하긴, 병사들을 상대로 아무런 피해도 없이 완승을 거뒀으니 기뻐하는 것도 당연한가.
[오빠?]
‘아, 미안. 지금 끝났어. 완승이야.’
[응. 그렇겠지.]
굳이 듣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양 세란이는 건조하게 응답했다.
‘이것도 전부 예상했어?’
[예상이랄 것까지 있나. 누가 봐도 다 알 만한 건데. 이런 건 연습 게임만도 못해. 그보다 나는 오빠가 걱정이야.]
‘내가?’
[그… 있잖아. 사람을 죽여서. 그래서, 괜찮…아?]
조금 전의 시큰둥하던 응답과는 다르게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 세란이가 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목소리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응. 괜찮아, 생각보다는. 아니, 오히려 의연한 내 모습이 놀라울 정도야.’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눈앞에 죽은 병사들이 한가득 쓰러져 있는데도 손발이 떨리긴커녕 오히려 더 냉정해졌으니까.
실은 내가 원래는 냉혈한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덤덤하다고나 할까. 어쩌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다 보니 감정 조절에 익숙해진 걸지도.
[다행이다. 응, 안심이야. 그럼 다음을 준비하자.]
‘다음? 다음이라니? 설마 저들이 또 온다는 말이야?’
[당연한 소리를. 자존심 강한 귀족이 평민에게 한 방 먹었는데 가만히 있겠어?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본격적으로 병사를 투입하겠지. 그러니까 전략은 지금부터야.]
‘전략? 지금처럼 울타리 너머에서 마을을 지키면 되는 거 아냐?’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 전쟁의 승리는 반복되지 않으니, 안주하지 말고 다양한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라는 말이 있어.]
저 말도 손자병법인가? 잘 모르겠지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기에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상대도 바보는 아니야. 다음엔 필시 화살을 막기 위한 대책을 준비해 올 거야. 그러니 우리도 유연하게 대응해야지. 때마침 도끼라는 유용한 무기를 빌려줬으니, 고맙게 사용해 보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세란이 목소리엔 기대와 흥분이 잔뜩 묻어 있었다.
***
“그래서! 고작 100명 남짓한 평민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왔단 말인가!”
“그, 그게, 기상천외한 활로 명궁처럼 쏴대는 통에…….”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일평생 농기구만 만지던 놈들이다! 그런데 뭐? 명궁? 내가 참으로 무능한 기사를 단장으로 임명했구나!”
“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집어치워라! 내 당장 네놈의 목을 취해도 할 말이 없을 터!”
“히이익!”
브렌터스 남작이 검을 뽑아 들자, 게런은 체면도 잊고 꼴사납게 뒷걸음질 쳤다.
브렌터스 남작은 그런 게런의 목 위에 검날을 드리우며 으르렁거리듯 낮게 말했다.
“하나 당장 네놈보다 내 권위를 무시하는 평민 놈들이 더 문제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가, 감사합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기대에 보답을……!”
“단, 명심하거라.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사돈에 팔촌까지 전부 단두대에 서리란 걸. 알겠느냐!”
“우윽! 아, 알겠습니다!”
게런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틀 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브렌터스 남작의 눈빛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하여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기사로서의 체면은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의 목숨까지 걸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작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해 왔건만, 어찌 손바닥 뒤집듯 상황이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전부, 전부 그놈들 때문이다.”
기사단장 게런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그 모습엔 단순한 증오를 넘어서 광기가 담겨 있었다.
“단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엔 설령 동서를 대표하는 두 신성 군사라 하더라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렴! 난다 긴다 하는 그 천재 군사들이라 할지라도 이만한 수의 병력을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럼요, 어찌할 수 없고말고요. 이번에 그 쳐 죽여도 시원찮을 도적놈들을 잡아오면 분명 단장님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만 된다면 내 너를 잊지 않겠다! 핫핫핫핫!”
게런은 부관의 입 발린 아부에 기분이 좋아져 목청껏 웃어젖혔다.
