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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무단으로 도시를 이탈해 산림을 차지한 평민들은 들어라! 나는 브렌터스 영주님의 명을 받고 온 기사, 게런이다! 노략질을 일삼는 네놈들의 악행을 더는 지켜볼 수 없는 바! 영민의 안전을 바라는 영주님께선 왕국법에 의거해 네놈들을 토벌하기로 마음을 다지셨노라!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문을 열고 순순히 항복할 것을 권고한다!”
화전민 사람들과 함께한 지 대략 한 달. 위기는 어떠한 전조도 없이 찾아왔다.
말을 타고 나타난 열 명가량의 기사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아침을 맞이하며 마을의 재건과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그때, 저들이 나타났다.
방금 우렁차게 외친 자는 열 명의 기사 중 가장 선두에 나와 있는 남자였는데, 쭉 째진 눈과 뾰족한 턱, 어쩐지 비열하고 잔혹한 느낌의 여우 같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뭐 하느냐! 어서 문을 열지 않고!”
여우 인상의 기사가 윽박지르며 보채자, 울타리 너머로 이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크게 동요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우린 노략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아마 무단으로 도시를 이탈한 죄목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한 거겠죠.”
내가 웰던의 욕지기를 진지하게 받아주자, 그는 끄응, 거북한 심정을 삼켰다.
“군사님, 이제 어찌하는 게 좋겠수?”
웰던이 묻자 다른 이들도 같은 마음인지, 기대와 걱정, 그리고 내 지시만을 따르겠다는 믿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무엇 하나 결정할 수 없어 눈가가 찌그러질 정도로 꽉 감았다.
“고민된다면 내가 처리하지.”
내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울타리에 느긋이 등을 기대고 있던 글로리아가 툭 내던지듯 무심하게 말했다.
범상치 않은 모습의 기사가 열 명이나 와 있는데도 긴장은커녕 잠깐 몸이라도 풀겠다는 양 말하는 자신감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믿음직스런 모습에 살짝 긴장이 풀린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을 쓰러뜨린다 해도 의미 없어요. 어차피 다시 병사를 이끌고 올 테니까요.”
나는 확신하듯 말했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내가 동생에게 물은 적이 있는 말이니까.
[아아, 그렇구나. 이제 알겠어. 고블린이야. 우리가 내쫓은 고블린이 브렌터스 영지를 향한 게 아닌가 싶어. 분명 배고픈 고블린들은 영지 바깥의 밭을 약탈했을 테고,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사냥꾼들이 고블린의 흔적을 쫓다 이 마을을 발견한 걸 테지. 미안, 오빠. 고블린을 살려둔 게 이런 나비효과로 되돌아올 줄 몰랐어.]
한동안 조용하기에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나 싶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건가?
‘아냐. 미안해할 거 없어.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그래도 덕분에 깨달은 게 있어. 안일하게 책 속의 내용만 생각하며 일을 벌이는 짓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화전민 마을을 구함으로써 이렇게 나비효과가 발생되었듯이, 다른 생존자들로 인해 책 속에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 있을지도 몰라.]
‘으음, 미안.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어차피 그런 부분은 전적으로 너를 믿으니까 알아서 해줘. 그보다 문제는 지금이야.’
[백번 옳은 말이네. 이미 대책은 충분해. 한 가지 걱정되는 건 과연 오빠가 내 작전을 따라올 수 있느냐는 거지. 그래서 묻는데… 오빠, 한 달 전 밤에 내가 물어본 것 기억나?]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방향성… 말이지?’
[응. 충분히 고민했다면, 그 답을 지금 들려줘. 그에 맞춰 작전을 수정할게.]
얼마든지 작전을 변경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자신감을 내보이는 세란이. 나는 문득 동생이 글로리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이라…….”
나는 중얼거리며 무심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 한 달 사이 손등에 적혀 있는 숫자는 더욱 줄어 532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거의 반이 줄었다.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숫자는 앞으로도 계속 꾸준히 더욱 줄어들겠지.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생의 말마따나 독해져야 한다. 언제까지고 망설이고만 있을 순 없다.
하지만…….
‘세란아.’
[응.]
‘전에 네가 그랬지, 나처럼 이곳으로 넘어온 생존자들은 전부 적이라고.’
