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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그럼 아직도 마을 안에 있다는 말이에요?”

마을 안은 아직도 시뻘겋게 불타오르고 있어 한 발짝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죽고도 남을 시간이 아닌가.

[오빠, 왜 갑자기 아무 말도 없어? 무슨 일 있어?]

‘큰일이야. 그녀가 아직 마을 안에서 나오지 않았어. 어, 어쩌지?’

[아직도? 오빠, 일단 진정해.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아, 혹시 빠져나간 고블린들 중에 고블린 리더의 모습은 보였어?]

‘고블린 리더?’

[몸집이 보통 고블린에 비해 세 배 정도 크다고 설명에 나와 있어. 그 녀석이 글로리아의 팔을 자른 녀석이기도 하고.]

‘그런 놈은 전혀 보지도 못했어! 잠깐, 그럼 설마 그녀는 지금 고블린 리더라는 것과 싸우고 있는 거야?’

[그럴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가 책 속의 역사를 틀어놓긴 했지만, 중요한 사건은 그대로 진행되려는 걸지도…….]

나는 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동생의 말대로라면 글로리아는 고블린 리더라는 놈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팔이 잘린다는 건가?

아냐. 그건 책 속에서나 그런 거고, 지금은 불타오르는 전장 한가운데 아닌가! 살아 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

‘제기랄, 그녀를 도와야 해!’

[뭐? 돕다니? 오빠,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오빠, 오빠!]

난 텔레파시를 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마을 사람 모두 나를 돌아보았다.

“군사님?”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나는 근처에 있는 물통을 들어 머리 위에 끼얹었다.

“푸하!”

차가운 물이 머리에 쏟아지자, 그나마 후끈거리던 몸이 식는 것을 느꼈다.

난 머리에 묻은 물을 두어 차례 털어내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죽창을 하나 집어 들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다니, 어디를… 설마 저 불길 속으로 들어갈 셈인가! 말도 안 되네! 몇 분 버티지 못하고 타 죽을 걸세!”

“군사님, 위험합니다!”

촌장을 비롯해 모두가 나를 만류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부인이라며 나를 배척하던 그들이 어느새 이렇게나 날 걱정해 주다니. 그들의 순박함이 너무도 절절하게 느껴져 내가 내린 선택에 한 점 후회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여나 제가 죽는다면…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난 그렇게 말하며 마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솔직히 내 이름이나 동생의 안부를 남기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이곳에서 말해봐야 아무 소용 없을 일이란 걸 알기에.

“콜록콜록! 헉, 헉…….”

불길에 휩싸인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후끈한 열기보다도 매캐한 연기가 먼저 내 목을 틀어막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 쉬기가 곤란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바보야! 옷을 찢어서 코와 입을 막아! 그런 다음 자세를 낮춰! 화재 시 가장 위험한 건 불이 아니라 유독가스라고!]

일갈하듯 꾸짖는 세란이.

나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세란이의 말대로 셔츠를 찢어 입과 코를 막고 허리를 굽혔다.

‘하아, 하아…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고마워.’

[진짜 막무가내로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정말 오빠는 바보야!]

화난 듯 소리치지만, 그 안에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나는 오히려 흐뭇하게 웃었다.

[웃지 마!]

‘아, 안 웃었어.’

[안 봐도 빤하니까 안 속아! 그보다 그녀를 찾기로 결정했으면 멍청하게 눈으로 찾지 말고 소리에 집중해! 어서!]

세란이는 일단 날 도와줄 심산인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세란이의 말대로 귀에 손을 대고 의식을 집중했다.

‘찾았어! 금속 소리야! 아직 싸우고 있어! 당장 그리로 가야……!’

[진정해. 싸우고 있다면 아직 그녀는 괜찮을 거야.]

‘하지만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잖아!’

[당장 오빠가 가서 뭘 할 수 있다고! 머리를 식혀. 냉정하게 생각해. 지금 여기서 오빠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지, 상황은 어떤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도 몰라?]

저 말은 워낙 유명해서 나도 잘 알고 있다. 분명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리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이길 수 있다라… 알았어.’

조금 냉정해진 나는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이동했다.

그렇게 얼마나 후끈한 열기 속을 걸었을까.

화상을 입은 건지 따끔거리는 피부를 참으며 도착한 곳은 커다란 공터였다. 이미 수많은 싸움이 펼쳐진 건지 주위엔 날카롭게 잘린 나무 파편과 고블린들의 시체가 즐비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한창 싸우고 있는 글로리아와 고블린 리더라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키에에에에에에엑!

“큭!”

고블린 리더가 휘두른 거대 도끼를 검으로 받아낸 글로리아가 저만치 날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상당히 지친 탓인지 어깨가 심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금 화상을 입은 것도 같았다. 숨 쉬기 곤란한 건 이 연기 때문인가? 복합적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크어어어어어어어!

그 순간, 고블린 리더가 잔뜩 화가 난 건지 우렁찬 포효를 발했다. 얼마나 소리가 쩌렁쩌렁한지 바닥이 진동할 정도라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섭다. 피어 타이거란 야수를 정면으로 대면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겁먹은 나와 달리 글로리아는 검으로 몸을 지탱하며 다시 일어섰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듯 단단한 눈빛을 발하며.

그 모습을 보니 난 조급함에 심장이 요동쳤다.

