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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동안 한마디도 없이 묵묵히 따라오기만 하던 내가 앞으로 나서자, 모두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어쭈? 고딩 새끼가 용기도 좋네?”
피어싱사내는 내 옷차림을 보고 학생이라는 걸 알았는지 비아냥거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얕잡아보는 그 눈빛을 무시하며 원피스 여성에게 가서 등을 내밀었다.
“업히세요, 어서.”
“어, 저기…….”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결국 원피스 여성은 머뭇머뭇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어이, 너. 정의로운 척하는 건 좋은데, 지쳐서 뒤처져도 신경 안 쓸 거다? 알았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피어싱사내는 어처구니없는지 실소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치 때문인지 더는 딴지를 걸지 않았다.
“무겁…죠?”
“익숙하니까 괜찮아요.”
“익숙하다고요?”
“실은 여동생을 자주 업어주곤 했거든요.”
내가 다소 난처하다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자, 뒤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죄송해요. 비웃은 건 아니에요. 단지 뭐랄까, 소설처럼 다정한 오빠도 있구나 싶은 생각에 그만…….”
“역시 좀 특이하죠?”
“아니에요!”
쑥스러운 기분에 대충 얼버무리던 나는 되레 크게 부정하는 원피스 여성의 목소리에 더 놀라고 말았다.
“전혀 특이하지 않아요. 응응, 이렇게 듬직한데.”
원피스 여성은 저 혼자 납득했다는 듯이 내 목을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원피스 여성의 몸이 가까이 밀착되자 등 뒤로 느껴지는 포근한 감촉과 함께 코끝을 스치는 머리칼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가 났다.
솔직히 말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향기였다.
“이름이 뭐예요?”
“네? 아, 신기석입니다.”
“신기석 씨군요.”
“씨라고 듣기엔 좀… 그냥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럼 기석 군이라 부를게. 나는 정다은. 누나라고 불러도 좋아.”
“아, 네… 그러니까, 정다은 누나?”
“우훗, 역시 좋을지도.”
“네?”
“아무것도 아니야.”
“야! 거기 둘! 너무 늦잖아! 자꾸 굼벵이처럼 기어올래!”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게 보기 싫었던 걸까, 대뜸 피어싱사내가 우리를 향해 소리 질렀다.
그의 행동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여기서 괜한 트러블을 만들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나는 입을 다물고 일행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다은 누나를 업고 걷기를 대략 10분쯤 지났을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손수건으로 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거나 손부채로 목 뒤를 부채질해 주던 다은 누나가 살짝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이상해.”
“하아, 하아… 네? 뭐가요?”
“실은 나, 플로리스트로 일하고 있는데…….”
“플, 뭐요?”
“아, 간단히 말해 그냥 조그마한 화원을 운영하고 있어.”
“그, 그렇군요.”
화원을 운영하는 사람을 플로리스트라고 하나?
괜히 멍청한 모습을 티낸 거 같아 낯부끄럽다.
“그래서 식물에 대해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여기에 있는 식물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 말씀은…….”
“한국에 자생하는 들꽃은 하나도 안 보여. 그렇다고 서구권에 피는 꽃도 없고. 저기, 노랑과 붉은색이 섞인 꽃 보이니? 도감에서도 본 적 없는 꽃이야. 저기, 기괴하게 생긴 나무도 그렇고.”
그녀가 가리킨 나무는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에 별사탕처럼 뾰족뾰족한 열매가 열려 있어 확실히 기괴하게 생기긴 했다.
“흥! 그냥 당신이 멍청해서 모르고 있는 것뿐이겠지!”
그때,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건지, 피어싱사내가 코웃음 치며 끼어들었다.
“그냥 어딜 봐도 흔한 나무때기구만!”
퍽!
피어싱사내는 그리 말하며 발로 기괴한 나무를 거침없이 걷어찼다.
그 순간.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무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히이이익!”
순간, 피어싱사내는 사색이 되어 뒤로 넘어졌고, 우린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뭐…… 시끄…… 누, 멈추……!”
