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2화
고블린들은 애초 목적한 것과 같이 정면으로 뚫을 생각인 듯했다. 좁은 입구로 들어오기 위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고블린 무리를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던 난 슬며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잔뜩 긴장한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급조해 만든 죽창을 들고 내 눈치를 살폈다.
긴장감이 한껏 고조될 즈음, 드디어 고블린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갸갸갸갸갹!
케에에에에!
고작 어린아이만 한 체격인데도 천 마리가 한꺼번에 몰려드니 땅이 진동할 정도였다. 더불어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과 피부가 저릿할 만큼의 살기도 느껴졌다.
이것이 전쟁이란 걸까? 무섭다. 절로 몸이 떨렸다.
하지만 겁먹은 모습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내가 두려움에 떨면 나만을 믿으며 함께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 전부에게 공포가 전염되어 버릴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한 사람의 군사가 된 것처럼 가슴을 펴고 외쳤다.
“옵니다! 요격 준비!”
내 명령에 백 명가량 모인 마을 청년들 모두 죽창을 힘껏 꼬나 쥐었다.
동생이 그러더라. 이 마을 사람들은 전쟁 경험이 없기에 지휘 체계를 나누기보단, 내가 전부를 관리하며 명령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확실히 백 명 정도뿐인 작은 수라면 세란이의 말대로 내가 한꺼번에 지휘하는 게 편하긴 했다. 다만, 내가 다치면 통솔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게 문제지만.
“군사님, 내 사정거리에 들어왔수!”
“그럼 웰던 씨는 먼저 쏘세요!”
“그 말을 기다렸수다! 이거나 받아라!”
유일하게 활을 소지한 웰던이 활을 쏘아 올렸다.
크웩!
그의 활 솜씨는 보통이 아닌지, 가장 앞서 달려오던 고블린의 미간이 정확히 꿰뚫렸다. 놈이 쓰러지며 뒤따라오던 고블린들의 돌진을 방해했고, 덕분에 제법 속도가 줄어든 게 확연히 보였다.
“지금입니다! 투척 준비! 던지세요!”
“투, 투척! 던져! 던져어어어어어!”
“으랴아아아아앗!”
내 외침에 모두들 기합을 내지르며 변이 묻은 죽창을 던졌다.
죽창은 비록 가볍고 잘 부러지는 단점이 있지만, 쉽고 빠르게, 그리고 한꺼번에 많이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근처 죽림에서 널려 있는 대나무를 잘라서 가져오면 될 뿐이니까.
나는 이걸 최대한 많이 모아 투척용 창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 이들에겐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기에 급한 대로 이렇게 죽창을 이용한 것이다.
키에에엑!
선두에 달려오던 고블린들이 마구잡이로 던져진 창에 의해 우당탕탕 넘어졌다. 대부분 찔렸다기보단 얻어맞아 넘어진 정도에 불과하지만, 죽창에 묻어 있는 오물 때문인지 뒤따르던 녀석들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 서버려 저들끼리 뒤엉키기 시작했다.
앞줄에 있는 고블린들은 연신 뒤로 물러나려 하고, 후방에 있는 녀석들은 밀어제치니, 마치 소용돌이를 보는 것처럼 대혼란이 일어났다.
“아무리 고블린의 수가 많다곤 하지만, 저들은 규율이 없고 무질서해. 그런 오합지졸을 상대로 백 명이나 되는 아군이 있다면 겁먹을 거 하나도 없어.”
고블린 수가 많아 걱정하고 있던 내게 세란이가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확실히 동생의 말대로였다. 고작 오물 묻은 죽창을 던진 것만으로도 저런 혼란을 줄 수 있다니. 이래서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구나.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압도적인 숫자인 탓에 혼란이 일어난 와중에도 입구에 다다른 고블린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죽창을 내뻗으며 울타리를 넘으려는 고블린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물론 나 역시 한 손 거들기 위해 쉼 없이 죽창을 내찔렀다.
캬악!
