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7화
바닥에 주저앉아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을까. 본격적으로 태양빛이 뜨거워지기에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약하고 용기도 없는 놈이다. 동료를 발판 삼아 도망쳤을 뿐만 아니라, 굴 안에 피신했을 때도 용기가 없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굶어 죽을 뻔했다.
조금은 변한 줄 알았는데, 동생을 다치게 할 수밖에 없던 당시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다.
“내게 조금만 힘이 있었다면…….”
아버지와 싸워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야수와 싸워 동료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처하지도 않고, 그 여인에게 혐오스런 눈빛을 받지도 않았겠지. 당연히 동생도 평범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을 테고, 다은 누나도 죽지 않았을… 제기랄!
나는 이마를 힘껏 주먹으로 쳤다.
후회뿐인 일들을 이제 와 되새겨 봤자 무엇 하겠는가.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인데.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까 보냐.”
난 어기적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약하고 용기 없는 놈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당장 살아남는 것과는 별개다.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살고 싶으냐’고 말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받을 때처럼, 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기필코 동생을 다시 볼 것이다.
“이런 정체도 모를 세계에서 죽는 건 사절이야.”
반쯤 해진 옷을 북 찢어 머리에 동여맸다. 거슬리던 머리가 정리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좌절을 딛고 일어난 나는 최우선적으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주변 지리를 알고 있다면 마을을 찾아 내려가는 게 최우선순위겠지만, 그걸 모르니 당장 먹고살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그 야수 같은 놈이 또 있을지 모르니, 그에 대한 방비도 필요하다. 정장남의 말마따나 내가 쉴 공간도, 무기도, 그리고 정보도 필요했다.
“으윽, 하아, 하아…….”
그렇게 먹을 것을 찾아 한동안 움직였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안 그래도 지친 몸인데, 억지로 움직였더니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도저히 움직일 기력이 없어 나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한낮인데도 기운이 없어 눈이 가물거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한계에 다다른 경험이 있었던가. 이거, 바닥에 있는 풀이라도 뜯어 먹어야 하는 거 아닐까?
진지하게 잡초를 바라보다 한 움큼 뜯어 먹어보았다. 당연하게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이라 눈물콧물 다 흘리며 내뱉고 말았지만.
심신이 잔뜩 지쳐서인가 눈앞으로 세란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문득, 나처럼 동생도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란이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니까.
“크윽! 움직여라… 포기하지 마.”
근육통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독립해 동생과 함께 살겠다는 꿈이 있다! 이런 곳에서 주저앉을 순 없단 말이다!
근처 나무를 부둥켜안고 기어이 일어나는 데 성공했다. 손을 떼자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안간힘을 쓰며 억지로 버텨냈다.
젠장, 이젠 걷는 것도 힘들 정도라니. 정말 한계이긴 한 모양이네.
막 태어난 망아지가 억지로 몸을 세우려는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지탱하던 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바로 그때.
[부탁이야, 대답 좀 해줘…….]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애틋한 울림.
난 그 목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어? 이 목소리는, 세, 세란이야?’
[히악?]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동생을 부르자, 상대 쪽에서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저 목소리를 어찌 모르겠는가. 이 반가운 텔레파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세란이지? 세란이 맞지? 세란아!’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는 않지만, 난 토하듯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오, 오빠야?]
동생도 그제야 나란 걸 알았는지 몹시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기어코 동생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무척이나 긴 시간 동안. 역시 동생도 나처럼 걱정하고 있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어허허엉, 오빠, 오빠… 으허어어어어엉!]
‘울지 마. 오빠는 괜찮으니까 울지 마.’
난 나무에 다시 몸을 기댄 채 다독이듯 텔레파시를 전했다. 비록 바로 앞에 있지는 않지만, 어쩐지 녀석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평소처럼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동생과 대화할 수 있어서, 동생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어서.
생전 믿지도 않던 신에게 감사를 표하며 난 회개하듯 눈물을 흘렸다.
세란이와 나는 그렇게 한동안 울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텔레파시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가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확인했다. 그러다 다시 대화가 통하면 또 울고… 그 짓을 의미 없이 반복했다.
‘이제 좀 진정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내가 물었다. 비록 동생의 얼굴은 볼 수 없으나 어쩐지 고개를 끄덕인 것만 같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는 건지, 단지 그럴 거라 예상하는 건진 아리송했지만.
‘그런데 어떻게 텔레파시가 연결된 거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연결되지 않았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세란이는 명확히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훌쩍이는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책. 책을 잡고 말하니까 연결됐어. 아마도 이게 연결 고리일 거야.]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책 속이다. 그렇다면 책이 그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동생과 다시 텔레파시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오빠는 지금 어디 있는 거야?]
‘그…….’
답변하려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까.
책 속에 들어오게 된 일? 나레스란 자로 인해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생존 게임을 시작하게 된 일?
