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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파악된 실종자의 수는 810명으로 밝혀졌으나, 그보다 더 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국에서는 이번 사건을 IS의 테러라 유추하고 있으며…….]
“허… 테러라니, 무서운 일이네.”
“겁나서 밖에 돌아다닐 수 있겠나, 원.”
많은 환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일반 병실 안.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운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세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까지 미간을 좁힌 채 TV를 보고 있던 신명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호출 벨을 눌러 담당의를 불렀다.
“세란아, 정신이 드니?”
“…….”
허겁지겁 달려온 담당의 김강수가 물어보았지만, 세란은 그저 천천히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거나 속이 답답하거나 울렁거리진 않고?”
재차 묻는 말에 세란은 무겁게 머리를 좌우로 젓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세란아?”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눈으로 연신 주변을 둘러보는 세란.
평소 감정을 겉으로 잘 표출하지 않는 아이기에 김강수와 신명태의 놀람은 더더욱 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니? 여기.”
익숙한 듯 김강수가 손에 들고 있던 차트와 펜을 넘겨주자 세란은 허겁지겁 뭐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잠시 뒤, 차트를 뒤집어 보여준 글귀에는 ‘오빠는 어디 있죠?’라고 쓰여 있었다.
순간, 김강수와 신명태의 눈빛이 크게 어두워졌다. 그런 반응만으로도 대충 사태를 판단한 세란은 울먹이며 혼란스러워하다 급히 다시 뭐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가르벤 연대기… 책? 그걸 가져다 달라고?”
신명태는 자신이 잘못 읽은 게 아닐까 싶어 다시 물어보았지만, 세란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알았다. 다음에 올 때 가져다주마.”
어쩔 수 없다는 듯 신명태가 약속하자, 세란은 비로소 늘어지듯 침대에 몸을 묻곤 시트를 뒤집어썼다.
“아직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입니다. 우선은 안정을 취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아 보입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김강수의 말에 신명태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는 중에도 세란은 시트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불안에 떨었다.
사실 그녀는 깨어난 순간부터 계속 기석에게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탓에 불안 증세는 더욱 심해졌고.
‘무사한 거지? 그런 거지? 오빠…….’
이제 하나 남은 가족마저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무의식적으로 시트를 꼭 움켜쥐는 세란이었다.
***
크허엉!
야수가 헛손질을 할 때마다 세찬 바람이 앞머리를 뒤흔들었다.
격노에 차 울부짖는 소리, 이따금씩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동자, 그리고 굴 자체를 파괴할 기세로 거칠게 휘두르는 손톱까지.
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지금 나는 굴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상태였다. 여우처럼 작은 동물이 살 만한 크기의 굴인데, 덕분에 야수는 들어오지 못해 저 난리다.
낭떠러지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한 나는 우연히 이 굴을 발견하게 되었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뛰어들었다.
솔직히 반 정도는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는데, 야수의 위협을 벗어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완전히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는 꼴이니까.
“큭, 제발 그만 좀 가라…….”
굴 안에서 숨죽이고 있기를 벌써 다섯 시간째.
그럼에도 녀석은 눈을 찔린 게 어지간하게 분한지 좀체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굴 안에는 정체 모를 뼈와 짐승의 털, 그리고 오물 냄새만 가득해 먹을 것은커녕 목을 축일 물조차 없었다.
이 상태로는 기껏해야 사흘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틀도 어려울지…….
기어코 굴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노을이 질 즈음부터 야수의 기척은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놈이 몸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결국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꼬박 날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는지, 꿈에 동생이 나왔다.
집에 돌아온 나를 반갑게 웃으며 맞이해 주는 세란이. 그런 동생의 머리에서 갑자기 피가 흐르는가 싶더니, 야수가 으적, 씹어 먹었다.
그런 뒤에는 머리가 없는 정장남이 자신의 머리를 찾아달라며 두 손을 더듬거렸고, 팔이 떨어지고 몸이 으깨진 중학생 남매가 좀비처럼 내게 기어왔다.
차마 볼 수 없어 애써 고개를 돌리자, 몸이 반쯤 파 먹힌 다은 누나가 왜 자기를 내버려 두고 갔냐며 윽박질렀고, 마지막에는 얼굴부터 허리까지 찢긴 대머리 아저씨가 고작 그 정도밖에 작전을 생각할 수 없었느냐며 타박했다.
그 둘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박고 사과하는 와중에 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틀째.