[그랬지.]
‘나는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뭐, 뭐?]
심히 당황한 목소리가 텔레파시로 전해져 왔다. 설마 그런 답변이 나올 줄은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그동안 쭉 고민했어. 생존자들을 적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가. 물론 네 말대로 내 목숨을 노리려는 자도 있겠지. 피치 못해 서로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라.’
[그럼 역시…….]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분명 존재해. 지금도 어디선가 도움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아.’
[오빠…….]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나는 잠시 텔레파시를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내가 결정한 나만의 다짐을 되새기듯 강하게 전했다.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하는 자들을 위해서라면 망설이지 않겠어. 설령 그로 인해 적대하는 자를 죽일 수밖에 없더라도, 그로 인해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야.’
세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답이 없었을까. 돌연 명쾌한 텔레파시가 전해져 왔다.
[어느 날 창대를 휘두르며 연습하던 한 승병이 사명 대사께 묻길,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어기고 창을 드는 것이 정녕 참된 길이옵니까?’라고 하니, 사명 대사는 ‘부처님께선 세상의 중생을 구호하기 위해 나오셨거늘, 어찌 불가의 몸을 둔 중으로서 흉측한 왜적 무리의 위협을 보고만 있겠느냐’라고 하시더라.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일본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할 당시, 승병장으로 활약한 사명 대사가 하신 말이야. 그분은 오직 백성을 구호하기 위해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 계율을 어기고 법구 대신 칼을 쥔 분이셔. 오빠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잘 알겠어.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야. 그렇게 가고자 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헤엄쳐. 나는 물길을 열어줄 테니.]
마지막, 수어지교를 인용한 말을 듣고 어쩐지 뒤에서 동생이 내 등을 밀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절로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래, 맹세했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말자. 왜적과 맞서 싸우신 사명 대사처럼 살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
“모두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눈을 뜨며 말하자, 나를 바라보던 이들이 모두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더 저에게 목숨을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음을 담아 부탁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마을 사람들. 그러다 갑자기 일제히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핫! 무슨 명령을 하나 했더니, 그거였습니까요?”
“난 또, 다 같이 포기하고 항복하자는 줄 알았네.”
“어… 네? 저기요, 제 말은 그러니까…….”
설마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차마 몰랐기에 되레 당황하자, 웰던이 내 어깨에 투박한 손을 턱 올리며 걸걸하게 웃었다.
“흐핫핫! 그 무슨 바보 같은 말이오? 군사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이미 다 죽거나 노예가 된 목숨이었수. 한 번 맡긴 목숨, 두 번 맡기지 못할 거 뭐 있겠느냔 말이우.”
“저도 군사님께 목숨을 맡긴 지 오랩니다!”
“군사님, 말씀만 하시면 불구덩이라도 뛰어 들어갈 테니,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웰던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나를 따르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로리아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뜬 채 지켜볼 뿐이었고.
그러니까… 웃고 있는 건가? 잘 모르겠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모두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여태껏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여우 인상의 기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웰던 씨, 당장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슈! 내 무엇이라도 하겠수!”
내 부름에 웰던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탕, 두드리며 응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저 기사들 발밑에 활을 쏴주세요.”
“알겠… 으엉? 아, 알겠수!”
내 명령에 잠깐 당황했지만, 그는 무슨 생각이 있겠다 싶었는지 잠자코 활시위를 당겼다.
“귀라도 먹은 거냐! 어서 문을 열지 않고 뭐 하… 으헉!”
화살 하나가 날아가 발밑에 푹 박히자, 꽥꽥 오리처럼 소리 지르던 여우기사 게런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무, 무슨 짓이냐! 이것들이! 그 행위는 필시 적대하는 것이렷다!”
“맞습니다.”
난 급조해 만든 망루 위에 올라서 응답했다. 너무도 가볍게 긍정하는 발언에 약을 올리는 거라 생각했는지, 여우기사 게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놈, 네놈이 우두머리냐! 감히 브렌터스 영지를 대표하는 전령에게 위협을 가하다니! 정녕 어찌 될지 알고도 그러는 것이냐!”
“어찌 됩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묻자, 여우기사 게런은 침이 튕기도록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몰살이다! 내 친히 네놈들의 목을 잘라 영지 입구에 죄다 효수할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별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뭐, 뭐라?”
