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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걱정되는 눈빛으로 책을 꼭 끌어안은 세란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천만한 일들이 많았지만, 결국 전부 잘 풀렸다.

‘정말이지, 걱정만 끼친다니까.’

긴장이 탁 풀려 몸이 절로 축 처졌다.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옷에도 땀이 흥건했다. 마음 같아선 샤워라도 하고 싶지만, 혼자선 무리인지라 그냥 물티슈로 얼굴과 겨드랑이 안쪽만 훔쳐 내곤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러고 나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별 볼 것 없는 새하얀 벽지의 천장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방 전체를 둘러보았다.

방은 제법 넓지만, 가구라곤 침대와 책장, 그밖에 몇 가지 옷을 걸어놓을 수 있는 작은 장롱이 전부인 방이었다. 여성이 사는 방답게 인형이나 화장품, 거울이나 벽걸이 시계 정도는 있을 법도 한데, 개인적인 물건이라곤 책밖에 없어 어쩐지 사람이 사는 방이라기 보단 오랫동안 방치된 빈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사물에 애착이 없는 세란의 심리 상태가 엿보이는 방이었다.

세란은 잠시 형광등 스위치를 주시하다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녀는 앞으로도 이곳에서 계속 생활해야 한다. 전처럼 눈치 보며 대소변을 가리고, 샤워를 하거나 지금처럼 형광등을 꺼야 할 때도 숙부나 숙모를 불러야 했다.

그게 싫다면 일일이 휠체어를 찾거나 기어가서 해결하는 수밖에.

그랬다간 또 더러워진 옷을 보고 왜 자신을 찾지 않았느냐며 한소리 듣겠지만.

‘오빠와 함께 있을 땐 그래도 위안이 됐는데…….’

문득, 그동안 신기석과 살아온 시간이 떠올랐다.

작지만 행복하던 순간들.

세란은 당시의 재미있던 일이 떠올랐는지 잃어버린 미소를 다시 지어 보였다.

그래, 아직 희망이 있다. 참고 기다리면 분명 다시 그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내가 생각해야 해. 우선 마을이야. 그곳은 적습에 너무 취약해. 울타리를 보강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거야.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오빠와 글로리아만 따로 떠나는 건데… 역시 무리겠지. 오빠라면 절대로 화전민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을 거야. 곤란하네. 결국 그들을 안고 가야 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렇다면 최우선적으로 안전의 확보. 아예 산림 밖에 있는 브렌터스 남작 영지를 차지해 버려? 가능성은… 응, 할 수 있어. 하지만 득보다 실이 크네. 그렇게 되면 프리펄츠 왕국 전체를 적대하는 셈이니. 그러면 반대로 의탁인가? 유비가 의용병을 모아 전전하던 것처럼? 고단한 행보의 길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세계관을 알고 있으니 유명한 영웅도 많이 포섭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것도 중책. 역시 상책은…….’

세란은 몇 시간 동안 이것저것 고민하다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직접 식사를 들고 온 숙부, 신명태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도, 도서관엘 말이냐?”

세란은 ‘도서관에 데려가 주세요’라 적힌 노트를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무엇 하나 바라지 않던 아이건만 병원에서도 그렇고, 최근 부탁하는 일이 잦아지다니… 신명태는 입만 벌린 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당황스런 마음도 잠시.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도서관은 사람이 많은 곳인데, 괜찮겠니? 혹시 보고 싶은 책이 있는 거라면 숙부가 가져올 테니 말하려무나. 그 정도는 전혀 폐가 아니다.”

안 그래도 옷깃만 스쳐도 벌벌 떨 정도로 사람을 무서워하는 아이다. 그런데 사람이 북적거리는 도서관을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신명태는 그런 배려심으로 말을 꺼냈지만, 어째선지 세란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후, 알았다. 그럼 오후에 잠깐 시간이 비니, 그때 같이 가자꾸나.”

결국 그는 그리 말하며 방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후가 되어 일찍 집으로 돌아온 신명태는 조카와 함께 국립도서관을 찾았다.

세란은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정열적으로 책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물론 도서관을 거니는 사람들을 보고 잠깐 패닉에 빠졌지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곧 두려움을 떨치고 겨우 자신의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신명태는 그 놀라운 변화를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곧 그녀는 품에 한 아름 책을 들고 그나마 사람이 없는 구석진 자리에 가서 읽기 시작했다. 그 책들 ‘농업 기초’, ‘고대 활’, ‘식물 재배의 특성’과 같은 농업과 활에 대한 전문적인 자료들이었는데, 신명태는 도무지 조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농업? 활? 대체 무슨 생각이지?’