추적추적 비가 온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 주변에 떨어진 짐승 털을 모아 체온을 유지했다. 밖에서 나무를 구해와 불이라도 피우면 좋으련만, 난 여전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흘째가 되자 한계가 온 건지 일어설 수도 없게 되었다.
목이 마르다. 잠이 들면 또 악몽을 꿀 것 같아 한나절 내내 눈만 말똥거리며 내가 죽어가는 걸 실감했다.
대체 왜 내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동생에게 선물을 주고 싶을 뿐이었는데…….
깜빡 잠이 든 건지, 내가 다시 눈떴을 땐 날이 밝아져 있었다.
이로써 나흘째인가?
이젠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입술도 바짝 마르고, 볼도 쏙 들어간 상태다.
슬쩍 눈을 돌려 손목을 바라보았다. 손목에는 754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장남이 죽었을 때 알 수 있었다. 그가 죽자 1,000을 가리키던 숫자가 999로 바뀌었으니까.
그래, 이건 생존자를 실시간으로 가리키는 죽음의 카운트였던 것이다.
고작 나흘 만에 4분의 1이 죽었다. 다들 무슨 연유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이 세상이 가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하, 정말 가혹하지. 저런 야수가 존재하는 세상인데, 어찌 평범한 사람이 버틸 수 있겠어.
“데스 게임? 아냐. 이건 누가 더 오래 버티나 겨루는 생존 게임이야…….”
나는 마른웃음을 지어내며 자조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한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해서.
만약 내 동생이라면 어찌했을까?
세란이라면 이런 굴속에 피신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을까?
세란이라면 대머리 아저씨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 녀석은 나와 달리 명석하다. 한 번 읽은 책은 토씨 하나 틀리는 일 없이 완벽히 암기해 내고, 이따금씩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사실 거기까지만 봤을 땐 ‘머리가 뛰어나구나’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난 녀석이 가진 천재성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더 지니어스’란 두뇌 게임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였다.
당시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내로라하는 배우와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퀴즈를 풀었는데, 다들 난색을 표하는 문제조차도 동생은 손쉽게 풀어버리는 신기를 보인 것이었다.
내가 하도 신기해하며 저런 걸 어찌 아냐고 물어봤더니, 되레 ‘왜? 쉽잖아?’라는 말만 들었다.
그런 동생이기에 갈구하듯 물어보았다.
전부 무의미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만큼 절박했기에, 사고를 멈춰 버리면 마음이 꺾여 버릴 것만 같았기에.
[세란아… 너라면 어찌했겠니?]
통하지 않는 텔레파시를 보내보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으흐윽!”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파묻자, 참을 수 없는 오열이 터져 나왔다. 아니, 수분조차 없어 눈물은 나오지 않았으니, 소리 없는 울음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사무치도록 동생이 보고 싶다. 그 예쁜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가냘픈 어깨를 부둥켜안고 싶다.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앞으로 뻗어보았지만, 역시 그곳에 동생은 없었다.
크허엉―!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역시 아직까지도 야수가 주위를 배회하고 있던 건가? 그런데 어째 방금 울음소리는 비명같이 들렸는데?
내가 의문을 드러내는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거침없이 호쾌한 발걸음 소리.
이것은 짐승이 아니다. 사람이다. 사람이 틀림없다.
솔직히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책 속 미지의 세상이니만큼 내가 모르는 무언가일 확률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인가. 당장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판인데.
“여기, 살려… 콜록! 콜록!”
힘차게 소리 질러 구원을 요청하고 싶지만, 입이 바짝 마른 탓에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젖 먹던 힘을 쥐어짜 입구로 기어갔다. 도중에 삭은 뼛조각에 찔려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딴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목숨이 달려 있는 순간이니까.
그렇게 겨우 굴 입구에 당도하자, 상대도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발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내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직사광선에 눈이 아려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한참을 눈을 껌뻑이며 빛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가 비로소 내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무릎까지 이어진 가죽 부츠였다. 그 위로 승마 바지를 연상케 할 만큼 타이트한 가죽 바지와 낙낙한 품의 흰 블라우스, 거기에 코르셋처럼 생긴 가죽조끼를 입고 있었다.
좀 더 시선을 올리자 허리까지 내려온,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반듯한… 어쩌면 시원하다고도 할 수 있는 미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블루베리처럼 어둡고 묵직한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가늘게 뜬 눈동자엔 언뜻 호기심과 의심 같은 감정들이 섞여 있는 듯했다.
“…….”
왠지 모르겠는데 우린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후, 고집스러움이 엿보일 만큼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사람이냐?”
그것이 그녀가 내게 한 첫마디였다.
