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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덩치가 나의 두 배가 넘는 녀석이 쿵쾅거리며 달려오니, 마치 덤프트럭을 마주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아플 정도로 울려 댔다. 아버지에게 살해당할 뻔한 당시의 일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며 당장에라도 검을 버리고 나 살려라 도망가고픈 욕구가 샘솟았지만… 나는 억지로 검을 들어 올렸다.

더는 도망가지 않기로 다짐했기에.

“와라!”

용기를 내기 위해 더욱 힘차게 외치며 자세를 잡았다.

막는다. 유독가스에 약해진 녀석이라면 나라도…….

크워엉!

빠직!

번개가 전신을 관통하며 내 몸이 붕 날아올랐다. 방금 전에 벌어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날아가는 와중에도 멍하니 고블린 리더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엉거주춤 한쪽 다리를 위로 치켜든 상태였다. 그제야 나는 녀석이 달려오던 속도를 죽이지 않은 채 그대로 나를 걷어차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런 거냐?

녀석은 나를 적수라 여기지도 않아 도끼조차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

그런데도 나는 얕보는 그 공격조차도 막지 못해 이리 허무하게 날아가는 것이고.

어린아이가 놀다가 툭 차버린 개구리처럼 배를 드러내며 날아가던 나는 물수제비처럼 지면을 몇 번 튕기다 반쯤 타다 남은 짚더미에 처박혔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아프다는 느낌이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안일했다. 너무도 생각이 안일했다. 내가 시간을 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니, 그 자만심이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사람들을 지휘하니 순간 내가 뭐라도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약하고 힘없는 고등학생에 불과한데.

“군사!”

멀리서 나를 부르는 글로리아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니, 억지로 일어나려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하… 바보 같지, 정말 바보 같지.

다리가 삐걱거리고 입안에서 피가 흘러나옴에도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상상 이상으로 내 꼴이 형편없었는지, 글로리아는 일어서려는 나를 보고 양쪽 눈썹이 거의 붙을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일어나지 마!”

“…싫, 어요.”

설마 내가 싫다고 말할 줄은 몰랐는지, 눈을 크게 뜨는 글로리아.

“저는…요, 크윽! 비록, 보잘것없는 놈이지만… 자존심이란 게 있…어요. 그러니까! 죽어도 사람으로 죽겠다고! 짐승 같은 게 아니니까!”

피를 토하듯 소리 지르자 글로리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분노, 아니면 혼란스러움?

머리가 아파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으, 아아아아!”

당장에라도 팔근육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재주 좋게 놓치지 않은 그녀의 검을 억지로 다시 들어 올렸다.

나라는 존재가 나약하다는 건 뼈저리게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가도 된다는 변명은 되지 않는다.

내가 무엇 때문에 억지를 부려가며 마을 사람들을 구하려 했겠는가.

내가 무엇 때문에 글로리아를 구하려 했겠는가.

전부! 더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 아니냔 말이다!

“와…라. 내게 오라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검끝을 고블린 리더에게로 향하자, 녀석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내 상태가 만신창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다가오는 발걸음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고양이가 다 잡은 쥐를 가지고 놀 때의 모습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군사니임!”

“어디 계십니까!”

“콜록콜록, 어서 불을 꺼!”

그때, 불길 너머로 나를 찾는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나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온 거야?

크르르.

고블린 리더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불길 너머를 돌아보며 위협이 서린 울음소리를 냈다.

그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웃기게도 목숨이 경각에 달해서인지, 머리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한다고 했던가. 그와 같이 만신창이가 된 몸임에도 난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달려 나갈 수 있었다.

갑자기 내가 뛰어들자 녀석은 깜짝 놀라 홱 돌아보았다. 하지만 녀석이 대처하는 것보다 내가 품 안으로 파고드는 게 더 빨랐다.

“이야아아아앗!”

온 힘을 다해 태클 걸 듯 뛰어들어 녀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푹!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가 내 얼굴에 튀었다. 하지만 썩 만족스럽진 않았다. 기껏해야 검날의 3분의 1 정도를 박아 넣는 데 그쳤으니까.

역시나 마지막에 찔러 넣는 힘이 약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녀석의 피부가 생각보다 두꺼웠다든가.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며 후회해 봐야 무엇 하겠는가. 절호의 기회를 놓친 순간, 이미 내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잔뜩 화가 나 핏발 선 녀석의 눈이 나를 향했다. 동시에 지금껏 바닥을 질질 끌다시피 들고 있던 거대한 도끼가 붕― 공기를 가르며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죽는다!’라는 인식과 함께 주마등이 스쳤다.

아직 행복하던 시절의 미소 짓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연신 ‘오빠’를 부르며 따르던 세란이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뒤로 나를 군사라 불러주던 마을 사람들과 시큰둥한 표정의 글로리아까지. 어째서 마지막에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 건지 알 수 없…….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밀치듯 감싸 안았다. 가느다라면서도 단단한 팔이 내 목을 두르고, 큼지막한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다.

그렇게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안긴 상태에서 상대의 어깨 너머로 휘날리는 붉은 머리와 핏방울이 선명히 보였다.