한 번 푹 찌를 때마다 들리는 비명 소리와 얼굴에 튀는 피, 살을 파고드는 손맛이 소름 끼쳤다.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속에 든 걸 게워내고 싶지만, 그보다도 당장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공포가 더 커 거의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뻗었다.
“군사님, 위험합니다!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나십시오!”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요!”
얼굴에 묻은 피를 소매로 거칠게 닦으며 옆을 돌아보자, 여태껏 팔짱 낀 채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던 글로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 차롄가?”
“네!”
어리석게 달려드는 또 한 마리의 고블린을 찌르며 답하자, 글로리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겨드랑이 밑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녀는 마치 느긋하게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울타리 밖으로 나가더니, 우리와 고블린들 사이에 우뚝 멈춰 섰다.
문 좌우로 설치된 횃대가 그녀를 붉게 밝혀주니, 뭔가 더욱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오너라!”
그녀의 외침은 지극히 짧고 간결했다. 하지만 기세가 남달라서일까, 놀랍게도 모든 고블린들이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오, 오오!”
그 기백이 닿은 건지, 몇몇 마을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웃긴 건 내 팔에도 잔뜩 소름이 돋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웅이란 자의 존재감인가.
동생이 말로는 실력만을 따지면 대영웅 못지않은 능력자라고 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검사답게 죽고 싶다는 바람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하게 유린당한 후 자결한다는데, 대체 어떤 불우한 사건이기에 저런 강한 여성이 그런 상황에 처하고 마는 것인지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고블린들이 글로리아에게로 우르르 달려들었다. 좁은 길이지만 워낙 수가 많다 보니 천지 사방에서 포위해 오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도 글로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되레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적진 한복판에 뛰어드는 건 무모……!
“하아아아아아아앗!”
글로리아의 거침없는 돌진에 기겁한 심정으로 목을 내밀던 나는 우뚝 멈춰 섰다. 그도 그럴 게, 고블린들의 목이 사방으로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우,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휙휙 움직이는 것 같은데…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인지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잔상처럼 그녀의 뒤를 쫓고 있는 것뿐이었다.
“대, 대단해. 저, 저것이 검사님의 실력…….”
“하나도 안 보여.”
“저건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잖…….”
“불꽃의 잔상.”
“…네? 군사님, 지금 뭐라고…….”
“불꽃의 잔상이요. 정말 불꽃의 잔상처럼 보여요.”
“음? 오, 오오… 듣고 보니 정말 그리 보입니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마을 사람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횃대에 반사되는 붉은 머리칼이 꼬리처럼 따라다니니, 정말 불꽃으로 된 잔상처럼 보였다.
세란이가 왜 그녀를 불꽃의 잔상이라고 언급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걸? 혼자서 저 많은 고블린을 압도하고 있다니. 이건 거의 학살에 가까운데? 저런 실력이라면 굳이 작전도 필요 없던 거 아닐까?
[오빠! 오빠!]
‘으, 응?’
[정신 차려! 한참 전부터 불렀잖아! 넋 나간 목소리를 보아하니, 글로리아가 본격적으로 나선 거지?]
헐, 예견 능력이 대단하다. 이 녀석, 사실 직접 보고 있는 거 아냐?
[어휴, 답답해 죽겠네. 자꾸 딴생각할래?]
‘아, 미안. 네 말대로야. 지금 글로리아가 나섰어. 이건 거의 학살 수준인데? 이 정도라면 다른 전략이 굳이 필요 없을지도…….’
[아니야! 위험해! 아무리 그녀가 강해도 사람이라 지친다고! 고블린들 또한 그녀 하나만을 노리며 곧이곧대로 덤벼들지는 않을 테고. 고블린들이 그녀를 무시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빨리 다음 작전을 이행해야 해!]
동생의 말은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지금이야 괴물처럼 보이지만, 분명 그녀도 사람이다 보니 언젠가는 지칠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작전을 짜지 않았던가.
나는 저 멀리 달빛 사이로 보이는 고블린들의 수를 얼핏 가늠해 보았다.
