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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사람이냐?”
처음 만났을 땐 절로 그런 질문이 나올 만큼 엉망인 모습이었다. 진흙 목욕을 신나게 한 멧돼지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바람의 근원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흘째 크라이 산림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그 남자를 만났다.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애꾸눈 피어 타이거를 막 처리한 참인데, 피어 타이거를 피해 숨어 있던 건지, 그 남자는 어린아이나 겨우 들어갈 법한 좁은 굴 안에서 기어 나왔다.
퀭한 눈, 쏙 들어간 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는지 바짝 메말라 있는 입술까지……. 생전 처음 보는 디자인의 옷도 잔뜩 해져 있는 것으로 봐선 꽤 오랫동안 굴 안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남자.
이것이 나와 군사의 첫 만남이었다.
“도, 도와주세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도와달라 청하는 그가 당시에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도움부터 청하는, 그 안일하고 나약한 정신상태가 특히나.
마음 같아선 무시한 채 떠나고 싶었지만, 약한 자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신전의 규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인정을 베풀었는데… 설마 채운 지 얼마 안 된 물주머니를 전부 비워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뒤로 나는 몇 마디 질문을 던졌다. 그에게 호기심이 생긴 게 아니라 특이한 옷차림을 보고 몇 시간 전에 본, 피어 타이거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사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아까 근처에서 그대와 비슷한 차림의 사체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대의 동료인가?”
“네. 그들은 제…….”
“그럼 동료의 목숨을 발판 삼아 혼자 살아남았다는 건가?”
그러고는 여지없이 실망스러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히 질문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동료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미련 없이 그를 떠나갔다. 동료와 가족, 특히 어린아이를 외면한 자는 나에게 있어 짐승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래, 짐승이나 다름없는 존재들. 내 오라버니들이 바로 그러했다.
보잘것없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권력 다툼을 벌인 오라버니들. 그로 인해 나를 키운 보모가 죽고, 나와 불과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던 언니가 죽고, 고작 다섯 살이던 나까지 죽이려 한 그 짐승 놈들.
그 결과, 난 끝내 버려지다시피 검의 신전에 유배 보내져 무녀로 살아야 했다.
“언니! 언니!”
“리아, 너는 자유롭게… 살아…….”
“아, 안 돼! 언니!”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심장이 찔린 언니가 내 손을 꼭 잡으며 한 말이.
그 화살은 1왕자인 오라버니의 심복이 쏘았다. 그것도 언니가 아니라 나를 향해. 언니는 단지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나를 밀쳐 내다 대신 맞은 것뿐이었다.
그런 놈들이었다. 어린 나와 언니도 서슴없이 죽이려 한 짐승 놈들.
그래서 엔데버 왕국의 침공으로 클라인드 왕국이 멸망했을 땐 꼴좋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속된 내전으로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하고 짐승 놈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말 그대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웃음? 아니, 원통함의 웃음이다. 그 짐승 놈들을 내 손으로 복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허무한 웃음.
아무튼, 엔데버 왕국의 침략으로 인해 내 목표가 사라져 버렸지만,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언니의 유언을 목표로 삼아 나는 최선을 다했다.
농노나 다름없는 하급 무녀에게는 소유권이 없었다. 내가 번 돈, 내가 일군 땅,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행동, 목숨조차도 오롯이 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바닥부터 기어 올라갔다. 평생 만져 본 적 없는 걸레짝을 들고 하루 종일 똥물이 튀는 화장실을 청소하며, 길을 지나갈 때마다 망국의 공주라며 돌팔매질을 당해도, 같은 하급 무녀에게 따돌림을 당할지라도 기를 쓰고 검을 단련해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나는 장로님에게 ‘검희’라는 칭호를 받아 오롯이 내 힘으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화전민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타했다. 자유를 찾아 영지에서 벗어난 주제에 위험에 처하니 남에게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며 분노했다.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그런 각오도 없이 남에게 의지만 하려 하다니, 그래서 난 도울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건만…….
그는 그런 나를 반박했다.
“당신의 말은… 크윽, 오, 옳아요. 하, 하지만! 저기 있는 어린아이들은… 무, 무슨 죄가 있나요!”