이걸 과연 믿어주기나 할까?
‘있잖아… 믿기지 않겠지만, 들어주겠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나는 오빠를 무조건 믿으니까 말해봐.]
조금도 의심치 않는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후우, 알았어. 지금부터 오빠가 하는 말 잘 들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벌어진, 꿈같은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대략 30분 정도 걸렸을까. 두서없이 설명하긴 했지만, 총명한 세란이라면 알아서 이해했을 것이다.
[…그랬구나.]
동생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오빠가 불쌍하다며,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그녀는 순수하게 내 말을 믿어주었다.
‘하, 하하…….’
[왜 웃어?]
‘그… 뭐랄까, 그렇게 쉽게 믿어주니까 괜히 걱정한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달까.’
[바보! 말했잖아, 나는 무조건 오빠를 믿는다고. 그도 그럴 게, 오빤 내게 거짓말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
‘그랬던가?’
괜히 쑥스러워져 콧잔등을 매만졌다.
[게다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어. 상식적으로 천 명의 사람이 동시에 사라지는 일은 판타지 소설 같은 일이 아니고서야 이뤄질 수 없는 일인걸.]
내 말을 믿어주는 점도 있지만, 동생은 매우 이성적으로 답변을 도출해 낸 것 같았다. 하긴 이 녀석은 천재니까 남다르게 상황을 본 걸지도.
[그래서… 지금은 위험하지 않아?]
‘위험했는데, 어떤 여성이 구해줘서 일단 한숨 돌렸어. 아직 안전하다고 말하기엔 좀 모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렇구나. 그런데 여성?]
‘응. 성격은 좀 싫지만, 대단한 사람이었어. 황소만 한 덩치의 야수를 혼자서 무찌르더라고.’
[후훗, 천하의 오빠가 그리 말할 정도라니, 그 사람 성격도 어지간했나 보네. 그런데 크기가 황소만 하다면 분명 보통내기의 몬스터가 아니었을 텐데, 그걸 혼자서 무찔렀다니… 혹시 인상착의 기억나?]
‘응. 확실히 기억나. 일단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하고 있었어.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서 찰랑거릴 정도로 긴. 그리고 특히나 눈동자가 무척 아름다웠어. 마치 어두운 자수정 같달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빨간 머리칼과 보랏빛 눈동자… 혹시! 한쪽 팔이 잘려서 없지 않았어?]
‘아니. 멀쩡했는데?’
‘거기는… 왜?’
[글로리아 클라인드를 얻기 위해!]
세란이는 영문 모를 텔레파시를 보내왔고, 나는 그저 멍하니 정신을 놓은 채 눈만 끔뻑였다.
[어? 그럼 아닌가? 잠깐, 아냐. 어쩌면 아직 팔이 멀쩡한 시간대일지도 몰라! 그럼 검! 검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어? 그러니까 가볍고 얇은 검 말이야.]
‘그건… 잘 모르겠어. 아, 검이라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 사람 검의 신전이란 곳을 몇 번이나 언급하더라고.’
[검의 신전! 그렇구나! 알았어! 외팔이 검사! 글로리아 클라인드! 불꽃의 잔상이란 이명으로 유명한 망국의 공주! 검의 신전의 검희! 어떡해! 가르벤 연대기에서 정말 유명한 사람이야!]
갑자기 세란이는 신이 난 듯 혼자서 떠들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나로선 그저 멍청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저기… 세란아? 진정해 봐. 망국의 공주라니, 무슨 소리야? 그 여성이 공주야?’
[응! 그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클라인드 왕국의 핏줄이야. 그녀가 불과 다섯 살 때 인근 국가인 엔데버 왕국에 의해 멸망했는데, 그녀는 그전에 권력 다툼으로 버려지다시피 검의 신전에 유배 보내져 있던 상태라 화를 면할 수 있었어. 그래서 지금은 클라인드란 성을 사용할 수도 없고, 그녀를 아는 사람도 극히 적지. 그나저나 클라인드 왕국이 멸망한 시점이 륀력 95년도고, 그녀가 검의 신전을 나오고 아직 팔이 멀쩡한 시점이니 대충 륀력 104에서 106년 사이… 아아, 그렇구나! 그녀가 산속에 있는 경우라면 정확히 106년 고블린 사건이 일어날 때밖에 없어! 좋아, 전부 풀렸다! 지금 오빠는 륀력 106년 시점에 크라이 산림이라 부르는 곳에 있네.]
난 질려서 혀를 내둘렀다. 고작 그 여성의 정체만으로 현 시점과 내가 있는 장소까지 알아내는 게 가능한 일인가? 무슨 퍼즐이라도 푸는 것처럼 단숨에 해결해 버리네…….
[그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아까 절벽을 봤다고 했지? 당장 그곳으로 가야 해!]