혈색이 완전히 새파래진 피어싱사내가 연신 뒷걸음질 치며 뭐라 외쳤지만, 비명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원인 모를 기사에 나를 비롯해 다들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었으므로 피어싱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력조차도 없다고 봐야 했지만.
“아아아아아아…….”
그렇게 모두가 두려움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점차 비명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 귀를 막은 채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해서.
“…이걸로 확실해졌군요. 전부, 전부 알았습니다.”
고요한 적막을 깨듯 정장남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알다니… 뭐가 말이죠?”
파마남이 불안해하며 묻자, 정장남은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비명을 내지르던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무의 정체, 모르시겠습니까?”
“정체…요?”
“다들 아직 감이 오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좋습니다, 그럼 저 나무를 ‘울부짖는 나무’라고 부른다면?”
“울부짖는 나무? 어라?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은데…….”
“울부짖는 나무… 아아, 기억났어! 오빠, 메스트의 나무야! 메스트의 나무라고!”
여전히 아리송해하는 파마남과 달리 곰곰이 생각하던 중학생 남매 중 여동생 쪽이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그에 정장남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여기 있는 여러분보다 저 어린 친구들이 더 똑똑하군요. 맞습니다. 저 나무는 메스트의 나무. 가르벤 연대기에 등장하는 나무입니다.”
“자, 잠깐 기다려 보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따라가질 못하겠네.”
황망하게 듣고 있던 대머리 아저씨가 급히 손을 뻗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젊은이, 자네 말은 지금 저 메티슨지 메스튼지 하는 나무가 가르벤 연대기란 책 속에서 나오는 나무라,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생김새까진 정확한 묘사가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충격을 받으면 비명을 지르는 습성은 똑같습니다. 책 속에 나오는 메스트란 이름의 군사가 이 나무를 이용해 고주파 음을 발생시켜 수만의 몬스터 군단을 무찌르는 공헌을 세우죠. 그래서 메스트의 나무라 불립니다.”
정장남의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대머리 아저씨는 황망한 얼굴이 더더욱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나는 손녀에게 줄 선물로 한정판 책을 구입했던 것뿐이라 그 얘기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통 이해가 안 되네만, 어쨌든 저 나무가 책 속에 있는 나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얘긴가?”
나도 대머리 아저씨와 비슷한 입장인지라 절로 마음이 동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하나 정장남은 농담 같은 게 아닌지 매우 진지하게 우리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들, 나레스란 자가 했던 말 기억하고 계시죠?”
정장남이 이름을 거론하자 모두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바로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인데.
정장남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흡족하게 웃으며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진중하게 이어 말했다.
“그자가 그랬죠, 저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한 실험자로 발탁되었다고. 그리고 전장은 가르벤 대륙이라고. 그 말을 듣고 쭉 의혹을 품고 있었습니다. 혹시 이곳은 책 속 세상이 아닐까 하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 판타지 오타쿠 같은 놈아! 그럼 우리가 종이책 속에 있는 거라고? 그딴 소설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어!”
얼굴을 붉힌 채 화를 삭이며 듣고 있던 피어싱사내가 기어코 폭발했다.
하지만 정장남은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이 차분한 어조로 반박했다.
“냉정히 생각해 보세요. 애초에 다들 책 속에 빨려 들어가 우주 같은 공간에 도착했죠? 거기서 나레스란 자를 만났고요. 그만큼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가 하는 말도 가능성이 있는 얘기 아닐까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정장남은 노발대발하는 피어싱사내의 말을 자르며 손목을 들어 보였다.
“모두의 손목에 쓰여진 숫자 천, 그리고 이 세계에 들어온 저희도 정확히 천 명이죠. 뭔가 노골적이지 않나요? 분명 나레스란 자가 마지막에 그랬죠. ‘싸워라, 그리고 쟁취하라. 승리한 자, 단 한 명만이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자격을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요. 그 말인즉,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데스 게임이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빌어먹을, 그게 무슨 개 같은 말이야!”
