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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빨리 걷지 못해?”

“윽!”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조잡한 활을 멘 중년인이 나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나는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는데, 때마침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년 남성은 마을 안까지 끌고 들어가 마당 딸린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촌장님! 촌장님, 계슈?”

우렁찬 목소리로 기별을 넣자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 나무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응? 웰던 아닌가. 이런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인가?”

“난데없는 사고가 터져 찾아왔수. 꿇어라, 이놈!”

웰던이라 불린 중년인은 거칠게 나를 바닥에 꿇어 앉혔다.

“외지인인가? 허어, 오늘따라 손님이 자주 보이는군. 그런데 왜 묶어놓았는가? 그자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겐가?”

촌장이 의문을 담아 묻자, 웰던이란 중년인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내려쳤다.

“아니, 글쎄! 이 녀석이 절벽 다리를 돌칼로 끊어놓았지 뭐유! 내참, 기가 막혀서!”

“허, 그 말이 참말인가.”

“참말이고말고! 덕분에 당분간 사냥은커녕 과일 채집도 글렀수다.”

“그런… 슬슬 겨울 식량을 비축해야 할 때인데, 이게 무슨 봉변인가!”

내가 한 짓을 듣자 촌장도 웰던이란 중년인처럼 얼굴을 붉히며 격노했다.

“무슨 일이지?”

바로 그때, 촌장의 집에서 또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빨간 머리칼, 무표정한 얼굴까지도 아름다운 얼굴, 자수정처럼 무겁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까지… 이젠 나름 익숙하기까지 한 그녀, 글로리아 클라인드였다.

세란이의 설명을 들어 그녀가 이 마을에 있을 거란 건 이미 알았지만, 설마 촌장집에 머무르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고, 검사님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글로리아의 등장에 촌장은 허겁지겁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으로 나만을 내려다보았다.

“거지나 짐승이 아니라 도적이었나?”

“크윽.”

비아냥대는 말에 나도 모르게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역시 뭔가… 저 사람은 싫다.

한편,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지, 나와 글로리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혹시… 서로 아는 사이신지?”

“아니, 모른다.”

그녀는 딱 잘라 잡아뗐다.

참내,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모른 체할 수 있는 건지.

“그보다, 고기는 아직 멀었나?”

“아, 검사님께서 잡아오신 피어 타이거는 손질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녁때까지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알았다.”

글로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흥미 없다는 듯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물론 그전에 내가 막았지만.

“잠시만요.”

줄곧 가만히 있던 내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자, 글로리아와 촌장, 그리고 웰던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잠시 노을 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한 뒤, 미리 준비한 대로 말을 이었다.

“저는 부득이하게 다리를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라?”

“그게 무슨 말이지?”

글로리아는 그저 지그시 나를 노려보았고, 촌장은 눈가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으며, 웰던은 나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그 살벌한 모습에 나는 살짝 긴장했지만, 애써 의연한 척 말을 이었다.

“이 마을에 당도하기 전, 저는 무수히 많은 고블린들이 산을 내려오는 걸 보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다리를 건너오면 크게 위험하기에 끊어놓은 것입니다.”

“허, 고블린? 어린아이도 잡는 몬스터가 뭐가 무섭다고!”

“한두 마리였다면 저도 걱정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제가 보았을 땐 적어도 천 마리 정도는 되어 보였습니다.”

“처, 천……!”

“아니, 촌장님은 저 말을 믿으슈? 에라이, 썩을 놈아! 사기를 쳐도 그럴듯한 사기를 쳐야지! 세상천지에 천 마리씩 무리 지어 다니는 고블린이 어딨어! 어디서 되지도 않는 잔머리를 굴리고 있…….”

“촌장님! 촌장니이임!”

웰던의 난폭한 언사가 계속되던 그때, 저 멀리서 젊은 청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촌장은 아주 잠시 나를 내려다보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머리를 휙휙 내저었다.

“넌 그렌이 아니냐.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한 게냐?”

“큰일이라요! 밖에! 밖에 고블린들이 드글드글하게 모여 있당께요!”

“뭐, 뭣이라?”

웰던과 촌장, 심지어 시큰둥하게 서 있던 글로리아조차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속으로 흥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안심하세요. 다리가 없으니 당장은 여기로 건너오지 못할 겁니다.”

“자네…….”

“촌장님,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랑께요!”

“그, 그렇군! 일단 내 직접 확인해 봐야겠네! 웰던, 자네는 나와 같이 가세나!”

“알겠수!”

“저도 데려가 주세요!”

막 뛰쳐나가려던 촌장을 내가 붙잡았다. 그러자 촌장과 웰던은 서로를 돌아보며 망설였다.

그 순간, 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내 몸에 묶여 있던 밧줄이 스르륵 풀렸다.

“어?”

나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끔뻑거렸다. 딱 한 명, 글로리아만이 착, 소리를 내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을 뿐이었다.

지금 뭐야? 설마 검으로 밧줄을 자른 거야? 보, 보이지도 않았는데?

“와라.”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자, 그녀는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내뱉곤 저 혼자 달려 나가 버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촌장은 목을 쭉 빼고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지 머리를 붕붕 내저으며 모두를 이끌고 마을 입구로 달렸다.