바닥에 주저앉아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을까. 본격적으로 태양빛이 뜨거워지기에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약하고 용기도 없는 놈이다. 동료를 발판 삼아 도망쳤을 뿐만 아니라, 굴 안에 피신했을 때도 용기가 없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굶어 죽을 뻔했다.
조금은 변한 줄 알았는데, 동생을 다치게 할 수밖에 없던 당시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다.
“내게 조금만 힘이 있었다면…….”
아버지와 싸워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야수와 싸워 동료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처하지도 않고, 그 여인에게 혐오스런 눈빛을 받지도 않았겠지. 당연히 동생도 평범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을 테고, 다은 누나도 죽지 않았을… 제기랄!
나는 이마를 힘껏 주먹으로 쳤다.
후회뿐인 일들을 이제 와 되새겨 봤자 무엇 하겠는가.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인데.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까 보냐.”
난 어기적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약하고 용기 없는 놈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당장 살아남는 것과는 별개다.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살고 싶으냐’고 말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받을 때처럼, 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기필코 동생을 다시 볼 것이다.
“이런 정체도 모를 세계에서 죽는 건 사절이야.”
반쯤 해진 옷을 북 찢어 머리에 동여맸다. 거슬리던 머리가 정리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좌절을 딛고 일어난 나는 최우선적으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주변 지리를 알고 있다면 마을을 찾아 내려가는 게 최우선순위겠지만, 그걸 모르니 당장 먹고살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그 야수 같은 놈이 또 있을지 모르니, 그에 대한 방비도 필요하다. 정장남의 말마따나 내가 쉴 공간도, 무기도, 그리고 정보도 필요했다.
“으윽, 하아, 하아…….”
그렇게 먹을 것을 찾아 한동안 움직였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안 그래도 지친 몸인데, 억지로 움직였더니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도저히 움직일 기력이 없어 나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한낮인데도 기운이 없어 눈이 가물거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한계에 다다른 경험이 있었던가. 이거, 바닥에 있는 풀이라도 뜯어 먹어야 하는 거 아닐까?
진지하게 잡초를 바라보다 한 움큼 뜯어 먹어보았다. 당연하게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이라 눈물콧물 다 흘리며 내뱉고 말았지만.
심신이 잔뜩 지쳐서인가 눈앞으로 세란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문득, 나처럼 동생도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란이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니까.
“크윽! 움직여라… 포기하지 마.”
근육통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독립해 동생과 함께 살겠다는 꿈이 있다! 이런 곳에서 주저앉을 순 없단 말이다!
근처 나무를 부둥켜안고 기어이 일어나는 데 성공했다. 손을 떼자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안간힘을 쓰며 억지로 버텨냈다.
젠장, 이젠 걷는 것도 힘들 정도라니. 정말 한계이긴 한 모양이네.
막 태어난 망아지가 억지로 몸을 세우려는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지탱하던 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바로 그때.
[부탁이야, 대답 좀 해줘…….]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애틋한 울림.
난 그 목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어? 이 목소리는, 세, 세란이야?’
[히악?]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동생을 부르자, 상대 쪽에서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저 목소리를 어찌 모르겠는가. 이 반가운 텔레파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세란이지? 세란이 맞지? 세란아!’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는 않지만, 난 토하듯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오, 오빠야?]
동생도 그제야 나란 걸 알았는지 몹시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기어코 동생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무척이나 긴 시간 동안. 역시 동생도 나처럼 걱정하고 있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어허허엉, 오빠, 오빠… 으허어어어어엉!]
‘울지 마. 오빠는 괜찮으니까 울지 마.’
난 나무에 다시 몸을 기댄 채 다독이듯 텔레파시를 전했다. 비록 바로 앞에 있지는 않지만, 어쩐지 녀석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평소처럼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동생과 대화할 수 있어서, 동생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어서.
생전 믿지도 않던 신에게 감사를 표하며 난 회개하듯 눈물을 흘렸다.
세란이와 나는 그렇게 한동안 울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텔레파시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가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확인했다. 그러다 다시 대화가 통하면 또 울고… 그 짓을 의미 없이 반복했다.
‘이제 좀 진정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내가 물었다. 비록 동생의 얼굴은 볼 수 없으나 어쩐지 고개를 끄덕인 것만 같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는 건지, 단지 그럴 거라 예상하는 건진 아리송했지만.
‘그런데 어떻게 텔레파시가 연결된 거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연결되지 않았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세란이는 명확히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훌쩍이는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책. 책을 잡고 말하니까 연결됐어. 아마도 이게 연결 고리일 거야.]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책 속이다. 그렇다면 책이 그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동생과 다시 텔레파시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오빠는 지금 어디 있는 거야?]
‘그…….’
답변하려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까.
책 속에 들어오게 된 일? 나레스란 자로 인해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생존 게임을 시작하게 된 일?