저런 영웅을 여기서 죽게 놔둘 수는 없어. 무언가, 내가 무언가라도 해야……!

당장에라도 죽창을 들고 뛰쳐나가려다 다시금 세란이의 말이 떠올라 급히 멈추었다.

여기서 내가 나선들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녀처럼 빠른 발도, 대단한 검술도, 심지어 동생처럼 좋은 머리도 없다. 그동안 특별히 운동을 해본 적도 없고, 고작해야 아르바이트를 하며 늘어난 근육이 전부다. 그런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생각해라, 신기석. 나에 대해선 충분히 알았어. 그럼 적은 어떻지? 세란이가 말하기로 고블린은 눈이 나쁜 대신 청각과 후각에 밝다고 했… 후각! 바로 그거야!

나는 급히 반쯤 불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집 주변을 살폈다.

그중 세 번째 집에 들어갔을 때, 내가 원하던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물건을 든 나는 무작정 고블린 리더에게 달려갔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나를 보고 놀란 녀석은 내 몸통만 한 도끼를 다급히 치켜들었다. 하지만 내가 양손에 들고 있던 물건, 그러니까 통 안에 담겨 있던 오물을 뿌리는 게 더 빨랐다.

키에에에에엑!

내가 오물을 얼굴에 뿌리자, 녀석은 참을 수 없는 악취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글로리아에게 달려가 그대로 덮쳤다.

“큭?”

태클을 걸듯 넘어뜨리자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글로리아.

차분히 설명해 줄 시간이 없기에 나는 다짜고짜 그녀의 위에 올라타 코르셋처럼 꽉 조이고 있는 가죽조끼를 확 잡아 풀었다. 그러자 낙낙한 품의 흰 블라우스와 큼지막한 가슴 굴곡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이번엔 정말 많이 놀랐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크게 뜨는 글로리아.

당황의 빛으로 물들어 있는 보랏빛 눈동자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문득 떠오른 건데, 저런 눈빛을 보는 건 내가 최초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여기서 분명히 말해두자면… 지금 내가 이처럼 변태 같은 행위를 한 이유는 바로 혈액순환 때문이다.

피어 타이거도 손쉽게 처리한 그녀가 어째서 이리 쩔쩔매고 있을까를 아까부터 생각하던 중에 생각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중독 현상.

세란이가 아까 내게 말했듯이 화재 시 가장 위험한 건 불이 아니라 유독가스다. 화재 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보면 대부분 사망 경위가 불타 죽은 게 아니라 유독가스에 중독돼 질식해서 죽는 것 아니었던가.

그녀가 너무도 대단한 탓에 나나 세란이도 화공 작전을 짤 때 간과한 것이다. 아무리 강한 그녀라 할지라도 연기에 중독된 채론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녀는 사람답지 않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긴 했다. 중독된 상태에서도 한 시간이 넘도록 고블린들과 사투를 벌였으니 말이다.

그 말인즉, 화재 속에서 마라톤 선수처럼 계속 뛰어다녔다는 말과 다를 게 없는데, 어찌 초인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배기겠냐고.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 고블린 리더를 맞상대할 수 없을 만큼 지쳤을 것이다. 발도 느린 내가 거는 태클을 피하지도 못할 정도니, 말 다했지.

그래서 그녀를 눕히고 가슴을 조이는 조끼를 풀어헤쳤다. 조금이라도 산소를 마실 수 있게 하려고.

“너, 지금 무슨 짓을……!”

“움직이지 마세요!”

다급히 나를 밀쳐 내려는 그녀에게 소리치자, 수치심에 눈썹을 부르르 떠는 글로리아.

“당신은 지금 유독가스에 중독됐어요! 이대로 누워서 심호흡하세요! 어서!”

“그… 칫!”

내가 몹시 진지한 어투로 말하자, 그녀는 몇 번 입을 달싹이려다 이내 혀를 차며 시선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살짝 얼굴이 붉어진 듯 보이는데, 아마도 불빛에 반사된 걸 잘못 본 것이겠지.

크어오어어어어어!

그때, 연신 얼굴을 문지르며 괴로워하고 있던 녀석이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던 중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제길, 좀 더 시간을 끌어주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기대를 벗어난 모양이다.

크륵, 크륵.

녀석은 씩씩거리며 뒤뚱뒤뚱 내게 걸어왔다. 자세히 보니 걸을 때마다 몸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아아, 알겠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사실 놈도 유독가스에 중독돼 상당히 괴로운 처지였던 거야.

게다가 숨도 거친 게, 영 불편해 보인다. 얼굴과 몸에 묻은 오물 때문인가? 아무튼 나에겐 좋은 일이다. 저렇게 약해진 상태라면 내가 시간을 끌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검 좀 빌릴게요.”

“너, 무슨…….”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검을 빼앗아 들었다.

“욱!”

겉보기엔 얇은 검이라서 가벼울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 외로 무거워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런 걸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으려나?

“검도 제대로 못 드는 주제에 뭘 하겠다고! 위험해!”

“하지만 이대로는 둘 다 죽어요. 어떻게든 제가 시선을 끌어볼 테니, 조금 더 누워 있어요.”

“녀석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가… 콜록콜록!”

거칠게 기침해 대는 글로리아를 보며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마 지금 내 표정은 진짜 형편없겠지.

쿠워어어어어!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블린 리더가 침을 튕기며 돌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