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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당연히 사람인데 왜 의문형으로 물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 꼴이 짐승이나 다름없이 더러웠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도, 도와주세요…….”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자, 여성의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와그작 구겨졌다.
“사람인 줄 알았더니, 거지였나.”
살짝 낮으면서도 청명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그 속에 담긴 의미가 현저히 달랐다.
“시간만 낭비했군.”
그녀가 혐오스럽다는 듯 한 번 흘겨보곤 바로 떠나려 하기에 난 급히 넙죽 엎드리며 소리를 높였다.
“무, 물… 적어도 물만이라도 조금만 나눠 주세요……!”
내 간절한 외침에 여성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러곤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풀었다.
가죽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그 안에 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음식을 갈구하는 걸신처럼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가엾이 여겨 가죽 주머니를 건네…주지 않고, 머리 위에 쏟아버렸다.
“어푸! 무슨 짓……!”
“네 꼴이 짐승이라 착각할 만큼 형편없어서. 이제 좀 사람답군.”
“…네?”
눈에 들어간 물을 닦으며 불만을 호소하던 나는 뒤늦게 발견하고 말았다.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구정물을.
대체 얼마나 더러웠으면 아주 색이 흙탕물 저리 가라다. 아마 조금 전까지 나는 탄광에 들어갔다 나온 꼴이었던 게 틀림없다.
“자.”
얼굴에 묻은 때가 어느 정도 씻겨졌는지, 그녀는 무심하게 가죽 주머니를 내 앞에 툭, 던졌다. 뭔가 적선받는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쩌겠는가, 받지 않으면 당장 죽을 판인데.
“콜록! 콜록!”
벌컥벌컥 들이켜다 물이 기도로 넘어가도 멈추지 않았다. 물에는 조금 시큼한 맛과 가죽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것조차도 감미로운 향신료처럼 느껴질 정도이기에 걸신들린 사람마냥 필사적으로 마셔 댔다.
그런 광기에 찬 모습이 질린 걸까, 그녀의 목이 살짝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우윽! 콜록! 후아, 감사…합니다.”
말릴 새도 없이 거의 다 마셔 버린 탓에 가죽 물통이 쪼그라든 폐처럼 변했다.
마치 더러운 걸 만지는 것처럼 두 손가락으로 가죽 물통을 받아 든 그녀는 달랑달랑 흔들어보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덕분에 다시 냇가로 내려가 물을 채워야겠구나. 참으로 고맙다’라고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느껴졌다.
“그런데 왜 저런 협소한 굴 안에 살고 있지?”
“살다뇨… 집이 아니에요. 야수한테 쫓겨서 어쩔 수 없이 숨어 있던 거라고요…….”
“야수라…… 저것 말인가?”
여자는 무심히 턱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무심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옆을 돌아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잡아먹으려고 기를 쓰던 야수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어?”
“왜 이 주변을 서성이나 했는데, 그런 이유였군.”
처음엔 자는 건 줄 알고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뒤늦게 무덤덤하게 던진 그녀의 말을 듣곤 죽은 시체라는 걸, 그것도 그녀가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저걸 당신이?”
“고작 저런 들짐승이 무서워 숨어 있다니, 남자가 참으로 한심하구나.”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듯 나를 흘겨보는 그녀.
여기서 남자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저런 괴물을 어떻게 맨손으로 상대하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그녀가 먼저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나저나 옷차림이 특이하군. 먼 곳에서 왔나?”
“저요?”
그 물음에 나는 새삼스럽게 내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더럽긴 하지만 교복 차림이니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건가? 잠깐, 그러고 보니 이상한걸? 척 보기에도 서구권 사람처럼 보이는 여성인데, 대화가 제법 잘 통하잖아.
“뭘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지?”
너무 대놓고 바라봤는지, 그녀는 불쾌하다는 의미로 붉은 눈썹을 좁혔다.
“아뇨. 그게… 한국어를 잘하시는 것 같아서…….”
“한국어?”
여성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더욱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쓰는 말은 가르벤 대륙 공용어다. 뭔가 착각한 것 아닌가?”
가르벤 대륙 공용어?
이번엔 내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가르벤 연대기’라는 소설책 안이었지. 가르벤이라는 단어가 대륙 지명이었나? 그럼 그녀가 쓰는 언어도 엄밀히 말하면 한국어가 아니어야 할진대,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의 말이 한국어로 들렸다. 혹시 이건 나레스란 자의 조치일까?
“이봐, 내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다. 아니,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려나. 내가 묻고 싶은 건 아까 이 근처에서 그대와 비슷한 차림의 사체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대의 동료인가?”
의구심으로 물어보는 것치곤 말투가 무척이나 싸늘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보니 딱히 화난 것 같진 않은데… 원래 말투가 저런가?