한 번 더 막아서면 벤다고 경고했는데도 다시 나선 그는 올곧은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살기로 한껏 겁을 주었는데도 당돌한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겉보기엔 당당한 척하지만 말을 더듬는 점이나 다리를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분명 겁은 먹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뭘 믿고 나에게 대드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재미있었다. 그래, 나는 사실 이때부터 그가 마음에 든 것 같다.
“당신이 제게 말했죠. 어린아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용기도 없는 짐승이라고. 그래서! 이번엔 짐승이란 말을 듣지 않도록 도망가지 않으렵니다. 그럼 이제 당신에게 되물어보죠. 당신은 짐승입니까, 사람입니까?”
정말 이땐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줄 줄이야.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내가 짐승이란 단어를 부정한다면, 내가 줄곧 짐승이라 여겨온 오라버니들을 옹호하는 격이 되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일단 화전민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선언했다. 오직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그 후로 그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들을 들으며, 나는 그의 가치를 오해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 정도로 그의 머리는 뛰어났다. 천재 군사라 불리는 메스트나 이글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왜 저런 남자가 이런 곳에서 고작 피어 타이거 하나를 어찌하지 못해 죽어가고 있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저 정도의 머리라면 어느 나라든 그를 데려가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텐데.
그래서 나는 그를 군사라 불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닫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적에게 유리한 곳을 불리하게 만들고, 아군에게 불리한 곳을 유리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과연 그의 작전대로 고블린을 마을 안으로 유인해 불을 지르니, 순식간에 대혼란이 일어났다.
문제는 너무 혼란이 커서 내가 미처 몸을 뺄 수 없었다는 걸까.
수백 마리의 고블린들과 뒤엉킨 채 연기로 시야까지 좁아진 터라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눈앞에 보이는 고블린을 베어가며 근근이 버텼는데, 한참을 그러다 보니 어느새 고블린들은 사라지고, 내 앞에는 고블린 리더 한 놈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일반 고블린보다 세 배 이상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녀석의 공격 하나하나가 장로님의 검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기교는 장로님의 발끝도 미치지 못하기에 평소라면 일 합에 목을 잘라 버릴 수 있었을 테지만… 이유 모를 두통과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바로 그때, 정말이지 생각도 하지 못한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고블린 리더한테 똥물을 뿌리고 나를 덮쳤을 땐, 그것으로도 모자라 내 위에 올라타 상의를 잡아 뜯었을 땐 정말이지…….
호흡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란 걸 뒤늦게 알았기에망정이지, 하마터면 그의 목을 베어버릴 뻔했다.
그 뒤로 그는 내가 회복될 때까지 어설프게 내 검을 들고 고블린 리더와 맞서 싸웠다. 처참하게 날아가도, 내가 아무리 만류해도 그는 계속 일어섰다.
“일어나지 마!”
“…싫, 어요. 저는…요, 크윽! 비록, 보잘것없는 놈이지만… 자존심이란 게 있…어요. 그러니까! 죽어도 사람으로 죽겠다고! 짐승 같은 게 아니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동료를 버리고 도망이나 치는 나약한 짐승도, 수백의 병사를 지휘할 만큼 머리 좋은 군사도 아니라는 걸.
그는 전사였다. 신념이 있고, 자존감이 있고,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물러서지 않는… 그런 강한 전사.
그렇기에 몸을 던져 그를 구했다. 저 올곧은 눈빛을 가진, 강한 전사를 잃고 싶지 않아서. 저자라면 내가 목숨을 걸어도 괜찮을 듯싶어서.
“처음에 나는 너를 보잘것없는 자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 그래, 인정하마. 너는… 강한 남자다.”
“당신…….”
“글로리아.”
“네?”
“내 이름은 글로리아다. 군사, 너의 이름은?”
“신…기석입니다.”
검의 신전에 몸담던 무녀가 자신의 본명을 남에게 알려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까? 아니, 모르겠지.
“좋다, 기석. 사죄의 의미로 나는 딱 한 번, 신전의 규율을 어긴다.”