“반 정도는 처리했나 싶었는데, 아직 반의반도 처리 못했잖아. 제길,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모두들 움직이세요! 그녀가 시선을 끌고 있을 때, 다음 작전으로 넘어갑니다!”
“네, 네! 군사님의 명령이다! 다음 작전을 이행한다!”
“신속히 빠져! 진흙을 준비해라!”
멍하니 글로리아의 활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내 명령에 맞춰 뒤로 빠져나갔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여보, 세란이는 어때?”
“말도 마요. 얼마나 고집이 센지, 밥은 입도 대지 않아요. 게다가 아깐 형사한테 음식까지 던져 대서 제가 얼마나 난감했는데요. 에휴, 그래도 어릴 땐 난폭하진 않았는데, 요즘엔 아주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는……. 하여튼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니까.”
“…….”
신명태는 아내인 최숙자의 말을 들으며 넥타이를 풀었다. 그의 얼굴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그런 말 세란이에겐 절대 하지 마. 안 그래도 마음 약한 아이니까.”
“정말 당신은 오지랖도 넓수. 대체 그런 아이가 뭐가 좋다고 옹호하는 거예요? 설마 아직도 그 애를 우리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말에 신명태의 손이 우뚝 멈췄다.
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하나의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폐쇄성 무정자증. 비록 사는 데 지장은 없지만, 정자를 만들지 못해 평생 자신의 아이를 갖지 못하는 냉혹한 병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명태는 젊을 적부터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형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인해 조카들을 자식 대신 보살피게 된 것이다.
“불쌍한 아이야. 당신이 좀 참아. 세란이는 방에 있나?”
“그럼 없겠어요? 하아고, 아주 그 애랑 결혼해 사시구랴.”
최숙자는 흥, 거칠게 콧김을 내뿜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명태는 잠시 손에 들린 넥타이를 바라보다 소파에 내던지곤 세란의 방으로 이동했다.
“세란아, 숙부다.”
두어 번 노크했지만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고 있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신명태는 세란의 병을 알고 있기에 조심히 문을 열었다.
“자니?”
침대에 누워 있는 세란은 마치 자는 것처럼 커다란 책 한 권을 꼭 품에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신명태는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침대 가에 앉았다.
그러자 세란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어쩐지 자고 있었다기보단 뭔가에 집중하고 있어 신명태가 온 줄도 모른 것 같은 눈치였다.
세란은 책과 신명태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곧 입을 꾹 다물고 지긋이 올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호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늘 아침에 놔둔 음식도 그대로구나. 자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니?”
왠지 처음 보는 세란의 완고한 표정에 신명태는 애써 말을 돌렸다.
세란은 잠시 식탁에 놓여 있는 죽에 시선을 두더니, 다시 신명태를 올려다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아예 마주 보는 것조차 하지 않을 그녀가 저러니 신명태로선 참으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으, 으흠. 그래, 알았다. 뭔가 고민이 많은 모양이구나. 그럼 이만 쉬거라. 아, 그 책 대신 정리해 줄까?”
신명태는 너무도 큰 책을 껴안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 보여 무심코 손을 뻗었다.
한데 그 순간, 세란은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책을 더욱 세게 쥐는 게 아닌가. 제발 빼앗지 말아달라는 그녀의 바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냐. 알겠다. 쉬거라.”
신명태는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어 그대로 방을 떠났다.
세란은 그가 나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란아?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세란아?]
‘아, 아니야. 잠깐 숙부가 오셔서. 그보다 준비는 끝났지? 그러면…….’
세란은 다시 책 속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하나하나 지시에 들어갔다.
그사이, 문밖으로 나간 신명태는 거실로 향하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언제부터 저 애가 이렇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게 된 거지?’
언제나 초점 없는 눈으로 인형처럼 앉아만 있던 신세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죽어가는 것만 같은 그녀를 보며 신명태는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그런데 오늘 그는 세란의 살아 있는 눈동자를 처음 접할 수 있었다.
설마 사라진 그녀의 마음이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형님, 저는 이 일을 기뻐해야 하는 걸까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형을 불러보는 신명태였다.