둘이 이렇게 시시덕거리며 자신감에 차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병사 덕분이었다.
대략 300에 달하는 병사들. 그들은 하나같이 나무 방패를 등에 메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화살막이용으로 사용할 노예들도 200명이나 준비했다.
모두 합쳐서 500.
고작 화전민 마을 하나를 토벌하기 위한 병력으로는 너무도 과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만 보더라도 브렌터스 남작이 얼마나 이를 갈고 준비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뭐 하느냐! 속도가 느려졌지 않느냐! 어서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단장님, 아무래도 노예들이 지친 모양입니다.”
“뭐야?”
병사를 이끌던 기사가 다가와 보고하자, 게런의 여우 같은 눈동자가 부리부리하게 변했다.
“감히 천한 노예 놈들 주제에 게으름을 부려?! 잔꾀를 피우는 놈들에게는 전부 채찍질을 가하거라!”
“예! 알겠…….”
“잠깐! 기다려! 게으름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들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한 여성이 병사의 제지를 뿌리치며 다가왔다.
그녀는 보기 드문 단발머리에 반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보다도 특이한 복장이 더 눈에 띄었다.
흰 셔츠에 흰 바지, 하얀 운동화까지 온통 흰색 일색.
그래서 조금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여기저기 찢기고 때가 탔기에 언뜻 보면 헝겊 쪼가리로도 느껴져 게런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노예 주제에 어딜!”
“꺅! 놔! 이거 놓으라고!”
“그만. 멈춰라.”
뒤늦게 다가온 병사가 여자의 머리채를 붙잡아 억지로 끌고 가려 하자, 그전에 게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직 성깔이 남아 있는 노예가 있었구나. 호오, 제법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게…….”
순간, 게런의 날카로운 눈빛이 음흉하게 바뀌었다. 그 변화를 눈치챈 여성은 질색하며 손으로 가슴을 감추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웃기지 마. 너 같은 놈에게 알려줄 이름 따위… 악! 알았어! 황혜영! 황혜영이야!”
병사가 다시 머리채를 움켜쥐자 황혜영은 무력에 굴복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황혜영이라… 무척 특이한 이름이로군. 다른 지방에서 팔려온 귀족 노예인가? 오늘 밤은 심심치 않겠구나.”
“으윽.”
게런이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자, 황혜영은 바퀴벌레라도 마주 본 것처럼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래, 노예들이 뒤처지는 게 게으름이 아니라고 했겠다? 어디, 그럼 무슨 이유인지 한 번 들어나 볼까?”
“그래! 얼마든지 말해줄게! 노예들은 벌써 며칠째 제대로 물도 마시지 못하고 산을 오르고 있어. 이러면 탈수증상을 보이는 게 당연하잖아! 이대로는 전부 열사병으로 쓰러질 거야! 적어도 한 시간은 그늘에서 쉬어야한다고!”
“탈수? 열… 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군. 아무튼, 그건 여기 있는 병사들도 같다. 그런데 왜 유독 노예만 힘들어하느냐?”
“같기는 뭐가 같아! 노예는 고작 딱딱한 빵 반 쪼가리가 하루 식사의 전부야!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때도 우린 수발을 들어줘야 해! 여자 노예는 밤에도 병사들의 시중을 드느라 잠 한숨도 못 자! 그런 영양실조와 과로가 겹친 상황에서 매일같이 험악한 산길을 오르고 있는데 지치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이대로면 전부 쓰러질 거야! 전부 죽을…….”
“그러기 위해 데려왔다.”
게런이 도중에 말을 잘라 버리자 황혜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그게 무슨 말…….”
“다시 말해줄까? 너희 노예들은 우리 대신 죽기 위해 데려왔다는 말이다. 이제 좀 알아들었나?”
게런이 약 올리듯 말하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황혜영은 겁먹은 쥐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달달 떠는 황혜영의 모습에 흥분한 게런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검으로 천천히 상의를 찢기 시작했다.