궁금증이 치밀어 뭐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도 집중하고 있는 터라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신명태였다.



***



“잎이 가늘고 노란색 꽃을 피우는 식물이에요. 혹시 보신 분 있나요?”

“알아요, 그 꽃! 그거, 저기 언덕 아래에 흐드러지게 피었던데요? 자네도 봤지?”

“아무렴. 까닥 신경 안 쓰면 순식간에 자라는 녀석 아닌가. 가끔 지나다니던 길까지 막아서 여간 골칫거리였는데. 그런데 군사님, 그건 왜 찾으시는지?”

“먹거리예요. 그것도 아주 대단한.”

내 말을 듣고도 이해가 안 가는지,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꽃을 먹을 순 있어도 주식으론 사용하진 않을 테니까.

“아무리 먹을 게 없다고 해도 꽃을 먹다니…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 꽃을 먹자는 말이 아니에요. 저희가 먹을 건 그 식물의 뿌리입니다.”

“뿌, 뿌리요?”

당최 모르겠다는 얼굴이라 나는 바닥에 투박한 모양의 감자를 그리며 말을 덧붙였다.

“저 식물의 뿌리엔 이런 모양의 열매가 자라요. 이렇게 주렁주렁 말이죠. 저희가 먹을 건 바로 이 열매예요.”

“아니, 뿌리에 열매가 자란다니요! 듣도 보도 못한 소립니다요!”

“캐보면 알 거예요. 우선 그것을 캐 오시면 어찌 먹는지 알려 드릴게요.”

“그, 그럼 한 번 다녀와 보겠습니다.”

“나도 돕지.”

“나도 같이 가세! 이거, 궁금해 참을 수가 없구먼!”

뿌리에서 자라는 열매가 그렇게나 궁금한지, 너도나도 바구니와 곡괭이를 들고 언덕을 내려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순박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아직도 마르지 않은 옷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 말로 하면 될 것을.”

짓궂기도 하지, 얼굴이 더럽다고 굳이 물을 뿌릴 필요가 있느냔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일을 떠올린 나는 호쾌하게 웃던 글로리아의 모습이 문득 생각났다.

꾸밈없이 소리 내 웃는 그녀.

명쾌한 웃음소리는 맑고 깨끗했으며,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매력이 담겨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지.”

활기차게 웃는 것도 그렇고, 이상하게 그녀는 어딘가 바뀐 듯한 모습이었다. 예전엔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다분했는데,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달까.

물을 뿌리는 짓이나 말수가 적은 건 여전하지만, 적어도 잘못하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상처도 괜찮아 보이는 것 같고.”

나 때문에 크게 다친 상처. 고블린 무리를 몰아낸 지 이제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길 정도니 말 다 했지.

혹시 무리해서 고통을 참고 있는 것 아닐까 걱정했지만, 몸에 감고 있는 천 너머로 피가 배어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억지로 참는 건 아닌 것 같고. 애초에 아직 낫지 않았다면 사냥 같은 건 꿈도 못 꿀 테니까.

바로 어제, 움직이지 못해 몸이 뻐근해졌다며 운동이라도 하고 오겠다는 양 휘적휘적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대뜸 사람만 한 크기의 멧돼지를 잡아와 얼마나 놀랐던지.

덕분에 부족한 식량난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아니, 잠깐. 그거 설마 우리 때문에 일부러?

“그럴 리가…….”

나는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고블린의 침공으로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던 마을 사람들을 대놓고 질타하던 그녀였다. 그런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도움을 베풀고 있다니, 너무도 모순적이지 않은가.

[…빠, 오빠!]

‘엇? 앗! 어, 어어!’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대답이 없어! 걱정했잖아!]

‘아, 미안. 잠시 딴생각을… 그런데 왜?’

[왜긴 왜야! 사람들에게 잘 설명했어?]

아차, 감자에 대해 알려주고 세란이에게 보고하는 걸 잊었구나.

‘하, 하하… 잊고 있었네. 설명은 잘했어. 다행히 근처에 많이 자라고 있었나 봐.’

[그럴 거야. 군사 메스트도 이 산속에서 감자를 발견하니까. 근처에 있었다니, 운이 좋네.]