“항복해서 평생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나, 반항해서 효수되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는 쪽에 운명을 걸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 웰던, 한 방 더 쏘세요.”
“명령 받았수! 옜다! 이거나 먹어라!”
“흐히익!”
이번엔 정확히 정수리로 날아드는 화살에 여우기사 게런이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꺾다 그만 말 위에서 떨어져 버렸다.
“칫.”
웨, 웰던? 왜 혀를 차시는지? 서, 설마… 방금 진심으로 죽일 생각인…….
“이, 이, 이것들이!”
우스꽝스럽게 낙마한 여우기사 게런은 격분을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도적들 주제에 기사인 나를 능멸해! 죽인다! 하나도 빠짐없이 죽여 버릴 테다아!”
“다, 단장님, 고정하십시오! 저들의 숫자가 제법 많습니다!”
“막지 마라! 그래봐야 검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농민들 아니더냐! 백이든 천이든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울타리가 생각보다 거슬립니다. 저희만으론 고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돌아가서 병사를 이끌고 오는 것이…….”
“크아아! 빌어먹을! 내 저것들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한다니!”
여우기사 게런은 이를 갈며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저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니 좀 무섭네. 하지만 이미 결심한 이상, 겁먹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지.
나는 침착하게 표정을 가다듬고 내치듯 팔을 옆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당장 브렌터스 남작에게 돌아가 전해라! 우리는 노예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알았으면 가라!”
“썩 꺼져라!”
“네 녀석들의 노예 따윈 되지 않는다!”
“와아아아아!”
내 말에 호응하듯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팔을 치켜들며 외쳤다. 함성 소리가 꽤 큰 탓에 말과 기사들이 주눅 들어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게 눈에 보였다.
“크으으,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반항을 해?! 두고 보자! 내 친히 병사들을 이끌고 와 네놈들의 혓바닥을 잘라 버릴 테니!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가자!”
여우기사 게런은 기사 아홉을 데리고 온 길을 도로 내려가 버렸다.
그렇게 전쟁의 막이 열리고 말았다.
“무단으로 도시를 이탈해 산림을 차지한 평민들은 들어라! 나는 브렌터스 영주님의 명을 받고 온 기사, 게런이다! 노략질을 일삼는 네놈들의 악행을 더는 지켜볼 수 없는 바! 영민의 안전을 바라는 영주님께선 왕국법에 의거해 네놈들을 토벌하기로 마음을 다지셨노라!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문을 열고 순순히 항복할 것을 권고한다!”
화전민 사람들과 함께한 지 대략 한 달. 위기는 어떠한 전조도 없이 찾아왔다.
말을 타고 나타난 열 명가량의 기사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아침을 맞이하며 마을의 재건과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그때, 저들이 나타났다.
방금 우렁차게 외친 자는 열 명의 기사 중 가장 선두에 나와 있는 남자였는데, 쭉 째진 눈과 뾰족한 턱, 어쩐지 비열하고 잔혹한 느낌의 여우 같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뭐 하느냐! 어서 문을 열지 않고!”
여우 인상의 기사가 윽박지르며 보채자, 울타리 너머로 이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크게 동요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우린 노략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아마 무단으로 도시를 이탈한 죄목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한 거겠죠.”
내가 웰던의 욕지기를 진지하게 받아주자, 그는 끄응, 거북한 심정을 삼켰다.
“군사님, 이제 어찌하는 게 좋겠수?”
웰던이 묻자 다른 이들도 같은 마음인지, 기대와 걱정, 그리고 내 지시만을 따르겠다는 믿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무엇 하나 결정할 수 없어 눈가가 찌그러질 정도로 꽉 감았다.
“고민된다면 내가 처리하지.”
내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울타리에 느긋이 등을 기대고 있던 글로리아가 툭 내던지듯 무심하게 말했다.
범상치 않은 모습의 기사가 열 명이나 와 있는데도 긴장은커녕 잠깐 몸이라도 풀겠다는 양 말하는 자신감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믿음직스런 모습에 살짝 긴장이 풀린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을 쓰러뜨린다 해도 의미 없어요. 어차피 다시 병사를 이끌고 올 테니까요.”