기어코 피어싱사내가 정장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는 정말 한 대 때릴 것처럼 손을 높이 들어 올린 채 짓씹듯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여기가 그 소설 속이고, 데스 게임이 시작되었다 치자. 그래서 뭐? 그 음침한 놈 말대로 싸우자고? 999명을 쳐 죽이자고? 좋아, 그럼 가장 먼저 죽을 놈은 네놈이다.”
“기, 기다려 보게!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란 말이네!”
대머리 아저씨가 몸을 던지며 말리자, 피어싱사내는 마지못해 멱살을 놔주었다.
“큭, 저 아저씨 말이 맞습니다. 지금은 저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살기 위해서 뭉쳐야죠.”
“그래요! 지금은 서로 뭉치는 것이 살길이에요!”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내 등 뒤에 업혀 있던 다은 누나와 파마남까지 정장남을 옹호하자, 피어싱사내는 혀를 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조금 안심했는지 한껏 긴장한 채 중앙을 막고 서 있던 대머리 아저씨는 머리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한숨을 돌렸다.
“쳇, 그럼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데?”
투덜거리듯 묻는 피어싱사내의 말에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의 시선이 정장남에게로 모였다.
이 순간, 나를 포함해 무의식적으로 리더는 그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런데 그 물음의 답변은 정장남이 아니라 의외로 중학생 남매 중 오빠 쪽에서 나왔다.
“저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존셀이에요! 존셀을 찾으면 된다고요!”
당장에라도 존셀이란 자를 찾아 나설 것처럼 방방 뛰기에 대머리 아저씨가 의문을 담아 정장남을 돌아보았다.
“가르벤 연대기에 나오는 주인공격인 영웅입니다. 확실히 존셀을 찾기만 한다면 이 데스 게임을 수월히 풀어 나갈 수 있겠지만, 시급한 문제는 지금입니다. 일단 마을을 찾을 때까지 당분간 지낼 주거 공간과 식량을 확보해야겠죠.”
“저기, 식물에 대해서라면 제가 조금 알고 있어요. 먹을 수 있는 버섯이나 뿌리식물을 채집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30년이 넘도록 건축설계사로 일해왔네! 나무로 집을 짓는다면 내가 도와주겠네!”
식량과 주거 확보라는 말에 다은 누나와 대머리 아저씨가 손을 들었다.
“오, 그쪽에 전문가가 있어서 일단 안심이군요. 그렇다면 남은 건 지형을 파악해 지도를 제작해야 하는 정도…….”
“저 웹툰 작가입니다! 지도는 제가 그릴게요!”
“저하고 동생은 가르벤 연대기 수십 번도 더 읽어봤어요! 책에 관한 정보라면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동료 의식이 커진 건지 잇따라 파마남과 중학생 남매까지 나섰다.
나는 그런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에 떨며 우울해하던 이들이 어느새 활기찬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기에.
정장남… 대단하다. 고작 몇 마디 말만으로 사람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심적 불안까지 완화해 버리다니. 아마 저런 게 리더십이란 것이겠지.
저 사람만 따라가면 어찌어찌 잘 풀릴 것 같다는 믿음이 샘솟았다. 다행이다. 저렇게 대단한 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운이 좋을지도.
“좋습니다. 그럼 슬슬 이동을…….”
정장남이 말을 하다 말고 멈추기에 우리는 모두 의아해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촤아악!
정장남의 뜯겨 나간 목에서 피 분수가 뿜어지는 모습을, 우리 모두 피범벅이 되도록 멍하니 바라보았다.
쿵!
뒤늦게 허물어지듯 정장남의 몸이 엎어졌다.
아직 신경이 살아 있는지 간헐적으로 파들파들 떠는 몸뚱어리를 바라보던 우리는…….
“히, 히익!”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다들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중학생 남매는 서로를 두붕켜 안은 채 부들부들 떨었고, 다은 누나는 내 등에 실례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볼 수 있었다.
정장남의 머리를 물고 있는, 한 마리 호랑이 같은 야수를.