고블린들은 애초 목적한 것과 같이 정면으로 뚫을 생각인 듯했다. 좁은 입구로 들어오기 위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고블린 무리를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던 난 슬며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잔뜩 긴장한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급조해 만든 죽창을 들고 내 눈치를 살폈다.
긴장감이 한껏 고조될 즈음, 드디어 고블린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갸갸갸갸갹!
케에에에에!
고작 어린아이만 한 체격인데도 천 마리가 한꺼번에 몰려드니 땅이 진동할 정도였다. 더불어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과 피부가 저릿할 만큼의 살기도 느껴졌다.
이것이 전쟁이란 걸까? 무섭다. 절로 몸이 떨렸다.
하지만 겁먹은 모습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내가 두려움에 떨면 나만을 믿으며 함께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 전부에게 공포가 전염되어 버릴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한 사람의 군사가 된 것처럼 가슴을 펴고 외쳤다.
“옵니다! 요격 준비!”
내 명령에 백 명가량 모인 마을 청년들 모두 죽창을 힘껏 꼬나 쥐었다.
동생이 그러더라. 이 마을 사람들은 전쟁 경험이 없기에 지휘 체계를 나누기보단, 내가 전부를 관리하며 명령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확실히 백 명 정도뿐인 작은 수라면 세란이의 말대로 내가 한꺼번에 지휘하는 게 편하긴 했다. 다만, 내가 다치면 통솔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게 문제지만.
“군사님, 내 사정거리에 들어왔수!”
“그럼 웰던 씨는 먼저 쏘세요!”
“그 말을 기다렸수다! 이거나 받아라!”
유일하게 활을 소지한 웰던이 활을 쏘아 올렸다.
크웩!
그의 활 솜씨는 보통이 아닌지, 가장 앞서 달려오던 고블린의 미간이 정확히 꿰뚫렸다. 놈이 쓰러지며 뒤따라오던 고블린들의 돌진을 방해했고, 덕분에 제법 속도가 줄어든 게 확연히 보였다.
“지금입니다! 투척 준비! 던지세요!”
“투, 투척! 던져! 던져어어어어어!”
“으랴아아아아앗!”
내 외침에 모두들 기합을 내지르며 변이 묻은 죽창을 던졌다.
죽창은 비록 가볍고 잘 부러지는 단점이 있지만, 쉽고 빠르게, 그리고 한꺼번에 많이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근처 죽림에서 널려 있는 대나무를 잘라서 가져오면 될 뿐이니까.
나는 이걸 최대한 많이 모아 투척용 창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 이들에겐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기에 급한 대로 이렇게 죽창을 이용한 것이다.
키에에엑!
선두에 달려오던 고블린들이 마구잡이로 던져진 창에 의해 우당탕탕 넘어졌다. 대부분 찔렸다기보단 얻어맞아 넘어진 정도에 불과하지만, 죽창에 묻어 있는 오물 때문인지 뒤따르던 녀석들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 서버려 저들끼리 뒤엉키기 시작했다.
앞줄에 있는 고블린들은 연신 뒤로 물러나려 하고, 후방에 있는 녀석들은 밀어제치니, 마치 소용돌이를 보는 것처럼 대혼란이 일어났다.
“아무리 고블린의 수가 많다곤 하지만, 저들은 규율이 없고 무질서해. 그런 오합지졸을 상대로 백 명이나 되는 아군이 있다면 겁먹을 거 하나도 없어.”
고블린 수가 많아 걱정하고 있던 내게 세란이가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확실히 동생의 말대로였다. 고작 오물 묻은 죽창을 던진 것만으로도 저런 혼란을 줄 수 있다니. 이래서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구나.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압도적인 숫자인 탓에 혼란이 일어난 와중에도 입구에 다다른 고블린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죽창을 내뻗으며 울타리를 넘으려는 고블린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물론 나 역시 한 손 거들기 위해 쉼 없이 죽창을 내찔렀다.
캬악!
