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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크, 큰일이야.’
[왜? 무슨 이변이라도 생겼어?]
‘그게… 글로리아가 도와주지 않겠대.’
[뭐어?]
‘어쩌지? 설득해야… 이런 제길! 급하니까 이따가 다시 말할게!’
세란이와 텔레파시를 나누던 도중 글로리아가 더는 볼일 없다는 듯 떠나려 하기에 나는 황급히 달려갔다.
“기다려요!”
난 무작정 그녀를 막아섰다. 그러자 글로리아는 더없이 사나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비켜라.”
“잠깐만요! 당신은 이곳 사람들이 죽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실 생각이에요?”
“그래.”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태도에 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약한 자는 지켜야 한다고!”
그녀가 내게 한 말을 반박하듯 꺼내 들자, 살짝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글로리아.
“그랬지.”
“그런데 왜!”
내가 더욱 목소리를 높이자, 글로리아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왜냐고? 저들은 약자이기 이전에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 말에 마을 사람 전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순간, 자신의 평판이 바닥을 쳤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봐라, 이들은 기근과 억압으로부터 영지를 뛰쳐나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자들이다. 안전이 보장된 영지에서 뛰쳐나와 생활한다는 것은 본인이 그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뜻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감안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이들은 그동안 몬스터의 습격을 대비하지 않은 죄로 죽어 마땅한 자들이 된 거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이긴 했다. 이들은 그 흔한 무기도 갖춰놓지 않은 상태이며, 그나마 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도 몬스터가 맘먹고 오른다면 넘지 못할 높이도 아니니까.
영주의 지배에서 뛰쳐나와 죽음을 감수하고 사는 사람들치고는 대처가 너무 안일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마을 사람들도 자각하고 있었는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다들 어깨만 늘어뜨렸다.
“분명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욕심과 영주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무작정 뛰쳐나왔겠지. 영지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성벽을 만들고, 병사를 배치하며, 매년 몬스터를 사냥하는 기사들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런 병사와 귀족, 영주를 무시하고 떠난 이들을 내가 도와줘야 할 이유가 있나?”
글로리아가 신랄하게 비판을 쏟아내자, 마을 사람들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반박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굶어보기나 했어!”
“폭정에 못 이겨 동생이 죽었어요! 그런 곳에서 어찌 살란 말이에요!”
“이렇게 도망치는 것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어!”
“우리 사정도 모르고 아는 체하지……!”
순간, 글로리아는 검을 뽑아 드는 것만으로 격정에 찬 목소리들을 단숨에 물리쳤다.
그녀는 그대로 마을 사람들을 향해 검을 겨눈 채 성난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굶어보았다. 노예 못지않은 대우도 받아보았다. 그래서 난 너희를 더욱 질타한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은 너무도 날카롭고 무거워 절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의지를 끝까지 관철해라. 저 필요할 때만 도움을 청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가축과 다를 바 없다. 먹이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옳다. 그러니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한들 구차하게 나를 설득하려 들지 마라.”
살기를 느낀 건지, 마을 사람 모두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어쩌면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걸지도.
“그리고 너, 다시 한 번 내 앞을 막아선다면 베겠다. 명심해라.”
글로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옆을 스쳐 가듯 지나갔다.
그녀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의지를 관철하고 행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엔 책임이 뒤따른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너무 몰인정하고 삭막하다. 아무리 책임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이런 대재앙 같은 일은 어찌해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사람은 서로 도와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부가 글로리아같이 생각한다면, 인류는 진즉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그녀에게 해준다 한들 코웃음치고 말겠지. 젠장, 이대로는 붙잡을 수 없어. 방법,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렇구나, 알겠어. 책 속에선 그들이 영주의 폭정을 피해 화전을 일군 사실을 몰랐기에 구하려 노력한 거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설득할 수 없겠지. 그녀는 고집이 강한 사람이야. 한 번 결정한 것에 대해 타협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오빠, 별수 없어. 다른 대책을 강구해 보자.]
‘아니, 무조건 설득해야 해. 네가 말했잖아, 마을 사람들을 전부 구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글로리아가 있어야 한다고.’