이걸 과연 믿어주기나 할까?
‘있잖아… 믿기지 않겠지만, 들어주겠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나는 오빠를 무조건 믿으니까 말해봐.]
조금도 의심치 않는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후우, 알았어. 지금부터 오빠가 하는 말 잘 들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벌어진, 꿈같은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대략 30분 정도 걸렸을까. 두서없이 설명하긴 했지만, 총명한 세란이라면 알아서 이해했을 것이다.
[…그랬구나.]
동생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오빠가 불쌍하다며,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그녀는 순수하게 내 말을 믿어주었다.
‘하, 하하…….’
[왜 웃어?]
‘그… 뭐랄까, 그렇게 쉽게 믿어주니까 괜히 걱정한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달까.’
[바보! 말했잖아, 나는 무조건 오빠를 믿는다고. 그도 그럴 게, 오빤 내게 거짓말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
‘그랬던가?’
괜히 쑥스러워져 콧잔등을 매만졌다.
[게다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어. 상식적으로 천 명의 사람이 동시에 사라지는 일은 판타지 소설 같은 일이 아니고서야 이뤄질 수 없는 일인걸.]
내 말을 믿어주는 점도 있지만, 동생은 매우 이성적으로 답변을 도출해 낸 것 같았다. 하긴 이 녀석은 천재니까 남다르게 상황을 본 걸지도.
[그래서… 지금은 위험하지 않아?]
‘위험했는데, 어떤 여성이 구해줘서 일단 한숨 돌렸어. 아직 안전하다고 말하기엔 좀 모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렇구나. 그런데 여성?]
‘응. 성격은 좀 싫지만, 대단한 사람이었어. 황소만 한 덩치의 야수를 혼자서 무찌르더라고.’
[후훗, 천하의 오빠가 그리 말할 정도라니, 그 사람 성격도 어지간했나 보네. 그런데 크기가 황소만 하다면 분명 보통내기의 몬스터가 아니었을 텐데, 그걸 혼자서 무찔렀다니… 혹시 인상착의 기억나?]
‘응. 확실히 기억나. 일단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하고 있었어.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서 찰랑거릴 정도로 긴. 그리고 특히나 눈동자가 무척 아름다웠어. 마치 어두운 자수정 같달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빨간 머리칼과 보랏빛 눈동자… 혹시! 한쪽 팔이 잘려서 없지 않았어?]
‘아니. 멀쩡했는데?’
‘거기는… 왜?’
[글로리아 클라인드를 얻기 위해!]
세란이는 영문 모를 텔레파시를 보내왔고, 나는 그저 멍하니 정신을 놓은 채 눈만 끔뻑였다.
[어? 그럼 아닌가? 잠깐, 아냐. 어쩌면 아직 팔이 멀쩡한 시간대일지도 몰라! 그럼 검! 검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어? 그러니까 가볍고 얇은 검 말이야.]
‘그건… 잘 모르겠어. 아, 검이라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 사람 검의 신전이란 곳을 몇 번이나 언급하더라고.’
[검의 신전! 그렇구나! 알았어! 외팔이 검사! 글로리아 클라인드! 불꽃의 잔상이란 이명으로 유명한 망국의 공주! 검의 신전의 검희! 어떡해! 가르벤 연대기에서 정말 유명한 사람이야!]
갑자기 세란이는 신이 난 듯 혼자서 떠들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나로선 그저 멍청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저기… 세란아? 진정해 봐. 망국의 공주라니, 무슨 소리야? 그 여성이 공주야?’
[응! 그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클라인드 왕국의 핏줄이야. 그녀가 불과 다섯 살 때 인근 국가인 엔데버 왕국에 의해 멸망했는데, 그녀는 그전에 권력 다툼으로 버려지다시피 검의 신전에 유배 보내져 있던 상태라 화를 면할 수 있었어. 그래서 지금은 클라인드란 성을 사용할 수도 없고, 그녀를 아는 사람도 극히 적지. 그나저나 클라인드 왕국이 멸망한 시점이 륀력 95년도고, 그녀가 검의 신전을 나오고 아직 팔이 멀쩡한 시점이니 대충 륀력 104에서 106년 사이… 아아, 그렇구나! 그녀가 산속에 있는 경우라면 정확히 106년 고블린 사건이 일어날 때밖에 없어! 좋아, 전부 풀렸다! 지금 오빠는 륀력 106년 시점에 크라이 산림이라 부르는 곳에 있네.]
난 질려서 혀를 내둘렀다. 고작 그 여성의 정체만으로 현 시점과 내가 있는 장소까지 알아내는 게 가능한 일인가? 무슨 퍼즐이라도 푸는 것처럼 단숨에 해결해 버리네…….
[그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아까 절벽을 봤다고 했지? 당장 그곳으로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