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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기석, 정말 괜찮은 거냐?”

기사들을 쫓아낸 후 망루에서 내려오자, 울타리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던 글로리아나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병사를 상대하는 건 고블린을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번에 마을 사람들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거다.”

그녀는 세란이와 마찬가지로 현 상황을 냉정히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다.

“백병전이 된다면 그렇겠죠. 그래서…….”

말을 잇던 도중 짓궂은 생각이 떠올라 씩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마을 사람들을 최단 시간에 정예병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글로리아는 무엇일 거 같아요?”

“활.”

글로리아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내가 겨우 추론해 낸 바를 곧바로 답했다.

끙, 이 사람도 범상치 않다니까.

하지만 그 이상은 역시 생각 못하는 모양이네.

“반만 맞았어요.”

내가 고개를 젓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글로리아.

나도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같은 표정이었으려나.

“확실히 활은 멀리서 쏘기만 하면 되니 약한 사람이 강한 병사를 상대할 수 있는 최적의 무기이긴 하죠. 하지만 숙달되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해요. 단시간에 다루기엔 어려운 무기잖아요.”

“그래, 나도 그게 마음에 걸렸다. 브렌터스 영지에서 토벌대를 편성해 오는 건 며칠도 채 걸리지 않을 거다. 그 짧은 시간에 활쏘기를 숙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겠지.”

“그래서, 다루기 쉬운 활을 준비했어요.”

“다루기 쉬운… 활?”

글로리아의 보라색 눈동자가 의문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녀의 궁금증에 답해주는 대신 손을 들었다.

“벤 할아버지, 여기요! 이리 좀 와주세요!”

내가 손을 흔들자, 마을 사람들 틈에서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노인이 내게 다가왔다.

“썩을 것. 노인한테 오라 가라니. 에잉, 쯧쯧쯧.”

영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흘겨보는 벤 할아버지.

턱수염 사이로 꾹 다물린 입매만 봐도 완고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분이 바로 마을에서 유일한 목수인 벤 할아버지다.

화전을 일굴 때 만든 울타리와 집은 전부 이분이 손수 힘써가며 만들었을 만큼 뛰어난 장인이라 보면 된다.

“미안해요, 워낙 급해서요. 그런데 벤 할아버지, 제가 부탁한 물건은 어찌 되었나요?”

“그 장난감 같은 것 말인가? 많을수록 좋다기에 꾸준히 만들어두긴 했네만…….”

“잘됐네요, 그거 하나만 가져와 주실 수 있나요?”

내 부탁에 벤 할아버지는 흰 눈썹을 치뜨며 나를 노려보았지만, 결국 두말 않고 공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옜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벤 할아버지가 성의 없이 내게 물건을 던졌다.

어이쿠, 이 섬세한 걸 막 던지시다니. 떨어뜨리면 고장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해 달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그러다 괜히 두 소리 더 들을 거 같으니까.

“이건… 뭐지? 활처럼 생긴 것도 같은데, 특이하군.”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글로리아가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잘 작동되는지 이리저리 만져 보다 말했다.

“이건 쇠뇌라고 합니다.”

“쇠… 뭐요? 거, 발음하기 어렵네.”

“꼭 어린애 장난감처럼 생겼네그려.”

마을 사람들도 궁금증이 인 건지 우르르 몰려왔다.

그랬다. 세란이가 마을 사람을 정예병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생각한 것이 바로 이 쇠뇌였다.

고대 신라의 비밀 병기인 쇠뇌.

쇠뇌의 제조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세란이의 말에 따르면 제나라의 손빈은 마릉에 만노를 매복 설치하여 방연을 죽였고, 항우 또한 한왕을 쇠뇌로 사살한 전과가 있으며, 우리나라에 이르면 신라, 고구려 시대에 김유신이 연노의 전법으로 10만의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여 전승을 거둔 예가 있다고 했다.



“당나라 황제 고종은 쇠뇌 제작자를 빼돌려 기술을 훔치려고까지 했어. 그만큼 쇠뇌란 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단편이지. 쇠뇌는 있잖아, 일단 다룰 수만 있게 되면 간단히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으로 화살을 쏠 수가 있어. 당연히 표적을 노리는 명중률이나 위력도 활보다 월등히 우위에 있지. 무엇보다도 활시위를 당기기 버거워하는 여성과 노인, 심지어 어린아이조차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야. 그 말인즉슨, 쇠뇌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일반인을 정예병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전력도 두 배 이상 늘릴 수 있다는 거지.”



그때 세란이가 한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투력뿐만 아니라 전력까지 늘릴 수 있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딱 필요한 무기. 어쩌면 우리에게 큰 전환점이 될지도 모를 무기란 걸 이들은 알고 있으려나.

“궁금해 미치겠구먼. 군사님, 그거 어찌 사용하는 거랍니까?”

“지금 보여 드릴게요. 일단 여기 옆에 걸려 있는 손잡이를 지렛대처럼 사용해 활시위를 당겨 걸고 쇠뇌 전용 살촉을 올린 뒤, 이렇게 방아쇠를 당기면…….”

푸슝!

바람을 가르는 독특한 소리와 함께 일직선으로 날아간 화살.

그 화살은 울타리에 박히다 못해 관통해 버렸다.

“우, 우와!”

“뭐, 뭐야? 지금 화살이 날아간 거야?”

“이게 뭣이당가.”

간단히 나무 울타리를 뚫어버리는 위력에 다들 눈을 치떴다.