“마르긴 했지만 몸매도 나쁘지 않구나. 어디, 가슴은 어떠할까?”
“시, 싫어…….”
“으악!”
“크헉!”
바로 그때, 병사들이 줄지어 행군하던 곳에서 무차별적으로 화살이 날아왔다.
“어헉!”
“컥!”
가장 선두에 서서 다가오던 병사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쓰러졌다.
“…어?”
일반 화살과는 달리 직선의 형태로 쏘아진 화살이기에 날아오는 궤적을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덕분에 뒤에 있던 병사들은 영문도 모르는 표정으로 쓰러진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화살?”
“무, 무슨…….”
“으악! 도망……!”
뒤늦게 죽은 병사들의 몸과 땅에 박힌 화살을 보고 상황을 인지한 병사들이 기겁해 도망가려 했지만, 내 명령이 더 빨랐다.
“2열 발사!”
2차로 대기하던 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바꿔 앞으로 나서며 쇠뇌를 발사했다. 몸을 숙이거나 뒤돌아 달아나는 병사들이 많아 그다지 큰 피해는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열 명 정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뭐, 뭐냐?! 화살이라니! 어디서 날아오는 거냐!”
“다, 단장님! 아무래도 장난감처럼 보이는 기구에서 발사되는 것 같습니다!”
“뭣이라? 그럴 리가! 어찌 시위를 당기지도 않고 쏠 수 있는 활이 있겠느냐!”
“그, 그건 저도 잘…….”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뭐 하느냐! 물러나지 마라! 전쟁도 한 번 치러보지 않은 농민들이 활을 잘 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시하고 앞으로…….”
“으악!”
“크억!”
그의 명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우리는 3차 사격을 개시했다. 그로 인해 또다시 열 명가량의 병사가 쓰러지자, 여우 같은 게런의 얼굴이 더욱 홀쭉하게 변했다.
“어, 어째서냐? 어째서 저리 잘 쏠 수 있단 말인가. 고작 농민, 고작 농민 주제에!”
“단장님, 이대론 전멸합니다! 어서 후퇴 명령을!”
“안 돼… 안 돼! 안 돼! 농민 나부랭이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가다니! 이대로는 영주님을 뵐 면목이 없어!”
게런은 악에 받쳐 소리 질렀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 병사들은 도끼를 내던지고 나 살려라 도망가기 바빴다.
그럴 만도 하지. 고작 1, 2, 3차로 나눠 쏜 것만으로도 병사들 대부분이 죽어 나갔는데, 어느 누가 태평하게 울타리를 부수고 있겠느냔 말이다.
“단장님, 이러다 다 죽겠어요!”
“끄으윽! 젠장! 젠자아앙!”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게런은 결국 후퇴를 외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겼다! 이겼어!”
“기사 놈들! 꼬랑지 감추고 도망가는 꼴 보슈! 우핫핫핫핫핫!”
너무도 통쾌한 승리에 웰던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성을 내질렀고, 오직 나만이 길가에 쓰러진 병사들을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싸움은 시작한 지 불과 10분도 안 돼서 끝나고 말았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남은 건, 수십 구의 시체와 무기뿐이었다.
보통 공성전을 할 때, 수성하는 병사보다 몇 배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보다도 숫자가 적을 뿐 아니라 활에 대한 방비조차도 없었으니, 이런 참상이 빚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역시 군사님입니다요!”
“군사님만 있으면 우린 무적이라니까!”
마을 사람들은 통쾌한 승리에 취해 당장 축제라도 벌일 것처럼 좋아했다.
하긴, 병사들을 상대로 아무런 피해도 없이 완승을 거뒀으니 기뻐하는 것도 당연한가.
[오빠?]
‘아, 미안. 지금 끝났어. 완승이야.’
[응. 그렇겠지.]
굳이 듣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양 세란이는 건조하게 응답했다.