나는 확신하듯 말했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내가 동생에게 물은 적이 있는 말이니까.
[아아, 그렇구나. 이제 알겠어. 고블린이야. 우리가 내쫓은 고블린이 브렌터스 영지를 향한 게 아닌가 싶어. 분명 배고픈 고블린들은 영지 바깥의 밭을 약탈했을 테고,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사냥꾼들이 고블린의 흔적을 쫓다 이 마을을 발견한 걸 테지. 미안, 오빠. 고블린을 살려둔 게 이런 나비효과로 되돌아올 줄 몰랐어.]
한동안 조용하기에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나 싶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건가?
‘아냐. 미안해할 거 없어.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그래도 덕분에 깨달은 게 있어. 안일하게 책 속의 내용만 생각하며 일을 벌이는 짓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화전민 마을을 구함으로써 이렇게 나비효과가 발생되었듯이, 다른 생존자들로 인해 책 속에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 있을지도 몰라.]
‘으음, 미안.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어차피 그런 부분은 전적으로 너를 믿으니까 알아서 해줘. 그보다 문제는 지금이야.’
[백번 옳은 말이네. 이미 대책은 충분해. 한 가지 걱정되는 건 과연 오빠가 내 작전을 따라올 수 있느냐는 거지. 그래서 묻는데… 오빠, 한 달 전 밤에 내가 물어본 것 기억나?]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방향성… 말이지?’
[응. 충분히 고민했다면, 그 답을 지금 들려줘. 그에 맞춰 작전을 수정할게.]
얼마든지 작전을 변경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자신감을 내보이는 세란이. 나는 문득 동생이 글로리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이라…….”
나는 중얼거리며 무심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 한 달 사이 손등에 적혀 있는 숫자는 더욱 줄어 532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거의 반이 줄었다.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숫자는 앞으로도 계속 꾸준히 더욱 줄어들겠지.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생의 말마따나 독해져야 한다. 언제까지고 망설이고만 있을 순 없다.
하지만…….
‘세란아.’
[응.]
‘전에 네가 그랬지, 나처럼 이곳으로 넘어온 생존자들은 전부 적이라고.’
[그랬지.]
‘나는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뭐, 뭐?]
심히 당황한 목소리가 텔레파시로 전해져 왔다. 설마 그런 답변이 나올 줄은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그동안 쭉 고민했어. 생존자들을 적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가. 물론 네 말대로 내 목숨을 노리려는 자도 있겠지. 피치 못해 서로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라.’
[그럼 역시…….]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분명 존재해. 지금도 어디선가 도움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아.’
[오빠…….]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나는 잠시 텔레파시를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내가 결정한 나만의 다짐을 되새기듯 강하게 전했다.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하는 자들을 위해서라면 망설이지 않겠어. 설령 그로 인해 적대하는 자를 죽일 수밖에 없더라도, 그로 인해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야.’
세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답이 없었을까. 돌연 명쾌한 텔레파시가 전해져 왔다.
[어느 날 창대를 휘두르며 연습하던 한 승병이 사명 대사께 묻길,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어기고 창을 드는 것이 정녕 참된 길이옵니까?’라고 하니, 사명 대사는 ‘부처님께선 세상의 중생을 구호하기 위해 나오셨거늘, 어찌 불가의 몸을 둔 중으로서 흉측한 왜적 무리의 위협을 보고만 있겠느냐’라고 하시더라.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일본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할 당시, 승병장으로 활약한 사명 대사가 하신 말이야. 그분은 오직 백성을 구호하기 위해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 계율을 어기고 법구 대신 칼을 쥔 분이셔. 오빠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잘 알겠어.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야. 그렇게 가고자 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헤엄쳐. 나는 물길을 열어줄 테니.]
마지막, 수어지교를 인용한 말을 듣고 어쩐지 뒤에서 동생이 내 등을 밀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절로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래, 맹세했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말자. 왜적과 맞서 싸우신 사명 대사처럼 살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
“모두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눈을 뜨며 말하자, 나를 바라보던 이들이 모두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더 저에게 목숨을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음을 담아 부탁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마을 사람들. 그러다 갑자기 일제히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핫! 무슨 명령을 하나 했더니, 그거였습니까요?”