한 번 푹 찌를 때마다 들리는 비명 소리와 얼굴에 튀는 피, 살을 파고드는 손맛이 소름 끼쳤다.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속에 든 걸 게워내고 싶지만, 그보다도 당장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공포가 더 커 거의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뻗었다.
“군사님, 위험합니다!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나십시오!”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요!”
얼굴에 묻은 피를 소매로 거칠게 닦으며 옆을 돌아보자, 여태껏 팔짱 낀 채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던 글로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 차롄가?”
“네!”
어리석게 달려드는 또 한 마리의 고블린을 찌르며 답하자, 글로리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겨드랑이 밑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녀는 마치 느긋하게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울타리 밖으로 나가더니, 우리와 고블린들 사이에 우뚝 멈춰 섰다.
문 좌우로 설치된 횃대가 그녀를 붉게 밝혀주니, 뭔가 더욱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오너라!”
그녀의 외침은 지극히 짧고 간결했다. 하지만 기세가 남달라서일까, 놀랍게도 모든 고블린들이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오, 오오!”
그 기백이 닿은 건지, 몇몇 마을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웃긴 건 내 팔에도 잔뜩 소름이 돋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웅이란 자의 존재감인가.
동생이 말로는 실력만을 따지면 대영웅 못지않은 능력자라고 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검사답게 죽고 싶다는 바람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하게 유린당한 후 자결한다는데, 대체 어떤 불우한 사건이기에 저런 강한 여성이 그런 상황에 처하고 마는 것인지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고블린들이 글로리아에게로 우르르 달려들었다. 좁은 길이지만 워낙 수가 많다 보니 천지 사방에서 포위해 오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도 글로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되레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적진 한복판에 뛰어드는 건 무모……!
“하아아아아아아앗!”
글로리아의 거침없는 돌진에 기겁한 심정으로 목을 내밀던 나는 우뚝 멈춰 섰다. 그도 그럴 게, 고블린들의 목이 사방으로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우,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휙휙 움직이는 것 같은데…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인지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잔상처럼 그녀의 뒤를 쫓고 있는 것뿐이었다.
“대, 대단해. 저, 저것이 검사님의 실력…….”
“하나도 안 보여.”
“저건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잖…….”
“불꽃의 잔상.”
“…네? 군사님, 지금 뭐라고…….”
“불꽃의 잔상이요. 정말 불꽃의 잔상처럼 보여요.”
“음? 오, 오오… 듣고 보니 정말 그리 보입니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마을 사람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횃대에 반사되는 붉은 머리칼이 꼬리처럼 따라다니니, 정말 불꽃으로 된 잔상처럼 보였다.
세란이가 왜 그녀를 불꽃의 잔상이라고 언급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걸? 혼자서 저 많은 고블린을 압도하고 있다니. 이건 거의 학살에 가까운데? 저런 실력이라면 굳이 작전도 필요 없던 거 아닐까?
[오빠! 오빠!]
‘으, 응?’
[정신 차려! 한참 전부터 불렀잖아! 넋 나간 목소리를 보아하니, 글로리아가 본격적으로 나선 거지?]
헐, 예견 능력이 대단하다. 이 녀석, 사실 직접 보고 있는 거 아냐?
[어휴, 답답해 죽겠네. 자꾸 딴생각할래?]
‘아, 미안. 네 말대로야. 지금 글로리아가 나섰어. 이건 거의 학살 수준인데? 이 정도라면 다른 전략이 굳이 필요 없을지도…….’
[아니야! 위험해! 아무리 그녀가 강해도 사람이라 지친다고! 고블린들 또한 그녀 하나만을 노리며 곧이곧대로 덤벼들지는 않을 테고. 고블린들이 그녀를 무시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빨리 다음 작전을 이행해야 해!]
동생의 말은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지금이야 괴물처럼 보이지만, 분명 그녀도 사람이다 보니 언젠가는 지칠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작전을 짜지 않았던가.
나는 저 멀리 달빛 사이로 보이는 고블린들의 수를 얼핏 가늠해 보았다.