“미, 미친! 저게 뭐요! 활시위를 당길 필요도 없이 쏠 수 있는 활이라니!”

그중에서도 웰던이 가장 크게 경악했는지,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며 내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아무래도 직접 활을 다루는 사냥꾼으로서 쇠뇌의 활용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깐, 이리 줘보슈! 그러니까 이 나무를 요렇게 돌려서 시위를 걸고 정면으로 조준해 쏘면…….”

웰던은 나처럼 정면에 있는 울타리가 아닌, 쇠뇌의 방향을 하늘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이내 발사된 화살. 화살은 날아가던 새의 몸통을 정확히 꿰뚫고 지나가 버렸다.

“허, 흐허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지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새만 바라보더니,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이거 정말 물건이네, 물건이야!”

“웰던,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대단하고말고! 이거 보슈. 보통 활은 이렇게 활시위를 당기며 조준해야 해서 초보자는 만지기가 어렵단 말이우. 그런데 이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수! 아마 이건 촌장님도 다룰 수 있을 거유!”

“허, 나도 말인가?”

웰던이 직접 자신의 활을 꺼내 활시위를 당겨 보이며 설명하자, 촌장은 흰 눈썹을 치뜨며 놀라워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리 장전해 놓을 수 있는 만큼 꼭 정자세를 취하고 쏴야 할 필요가 없어진다. 말을 탄 상태에서도, 심지어 엎드려서도 쏠 수 있겠군.”

글로리아가 말을 받자 웰던이 손뼉을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하, 그렇구먼! 성벽 뒤에 숨어서 쏘거나 숲속에 매복해서 쏘기 딱 적당하겠수!”

“놀라워. 이건 정도를 넘어섰어.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만한 무기야. 기석, 너는 대체 이런 걸 어떻게…….”

글로리아가 말끝을 흐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지구 역사에는 이런 물건이 존재했습니다’라고 말해봐야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기에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우와, 이런 장난감 같은 물건에 그런 쓰임새가…….”

“역시 우리 군사님이셔!”

“으핫핫핫! 내 말했잖수! 군사님만 따르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저는 영원히 군사님만 따르겠습니다!”

웰던에 이어 글로리아까지 감탄하고 있자, 이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맹신을 넘어 신봉자가 된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다들 저러니 어째… 부담스럽네.

하지만 안도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기에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단점도 많아요. 우선 활에 비해 재장전하는 속도가 더디다는 점. 게다가 나무로만 만든 거라 비가 오면 습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게 된다든지,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게 부서지기도 해요.”

철, 하다못해 청동으로 몸체를 만들었다면 오래가고 안전하겠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저 애송이 말이 맞다. 시위를 거는 나무가 마모되면 헐거워져서 못쓰겠지.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다면 좀 더 오래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나무를 찾을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쇠뇐지 뭔지 하는 그거, 제 자식 다루듯 조심히 사용해, 썩을 놈들아.”

벤 할아버지가 보충하듯 말을 보태주었다. 역시 직접 쇠뇌를 만든 장인으로서 단점을 명확히 알아차린 모양이다.

“자, 다들 아셨으면 이제 슬슬 연습하도록 하죠.”

나는 주위를 환기시키며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런 후, 본격적인 쇠뇌 다루는 연습이 시작됐다.



***



“우매한 도적놈들아, 마지막 경고다! 당장 문을 열고 항복하지 않으면 내 이름을 걸고 네놈들을 즉결심판하겠노라!”

그로부터 닷새가 지나 다시 나타난 여우기사 게런.

이번엔 정말 단단히 작정했는지, 그를 따르는 열 명의 기사뿐만 아니라 50명의 병사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50이라…….”

나는 그 숫자에 겁을 먹기보단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란이가 말하기론 브렌터스 남작령는 소규모 영지에 불과하기에 병사가 500명 정도밖에 안 되며, 치안 유지와 성을 지키는 병사 등을 제외하고 토벌에 소집될 병사는 많아야 100에서 200명 정도일 거라 했다.

그런데 50이다. 브렌터스 남작이 분명 우리를 얕볼 거라고 언급하긴 했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감히 끝까지 나를 무시해? 그래,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 쳐라! 울타리 따위 다 박살 내버려!”

게런이 명령을 내리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큼지막한 도끼를 들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완전히 바보는 아닌지, 울타리를 공략하기 위해 나름 준비한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그 부분에서 또 한 번 헛웃음을 지었다.

닷새 전, 웰던이 화살에 맞을 뻔한 수치를 겪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활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알 텐데 흔한 화살막이용 방패조차 들지 않다니, 대체 우리를 얼마나 얕보는 거란 말인가.

나는 점차 다가오는 병사들을 보며 말없이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울타리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일시에 쇠뇌를 겨누었다. 미리 흙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만들어놓은 터라 울타리 너머의 상대를 겨누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응? 단장님, 적이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우핫핫핫! 뭐냐, 저 장난감은! 신경 쓰지 말고 전진하라!”

게런이 우습다는 듯 무시하자, 살짝 긴장하던 병사들도 안도하며 다시 전진해 왔다.

그렇게 병사들이 쇠뇌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웰던이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이미 결심은 했지만, 막상 일이 눈앞에 닥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중생을 구호하기 위해 불살생의 계율을 어긴 사명 대사의 마음이라……. 그래, 나는 지금 사람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아군을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잊지 말자, 그 숭고한 마음을.

“쏘세요!”

퓨슈슈슈슈슈슈슝!

힘차게 팔을 아래로 떨구며 외치자, 수십 발의 화살이 일시에 발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