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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핫뜨, 핫뜨! 우와, 이거 맛있어!”
“포실포실하면서도 은은히 달달한 게… 정말 맛있구먼!”
그날 밤, 대충 장작불 속에 집어넣어 만든 감자 구이를 먹으며 다들 얼굴에 그을음이 묻은 것도 모른 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조금 밍밍한 맛이라 소금이나 설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고생하다 먹은 음식이다 보니 적당히 만족할 수 있었다.
세란이는 감자에 대해 안정성이 나와 있다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다른 품종일 수도 있고, 감자가 아닌 다른 것일 확률도 없지 않아 있다고 했다―이니, 우선 다른 동물에게 시식한 다음 먹으라고 말하는 통에 밤이 늦어서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과연, 이런 먹거리가 존재했다니. 군사는 식물학에도 정통한 건가?”
감자를 한입 베어 문 글로리아가 감탄하며 말하자,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네? 아뇨. 딱히 그런 정도는…….”
“겨우 그런 정도가 아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잘 자라고, 심지어 척박한 땅에서도 자란다고 하지 않았더냐. 어쩌면 이건 먹거리에 대한 혁명을 일으킬 작물일지도 모른다.”
글로리아는 감자 하나를 요리조리 돌려 보며 말했다.
대단하다. 고작 간단한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도 감자에 대한 존재 가치를 파악하다니. 설마 그녀도 세란이 못지않은 천재인 건가?
세란이가 말하기론 글로리아는 뛰어난 대영웅이라고 했다. 단순히 책에 나와 있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보여준 그녀의 행동과 말들을 내가 설명해 주니 그리 말한 것이다.
“망국의 공주라곤 하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기도 전에 검의 신전에 유배 보내진 그녀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논한다는 건 솔직히 놀라워. 단순히 검에 대한 실력을 떠나 그녀는 머리가 트여 있다는 걸 뜻해. 지금도 봐, 그녀는 엄밀히 말해 왕족인데도 전혀 거리낌 없이 오빠나 화전민 사람들을 대하고 있잖아. 음, 이건 무녀로서 살아온 세월이 길기에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그때 언급한 세란이의 말은 확실히 나도 인정한다. 지금도 글로리아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서 감자를 먹고 있다. 애초에 왕족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면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치욕스러워해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니겠는가.
그동안 영화에서 봐온 왕족이나 귀족의 인식이 과하게 표현된 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평민을 눈아래로 보고 있다 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난 새삼스레 옆에 앉아 있는 글로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블린의 침공 이후, 일주일째 함께 밤을 보내온 그녀. 처음엔 그녀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나를 짐승 취급하고 떠났으며, 화전민 사람들의 위험도 저버린 채 저 혼자 떠나려 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정말 그녀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처음 나를 만났을 때, 가죽 물통을 건네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지금도 그렇다. 날이 밝을 때마다 산속으로 들어가 동물을 사냥해 온다거나 지금같이 감자를 먹으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인식을 바꾸기엔 충분했다.
“…뭐냐?”
그녀가 나를 휙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차, 너무 뚫어지게 보고 있던 모양이다.
“아니에요.”
딱히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웃기만 하자 그녀는 나뭇가지로 애꿎은 모닥불을 쑤셨다. 타탁, 불똥이 튀어 오르며 그녀와 나 사이를 맴돌다 사라졌다.
뭔가 조용하니 괜히 더 어색해졌다.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입을 다문 채 나와 글로리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쓰게 웃곤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저기, 고마워요.”
“뭐가 말이냐?”
“도와주신 거요. 지금도 그렇고.”
그 말을 들은 글로리아는 모닥불에서 눈을 떼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모닥불에 의해 살짝 붉은빛이 도는 보라색 눈동자가 어쩐지 아름답게 보였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지? 이들을 책임지기로 약속한 이상, 중간에 저버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건 알지만… 솔직히 고블린 무리를 쫓아낸 다음에 약속은 지켰다며 바로 떠날 줄 알았거든요.”
그 말에 글로리아의 눈썹이 아주 잠시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었다. 표정은 진지함 자체지만, 아주 조금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 것처럼 보였달까?
“…자유다.”
“네?”
“약속을 한정하는 건 내 자유라고 말했다.”