[그렇긴 하지만… 방법이 없다니까? 괜히 억지를 부리다간 되레 오빠가 위험해질 수 있어.]
‘…세란아, 혹여나 잘못돼서 내가 죽으면… 미안하다.’
[어? 오, 오빠!]
나는 세란이의 만류를 무시하며 다시 글로리아의 앞으로 나아갔다.
“기다려요!”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대차게 그녀의 앞을 막았다.
그러자 이번엔 정말 죽일 듯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글로리아.
“분명히 말했다. 다시 날 막아서면 벤다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단지 그뿐인데도 싸늘한 예기가 내 몸을 따갑게 찔렀다.
“크윽!”
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숨도 쉬기 어렵고, 긴장감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혹시 이게 살기라는 걸까?
“당신의 말은… 크윽, 오, 옳아요.”
“호오?”
내가 그녀의 뜻을 긍정했다는 사실보다는 살기를 온전히 버텨가며 말했다는 것이 더 감탄스러운지, 미동도 없던 그녀의 눈썹이 살짝 위로 들려졌다.
“하, 하지만! 저기 있는 어린아이들은… 무, 무슨 죄가 있나요!”
입술이 떨려 절로 말이 더듬거렸지만, 그래도 할 말은 다 했다. 나의 시도는 다행히 성공적이었는지, 내가 아이들을 언급하자 금방이라도 찌를 듯한 살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글로리아는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디 더 해보란 식으로 턱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좋아, 그렇다면 기꺼이 해주지.
“가족을 따라 화전민이 되었으니, 아이들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한 죄 때문에? 아니면 힘이 없는 죄? 그것도 아니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죄 때문에?”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다르잖아요! 아이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욕심이나 영주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같은 걸 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저 가족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처지잖아요!”
내가 옹기종기 모여 손가락만 빨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키자, 글로리아의 눈이 한없이 가늘어졌다.
나는 거기서 결정타를 날리듯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당신이 제게 말했죠, 어린아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용기도 없는 짐승이라고. 그래서! 이번엔 짐승이란 말 듣지 않도록 도망가지 않으렵니다. 그럼 이제 당신에게 되물어보죠. 당신은 짐승입니까, 사람입니까?”
내 도발적인 행동과 질문에 글로리아의 온몸에서 폭발하듯 살기가 터져 나왔다.
“우윽!”
“으헉!”
그 살벌한 기세에 마을 사람들 전부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몇몇은 그대로 주저앉고, 어린아이들은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그 살기를 가장 가까이서 접한 나는 농담이 아니라 이빨이 따닥, 부딪칠 정도로 떨었다.
젠장, 두려움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실제로 꼴사납게 눈물콧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글로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탁, 쳐냈다.
“아까부터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다니, 말주변이 늘었군.”
그녀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붉은 머리를 한차례 뒤흔들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의 말대로 어린아이들은 죄가 없다. 그렇다면 네게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린아이를 구해야겠지.”
“그렇다면!”
“하나 그러한들 무슨 소용이 있지?”
들뜬 내 마음을 그녀는 말 한마디로 나락까지 떨어뜨렸다.
“아무리 나일지라도 천 마리가 넘는 고블린을 상대하며 아이들을 전부 지켜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낱 피어 타이거가 무서워 굴 안에 숨어 있던 너의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하는가. 차라리 어린아이들만이라도 내가 데리고 도망가는 게 더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겠군.”
“그, 그건……!”
나는 일순간 말문이 막혀 반박하지 못했다.
‘젠장, 정말 고집이 장난 아니네. 이번엔 전략전술을 걸고 넘어왔어. 무슨 방법이…….’
[그런 것이라면… 오빠, 말해! 병법의 기본은!]
갑자기 세란이가 소리를 높이기에 나는 엉겁결에 말을 따라 했다.
“벼, 병법의 기본은!”
[적에게는 불리하고, 아군에겐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것!]
“적에게는 불리하고, 아군에겐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것!”
내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자, 글로리아는 물론,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마저 눈을 크게 떴다.