자유인이 되는 대가로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신전의 규율을 어기고 물의 검술을 사용했다. 이로써 나는 규율을 무시한 죄인이 되었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
“글로리아, 또 여기 있었어요?”
한참 바위 위에 걸터앉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기석이 다가왔다. 한창 바쁘게 마을을 재건하고 있어서 그런지, 옷과 얼굴이 흙투성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응? 왜 웃어요?”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라는 말은 숨기기로 했다. 뭔가 말하기 부끄러웠기에.
“뭐예요, 신경 쓰이게. 그런데 글로리아는 일광욕하는 거 참 좋아하시네요.”
“딱히. 그저 자유를 만끽하는 것뿐.”
“자유요?”
이 부분에 대한 답변도 가볍게 시선을 피함으로써 회피했다.
“저기… 상처는 좀 어때요?”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자 다시금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슬쩍 눈동자만 돌려 살펴보니, 걱정으로 가득한 그의 시선이 온통 내 등을 향해 있었다.
하여간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는데도…….
“응? 왜요?”
내가 손을 까닥이자 의아해하는 그.
그래도 모른 척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리자, 결국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나는 그의 얼굴 위로 품 안에 숨겨둔 물주머니를 꺼내 쏟아부었다.
“앗! 뭐예요! 갑자기!”
“네 꼴이 짐승으로 착각할 만큼 형편없어서.”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말을 하며 눈웃음 짓자, 그도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혔다.
“윽! 사람이 진지하게 물어보는데 장난이나 치고! 걱정한 나만 손해 봤네!”
부끄러움을 감추듯 버럭 소리 지르는 모습이 꽤나 웃겨 나는 다시금 호쾌하게 웃었다.
이렇게 마음껏 웃어본 게 정말 얼마 만이던가. 아니, 없던가. 어쩐지 그와 함께 있으면 감정을 감추기 어려워서 곤란하다. 하지만 딱히 나쁘진 않을지도.
내겐 페어리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이 있지만… 잠시 동안은 여유를 부려도 괜찮겠지.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니까.
“사람이냐?”
처음 만났을 땐 절로 그런 질문이 나올 만큼 엉망인 모습이었다. 진흙 목욕을 신나게 한 멧돼지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바람의 근원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흘째 크라이 산림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그 남자를 만났다.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애꾸눈 피어 타이거를 막 처리한 참인데, 피어 타이거를 피해 숨어 있던 건지, 그 남자는 어린아이나 겨우 들어갈 법한 좁은 굴 안에서 기어 나왔다.
퀭한 눈, 쏙 들어간 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는지 바짝 메말라 있는 입술까지……. 생전 처음 보는 디자인의 옷도 잔뜩 해져 있는 것으로 봐선 꽤 오랫동안 굴 안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남자.
이것이 나와 군사의 첫 만남이었다.
“도, 도와주세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도와달라 청하는 그가 당시에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도움부터 청하는, 그 안일하고 나약한 정신상태가 특히나.
마음 같아선 무시한 채 떠나고 싶었지만, 약한 자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신전의 규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인정을 베풀었는데… 설마 채운 지 얼마 안 된 물주머니를 전부 비워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뒤로 나는 몇 마디 질문을 던졌다. 그에게 호기심이 생긴 게 아니라 특이한 옷차림을 보고 몇 시간 전에 본, 피어 타이거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사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아까 근처에서 그대와 비슷한 차림의 사체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대의 동료인가?”
“네. 그들은 제…….”
“그럼 동료의 목숨을 발판 삼아 혼자 살아남았다는 건가?”
그러고는 여지없이 실망스러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히 질문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동료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미련 없이 그를 떠나갔다. 동료와 가족, 특히 어린아이를 외면한 자는 나에게 있어 짐승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래, 짐승이나 다름없는 존재들. 내 오라버니들이 바로 그러했다.
보잘것없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권력 다툼을 벌인 오라버니들. 그로 인해 나를 키운 보모가 죽고, 나와 불과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던 언니가 죽고, 고작 다섯 살이던 나까지 죽이려 한 그 짐승 놈들.