그녀는 툭 내던지듯 말하더니, 불쏘시개를 모닥불에 던져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로리아?”
당황한 내가 다급히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화났나?”
“아휴, 군사님은 머리는 참 총명한데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구려.”
내가 눈만 끔뻑이고 있자, 어디선가 다가온 웰던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끼어들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중에 검사님께 사과하라는 말이지 뭐겠수? 자자, 시간도 늦었으니, 잠이나 잡시다!”
명쾌하게 답해주면 좋으련만, 웰던은 내 마음에 더 큰 의문만을 남겨놓고 자리를 파했다.
하나둘 사람들이 임시로 만들어놓은 거처에 자리를 펴고 눕자, 나도 그들을 따라 지푸라기를 몸에 두르며 누웠다.
그렇게 하늘을 지붕 삼아 눕자 총총히 떠 있는 별무리가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지구와는 다르게 한껏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붉은 달.
“정말… 다른 세계구나.”
나는 저 달을 보며 확실히 이곳이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아니, 그저 책을 본떠 나레스란 자가 만든 가상 세계일 확률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렇게 사람들과 마주하며 지내다 보니 결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상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나레스란 자가 신일 확률도 있지만…….”
가장 최악의 상황을 중얼거려 보았다. 정말 그자가 신 같은 존재라면, 이런 세계를 창조하고 악취미적인 데스 매치 룰을 정해 나를 포함한 1,000명을 이 세계에 떨어트려 놓았다는 말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 가설이 진짜라면, 나는 도저히 어찌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지.
신을 상대로 한낱 인간인 내가 뭘 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기에.
괜히 불안해져 몸을 뒤척거렸다. 지금 당장도 앞길이 보이지 않고 막막한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과연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신념을 끝까지 관철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생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세란아, 자?’
[…으음, 아니. 오빠는? 안 자?]
자다가 일어난 건지 약간 잠긴 듯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잠이 안 오네. 그런데 설마 너, 지금 책을 끌어안고 자는 거야?’
[그게… 헤헤.]
괜히 얼버무리는 웃음소리.
보지 않아도 잘 느껴진다. 분명 동생도 나처럼 불안할 것이다.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 그리고 앞으로 나 없이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불안까지.
그렇기에 저리 책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는 것이겠지.
‘고맙다.’
[뭐가?]
‘그냥 전부. 막막한 상황임에도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건 네 덕분이야.’
[우와, 갑자기 뭐야? 낯간지러워.]
살짝 높아진 톤의 목소리로 말하는 세란이.
그러다 부끄러움을 감추듯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런 것보다 오빠,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야?]
‘앞으로라…….’
나는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이라 깊게 고민해 보진 않았지만… 우선 강해지고 싶어.’
[강해진다라… 어떤 방식으로? 방법은 많아. 전설의 무기를 찾는다든가,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는 영웅들을 찾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막강한 나라의 가신으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할 수도 있어. 그런데 오빠, 지금 내가 한 질문은 그런 걸 떠나 좀 더 근본적인 방향성을 묻고 있는 거야.]
‘방향성?’
내가 되묻자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려오더니, 살짝 못마땅한 어투의 텔레파시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 손목에 나타나 있는 숫자가 몇이야?]
그 물음에 나는 손바닥을 하늘로 뻗어 손등의 숫자를 살폈다.
‘683.’
[고작 일주일 사이에 317명이 죽었다는 건가. 상당히 많… 아니, 달라. 너무 적어. 역시 책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일지도.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럼 오빠처럼 이 험난한 상황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683명이란 소린데… 오빠는 이들을 뭐라고 생각해?]
‘뭐냐니… 으음,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동료?’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잘 들어.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들은 전부 오빠의 적이야.]
‘저, 적?’
[오빠는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어. 나레스란 자는 1,000명의 사람들에게 오지로 떨어트려 서로를 도와 생존하라고 한 게 아냐.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라고 한 거잖아. 그 취지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해.]
‘취지라니… 그럼 너는 내가 683명의 사람들과 사투를 벌여 최후의 1인이 되어 현실로 돌아오길 바라는 거야?’
[그럴 수밖에 없다면… 응.]
세란이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긍정했다. 683명의 목숨 따위는 일절 관심 없다는 듯이.
‘세란아…….’