“어, 엄청난 수구나. 저게 다 고블린이라니…….”

마을 밖, 절벽까지 나온 촌장은 개미 떼처럼 모여 있는 고블린을 보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 세란이의 말대로 끔찍한 수의 고블린들이었다.

“만약 다리가 멀쩡했다면 지금쯤…….”

촌장은 뒷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지, 긴장한 모습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됐는지,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저놈 말이 진짜였다니…….”

웰던은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는 내게 지은 죄가 있다 보니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휴, 다행히 여기까진 세란이의 생각대로다. 그럼 슬슬 다음 수로 넘어가 볼까?

“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고블린은 집요한 몬스터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필시 절벽을 돌아 마을로 올 겁니다.”

확신하는 듯한 내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기겁하며 놀랐다.

“그, 그런! 촌장님, 당장 도망가야 합니다!”

“그렇긴 한데… 어디로, 대체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일단 마을을 버리고 산을 내려가야…….”

“바보 같은 소리! 벌써 잊었는가! 우린 영주의 폭정에 못 이겨 산속으로 도망쳐 와 화전을 일구지 않았는가! 그런 우리가 산을 내려가면 필시 중죄인으로 처벌당할 것이네! 자네는 노예가 되고 싶은가!”

“하, 하지만…….”

“초, 촌장님, 저것 보슈! 썩을 고블린들이 옆으로 돌아가고 있수다! 정말 절벽을 돌아오려는 것 같수!”

마을 사람들과 촌장이 한창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웰던이 급히 끼어들었다.

그의 말대로 절벽 건너편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고블린들이 우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먼지구름을 이루며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조급하게 발을 굴렀다.

“크윽, 저 속도면 한나절도 걸리지 않겠수다!”

“한나절이라니! 그, 그 말, 틀림없는가?”

“산을 타며 밥 빌어먹는 사냥꾼인 내 말을 못 믿으슈?”

웰던이 흘겨보며 타박하자 촌장은 신음을 삼켰다.

“하는 수 없구나. 영주님의 관대함을 믿고 빌어보는 수밖에. 고블린이 침공한다는 정보를 제공하면 어느 정도는 죄를 사해주실지도 모르…….”

“아뇨.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순간, 나는 희망으로 가득 찬 촌장의 말을 싹둑 자르며 끼어들었다.

“지금 촌장님이 말하는 건 산림 밖에 있는 브렌터스 남작 영지 맞죠? 잘 아시다시피 그곳의 특산물은 노예입니다. 이곳 크라이 산림에서 나오는 몬스터와 이종족을 잡아 파는 것이 주된 산업이죠. 그런 영지에서 여러분을 노예로 잡지 않는다고요? 들어보니 폭정을 견디지 못해 화전을 일구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영주의 성격이 어떤지는 저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말이 너무 신랄했는지 촌장은 아무 말도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세란이는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는 선택만큼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고. 방금 내가 언급한 문제도 있지만, 이 마을엔 여성과 노인, 그리고 아이들도 많기에 하산하기도 전에 고블린에게 따라잡혀 전멸할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동생이 그리 말하면 정말 그리될 것이기에 나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그, 그럼 우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내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손가락을 바닥으로 내리며 말을 이었다.

“고블린을 막는다. 바로 여기서요.”

“뭐, 뭣!”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기가 막히다 못해 숨이 막히는지, 억 소리를 내는 사람들.

나는 그 반응이 살짝 반가웠다. 나도 세란이에게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저들처럼 놀랐으니까.

“혹시 적을 대비한 무기는 있나요?”

“그런 게 있을 턱이 있겠나. 기껏해야 농기구뿐이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지만, 촌장의 답변은 무척이나 음울했다.

“무, 무기라면 웰던 씨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사용하면……!”

“턱도 없어! 나도 기껏해야 이 활 정도뿐이야! 무두용 칼이 몇 개 있긴 하지만, 그런 걸 누구 코에 붙이겠어?”

사냥꾼인 웰던마저도 부정적으로 고개를 젓자, 마을 사람들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도 혹시나 싶었는데, 기대하지 말라던 세란이 말대로네. 이 녀석은 대체 어디까지 앞을 내다본 거람.

“그래도 절망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우리에겐 마을을 지키는 울타리가 있으니까요.”

조잡하긴 하지만 마을엔 2미터 높이의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고블린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글로리아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에겐 이분이 있습니다.”

내가 그녀를 가리키며 언급하자,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글로리아를 돌아보았다.

“오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겐 검사님이 계셨어.”

“맞아! 피어 타이거를 홀로 잡으실 정도의 실력이라면!”

마을 사람들이 두 손을 맞잡으며 기대에 찬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렇게 시선이 글로리아에게로 모이자, 나는 기회는 지금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책에서 그녀는 홀로 마을을 위해 싸웠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번에도 틀림없이…….

“싫다.”

지금껏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 있던 글로리아는 고개만 돌려 나를 돌아보더니, 매우 간결하게 거절해 버렸다.

“네, 네?”

자신 있게 권한 내가 되레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 정도로 지금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