그 결과, 난 끝내 버려지다시피 검의 신전에 유배 보내져 무녀로 살아야 했다.
“언니! 언니!”
“리아, 너는 자유롭게… 살아…….”
“아, 안 돼! 언니!”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심장이 찔린 언니가 내 손을 꼭 잡으며 한 말이.
그 화살은 1왕자인 오라버니의 심복이 쏘았다. 그것도 언니가 아니라 나를 향해. 언니는 단지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나를 밀쳐 내다 대신 맞은 것뿐이었다.
그런 놈들이었다. 어린 나와 언니도 서슴없이 죽이려 한 짐승 놈들.
그래서 엔데버 왕국의 침공으로 클라인드 왕국이 멸망했을 땐 꼴좋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속된 내전으로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하고 짐승 놈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말 그대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웃음? 아니, 원통함의 웃음이다. 그 짐승 놈들을 내 손으로 복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허무한 웃음.
아무튼, 엔데버 왕국의 침략으로 인해 내 목표가 사라져 버렸지만,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언니의 유언을 목표로 삼아 나는 최선을 다했다.
농노나 다름없는 하급 무녀에게는 소유권이 없었다. 내가 번 돈, 내가 일군 땅,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행동, 목숨조차도 오롯이 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바닥부터 기어 올라갔다. 평생 만져 본 적 없는 걸레짝을 들고 하루 종일 똥물이 튀는 화장실을 청소하며, 길을 지나갈 때마다 망국의 공주라며 돌팔매질을 당해도, 같은 하급 무녀에게 따돌림을 당할지라도 기를 쓰고 검을 단련해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나는 장로님에게 ‘검희’라는 칭호를 받아 오롯이 내 힘으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화전민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타했다. 자유를 찾아 영지에서 벗어난 주제에 위험에 처하니 남에게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며 분노했다.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그런 각오도 없이 남에게 의지만 하려 하다니, 그래서 난 도울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건만…….
그는 그런 나를 반박했다.
“당신의 말은… 크윽, 오, 옳아요. 하, 하지만! 저기 있는 어린아이들은… 무, 무슨 죄가 있나요!”
한 번 더 막아서면 벤다고 경고했는데도 다시 나선 그는 올곧은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살기로 한껏 겁을 주었는데도 당돌한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겉보기엔 당당한 척하지만 말을 더듬는 점이나 다리를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분명 겁은 먹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뭘 믿고 나에게 대드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재미있었다. 그래, 나는 사실 이때부터 그가 마음에 든 것 같다.
“당신이 제게 말했죠. 어린아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용기도 없는 짐승이라고. 그래서! 이번엔 짐승이란 말을 듣지 않도록 도망가지 않으렵니다. 그럼 이제 당신에게 되물어보죠. 당신은 짐승입니까, 사람입니까?”
정말 이땐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줄 줄이야.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내가 짐승이란 단어를 부정한다면, 내가 줄곧 짐승이라 여겨온 오라버니들을 옹호하는 격이 되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일단 화전민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선언했다. 오직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그 후로 그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들을 들으며, 나는 그의 가치를 오해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 정도로 그의 머리는 뛰어났다. 천재 군사라 불리는 메스트나 이글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왜 저런 남자가 이런 곳에서 고작 피어 타이거 하나를 어찌하지 못해 죽어가고 있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저 정도의 머리라면 어느 나라든 그를 데려가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텐데.
그래서 나는 그를 군사라 불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닫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적에게 유리한 곳을 불리하게 만들고, 아군에게 불리한 곳을 유리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과연 그의 작전대로 고블린을 마을 안으로 유인해 불을 지르니, 순식간에 대혼란이 일어났다.
문제는 너무 혼란이 커서 내가 미처 몸을 뺄 수 없었다는 걸까.