난 그 뒤로 이어진 세란이의 말을 겨우 이해하며 몹시 당황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인지라 두 눈을 꼭 감고 손가락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이런 좋은 조건임에도 이기지 못한다면, 병법을 논할 자격조차 없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맹세하죠! 어린아이들은 물론, 마을 사람도 한 명 빠짐없이… 헉? 그, 그게 가능… 젠장, 내가 전부 살려 보이겠노라고! 만약 그러지 못할 시엔 당신이 절 죽여도 아무 말 않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도와주시겠습니까?”
하늘 높이 치켜든 손가락이 후들후들 떨렸다.
세, 세란아, 정말 괜찮으 거 맞니? 너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무섭거든?
불안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글로리아는 그저 내 눈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듯싶더니…….
“그 맹세 잊지 마라.”
여태껏 겨누고 있던 검으로 내 머리칼을 성둥, 잘라 버리곤 만족한 듯 얌전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마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설마… 아까 벤다는 다짐을 번복하기 싫어서 내 머리칼만 자른 거야?
실로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게 오히려 글로리아 성격다워서 나름 이해되기도 했다.
정말 저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절대 철회하지 않는 사람이네. 꺾여 죽을지언정 휘는 것 없이 직선적으로 행동하는 성격.
막말로 고집스럽다고 할 수 있지만, 달리 보면 빈말이나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을 타입이라는 소리이기도 하니…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아.”
어쨌든 나는 긴장감이 한순간 탁 풀어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와, 정말 무서웠다. 어릴 때 아버지를 대면했을 때보다 더더욱. 아직도 잘게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다.
[오빠, 성공했어?]
‘어찌어찌. 아무튼, 돌은 던져졌어. 이제 내 목숨은 세란이 너에게 달렸다.’
[응, 맡겨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저런 자신감을 내보일 수 있다니, 도대체 어찌 돼먹은 심장이람. 그래, 차라리 저런 식으로 자신감을 내비치는 게 낫다. 그래야 어떻게든 해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길 테니까.
해보자. 이제 죽든 살든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 속, 은은히 비치는 달빛을 통해 이젠 730까지 줄어져 있는 손등의 숫자를 내려다보며 인생 처음으로 결의를 다졌다.
― 생존자 : 730명 ―
‘크, 큰일이야.’
[왜? 무슨 이변이라도 생겼어?]
‘그게… 글로리아가 도와주지 않겠대.’
[뭐어?]
‘어쩌지? 설득해야… 이런 제길! 급하니까 이따가 다시 말할게!’
세란이와 텔레파시를 나누던 도중 글로리아가 더는 볼일 없다는 듯 떠나려 하기에 나는 황급히 달려갔다.
“기다려요!”
난 무작정 그녀를 막아섰다. 그러자 글로리아는 더없이 사나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비켜라.”
“잠깐만요! 당신은 이곳 사람들이 죽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실 생각이에요?”
“그래.”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태도에 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약한 자는 지켜야 한다고!”
그녀가 내게 한 말을 반박하듯 꺼내 들자, 살짝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글로리아.
“그랬지.”
“그런데 왜!”
내가 더욱 목소리를 높이자, 글로리아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왜냐고? 저들은 약자이기 이전에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 말에 마을 사람 전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순간, 자신의 평판이 바닥을 쳤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봐라, 이들은 기근과 억압으로부터 영지를 뛰쳐나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자들이다. 안전이 보장된 영지에서 뛰쳐나와 생활한다는 것은 본인이 그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뜻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감안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이들은 그동안 몬스터의 습격을 대비하지 않은 죄로 죽어 마땅한 자들이 된 거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이긴 했다. 이들은 그 흔한 무기도 갖춰놓지 않은 상태이며, 그나마 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도 몬스터가 맘먹고 오른다면 넘지 못할 높이도 아니니까.
영주의 지배에서 뛰쳐나와 죽음을 감수하고 사는 사람들치고는 대처가 너무 안일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마을 사람들도 자각하고 있었는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다들 어깨만 늘어뜨렸다.
“분명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욕심과 영주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무작정 뛰쳐나왔겠지. 영지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성벽을 만들고, 병사를 배치하며, 매년 몬스터를 사냥하는 기사들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런 병사와 귀족, 영주를 무시하고 떠난 이들을 내가 도와줘야 할 이유가 있나?”