[알아, 오빠는 그러지 못하리란 거. 하지만 이건 알아야 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부 오빠처럼 마음이 여리지 않다는 걸. 개중엔 필시 오빠를 해하려는 사람도 있을 거야.]
나를 해하려 하는 사람도 있을 거란 말에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런 사람뿐만이 아냐. 그곳은 전쟁이 만연한 세계야. 자의든 타의든 분명 가까운 시일 내에 오빠도 전쟁에 휘말려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올 거야.]
세란이는 확신한다는 듯 단정 지어 말했다.
반면, 나는 이제 숨이 막히다 못해 목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죽이라니, 내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그럼 적대하는 자들이 오빠가 아닌 화전민 사람들을 노린다면? 그때도 ‘사람은 못 죽여요’ 하며 도망칠 거야?]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망간다고? 싫다. 이젠 도망치지 않는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제길, 모르겠어. 하지만, 하지만 정말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래, 내가 처음 묻고 싶어 한 게 바로 그 방향성이야. 충분히 고민하고 어찌할 것인지 답변을 줘. 상황이 닥친 다음에 고민하는 건 늦으니까. 미안. 괴로워하리란 걸 알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었어. 망설이다 오빠가 죽는 건 절대로 싫으니까.]
알고 있다, 나를 위해 하는 말이란 걸. 도리어 내가 이 중대한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알았어. 고민해 볼게.’
나는 그리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고민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오빠.]
‘응?’
[보고 싶다.]
한참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에 반쯤 잠겨든 목소리의 텔레파시를 들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하여간 냉정해 보이면서도 이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다. 이래서 내버려 두질 못하겠다니까.
‘나도.’
[으응…….]
‘잘 자.’
[잘 자…….]
점차 텔레파시가 약해지더니, 이윽고 끊어졌다. 아마도 잠든 것이리라.
정말 나레스의 뜻대로 데스 게임을 솔선하려는 자가 있을까?
그런 사람과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일어날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전쟁에 휘말려 드는 일이 벌어질까?
아직 멀게만 느껴지던 내 마음과 달리, 세란이가 우려하던 상황은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 생존자 : 683명 ―
“핫뜨, 핫뜨! 우와, 이거 맛있어!”
“포실포실하면서도 은은히 달달한 게… 정말 맛있구먼!”
그날 밤, 대충 장작불 속에 집어넣어 만든 감자 구이를 먹으며 다들 얼굴에 그을음이 묻은 것도 모른 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조금 밍밍한 맛이라 소금이나 설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고생하다 먹은 음식이다 보니 적당히 만족할 수 있었다.
세란이는 감자에 대해 안정성이 나와 있다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다른 품종일 수도 있고, 감자가 아닌 다른 것일 확률도 없지 않아 있다고 했다―이니, 우선 다른 동물에게 시식한 다음 먹으라고 말하는 통에 밤이 늦어서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과연, 이런 먹거리가 존재했다니. 군사는 식물학에도 정통한 건가?”
감자를 한입 베어 문 글로리아가 감탄하며 말하자,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네? 아뇨. 딱히 그런 정도는…….”
“겨우 그런 정도가 아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잘 자라고, 심지어 척박한 땅에서도 자란다고 하지 않았더냐. 어쩌면 이건 먹거리에 대한 혁명을 일으킬 작물일지도 모른다.”
글로리아는 감자 하나를 요리조리 돌려 보며 말했다.
대단하다. 고작 간단한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도 감자에 대한 존재 가치를 파악하다니. 설마 그녀도 세란이 못지않은 천재인 건가?
세란이가 말하기론 글로리아는 뛰어난 대영웅이라고 했다. 단순히 책에 나와 있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보여준 그녀의 행동과 말들을 내가 설명해 주니 그리 말한 것이다.
“망국의 공주라곤 하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기도 전에 검의 신전에 유배 보내진 그녀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논한다는 건 솔직히 놀라워. 단순히 검에 대한 실력을 떠나 그녀는 머리가 트여 있다는 걸 뜻해. 지금도 봐, 그녀는 엄밀히 말해 왕족인데도 전혀 거리낌 없이 오빠나 화전민 사람들을 대하고 있잖아. 음, 이건 무녀로서 살아온 세월이 길기에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그때 언급한 세란이의 말은 확실히 나도 인정한다. 지금도 글로리아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서 감자를 먹고 있다. 애초에 왕족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면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치욕스러워해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니겠는가.