― 생존자 : 754명 ―
[…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파악된 실종자의 수는 810명으로 밝혀졌으나, 그보다 더 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국에서는 이번 사건을 IS의 테러라 유추하고 있으며…….]
“허… 테러라니, 무서운 일이네.”
“겁나서 밖에 돌아다닐 수 있겠나, 원.”
많은 환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일반 병실 안.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운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세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까지 미간을 좁힌 채 TV를 보고 있던 신명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호출 벨을 눌러 담당의를 불렀다.
“세란아, 정신이 드니?”
“…….”
허겁지겁 달려온 담당의 김강수가 물어보았지만, 세란은 그저 천천히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거나 속이 답답하거나 울렁거리진 않고?”
재차 묻는 말에 세란은 무겁게 머리를 좌우로 젓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세란아?”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눈으로 연신 주변을 둘러보는 세란.
평소 감정을 겉으로 잘 표출하지 않는 아이기에 김강수와 신명태의 놀람은 더더욱 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니? 여기.”
익숙한 듯 김강수가 손에 들고 있던 차트와 펜을 넘겨주자 세란은 허겁지겁 뭐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잠시 뒤, 차트를 뒤집어 보여준 글귀에는 ‘오빠는 어디 있죠?’라고 쓰여 있었다.
순간, 김강수와 신명태의 눈빛이 크게 어두워졌다. 그런 반응만으로도 대충 사태를 판단한 세란은 울먹이며 혼란스러워하다 급히 다시 뭐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가르벤 연대기… 책? 그걸 가져다 달라고?”
신명태는 자신이 잘못 읽은 게 아닐까 싶어 다시 물어보았지만, 세란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알았다. 다음에 올 때 가져다주마.”
어쩔 수 없다는 듯 신명태가 약속하자, 세란은 비로소 늘어지듯 침대에 몸을 묻곤 시트를 뒤집어썼다.
“아직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입니다. 우선은 안정을 취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아 보입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김강수의 말에 신명태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는 중에도 세란은 시트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불안에 떨었다.
사실 그녀는 깨어난 순간부터 계속 기석에게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탓에 불안 증세는 더욱 심해졌고.
‘무사한 거지? 그런 거지? 오빠…….’
이제 하나 남은 가족마저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무의식적으로 시트를 꼭 움켜쥐는 세란이었다.
***
크허엉!
야수가 헛손질을 할 때마다 세찬 바람이 앞머리를 뒤흔들었다.
격노에 차 울부짖는 소리, 이따금씩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동자, 그리고 굴 자체를 파괴할 기세로 거칠게 휘두르는 손톱까지.
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지금 나는 굴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상태였다. 여우처럼 작은 동물이 살 만한 크기의 굴인데, 덕분에 야수는 들어오지 못해 저 난리다.
낭떠러지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한 나는 우연히 이 굴을 발견하게 되었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뛰어들었다.
솔직히 반 정도는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는데, 야수의 위협을 벗어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완전히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는 꼴이니까.
“큭, 제발 그만 좀 가라…….”
굴 안에서 숨죽이고 있기를 벌써 다섯 시간째.
그럼에도 녀석은 눈을 찔린 게 어지간하게 분한지 좀체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굴 안에는 정체 모를 뼈와 짐승의 털, 그리고 오물 냄새만 가득해 먹을 것은커녕 목을 축일 물조차 없었다.
이 상태로는 기껏해야 사흘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틀도 어려울지…….
기어코 굴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노을이 질 즈음부터 야수의 기척은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놈이 몸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결국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꼬박 날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는지, 꿈에 동생이 나왔다.
집에 돌아온 나를 반갑게 웃으며 맞이해 주는 세란이. 그런 동생의 머리에서 갑자기 피가 흐르는가 싶더니, 야수가 으적, 씹어 먹었다.
그런 뒤에는 머리가 없는 정장남이 자신의 머리를 찾아달라며 두 손을 더듬거렸고, 팔이 떨어지고 몸이 으깨진 중학생 남매가 좀비처럼 내게 기어왔다.
차마 볼 수 없어 애써 고개를 돌리자, 몸이 반쯤 파 먹힌 다은 누나가 왜 자기를 내버려 두고 갔냐며 윽박질렀고, 마지막에는 얼굴부터 허리까지 찢긴 대머리 아저씨가 고작 그 정도밖에 작전을 생각할 수 없었느냐며 타박했다.
그 둘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박고 사과하는 와중에 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틀째.
