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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으으…….”
“이봐! 정신이 드나?”
힘겹게 눈을 뜨자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누군가가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남성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러닝셔츠에 사각 팬티만 입고 있었다.
이 아저씨… 행색이 왜 이러지? 마치 자다가 그냥 나온 것처럼…….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난 분명 기이한 현상 때문에 책 안으로 빨려 들어왔지! 다행히 죽진 않은 건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저는 분명 책 속에 빨려 들어가서…….”
난 이내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 냈다.
그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그래, 꿈인 게 확실하다.
“여기는 어디죠?”
가만 보니 사방에 새카맸다.
밤? 아니면 어딘가 밀폐된 장소에 갇힌 건가?
납치당한 것인지 모른다는 추측부터 시작해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고민하고 있자, 나를 깨운 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처음 떠올린 그게 맞아. 우린 책 안으로 빨려 들어왔네.”
중년인은 씁쓸하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난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돌아봤다.
그가 가리킨 곳엔 농구공만 한 크기의 지구가 떠 있었다.
아니, 지구뿐만이 아닌, 갖가지 행성과 유성 조각도 부유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곳도 바닥이 아니었다. 그저 컴컴한 어둠이라 표현해야 옳았다.
그래. 지금 내가 밤이나 밀폐된 장소라고 여긴 곳은 알고 보니 우주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컴퓨터 그래픽이었다.
요즘엔 방 자체를 그래픽으로 꾸며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도 있지 않은가. 지금도 틀림없이 그런 경우라 생각했다. 하지만 또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가짜가 아니네.”
중년인은 저 뒤에 작은 돌 조각을 툭툭 차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엔 나와 중년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모여 있는 사람들… 대충 훑어봤는데도 오백 명은 족히 넘어갈 것 같은 수였다.
“어이, 거기 누구 없어요! 누가 여기서 나 좀 꺼내줘!”
“이게 뭐야! 한창 책 받아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난 밤에 일 나가야 한다고! 어떤 새끼가 장난친 거야!”
괜한 허공에 소리치며 화내는 사람, 무서워서 벌벌 떠는 사람,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며 자료를 모으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이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책 속에 빨려 들어왔다는 건가?
“혹시… 아저씨도 그 가르벤 연대기란 책 속에 빨려 들어오셨나요?”
중년인은 내 물음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그 천 권 한정판 책 속에 빨려 들어왔다더군.”
“천 권… 그렇다면…….”
“나도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천 명의 사람이 모여 있겠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중년인은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나는 너무도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에게서 한정판 가르벤 연대기 책을 받아 납치되었다는 건가?
“아니,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책을 전해 주었다는 것부터 가능한 일인가? 버리는 자도 분명 있을 텐데…….”
“응? 무슨 소린가? 책을 전해주다니?”
“네? 아저씨는 정체 모를 사람에게서 책을 받지 않았나요?”
“음, 나는 그저 인터넷으로 평범하게 예약 구매했을 뿐이네만?”
그 말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그럼 어찌 된 일이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인상만 찌푸리고 있던 그때, 갑자기 허공의 일부분이 일그러지더니 작은 블랙홀이 생겨났다. 모두가 신기해하며 블랙홀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안에서 후드를 눌러쓴 사람이 불쑥 빠져나왔다.
“우왁! 저, 저게 뭐야!”
“사…람?”
온몸을 가리는 검은 로브와 단순히 후드를 눌러쓰고 있을 뿐인데도 유령처럼 보이는 얼굴과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분위기까지……. 거기에 낫만 들고 있다면 정말 사신이라고 착각할 만한 모습인지라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반면,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은 나에게 책을 전해준 바로 그자였으니까.
[나는… 운명을 바꾸는 자, 나레스.]
그자가 하는 말이 귓속에 윙윙 울렸다. 진동이 너무 심해 나도 모르게 귀를 막았는데, 그럼에도 ‘나레스’라고 자신을 밝힌 자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너희는 내 목적을 위한 실험자로 발탁되었다.]
“으윽, 무슨 소리야? 실험자?”
“오빠, 무서워.”
“괜찮아, 내 곁에 있어.”
난데없는 실험이란 말에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나레스는 고개를 살짝 위아래로 흔들며 다시 말했다.