“반 정도는 처리했나 싶었는데, 아직 반의반도 처리 못했잖아. 제길,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모두들 움직이세요! 그녀가 시선을 끌고 있을 때, 다음 작전으로 넘어갑니다!”
“네, 네! 군사님의 명령이다! 다음 작전을 이행한다!”
“신속히 빠져! 진흙을 준비해라!”
멍하니 글로리아의 활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내 명령에 맞춰 뒤로 빠져나갔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여보, 세란이는 어때?”
“말도 마요. 얼마나 고집이 센지, 밥은 입도 대지 않아요. 게다가 아깐 형사한테 음식까지 던져 대서 제가 얼마나 난감했는데요. 에휴, 그래도 어릴 땐 난폭하진 않았는데, 요즘엔 아주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는……. 하여튼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니까.”
“…….”
신명태는 아내인 최숙자의 말을 들으며 넥타이를 풀었다. 그의 얼굴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그런 말 세란이에겐 절대 하지 마. 안 그래도 마음 약한 아이니까.”
“정말 당신은 오지랖도 넓수. 대체 그런 아이가 뭐가 좋다고 옹호하는 거예요? 설마 아직도 그 애를 우리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말에 신명태의 손이 우뚝 멈췄다.
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하나의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폐쇄성 무정자증. 비록 사는 데 지장은 없지만, 정자를 만들지 못해 평생 자신의 아이를 갖지 못하는 냉혹한 병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명태는 젊을 적부터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형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인해 조카들을 자식 대신 보살피게 된 것이다.
“불쌍한 아이야. 당신이 좀 참아. 세란이는 방에 있나?”
“그럼 없겠어요? 하아고, 아주 그 애랑 결혼해 사시구랴.”
최숙자는 흥, 거칠게 콧김을 내뿜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명태는 잠시 손에 들린 넥타이를 바라보다 소파에 내던지곤 세란의 방으로 이동했다.
“세란아, 숙부다.”
두어 번 노크했지만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고 있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신명태는 세란의 병을 알고 있기에 조심히 문을 열었다.
“자니?”
침대에 누워 있는 세란은 마치 자는 것처럼 커다란 책 한 권을 꼭 품에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신명태는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침대 가에 앉았다.
그러자 세란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어쩐지 자고 있었다기보단 뭔가에 집중하고 있어 신명태가 온 줄도 모른 것 같은 눈치였다.
세란은 책과 신명태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곧 입을 꾹 다물고 지긋이 올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호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늘 아침에 놔둔 음식도 그대로구나. 자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니?”
왠지 처음 보는 세란의 완고한 표정에 신명태는 애써 말을 돌렸다.
세란은 잠시 식탁에 놓여 있는 죽에 시선을 두더니, 다시 신명태를 올려다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아예 마주 보는 것조차 하지 않을 그녀가 저러니 신명태로선 참으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으, 으흠. 그래, 알았다. 뭔가 고민이 많은 모양이구나. 그럼 이만 쉬거라. 아, 그 책 대신 정리해 줄까?”
신명태는 너무도 큰 책을 껴안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 보여 무심코 손을 뻗었다.
한데 그 순간, 세란은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책을 더욱 세게 쥐는 게 아닌가. 제발 빼앗지 말아달라는 그녀의 바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냐. 알겠다. 쉬거라.”
신명태는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어 그대로 방을 떠났다.
세란은 그가 나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란아?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세란아?]
‘아, 아니야. 잠깐 숙부가 오셔서. 그보다 준비는 끝났지? 그러면…….’
세란은 다시 책 속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하나하나 지시에 들어갔다.
그사이, 문밖으로 나간 신명태는 거실로 향하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언제부터 저 애가 이렇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게 된 거지?’
언제나 초점 없는 눈으로 인형처럼 앉아만 있던 신세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죽어가는 것만 같은 그녀를 보며 신명태는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그런데 오늘 그는 세란의 살아 있는 눈동자를 처음 접할 수 있었다.
설마 사라진 그녀의 마음이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형님, 저는 이 일을 기뻐해야 하는 걸까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형을 불러보는 신명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