‘이것도 전부 예상했어?’
[예상이랄 것까지 있나. 누가 봐도 다 알 만한 건데. 이런 건 연습 게임만도 못해. 그보다 나는 오빠가 걱정이야.]
‘내가?’
[그… 있잖아. 사람을 죽여서. 그래서, 괜찮…아?]
조금 전의 시큰둥하던 응답과는 다르게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 세란이가 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목소리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응. 괜찮아, 생각보다는. 아니, 오히려 의연한 내 모습이 놀라울 정도야.’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눈앞에 죽은 병사들이 한가득 쓰러져 있는데도 손발이 떨리긴커녕 오히려 더 냉정해졌으니까.
실은 내가 원래는 냉혈한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덤덤하다고나 할까. 어쩌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다 보니 감정 조절에 익숙해진 걸지도.
[다행이다. 응, 안심이야. 그럼 다음을 준비하자.]
‘다음? 다음이라니? 설마 저들이 또 온다는 말이야?’
[당연한 소리를. 자존심 강한 귀족이 평민에게 한 방 먹었는데 가만히 있겠어?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본격적으로 병사를 투입하겠지. 그러니까 전략은 지금부터야.]
‘전략? 지금처럼 울타리 너머에서 마을을 지키면 되는 거 아냐?’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 전쟁의 승리는 반복되지 않으니, 안주하지 말고 다양한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라는 말이 있어.]
저 말도 손자병법인가? 잘 모르겠지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기에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상대도 바보는 아니야. 다음엔 필시 화살을 막기 위한 대책을 준비해 올 거야. 그러니 우리도 유연하게 대응해야지. 때마침 도끼라는 유용한 무기를 빌려줬으니, 고맙게 사용해 보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세란이 목소리엔 기대와 흥분이 잔뜩 묻어 있었다.
***
“그래서! 고작 100명 남짓한 평민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왔단 말인가!”
“그, 그게, 기상천외한 활로 명궁처럼 쏴대는 통에…….”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일평생 농기구만 만지던 놈들이다! 그런데 뭐? 명궁? 내가 참으로 무능한 기사를 단장으로 임명했구나!”
“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집어치워라! 내 당장 네놈의 목을 취해도 할 말이 없을 터!”
“히이익!”
브렌터스 남작이 검을 뽑아 들자, 게런은 체면도 잊고 꼴사납게 뒷걸음질 쳤다.
브렌터스 남작은 그런 게런의 목 위에 검날을 드리우며 으르렁거리듯 낮게 말했다.
“하나 당장 네놈보다 내 권위를 무시하는 평민 놈들이 더 문제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가, 감사합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기대에 보답을……!”
“단, 명심하거라.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사돈에 팔촌까지 전부 단두대에 서리란 걸. 알겠느냐!”
“우윽! 아, 알겠습니다!”
게런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틀 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브렌터스 남작의 눈빛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하여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기사로서의 체면은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의 목숨까지 걸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작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해 왔건만, 어찌 손바닥 뒤집듯 상황이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전부, 전부 그놈들 때문이다.”
기사단장 게런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그 모습엔 단순한 증오를 넘어서 광기가 담겨 있었다.
“단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엔 설령 동서를 대표하는 두 신성 군사라 하더라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렴! 난다 긴다 하는 그 천재 군사들이라 할지라도 이만한 수의 병력을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럼요, 어찌할 수 없고말고요. 이번에 그 쳐 죽여도 시원찮을 도적놈들을 잡아오면 분명 단장님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만 된다면 내 너를 잊지 않겠다! 핫핫핫핫!”
게런은 부관의 입 발린 아부에 기분이 좋아져 목청껏 웃어젖혔다.
둘이 이렇게 시시덕거리며 자신감에 차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병사 덕분이었다.
대략 300에 달하는 병사들. 그들은 하나같이 나무 방패를 등에 메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화살막이용으로 사용할 노예들도 200명이나 준비했다.
모두 합쳐서 500.