글로리아가 신랄하게 비판을 쏟아내자, 마을 사람들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반박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굶어보기나 했어!”
“폭정에 못 이겨 동생이 죽었어요! 그런 곳에서 어찌 살란 말이에요!”
“이렇게 도망치는 것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어!”
“우리 사정도 모르고 아는 체하지……!”
순간, 글로리아는 검을 뽑아 드는 것만으로 격정에 찬 목소리들을 단숨에 물리쳤다.
그녀는 그대로 마을 사람들을 향해 검을 겨눈 채 성난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굶어보았다. 노예 못지않은 대우도 받아보았다. 그래서 난 너희를 더욱 질타한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은 너무도 날카롭고 무거워 절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의지를 끝까지 관철해라. 저 필요할 때만 도움을 청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가축과 다를 바 없다. 먹이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옳다. 그러니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한들 구차하게 나를 설득하려 들지 마라.”
살기를 느낀 건지, 마을 사람 모두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어쩌면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걸지도.
“그리고 너, 다시 한 번 내 앞을 막아선다면 베겠다. 명심해라.”
글로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옆을 스쳐 가듯 지나갔다.
그녀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의지를 관철하고 행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엔 책임이 뒤따른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너무 몰인정하고 삭막하다. 아무리 책임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이런 대재앙 같은 일은 어찌해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사람은 서로 도와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부가 글로리아같이 생각한다면, 인류는 진즉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그녀에게 해준다 한들 코웃음치고 말겠지. 젠장, 이대로는 붙잡을 수 없어. 방법,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렇구나, 알겠어. 책 속에선 그들이 영주의 폭정을 피해 화전을 일군 사실을 몰랐기에 구하려 노력한 거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설득할 수 없겠지. 그녀는 고집이 강한 사람이야. 한 번 결정한 것에 대해 타협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오빠, 별수 없어. 다른 대책을 강구해 보자.]
‘아니, 무조건 설득해야 해. 네가 말했잖아, 마을 사람들을 전부 구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글로리아가 있어야 한다고.’
[그렇긴 하지만… 방법이 없다니까? 괜히 억지를 부리다간 되레 오빠가 위험해질 수 있어.]
‘…세란아, 혹여나 잘못돼서 내가 죽으면… 미안하다.’
[어? 오, 오빠!]
나는 세란이의 만류를 무시하며 다시 글로리아의 앞으로 나아갔다.
“기다려요!”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대차게 그녀의 앞을 막았다.
그러자 이번엔 정말 죽일 듯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글로리아.
“분명히 말했다. 다시 날 막아서면 벤다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단지 그뿐인데도 싸늘한 예기가 내 몸을 따갑게 찔렀다.
“크윽!”
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숨도 쉬기 어렵고, 긴장감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혹시 이게 살기라는 걸까?
“당신의 말은… 크윽, 오, 옳아요.”
“호오?”
내가 그녀의 뜻을 긍정했다는 사실보다는 살기를 온전히 버텨가며 말했다는 것이 더 감탄스러운지, 미동도 없던 그녀의 눈썹이 살짝 위로 들려졌다.
“하, 하지만! 저기 있는 어린아이들은… 무, 무슨 죄가 있나요!”
입술이 떨려 절로 말이 더듬거렸지만, 그래도 할 말은 다 했다. 나의 시도는 다행히 성공적이었는지, 내가 아이들을 언급하자 금방이라도 찌를 듯한 살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글로리아는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디 더 해보란 식으로 턱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좋아, 그렇다면 기꺼이 해주지.
“가족을 따라 화전민이 되었으니, 아이들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한 죄 때문에? 아니면 힘이 없는 죄? 그것도 아니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죄 때문에?”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다르잖아요! 아이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욕심이나 영주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같은 걸 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저 가족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처지잖아요!”
내가 옹기종기 모여 손가락만 빨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키자, 글로리아의 눈이 한없이 가늘어졌다.
나는 거기서 결정타를 날리듯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당신이 제게 말했죠, 어린아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용기도 없는 짐승이라고. 그래서! 이번엔 짐승이란 말 듣지 않도록 도망가지 않으렵니다. 그럼 이제 당신에게 되물어보죠. 당신은 짐승입니까, 사람입니까?”