― 생존자 : 999명 ―
그동안 한마디도 없이 묵묵히 따라오기만 하던 내가 앞으로 나서자, 모두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어쭈? 고딩 새끼가 용기도 좋네?”
피어싱사내는 내 옷차림을 보고 학생이라는 걸 알았는지 비아냥거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얕잡아보는 그 눈빛을 무시하며 원피스 여성에게 가서 등을 내밀었다.
“업히세요, 어서.”
“어, 저기…….”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결국 원피스 여성은 머뭇머뭇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어이, 너. 정의로운 척하는 건 좋은데, 지쳐서 뒤처져도 신경 안 쓸 거다? 알았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피어싱사내는 어처구니없는지 실소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치 때문인지 더는 딴지를 걸지 않았다.
“무겁…죠?”
“익숙하니까 괜찮아요.”
“익숙하다고요?”
“실은 여동생을 자주 업어주곤 했거든요.”
내가 다소 난처하다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자, 뒤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죄송해요. 비웃은 건 아니에요. 단지 뭐랄까, 소설처럼 다정한 오빠도 있구나 싶은 생각에 그만…….”
“역시 좀 특이하죠?”
“아니에요!”
쑥스러운 기분에 대충 얼버무리던 나는 되레 크게 부정하는 원피스 여성의 목소리에 더 놀라고 말았다.
“전혀 특이하지 않아요. 응응, 이렇게 듬직한데.”
원피스 여성은 저 혼자 납득했다는 듯이 내 목을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원피스 여성의 몸이 가까이 밀착되자 등 뒤로 느껴지는 포근한 감촉과 함께 코끝을 스치는 머리칼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가 났다.
솔직히 말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향기였다.
“이름이 뭐예요?”
“네? 아, 신기석입니다.”
“신기석 씨군요.”
“씨라고 듣기엔 좀… 그냥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럼 기석 군이라 부를게. 나는 정다은. 누나라고 불러도 좋아.”
“아, 네… 그러니까, 정다은 누나?”
“우훗, 역시 좋을지도.”
“네?”
“아무것도 아니야.”
“야! 거기 둘! 너무 늦잖아! 자꾸 굼벵이처럼 기어올래!”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게 보기 싫었던 걸까, 대뜸 피어싱사내가 우리를 향해 소리 질렀다.
그의 행동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여기서 괜한 트러블을 만들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나는 입을 다물고 일행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다은 누나를 업고 걷기를 대략 10분쯤 지났을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손수건으로 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거나 손부채로 목 뒤를 부채질해 주던 다은 누나가 살짝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이상해.”
“하아, 하아… 네? 뭐가요?”
“실은 나, 플로리스트로 일하고 있는데…….”
“플, 뭐요?”
“아, 간단히 말해 그냥 조그마한 화원을 운영하고 있어.”
“그, 그렇군요.”
화원을 운영하는 사람을 플로리스트라고 하나?
괜히 멍청한 모습을 티낸 거 같아 낯부끄럽다.
“그래서 식물에 대해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여기에 있는 식물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 말씀은…….”
“한국에 자생하는 들꽃은 하나도 안 보여. 그렇다고 서구권에 피는 꽃도 없고. 저기, 노랑과 붉은색이 섞인 꽃 보이니? 도감에서도 본 적 없는 꽃이야. 저기, 기괴하게 생긴 나무도 그렇고.”
그녀가 가리킨 나무는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에 별사탕처럼 뾰족뾰족한 열매가 열려 있어 확실히 기괴하게 생기긴 했다.
“흥! 그냥 당신이 멍청해서 모르고 있는 것뿐이겠지!”
그때,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건지, 피어싱사내가 코웃음 치며 끼어들었다.
“그냥 어딜 봐도 흔한 나무때기구만!”
퍽!
피어싱사내는 그리 말하며 발로 기괴한 나무를 거침없이 걷어찼다.
그 순간.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무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히이이익!”
순간, 피어싱사내는 사색이 되어 뒤로 넘어졌고, 우린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뭐…… 시끄…… 누, 멈추……!”