수백 마리의 고블린들과 뒤엉킨 채 연기로 시야까지 좁아진 터라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눈앞에 보이는 고블린을 베어가며 근근이 버텼는데, 한참을 그러다 보니 어느새 고블린들은 사라지고, 내 앞에는 고블린 리더 한 놈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일반 고블린보다 세 배 이상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녀석의 공격 하나하나가 장로님의 검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기교는 장로님의 발끝도 미치지 못하기에 평소라면 일 합에 목을 잘라 버릴 수 있었을 테지만… 이유 모를 두통과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바로 그때, 정말이지 생각도 하지 못한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고블린 리더한테 똥물을 뿌리고 나를 덮쳤을 땐, 그것으로도 모자라 내 위에 올라타 상의를 잡아 뜯었을 땐 정말이지…….
호흡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란 걸 뒤늦게 알았기에망정이지, 하마터면 그의 목을 베어버릴 뻔했다.
그 뒤로 그는 내가 회복될 때까지 어설프게 내 검을 들고 고블린 리더와 맞서 싸웠다. 처참하게 날아가도, 내가 아무리 만류해도 그는 계속 일어섰다.
“일어나지 마!”
“…싫, 어요. 저는…요, 크윽! 비록, 보잘것없는 놈이지만… 자존심이란 게 있…어요. 그러니까! 죽어도 사람으로 죽겠다고! 짐승 같은 게 아니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동료를 버리고 도망이나 치는 나약한 짐승도, 수백의 병사를 지휘할 만큼 머리 좋은 군사도 아니라는 걸.
그는 전사였다. 신념이 있고, 자존감이 있고,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물러서지 않는… 그런 강한 전사.
그렇기에 몸을 던져 그를 구했다. 저 올곧은 눈빛을 가진, 강한 전사를 잃고 싶지 않아서. 저자라면 내가 목숨을 걸어도 괜찮을 듯싶어서.
“처음에 나는 너를 보잘것없는 자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 그래, 인정하마. 너는… 강한 남자다.”
“당신…….”
“글로리아.”
“네?”
“내 이름은 글로리아다. 군사, 너의 이름은?”
“신…기석입니다.”
검의 신전에 몸담던 무녀가 자신의 본명을 남에게 알려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까? 아니, 모르겠지.
“좋다, 기석. 사죄의 의미로 나는 딱 한 번, 신전의 규율을 어긴다.”
자유인이 되는 대가로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신전의 규율을 어기고 물의 검술을 사용했다. 이로써 나는 규율을 무시한 죄인이 되었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
“글로리아, 또 여기 있었어요?”
한참 바위 위에 걸터앉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기석이 다가왔다. 한창 바쁘게 마을을 재건하고 있어서 그런지, 옷과 얼굴이 흙투성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응? 왜 웃어요?”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라는 말은 숨기기로 했다. 뭔가 말하기 부끄러웠기에.
“뭐예요, 신경 쓰이게. 그런데 글로리아는 일광욕하는 거 참 좋아하시네요.”
“딱히. 그저 자유를 만끽하는 것뿐.”
“자유요?”
이 부분에 대한 답변도 가볍게 시선을 피함으로써 회피했다.
“저기… 상처는 좀 어때요?”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자 다시금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슬쩍 눈동자만 돌려 살펴보니, 걱정으로 가득한 그의 시선이 온통 내 등을 향해 있었다.
하여간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는데도…….
“응? 왜요?”
내가 손을 까닥이자 의아해하는 그.
그래도 모른 척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리자, 결국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나는 그의 얼굴 위로 품 안에 숨겨둔 물주머니를 꺼내 쏟아부었다.
“앗! 뭐예요! 갑자기!”
“네 꼴이 짐승으로 착각할 만큼 형편없어서.”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말을 하며 눈웃음 짓자, 그도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혔다.
“윽! 사람이 진지하게 물어보는데 장난이나 치고! 걱정한 나만 손해 봤네!”
부끄러움을 감추듯 버럭 소리 지르는 모습이 꽤나 웃겨 나는 다시금 호쾌하게 웃었다.
이렇게 마음껏 웃어본 게 정말 얼마 만이던가. 아니, 없던가. 어쩐지 그와 함께 있으면 감정을 감추기 어려워서 곤란하다. 하지만 딱히 나쁘진 않을지도.
내겐 페어리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이 있지만… 잠시 동안은 여유를 부려도 괜찮겠지.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