“난 또, 다 같이 포기하고 항복하자는 줄 알았네.”
“어… 네? 저기요, 제 말은 그러니까…….”
설마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차마 몰랐기에 되레 당황하자, 웰던이 내 어깨에 투박한 손을 턱 올리며 걸걸하게 웃었다.
“흐핫핫! 그 무슨 바보 같은 말이오? 군사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이미 다 죽거나 노예가 된 목숨이었수. 한 번 맡긴 목숨, 두 번 맡기지 못할 거 뭐 있겠느냔 말이우.”
“저도 군사님께 목숨을 맡긴 지 오랩니다!”
“군사님, 말씀만 하시면 불구덩이라도 뛰어 들어갈 테니,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웰던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나를 따르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로리아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뜬 채 지켜볼 뿐이었고.
그러니까… 웃고 있는 건가? 잘 모르겠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모두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여태껏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여우 인상의 기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웰던 씨, 당장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슈! 내 무엇이라도 하겠수!”
내 부름에 웰던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탕, 두드리며 응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저 기사들 발밑에 활을 쏴주세요.”
“알겠… 으엉? 아, 알겠수!”
내 명령에 잠깐 당황했지만, 그는 무슨 생각이 있겠다 싶었는지 잠자코 활시위를 당겼다.
“귀라도 먹은 거냐! 어서 문을 열지 않고 뭐 하… 으헉!”
화살 하나가 날아가 발밑에 푹 박히자, 꽥꽥 오리처럼 소리 지르던 여우기사 게런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무, 무슨 짓이냐! 이것들이! 그 행위는 필시 적대하는 것이렷다!”
“맞습니다.”
난 급조해 만든 망루 위에 올라서 응답했다. 너무도 가볍게 긍정하는 발언에 약을 올리는 거라 생각했는지, 여우기사 게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놈, 네놈이 우두머리냐! 감히 브렌터스 영지를 대표하는 전령에게 위협을 가하다니! 정녕 어찌 될지 알고도 그러는 것이냐!”
“어찌 됩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묻자, 여우기사 게런은 침이 튕기도록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몰살이다! 내 친히 네놈들의 목을 잘라 영지 입구에 죄다 효수할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별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뭐, 뭐라?”
“항복해서 평생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나, 반항해서 효수되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는 쪽에 운명을 걸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 웰던, 한 방 더 쏘세요.”
“명령 받았수! 옜다! 이거나 먹어라!”
“흐히익!”
이번엔 정확히 정수리로 날아드는 화살에 여우기사 게런이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꺾다 그만 말 위에서 떨어져 버렸다.
“칫.”
웨, 웰던? 왜 혀를 차시는지? 서, 설마… 방금 진심으로 죽일 생각인…….
“이, 이, 이것들이!”
우스꽝스럽게 낙마한 여우기사 게런은 격분을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도적들 주제에 기사인 나를 능멸해! 죽인다! 하나도 빠짐없이 죽여 버릴 테다아!”
“다, 단장님, 고정하십시오! 저들의 숫자가 제법 많습니다!”
“막지 마라! 그래봐야 검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농민들 아니더냐! 백이든 천이든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울타리가 생각보다 거슬립니다. 저희만으론 고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돌아가서 병사를 이끌고 오는 것이…….”
“크아아! 빌어먹을! 내 저것들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한다니!”
여우기사 게런은 이를 갈며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저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니 좀 무섭네. 하지만 이미 결심한 이상, 겁먹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지.
나는 침착하게 표정을 가다듬고 내치듯 팔을 옆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당장 브렌터스 남작에게 돌아가 전해라! 우리는 노예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알았으면 가라!”
“썩 꺼져라!”
“네 녀석들의 노예 따윈 되지 않는다!”
“와아아아아!”
내 말에 호응하듯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팔을 치켜들며 외쳤다. 함성 소리가 꽤 큰 탓에 말과 기사들이 주눅 들어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게 눈에 보였다.
“크으으,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반항을 해?! 두고 보자! 내 친히 병사들을 이끌고 와 네놈들의 혓바닥을 잘라 버릴 테니!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가자!”
여우기사 게런은 기사 아홉을 데리고 온 길을 도로 내려가 버렸다.
그렇게 전쟁의 막이 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