내 도발적인 행동과 질문에 글로리아의 온몸에서 폭발하듯 살기가 터져 나왔다.
“우윽!”
“으헉!”
그 살벌한 기세에 마을 사람들 전부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몇몇은 그대로 주저앉고, 어린아이들은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그 살기를 가장 가까이서 접한 나는 농담이 아니라 이빨이 따닥, 부딪칠 정도로 떨었다.
젠장, 두려움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실제로 꼴사납게 눈물콧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글로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탁, 쳐냈다.
“아까부터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다니, 말주변이 늘었군.”
그녀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붉은 머리를 한차례 뒤흔들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의 말대로 어린아이들은 죄가 없다. 그렇다면 네게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린아이를 구해야겠지.”
“그렇다면!”
“하나 그러한들 무슨 소용이 있지?”
들뜬 내 마음을 그녀는 말 한마디로 나락까지 떨어뜨렸다.
“아무리 나일지라도 천 마리가 넘는 고블린을 상대하며 아이들을 전부 지켜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낱 피어 타이거가 무서워 굴 안에 숨어 있던 너의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하는가. 차라리 어린아이들만이라도 내가 데리고 도망가는 게 더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겠군.”
“그, 그건……!”
나는 일순간 말문이 막혀 반박하지 못했다.
‘젠장, 정말 고집이 장난 아니네. 이번엔 전략전술을 걸고 넘어왔어. 무슨 방법이…….’
[그런 것이라면… 오빠, 말해! 병법의 기본은!]
갑자기 세란이가 소리를 높이기에 나는 엉겁결에 말을 따라 했다.
“벼, 병법의 기본은!”
[적에게는 불리하고, 아군에겐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것!]
“적에게는 불리하고, 아군에겐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것!”
내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자, 글로리아는 물론,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마저 눈을 크게 떴다.
난 그 뒤로 이어진 세란이의 말을 겨우 이해하며 몹시 당황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인지라 두 눈을 꼭 감고 손가락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이런 좋은 조건임에도 이기지 못한다면, 병법을 논할 자격조차 없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맹세하죠! 어린아이들은 물론, 마을 사람도 한 명 빠짐없이… 헉? 그, 그게 가능… 젠장, 내가 전부 살려 보이겠노라고! 만약 그러지 못할 시엔 당신이 절 죽여도 아무 말 않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도와주시겠습니까?”
하늘 높이 치켜든 손가락이 후들후들 떨렸다.
세, 세란아, 정말 괜찮으 거 맞니? 너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무섭거든?
불안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글로리아는 그저 내 눈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듯싶더니…….
“그 맹세 잊지 마라.”
여태껏 겨누고 있던 검으로 내 머리칼을 성둥, 잘라 버리곤 만족한 듯 얌전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마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설마… 아까 벤다는 다짐을 번복하기 싫어서 내 머리칼만 자른 거야?
실로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게 오히려 글로리아 성격다워서 나름 이해되기도 했다.
정말 저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절대 철회하지 않는 사람이네. 꺾여 죽을지언정 휘는 것 없이 직선적으로 행동하는 성격.
막말로 고집스럽다고 할 수 있지만, 달리 보면 빈말이나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을 타입이라는 소리이기도 하니…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아.”
어쨌든 나는 긴장감이 한순간 탁 풀어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와, 정말 무서웠다. 어릴 때 아버지를 대면했을 때보다 더더욱. 아직도 잘게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다.
[오빠, 성공했어?]
‘어찌어찌. 아무튼, 돌은 던져졌어. 이제 내 목숨은 세란이 너에게 달렸다.’
[응, 맡겨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저런 자신감을 내보일 수 있다니, 도대체 어찌 돼먹은 심장이람. 그래, 차라리 저런 식으로 자신감을 내비치는 게 낫다. 그래야 어떻게든 해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길 테니까.
해보자. 이제 죽든 살든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 속, 은은히 비치는 달빛을 통해 이젠 730까지 줄어져 있는 손등의 숫자를 내려다보며 인생 처음으로 결의를 다졌다.
― 생존자 : 730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