그래, 핏방울이.

우린 서로 뒤엉킨 채 몇 바퀴나 굴렀다. 재와 흙이 잔뜩 묻어 엉망이 되었지만, 상대, 그러니까 글로리아는 아랑곳 않고 팔을 뻗어 내 몸 상태를 먼저 살폈다.

“하여간, 무모하기 짝이 없는 군사구나.”

그제야 그녀는 안심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동시에 나는 확연히 볼 수 있었다. 등 쪽, 찢겨진 블라우스 너머로 깊게 베인 상처를.

“다, 당신, 상처가……!”

“죽을 정돈… 으윽, 아니다. 숨도 쉴 수 없었을 때보단 낫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결코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냥 침 바르면 나을 상처 같은 게 아니잖아요! 어서 치료해야……!”

“됐고, 들어라.”

그녀는 내 말을 막더니, 옆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검을 주워 들었다.

“너의 진심은 잘 알았다. 멋모르고 짐승이라 말한 점, 사과하마.”

내 눈이 절로 커졌다.

내게… 사과를 해? 그것도 그녀가?

“처음에 나는 너를 보잘것없는 자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 그래, 인정하마. 너는… 강한 남자다.”

“당신…….”

“글로리아.”

“네?”

내가 멍청하게 되묻자, 그녀는 다가오는 고블린 리더를 주시한 채 계속 말했다.

“내 이름은 글로리아다. 군사, 너의 이름은?”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녀와 나는 제대로 통성명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신…기석입니다.”

“좋다, 기석. 사죄의 의미로 나는 딱 한 번 신전의 규율을 어긴다.”

“신전의 규율?”

“장로님, 맹세를 지키지 못한 죄는 반드시 달게 받겠습니다.”

그녀는 내 말을 무시하며 저 혼자 중얼거리더니, 검을 바닥에 닿을 만큼 늘어뜨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성큼성큼 걸어오던 고블린 리더는 점차 속도를 올리더니, 이내 뜀박질로 달려왔다.

크워어어어어어!

바닥이 흔들릴 만큼 거세게 발을 구른 고블린 리더가 허공으로 도약했다. 피하지 않으면 거대한 덩치에 짓뭉개질 판. 그럼에도 그녀는 세상 편한 자세로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아래로 늘어뜨린 검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칼도 검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아니, 머리칼뿐만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도… 말 그대로 몸 전체가 검푸른 빛에 휩싸였다.

쿠워어!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는지, 고블린 리더는 온 힘을 다해 두 손으로 도끼를 내리찍었다.

“물의 오러, 일식(一式) 수압(水壓).”

고블린 리더의 무게와 내려찍는 힘까지 실린 도끼의 기세가 그녀를 반으로 쪼개려는 찰나, 한 줄기 검푸른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그 빛은 마치 물을 고압으로 분출한 것처럼 몹시 날카로웠다. 뒤늦게 나는 그녀의 손끝을 보고 검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잔상처럼 내쏘아진 섬광은 불길로 검붉어진 하늘을 청명하게 반으로 가르며 나아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 뒤로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세 좋게 휘둘러지던 도끼가 우뚝 멈추고, 악귀처럼 으르렁거리던 고블린 리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고블린 리더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오더니 내장이 흩뿌려졌고, 머리부터 가슴, 배, 고간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나는 그 일련의 모습을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그러니까 단 한 방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잘라 버렸다는 건가? 내 힘으론 고작 몇 센티 찔러 넣을 만큼 단단한 고블린 리더의 몸뚱어리를 전부?

“하아, 하아…….”

그녀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차분하게 검을 착검시켰다.

어쩐지, 그 의연한 모습이 내겐 몹시도 크게 다가왔다.

“군사님, 어디 계십니까!”

“덤벼라, 이놈! 우와아아…아?”

그 무렵,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물통을 가슴에 안고 달려왔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미 주변은 불길이 다소 수그러든 상태였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이 나와 글로리아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을 뿌리며 뛰어왔다는 반증이겠지.

“군사님, 검사님! 두 분 모두 살아 계셨구랴! 우핫핫핫! 거보슈! 이분들은 괜찮을 거래도 그러네! 으헉! 이 커다란 시체는 뭣인가!”

나와 글로리아의 생존 사실을 확인하고 오두방정을 떨며 좋아하던 웰던이 바닥에 쓰러진 고블린 리더의 시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 웰던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맥이 풀려 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 하하하하…….”

왠지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지금 내가 뭔 짓을 했는지,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통 믿기지가 않은 것이다. 마치 이 전부 꿈만 같…….

“군사님! 군사님!”

“이보게들! 군사님이 쓰러지셨네!”

“어, 어서 마을 밖으로 옮겨!”

[오빠! 오빠! 대답해! 오빠!]

기겁해 소리 지르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와, 텔레파시가 다시 연결된 건지 세란이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나는 옆으로 쓰러진 채 메아리치듯 울리는 소리를 듣다 문득 손목을 보았다.

가물거리는 내 눈에 숫자가 들어왔다.

그 숫자는 정확히 700을 나타내고 있었다.





― 생존자 : 700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