그동안 영화에서 봐온 왕족이나 귀족의 인식이 과하게 표현된 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평민을 눈아래로 보고 있다 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난 새삼스레 옆에 앉아 있는 글로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블린의 침공 이후, 일주일째 함께 밤을 보내온 그녀. 처음엔 그녀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나를 짐승 취급하고 떠났으며, 화전민 사람들의 위험도 저버린 채 저 혼자 떠나려 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정말 그녀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처음 나를 만났을 때, 가죽 물통을 건네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지금도 그렇다. 날이 밝을 때마다 산속으로 들어가 동물을 사냥해 온다거나 지금같이 감자를 먹으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인식을 바꾸기엔 충분했다.
“…뭐냐?”
그녀가 나를 휙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차, 너무 뚫어지게 보고 있던 모양이다.
“아니에요.”
딱히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웃기만 하자 그녀는 나뭇가지로 애꿎은 모닥불을 쑤셨다. 타탁, 불똥이 튀어 오르며 그녀와 나 사이를 맴돌다 사라졌다.
뭔가 조용하니 괜히 더 어색해졌다.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입을 다문 채 나와 글로리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쓰게 웃곤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저기, 고마워요.”
“뭐가 말이냐?”
“도와주신 거요. 지금도 그렇고.”
그 말을 들은 글로리아는 모닥불에서 눈을 떼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모닥불에 의해 살짝 붉은빛이 도는 보라색 눈동자가 어쩐지 아름답게 보였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지? 이들을 책임지기로 약속한 이상, 중간에 저버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건 알지만… 솔직히 고블린 무리를 쫓아낸 다음에 약속은 지켰다며 바로 떠날 줄 알았거든요.”
그 말에 글로리아의 눈썹이 아주 잠시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었다. 표정은 진지함 자체지만, 아주 조금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 것처럼 보였달까?
“…자유다.”
“네?”
“약속을 한정하는 건 내 자유라고 말했다.”
그녀는 툭 내던지듯 말하더니, 불쏘시개를 모닥불에 던져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로리아?”
당황한 내가 다급히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화났나?”
“아휴, 군사님은 머리는 참 총명한데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구려.”
내가 눈만 끔뻑이고 있자, 어디선가 다가온 웰던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끼어들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중에 검사님께 사과하라는 말이지 뭐겠수? 자자, 시간도 늦었으니, 잠이나 잡시다!”
명쾌하게 답해주면 좋으련만, 웰던은 내 마음에 더 큰 의문만을 남겨놓고 자리를 파했다.
하나둘 사람들이 임시로 만들어놓은 거처에 자리를 펴고 눕자, 나도 그들을 따라 지푸라기를 몸에 두르며 누웠다.
그렇게 하늘을 지붕 삼아 눕자 총총히 떠 있는 별무리가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지구와는 다르게 한껏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붉은 달.
“정말… 다른 세계구나.”
나는 저 달을 보며 확실히 이곳이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아니, 그저 책을 본떠 나레스란 자가 만든 가상 세계일 확률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렇게 사람들과 마주하며 지내다 보니 결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상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나레스란 자가 신일 확률도 있지만…….”
가장 최악의 상황을 중얼거려 보았다. 정말 그자가 신 같은 존재라면, 이런 세계를 창조하고 악취미적인 데스 매치 룰을 정해 나를 포함한 1,000명을 이 세계에 떨어트려 놓았다는 말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 가설이 진짜라면, 나는 도저히 어찌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지.
신을 상대로 한낱 인간인 내가 뭘 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기에.
괜히 불안해져 몸을 뒤척거렸다. 지금 당장도 앞길이 보이지 않고 막막한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과연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신념을 끝까지 관철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생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세란아, 자?’
[…으음, 아니. 오빠는? 안 자?]
자다가 일어난 건지 약간 잠긴 듯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잠이 안 오네. 그런데 설마 너, 지금 책을 끌어안고 자는 거야?’
[그게… 헤헤.]
괜히 얼버무리는 웃음소리.
보지 않아도 잘 느껴진다. 분명 동생도 나처럼 불안할 것이다.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 그리고 앞으로 나 없이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불안까지.