“네. 그들은 제…….”
난 말하다 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시의 일들이 다시금 떠오른 것이다.
“그럼 동료의 목숨을 발판 삼아 혼자 살아남았다는 건가?”
싸늘한 목소리가 한 단계 더 낮아졌다. 조금 전에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슬쩍 올려다보니, 중압감이 느껴지는 보라색 눈동자엔 경멸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쯧.”
그녀는 작게 혀를 차더니 두말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이대로 가버리는 건가?
“저, 저기요?”
너무 당황스러워 불러 세우자, 그녀는 멈칫하더니 목만 돌려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약한 자를 지키고 동료를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나 그대는 동료를 버리고 홀로 살아남았지. 그런 그대에게 내가 동정할 가치가 있을까?”
“하, 하지만! 저로서는 그런 괴물을 상대할 수가……!”
“그 자리엔 어린아이도 있었다.”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렇게 내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자 그녀는 경멸이 가득 담긴 보랏빛 눈동자를 내리깐 채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린아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용기도 없는, 그저 물만 축내는 짐승이었구나. 내가 약한 자에게 검을 쓰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것을 고맙게 여기거라.”
그녀는 그렇게 나를 준엄하게 꾸짖은 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황소만 한 야수를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끌며 떠나가 버렸다.
“하, 하하…….”
그렇게 완전히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 난 기가 막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전부 사실이니까. 그래, 난 동료들의 목숨으로 살아남은 거다. 다은 누나도, 대머리 아저씨도, 중학생 남매까지 버리고 나 혼자 살겠다며 도망쳤던 거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죄책감에 사로잡혀 애꿎은 땅만 주먹으로 때렸다.
***
기석이 사라진 지 나흘째 되던 날, 세란은 초췌해진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석과 마찬가지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다.
“너, 정말 죽으려고 작정했어?”
노크도 없이 덜컥 방 안에 들어온 숙모가 아침에 가져다놓은 음식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고 짜증 냈다. 그녀는 딱히 세란을 걱정하진 않지만, 이대로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괜히 안 좋은 소문이 날까 봐 노심초사했다.
이틀 전, 퇴원한 후부터 세란은 줄곧 빛바랜 가죽 책만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저리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저기요, 신세란 양? 흠, 이 아이가 맞나요?”
“맞아요. 거보시라니까요. 어릴 때부터 말하지 못했는데, 이젠 정신도 놓은 건지 이틀 전부터 계속 저 상태라니까요.”
“후우, 알겠습니다. 잠시 둘이서 얘기하고 싶으니, 자리 좀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숙모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떠났다. 그런 숙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건장한 체격의 남성은 이내 휠체어 앞으로 다가가 무릎 꿇은 채 조심스레 수첩을 꺼내 세란에게 보여주었다.
“안녕, 세란 양. 나는 강력계 수사반의 이희철이라고 해. 이번 실종 사건과 관련해 조사차 들렀거든?”
살갑게 대하는 말투에 반응한 건지, 순간 세란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희철은 그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알겠지만, 지금 실종자 전원의 공통점이 바로 이 책이야. 조금이라도 좋으니 의심되는 사항은 없니?”
세란의 초점 없는 눈이 살짝 밝아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희철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두어 번 고개를 저었다.
“후우, 알겠다.”
이희철은 수첩에 꺼내 무언가 끼적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대로 밖에 나가려다 문고리를 잡은 채 지나가듯 말했다.
“10년 전, 너희 남매 사건도 내가 담당했단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나는 세란이 너의 마음을 잘 이해…….”
세란은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집어 던졌다. 지금까지 인형처럼 앉아 있던 그녀로선 가장 큰 자기 표현이었다.
“…알겠다. 혹시 나중에라도 무언가 의심되는 사항이 있으면 꼭 말해주렴.”
이희철은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갔고, 세란은 더 이상 격정을 참지 못한 채 그대로 한정판 책을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오빠, 오빠, 오빠!’
들리지도 않을 상대를 향해 지속적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살아 있을 것이다. 오빠가 자신을 내버려 둔 채 사라졌을 리가 없다. 세란은 그렇게 믿었다.
‘살아 있지? 그렇지? 나 혼자만 내버려 두고 멀리 가거나 하는 거 아니지? 오빠, 오빠, 오빠…….’
세란의 뜨거운 눈물이 한정판 책 커버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부탁이야, 대답 좀 해줘…….’
그리고 간절함을 담아 마지막으로 텔레파시를 보낸 그 순간!
[…어? 이 목소리는… 세, 세란이야?]
절실한 바람에 응답하듯 말소리가 들려왔다.
세란은 깜짝 놀라 책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한껏 치켜뜬 눈으로 멍하니 책을 바라보다 허겁지겁 주워 들었다.