‘아아, 그래서 대뜸 감자를 찾으라고 한 거구나. 그런데 메스트란 이름 자주 듣네. 정말 대단한 사람인가 봐?’

[사람 아냐. 호빗 족인걸.]

‘응?’

[아아, 오빠는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뭐, 종족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넘어가고, 메스트는 스노우 변경백령의 군사거든? 그곳은 매우 척박한 지역이다 보니 메마른 토지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을 찾다 여기서 감자를 발견하게 돼. 더불어 울부짖는 나무의 존재도. 그 시기가 107년이었던가? 그러니까 앞으로 1년 뒤겠네.]

‘1년 뒤라니, 그럼 그때까지 이 세계의 사람들은 감자의 존재도 모른다는 거야?’

[그럴 거야. 그곳의 농업은 기초적인 수준이니까.]

‘그렇구나…….’

“군사님, 정말 있었어요!”

“엄청 많이 캤어요!”

벌써 시간이 이리 지났나?

동생과 한창 텔레파시를 주고받던 사이, 감자를 캐 온 것인지 마을 사람 모두가 묵직한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온몸이 흙투성이인데도 식량을 많이 확보해서인지 해맑게 웃는 어른들, 한 손에 하나씩 큼지막한 감자를 들고 방방 뛰며 좋아하는 어린아이와 다친다며 이를 말리는 노인들까지.

나는 그런 순박한 사람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손을 흔들어 맞이했다.

“감자는 많았나요?”

“이걸 감자라 부릅니까요?”

“엄~청 많았어요, 오빠! 캐도 캐도 끝없이 나왔다니까요!”

“허허허, 이거라면 몇 년은 식량 걱정 없이 살겠구먼!”

한마디 질문에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답변이 들려와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일일이 사람들을 마주 보며 응답해 주었다.

“그런데 군사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조금 생김새가 다르던데요? 이것보세요. 더 쭈글쭈글한 것이, 크기도 그리 크지 않고, 기다란 것도 있고…….”

확실히 사람들 말대로 일반적인 감자의 형태가 아니라 마치 생강처럼 생긴 작물이었다.

세상에, 이런 감자가 존재하다니. 자연산 감자는 원래 다 이런 건가?

‘세란아, 감자 모양이 조금 이상한데, 정말 괜찮은 거야?’

[음, 책에선 그저 작은 품종의 감자라고만 표기되어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돼지감자랑 비슷한 품종이 아닐까 싶어. 그래도 그 감자를 먹고 탈이 났다는 얘긴 쓰여 있지 않으니, 영양가는 충분할 거야.]

‘그래? 그렇다면 걱정 없겠네.’

안심한 내가 마음을 놓자, 세란이는 고민하듯 콧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흠, 이것으로 식량 문제는 해결됐고, 다음은 군력(軍力)이려나.]

‘군력?’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지난번에 놔준 고블린들이 다시 재정비해서 쳐들어올지도 모르니까. 특히나 제일 걱정은 산림 밖에 있는 브렌터스 남작가야.]

‘그곳이 왜?’

[왜긴 왜야. 여기 사람들은 영지에서 도망친 화전민이잖아. 이곳 대륙의 법상 범죄자라고. 아마 남작가에서 이 마을을 발견하면 즉시 노예로 만들기 위해 병사를 보낼걸?]

‘그런! 굉장히 위험한 상태잖아!’

[그러니까 미전선산 다산취승(未戰先算 多算取勝)이라는 거야.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한문은 이해 못하겠지만, 대충 저것도 손자병법이나 뭐 그런 거겠지.

[그래서 말인데, 아무런 힘도 없는 일개 주민들을 최단 시간 내에 정예병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오빠는 그게 무엇일 거 같아?]

‘최단 시간에 정예병으로? 무슨 그런 꿈같은 얘기가… 으음, 글쎄다. 창을 쥐여 주고 전술을 가르쳐야 하나?’

[에이, 제대로 된 싸움도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쥐어 준다고 뭘 할 수 있겠어. 근접해서 싸우는 방식은 애초에 논외.]

‘그렇다면… 아, 알겠다! 활을 가르치는 거지? 그거라면 아무리 약해도 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오오, 대단해! 하지만 반만 맞아. 활은 생각보다 다루기 어렵거든. 숙련되려면 적어도 몇 달의 시간은 필요할 거야.]

‘활도 아냐? 그럼 뭔데?’

[그건 말이야…….]

세란이는 씩 웃으며 자신 있게 설명해 주었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그저 입만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