혈색이 완전히 새파래진 피어싱사내가 연신 뒷걸음질 치며 뭐라 외쳤지만, 비명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원인 모를 기사에 나를 비롯해 다들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었으므로 피어싱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력조차도 없다고 봐야 했지만.
“아아아아아아…….”
그렇게 모두가 두려움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점차 비명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 귀를 막은 채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해서.
“…이걸로 확실해졌군요. 전부, 전부 알았습니다.”
고요한 적막을 깨듯 정장남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알다니… 뭐가 말이죠?”
파마남이 불안해하며 묻자, 정장남은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비명을 내지르던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무의 정체, 모르시겠습니까?”
“정체…요?”
“다들 아직 감이 오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좋습니다, 그럼 저 나무를 ‘울부짖는 나무’라고 부른다면?”
“울부짖는 나무? 어라?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은데…….”
“울부짖는 나무… 아아, 기억났어! 오빠, 메스트의 나무야! 메스트의 나무라고!”
여전히 아리송해하는 파마남과 달리 곰곰이 생각하던 중학생 남매 중 여동생 쪽이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그에 정장남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여기 있는 여러분보다 저 어린 친구들이 더 똑똑하군요. 맞습니다. 저 나무는 메스트의 나무. 가르벤 연대기에 등장하는 나무입니다.”
“자, 잠깐 기다려 보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따라가질 못하겠네.”
황망하게 듣고 있던 대머리 아저씨가 급히 손을 뻗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젊은이, 자네 말은 지금 저 메티슨지 메스튼지 하는 나무가 가르벤 연대기란 책 속에서 나오는 나무라,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생김새까진 정확한 묘사가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충격을 받으면 비명을 지르는 습성은 똑같습니다. 책 속에 나오는 메스트란 이름의 군사가 이 나무를 이용해 고주파 음을 발생시켜 수만의 몬스터 군단을 무찌르는 공헌을 세우죠. 그래서 메스트의 나무라 불립니다.”
정장남의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대머리 아저씨는 황망한 얼굴이 더더욱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나는 손녀에게 줄 선물로 한정판 책을 구입했던 것뿐이라 그 얘기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통 이해가 안 되네만, 어쨌든 저 나무가 책 속에 있는 나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얘긴가?”
나도 대머리 아저씨와 비슷한 입장인지라 절로 마음이 동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하나 정장남은 농담 같은 게 아닌지 매우 진지하게 우리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들, 나레스란 자가 했던 말 기억하고 계시죠?”
정장남이 이름을 거론하자 모두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바로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인데.
정장남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흡족하게 웃으며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진중하게 이어 말했다.
“그자가 그랬죠, 저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한 실험자로 발탁되었다고. 그리고 전장은 가르벤 대륙이라고. 그 말을 듣고 쭉 의혹을 품고 있었습니다. 혹시 이곳은 책 속 세상이 아닐까 하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 판타지 오타쿠 같은 놈아! 그럼 우리가 종이책 속에 있는 거라고? 그딴 소설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어!”
얼굴을 붉힌 채 화를 삭이며 듣고 있던 피어싱사내가 기어코 폭발했다.
하지만 정장남은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이 차분한 어조로 반박했다.
“냉정히 생각해 보세요. 애초에 다들 책 속에 빨려 들어가 우주 같은 공간에 도착했죠? 거기서 나레스란 자를 만났고요. 그만큼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가 하는 말도 가능성이 있는 얘기 아닐까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정장남은 노발대발하는 피어싱사내의 말을 자르며 손목을 들어 보였다.
“모두의 손목에 쓰여진 숫자 천, 그리고 이 세계에 들어온 저희도 정확히 천 명이죠. 뭔가 노골적이지 않나요? 분명 나레스란 자가 마지막에 그랬죠. ‘싸워라, 그리고 쟁취하라. 승리한 자, 단 한 명만이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자격을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요. 그 말인즉,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데스 게임이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빌어먹을, 그게 무슨 개 같은 말이야!”