당연히 사람인데 왜 의문형으로 물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 꼴이 짐승이나 다름없이 더러웠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도, 도와주세요…….”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자, 여성의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와그작 구겨졌다.
“사람인 줄 알았더니, 거지였나.”
살짝 낮으면서도 청명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그 속에 담긴 의미가 현저히 달랐다.
“시간만 낭비했군.”
그녀가 혐오스럽다는 듯 한 번 흘겨보곤 바로 떠나려 하기에 난 급히 넙죽 엎드리며 소리를 높였다.
“무, 물… 적어도 물만이라도 조금만 나눠 주세요……!”
내 간절한 외침에 여성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러곤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풀었다.
가죽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그 안에 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음식을 갈구하는 걸신처럼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가엾이 여겨 가죽 주머니를 건네…주지 않고, 머리 위에 쏟아버렸다.
“어푸! 무슨 짓……!”
“네 꼴이 짐승이라 착각할 만큼 형편없어서. 이제 좀 사람답군.”
“…네?”
눈에 들어간 물을 닦으며 불만을 호소하던 나는 뒤늦게 발견하고 말았다.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구정물을.
대체 얼마나 더러웠으면 아주 색이 흙탕물 저리 가라다. 아마 조금 전까지 나는 탄광에 들어갔다 나온 꼴이었던 게 틀림없다.
“자.”
얼굴에 묻은 때가 어느 정도 씻겨졌는지, 그녀는 무심하게 가죽 주머니를 내 앞에 툭, 던졌다. 뭔가 적선받는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쩌겠는가, 받지 않으면 당장 죽을 판인데.
“콜록! 콜록!”
벌컥벌컥 들이켜다 물이 기도로 넘어가도 멈추지 않았다. 물에는 조금 시큼한 맛과 가죽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것조차도 감미로운 향신료처럼 느껴질 정도이기에 걸신들린 사람마냥 필사적으로 마셔 댔다.
그런 광기에 찬 모습이 질린 걸까, 그녀의 목이 살짝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우윽! 콜록! 후아, 감사…합니다.”
말릴 새도 없이 거의 다 마셔 버린 탓에 가죽 물통이 쪼그라든 폐처럼 변했다.
마치 더러운 걸 만지는 것처럼 두 손가락으로 가죽 물통을 받아 든 그녀는 달랑달랑 흔들어보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덕분에 다시 냇가로 내려가 물을 채워야겠구나. 참으로 고맙다’라고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느껴졌다.
“그런데 왜 저런 협소한 굴 안에 살고 있지?”
“살다뇨… 집이 아니에요. 야수한테 쫓겨서 어쩔 수 없이 숨어 있던 거라고요…….”
“야수라…… 저것 말인가?”
여자는 무심히 턱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무심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옆을 돌아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잡아먹으려고 기를 쓰던 야수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어?”
“왜 이 주변을 서성이나 했는데, 그런 이유였군.”
처음엔 자는 건 줄 알고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뒤늦게 무덤덤하게 던진 그녀의 말을 듣곤 죽은 시체라는 걸, 그것도 그녀가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저걸 당신이?”
“고작 저런 들짐승이 무서워 숨어 있다니, 남자가 참으로 한심하구나.”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듯 나를 흘겨보는 그녀.
여기서 남자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저런 괴물을 어떻게 맨손으로 상대하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그녀가 먼저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나저나 옷차림이 특이하군. 먼 곳에서 왔나?”
“저요?”
그 물음에 나는 새삼스럽게 내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더럽긴 하지만 교복 차림이니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건가? 잠깐, 그러고 보니 이상한걸? 척 보기에도 서구권 사람처럼 보이는 여성인데, 대화가 제법 잘 통하잖아.
“뭘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지?”
너무 대놓고 바라봤는지, 그녀는 불쾌하다는 의미로 붉은 눈썹을 좁혔다.
“아뇨. 그게… 한국어를 잘하시는 것 같아서…….”
“한국어?”
여성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더욱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쓰는 말은 가르벤 대륙 공용어다. 뭔가 착각한 것 아닌가?”
가르벤 대륙 공용어?
이번엔 내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가르벤 연대기’라는 소설책 안이었지. 가르벤이라는 단어가 대륙 지명이었나? 그럼 그녀가 쓰는 언어도 엄밀히 말하면 한국어가 아니어야 할진대,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의 말이 한국어로 들렸다. 혹시 이건 나레스란 자의 조치일까?
“이봐, 내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다. 아니,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려나. 내가 묻고 싶은 건 아까 이 근처에서 그대와 비슷한 차림의 사체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대의 동료인가?”
의구심으로 물어보는 것치곤 말투가 무척이나 싸늘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보니 딱히 화난 것 같진 않은데… 원래 말투가 저런가?