고작 화전민 마을 하나를 토벌하기 위한 병력으로는 너무도 과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만 보더라도 브렌터스 남작이 얼마나 이를 갈고 준비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뭐 하느냐! 속도가 느려졌지 않느냐! 어서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단장님, 아무래도 노예들이 지친 모양입니다.”
“뭐야?”
병사를 이끌던 기사가 다가와 보고하자, 게런의 여우 같은 눈동자가 부리부리하게 변했다.
“감히 천한 노예 놈들 주제에 게으름을 부려?! 잔꾀를 피우는 놈들에게는 전부 채찍질을 가하거라!”
“예! 알겠…….”
“잠깐! 기다려! 게으름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들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한 여성이 병사의 제지를 뿌리치며 다가왔다.
그녀는 보기 드문 단발머리에 반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보다도 특이한 복장이 더 눈에 띄었다.
흰 셔츠에 흰 바지, 하얀 운동화까지 온통 흰색 일색.
그래서 조금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여기저기 찢기고 때가 탔기에 언뜻 보면 헝겊 쪼가리로도 느껴져 게런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노예 주제에 어딜!”
“꺅! 놔! 이거 놓으라고!”
“그만. 멈춰라.”
뒤늦게 다가온 병사가 여자의 머리채를 붙잡아 억지로 끌고 가려 하자, 그전에 게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직 성깔이 남아 있는 노예가 있었구나. 호오, 제법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게…….”
순간, 게런의 날카로운 눈빛이 음흉하게 바뀌었다. 그 변화를 눈치챈 여성은 질색하며 손으로 가슴을 감추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웃기지 마. 너 같은 놈에게 알려줄 이름 따위… 악! 알았어! 황혜영! 황혜영이야!”
병사가 다시 머리채를 움켜쥐자 황혜영은 무력에 굴복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황혜영이라… 무척 특이한 이름이로군. 다른 지방에서 팔려온 귀족 노예인가? 오늘 밤은 심심치 않겠구나.”
“으윽.”
게런이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자, 황혜영은 바퀴벌레라도 마주 본 것처럼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래, 노예들이 뒤처지는 게 게으름이 아니라고 했겠다? 어디, 그럼 무슨 이유인지 한 번 들어나 볼까?”
“그래! 얼마든지 말해줄게! 노예들은 벌써 며칠째 제대로 물도 마시지 못하고 산을 오르고 있어. 이러면 탈수증상을 보이는 게 당연하잖아! 이대로는 전부 열사병으로 쓰러질 거야! 적어도 한 시간은 그늘에서 쉬어야한다고!”
“탈수? 열… 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군. 아무튼, 그건 여기 있는 병사들도 같다. 그런데 왜 유독 노예만 힘들어하느냐?”
“같기는 뭐가 같아! 노예는 고작 딱딱한 빵 반 쪼가리가 하루 식사의 전부야!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때도 우린 수발을 들어줘야 해! 여자 노예는 밤에도 병사들의 시중을 드느라 잠 한숨도 못 자! 그런 영양실조와 과로가 겹친 상황에서 매일같이 험악한 산길을 오르고 있는데 지치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이대로면 전부 쓰러질 거야! 전부 죽을…….”
“그러기 위해 데려왔다.”
게런이 도중에 말을 잘라 버리자 황혜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그게 무슨 말…….”
“다시 말해줄까? 너희 노예들은 우리 대신 죽기 위해 데려왔다는 말이다. 이제 좀 알아들었나?”
게런이 약 올리듯 말하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황혜영은 겁먹은 쥐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달달 떠는 황혜영의 모습에 흥분한 게런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검으로 천천히 상의를 찢기 시작했다.
“마르긴 했지만 몸매도 나쁘지 않구나. 어디, 가슴은 어떠할까?”
“시, 싫어…….”
“으악!”
“크헉!”
바로 그때, 병사들이 줄지어 행군하던 곳에서 무차별적으로 화살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