기어코 피어싱사내가 정장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는 정말 한 대 때릴 것처럼 손을 높이 들어 올린 채 짓씹듯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여기가 그 소설 속이고, 데스 게임이 시작되었다 치자. 그래서 뭐? 그 음침한 놈 말대로 싸우자고? 999명을 쳐 죽이자고? 좋아, 그럼 가장 먼저 죽을 놈은 네놈이다.”
“기, 기다려 보게!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란 말이네!”
대머리 아저씨가 몸을 던지며 말리자, 피어싱사내는 마지못해 멱살을 놔주었다.
“큭, 저 아저씨 말이 맞습니다. 지금은 저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살기 위해서 뭉쳐야죠.”
“그래요! 지금은 서로 뭉치는 것이 살길이에요!”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내 등 뒤에 업혀 있던 다은 누나와 파마남까지 정장남을 옹호하자, 피어싱사내는 혀를 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조금 안심했는지 한껏 긴장한 채 중앙을 막고 서 있던 대머리 아저씨는 머리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한숨을 돌렸다.
“쳇, 그럼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데?”
투덜거리듯 묻는 피어싱사내의 말에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의 시선이 정장남에게로 모였다.
이 순간, 나를 포함해 무의식적으로 리더는 그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런데 그 물음의 답변은 정장남이 아니라 의외로 중학생 남매 중 오빠 쪽에서 나왔다.
“저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존셀이에요! 존셀을 찾으면 된다고요!”
당장에라도 존셀이란 자를 찾아 나설 것처럼 방방 뛰기에 대머리 아저씨가 의문을 담아 정장남을 돌아보았다.
“가르벤 연대기에 나오는 주인공격인 영웅입니다. 확실히 존셀을 찾기만 한다면 이 데스 게임을 수월히 풀어 나갈 수 있겠지만, 시급한 문제는 지금입니다. 일단 마을을 찾을 때까지 당분간 지낼 주거 공간과 식량을 확보해야겠죠.”
“저기, 식물에 대해서라면 제가 조금 알고 있어요. 먹을 수 있는 버섯이나 뿌리식물을 채집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30년이 넘도록 건축설계사로 일해왔네! 나무로 집을 짓는다면 내가 도와주겠네!”
식량과 주거 확보라는 말에 다은 누나와 대머리 아저씨가 손을 들었다.
“오, 그쪽에 전문가가 있어서 일단 안심이군요. 그렇다면 남은 건 지형을 파악해 지도를 제작해야 하는 정도…….”
“저 웹툰 작가입니다! 지도는 제가 그릴게요!”
“저하고 동생은 가르벤 연대기 수십 번도 더 읽어봤어요! 책에 관한 정보라면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동료 의식이 커진 건지 잇따라 파마남과 중학생 남매까지 나섰다.
나는 그런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에 떨며 우울해하던 이들이 어느새 활기찬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기에.
정장남… 대단하다. 고작 몇 마디 말만으로 사람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심적 불안까지 완화해 버리다니. 아마 저런 게 리더십이란 것이겠지.
저 사람만 따라가면 어찌어찌 잘 풀릴 것 같다는 믿음이 샘솟았다. 다행이다. 저렇게 대단한 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운이 좋을지도.
“좋습니다. 그럼 슬슬 이동을…….”
정장남이 말을 하다 말고 멈추기에 우리는 모두 의아해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촤아악!
정장남의 뜯겨 나간 목에서 피 분수가 뿜어지는 모습을, 우리 모두 피범벅이 되도록 멍하니 바라보았다.
쿵!
뒤늦게 허물어지듯 정장남의 몸이 엎어졌다.
아직 신경이 살아 있는지 간헐적으로 파들파들 떠는 몸뚱어리를 바라보던 우리는…….
“히, 히익!”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다들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중학생 남매는 서로를 두붕켜 안은 채 부들부들 떨었고, 다은 누나는 내 등에 실례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볼 수 있었다.
정장남의 머리를 물고 있는, 한 마리 호랑이 같은 야수를.
― 생존자 : 999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