추적추적 비가 온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 주변에 떨어진 짐승 털을 모아 체온을 유지했다. 밖에서 나무를 구해와 불이라도 피우면 좋으련만, 난 여전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흘째가 되자 한계가 온 건지 일어설 수도 없게 되었다.
목이 마르다. 잠이 들면 또 악몽을 꿀 것 같아 한나절 내내 눈만 말똥거리며 내가 죽어가는 걸 실감했다.
대체 왜 내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동생에게 선물을 주고 싶을 뿐이었는데…….
깜빡 잠이 든 건지, 내가 다시 눈떴을 땐 날이 밝아져 있었다.
이로써 나흘째인가?
이젠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입술도 바짝 마르고, 볼도 쏙 들어간 상태다.
슬쩍 눈을 돌려 손목을 바라보았다. 손목에는 754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장남이 죽었을 때 알 수 있었다. 그가 죽자 1,000을 가리키던 숫자가 999로 바뀌었으니까.
그래, 이건 생존자를 실시간으로 가리키는 죽음의 카운트였던 것이다.
고작 나흘 만에 4분의 1이 죽었다. 다들 무슨 연유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이 세상이 가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하, 정말 가혹하지. 저런 야수가 존재하는 세상인데, 어찌 평범한 사람이 버틸 수 있겠어.
“데스 게임? 아냐. 이건 누가 더 오래 버티나 겨루는 생존 게임이야…….”
나는 마른웃음을 지어내며 자조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한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해서.
만약 내 동생이라면 어찌했을까?
세란이라면 이런 굴속에 피신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을까?
세란이라면 대머리 아저씨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 녀석은 나와 달리 명석하다. 한 번 읽은 책은 토씨 하나 틀리는 일 없이 완벽히 암기해 내고, 이따금씩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사실 거기까지만 봤을 땐 ‘머리가 뛰어나구나’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난 녀석이 가진 천재성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더 지니어스’란 두뇌 게임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였다.
당시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내로라하는 배우와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퀴즈를 풀었는데, 다들 난색을 표하는 문제조차도 동생은 손쉽게 풀어버리는 신기를 보인 것이었다.
내가 하도 신기해하며 저런 걸 어찌 아냐고 물어봤더니, 되레 ‘왜? 쉽잖아?’라는 말만 들었다.
그런 동생이기에 갈구하듯 물어보았다.
전부 무의미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만큼 절박했기에, 사고를 멈춰 버리면 마음이 꺾여 버릴 것만 같았기에.
[세란아… 너라면 어찌했겠니?]
통하지 않는 텔레파시를 보내보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으흐윽!”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파묻자, 참을 수 없는 오열이 터져 나왔다. 아니, 수분조차 없어 눈물은 나오지 않았으니, 소리 없는 울음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사무치도록 동생이 보고 싶다. 그 예쁜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가냘픈 어깨를 부둥켜안고 싶다.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앞으로 뻗어보았지만, 역시 그곳에 동생은 없었다.
크허엉―!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역시 아직까지도 야수가 주위를 배회하고 있던 건가? 그런데 어째 방금 울음소리는 비명같이 들렸는데?
내가 의문을 드러내는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거침없이 호쾌한 발걸음 소리.
이것은 짐승이 아니다. 사람이다. 사람이 틀림없다.
솔직히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책 속 미지의 세상이니만큼 내가 모르는 무언가일 확률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인가. 당장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판인데.
“여기, 살려… 콜록! 콜록!”
힘차게 소리 질러 구원을 요청하고 싶지만, 입이 바짝 마른 탓에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젖 먹던 힘을 쥐어짜 입구로 기어갔다. 도중에 삭은 뼛조각에 찔려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딴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목숨이 달려 있는 순간이니까.
그렇게 겨우 굴 입구에 당도하자, 상대도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발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내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직사광선에 눈이 아려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한참을 눈을 껌뻑이며 빛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가 비로소 내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무릎까지 이어진 가죽 부츠였다. 그 위로 승마 바지를 연상케 할 만큼 타이트한 가죽 바지와 낙낙한 품의 흰 블라우스, 거기에 코르셋처럼 생긴 가죽조끼를 입고 있었다.
좀 더 시선을 올리자 허리까지 내려온,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반듯한… 어쩌면 시원하다고도 할 수 있는 미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블루베리처럼 어둡고 묵직한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가늘게 뜬 눈동자엔 언뜻 호기심과 의심 같은 감정들이 섞여 있는 듯했다.
“…….”
왠지 모르겠는데 우린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후, 고집스러움이 엿보일 만큼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사람이냐?”
그것이 그녀가 내게 한 첫마디였다.
― 생존자 : 754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