“네. 그들은 제…….”
난 말하다 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시의 일들이 다시금 떠오른 것이다.
“그럼 동료의 목숨을 발판 삼아 혼자 살아남았다는 건가?”
싸늘한 목소리가 한 단계 더 낮아졌다. 조금 전에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슬쩍 올려다보니, 중압감이 느껴지는 보라색 눈동자엔 경멸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쯧.”
그녀는 작게 혀를 차더니 두말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이대로 가버리는 건가?
“저, 저기요?”
너무 당황스러워 불러 세우자, 그녀는 멈칫하더니 목만 돌려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약한 자를 지키고 동료를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나 그대는 동료를 버리고 홀로 살아남았지. 그런 그대에게 내가 동정할 가치가 있을까?”
“하, 하지만! 저로서는 그런 괴물을 상대할 수가……!”
“그 자리엔 어린아이도 있었다.”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렇게 내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자 그녀는 경멸이 가득 담긴 보랏빛 눈동자를 내리깐 채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린아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용기도 없는, 그저 물만 축내는 짐승이었구나. 내가 약한 자에게 검을 쓰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것을 고맙게 여기거라.”
그녀는 그렇게 나를 준엄하게 꾸짖은 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황소만 한 야수를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끌며 떠나가 버렸다.
“하, 하하…….”
그렇게 완전히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 난 기가 막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전부 사실이니까. 그래, 난 동료들의 목숨으로 살아남은 거다. 다은 누나도, 대머리 아저씨도, 중학생 남매까지 버리고 나 혼자 살겠다며 도망쳤던 거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죄책감에 사로잡혀 애꿎은 땅만 주먹으로 때렸다.
***
기석이 사라진 지 나흘째 되던 날, 세란은 초췌해진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석과 마찬가지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다.
“너, 정말 죽으려고 작정했어?”
노크도 없이 덜컥 방 안에 들어온 숙모가 아침에 가져다놓은 음식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고 짜증 냈다. 그녀는 딱히 세란을 걱정하진 않지만, 이대로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괜히 안 좋은 소문이 날까 봐 노심초사했다.
이틀 전, 퇴원한 후부터 세란은 줄곧 빛바랜 가죽 책만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저리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저기요, 신세란 양? 흠, 이 아이가 맞나요?”
“맞아요. 거보시라니까요. 어릴 때부터 말하지 못했는데, 이젠 정신도 놓은 건지 이틀 전부터 계속 저 상태라니까요.”
“후우, 알겠습니다. 잠시 둘이서 얘기하고 싶으니, 자리 좀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숙모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떠났다. 그런 숙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건장한 체격의 남성은 이내 휠체어 앞으로 다가가 무릎 꿇은 채 조심스레 수첩을 꺼내 세란에게 보여주었다.
“안녕, 세란 양. 나는 강력계 수사반의 이희철이라고 해. 이번 실종 사건과 관련해 조사차 들렀거든?”
살갑게 대하는 말투에 반응한 건지, 순간 세란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희철은 그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알겠지만, 지금 실종자 전원의 공통점이 바로 이 책이야. 조금이라도 좋으니 의심되는 사항은 없니?”
세란의 초점 없는 눈이 살짝 밝아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희철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두어 번 고개를 저었다.
“후우, 알겠다.”
이희철은 수첩에 꺼내 무언가 끼적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대로 밖에 나가려다 문고리를 잡은 채 지나가듯 말했다.
“10년 전, 너희 남매 사건도 내가 담당했단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나는 세란이 너의 마음을 잘 이해…….”
세란은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집어 던졌다. 지금까지 인형처럼 앉아 있던 그녀로선 가장 큰 자기 표현이었다.
“…알겠다. 혹시 나중에라도 무언가 의심되는 사항이 있으면 꼭 말해주렴.”
이희철은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갔고, 세란은 더 이상 격정을 참지 못한 채 그대로 한정판 책을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오빠, 오빠, 오빠!’
들리지도 않을 상대를 향해 지속적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살아 있을 것이다. 오빠가 자신을 내버려 둔 채 사라졌을 리가 없다. 세란은 그렇게 믿었다.
‘살아 있지? 그렇지? 나 혼자만 내버려 두고 멀리 가거나 하는 거 아니지? 오빠, 오빠, 오빠…….’
세란의 뜨거운 눈물이 한정판 책 커버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부탁이야, 대답 좀 해줘…….’
그리고 간절함을 담아 마지막으로 텔레파시를 보낸 그 순간!
[…어? 이 목소리는… 세, 세란이야?]
절실한 바람에 응답하듯 말소리가 들려왔다.
세란은 깜짝 놀라 책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한껏 치켜뜬 눈으로 멍하니 책을 바라보다 허겁지겁 주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