그렇기에 저리 책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는 것이겠지.
‘고맙다.’
[뭐가?]
‘그냥 전부. 막막한 상황임에도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건 네 덕분이야.’
[우와, 갑자기 뭐야? 낯간지러워.]
살짝 높아진 톤의 목소리로 말하는 세란이.
그러다 부끄러움을 감추듯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런 것보다 오빠,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야?]
‘앞으로라…….’
나는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이라 깊게 고민해 보진 않았지만… 우선 강해지고 싶어.’
[강해진다라… 어떤 방식으로? 방법은 많아. 전설의 무기를 찾는다든가,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는 영웅들을 찾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막강한 나라의 가신으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할 수도 있어. 그런데 오빠, 지금 내가 한 질문은 그런 걸 떠나 좀 더 근본적인 방향성을 묻고 있는 거야.]
‘방향성?’
내가 되묻자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려오더니, 살짝 못마땅한 어투의 텔레파시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 손목에 나타나 있는 숫자가 몇이야?]
그 물음에 나는 손바닥을 하늘로 뻗어 손등의 숫자를 살폈다.
‘683.’
[고작 일주일 사이에 317명이 죽었다는 건가. 상당히 많… 아니, 달라. 너무 적어. 역시 책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일지도.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럼 오빠처럼 이 험난한 상황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683명이란 소린데… 오빠는 이들을 뭐라고 생각해?]
‘뭐냐니… 으음,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동료?’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잘 들어.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들은 전부 오빠의 적이야.]
‘저, 적?’
[오빠는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어. 나레스란 자는 1,000명의 사람들에게 오지로 떨어트려 서로를 도와 생존하라고 한 게 아냐.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라고 한 거잖아. 그 취지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해.]
‘취지라니… 그럼 너는 내가 683명의 사람들과 사투를 벌여 최후의 1인이 되어 현실로 돌아오길 바라는 거야?’
[그럴 수밖에 없다면… 응.]
세란이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긍정했다. 683명의 목숨 따위는 일절 관심 없다는 듯이.
‘세란아…….’
[알아, 오빠는 그러지 못하리란 거. 하지만 이건 알아야 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부 오빠처럼 마음이 여리지 않다는 걸. 개중엔 필시 오빠를 해하려는 사람도 있을 거야.]
나를 해하려 하는 사람도 있을 거란 말에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런 사람뿐만이 아냐. 그곳은 전쟁이 만연한 세계야. 자의든 타의든 분명 가까운 시일 내에 오빠도 전쟁에 휘말려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올 거야.]
세란이는 확신한다는 듯 단정 지어 말했다.
반면, 나는 이제 숨이 막히다 못해 목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죽이라니, 내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그럼 적대하는 자들이 오빠가 아닌 화전민 사람들을 노린다면? 그때도 ‘사람은 못 죽여요’ 하며 도망칠 거야?]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망간다고? 싫다. 이젠 도망치지 않는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제길, 모르겠어. 하지만, 하지만 정말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래, 내가 처음 묻고 싶어 한 게 바로 그 방향성이야. 충분히 고민하고 어찌할 것인지 답변을 줘. 상황이 닥친 다음에 고민하는 건 늦으니까. 미안. 괴로워하리란 걸 알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었어. 망설이다 오빠가 죽는 건 절대로 싫으니까.]
알고 있다, 나를 위해 하는 말이란 걸. 도리어 내가 이 중대한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알았어. 고민해 볼게.’
나는 그리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고민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오빠.]
‘응?’
[보고 싶다.]
한참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에 반쯤 잠겨든 목소리의 텔레파시를 들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하여간 냉정해 보이면서도 이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다. 이래서 내버려 두질 못하겠다니까.
‘나도.’
[으응…….]
‘잘 자.’
[잘 자…….]
점차 텔레파시가 약해지더니, 이윽고 끊어졌다. 아마도 잠든 것이리라.
정말 나레스의 뜻대로 데스 게임을 솔선하려는 자가 있을까?
그런 사람과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일어날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전쟁에 휘말려 드는 일이 벌어질까?
아직 멀게만 느껴지던 내 마음과 달리, 세란이가 우려하던 상황은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 생존자 : 683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