[고로 천 명의 실험자에게 고한다. 그대들의 전장은 가르벤 대륙.]
“가르벤 대륙?”
“소설책에 나오는 대륙이잖아? 뭔가 연관이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우리도 그 책 속에 들어온 거잖아. 설마 몰래카메라나 그런 거냐?”
“이딴 거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그만두고 나 좀 꺼내줘!”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꺼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결코 몰래카메라 같은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레스란 자가 하는 말은 나와 동생이 소통하는 텔레파시와 비슷한 것이란 걸 알아차렸으니까.
[싸워라, 그리고 쟁취하라. 승리한 자, 단 한 명만이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자격을 얻을 수 있으리라.]
나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사람들의 몸이 작은 빛에 감싸이더니, 제각기 어디인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정말 빛과도 같아 눈으로 인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으으… 아이고, 머리야.”
“우욱! 속이 메스꺼워. 대체 여긴 또 어디야?”
“보아하니 숲 같은데?”
새로이 이동된 곳은 울창한 숲 안이었다.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진 건지, 지금 이 근처에 있는 건 나를 포함해 열 명가량의 인원뿐이었다. 그중에는 처음 나를 깨워준 중년인도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오늘 밤에 친구도 만나야 하는데……. 응? 뭐야? 통화권 이탈? 정말 가지가지하네!”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데다 입에 피어싱까지 한 남자가 거칠게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다들 식겁한 얼굴로 저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정말이야… 인터넷도 안 돼.”
“이러면 위치 추적도 불가능하잖아. 대체 여긴 어디지? 지리산? 백두산?”
“애초에 한국이 맞긴 한 거야?”
“…….”
파마한 남성이 불안에 떨며 묻자, 다들 서로 눈치만 살피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헛! 이, 이것 좀 보게! 손목에 이상한 표시가!”
그때, 처음 나를 깨워준, 예의 머리 벗겨진 중년인이 자신의 손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의아해하며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의 손목에 1,000이란 숫자가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내 손목을 들여다보았는데… 역시나 1,000이란 숫자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응? 이것 봐! 내 손목에도!”
“저도, 저도 있어요!”
비단 나뿐만은 아닌지, 여기저기서 당황스러워하는 반응이 나왔다.
“아까 나레스라 자도 그렇고, 손목에 있는 숫자도 그렇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중년인이 혼란스럽다는 듯 말하자, 나머지 이들도 불안한 눈빛을 드러냈다.
“에이 썅! 나레슨지 뭔지 알 바 없고, 난 가겠어!”
“이보게, 가다니? 어디를 말인가?”
피어싱사내가 거칠게 손을 털어내며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자, 중년인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어딜 가든 뭔 상관이야! 난 이런 곳에 처박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그러다 길을 잃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남이사! 꼰대 아저씨는 좀 짜져 있어!”
피어싱사내는 중년인의 우려 섞인 말에도 전혀 아랑곳 않은 채 저 혼자 수풀을 헤치며 사라져 버렸다.
“그런 무모한…….”
“저희는 이제 어쩌죠?”
갑작스런 일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자, 지금껏 잠자코 있던 안경 쓴 정장남이 차분한 음성으로 제안을 했다.
“벌써 오후입니다. 날이 어두워져 조난을 당하기 전에 우리도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GPS 확인도 안 되고, 지도나 하물며 나침반도 없는 마당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의 기울어진 방향이나 나이테, 이끼가 자라 있는 위치 등으로 대략적인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정말인가?”
중년인이 놀라 묻자, 정장남은 안경을 슬쩍 추켜올리며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정장남의 말투와 몸짓에서 신뢰할 수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기에 우리는 우선 산을 내려가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한쪽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나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주변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간단히 인원수를 체크할 겸 소개하자면, 저 앞에 혼자서 걷고 있는 피어싱사내를 시작으로 파마남, 대머리 아저씨, 원피스를 입은 여성,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는 중학생 남매, 정장남,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까지 포함해 총 여덟 명이었다.
“시발, 더럽게 덥네. 길은 또 뭐 이리 험난해?!”
피어싱사내는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거칠게 수풀을 헤쳐 나갔다. 그의 거친 욕설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이 이해도 되었다. 어째선지 이곳엔 사람이 만들어놓은 흔한 길조차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꺅!”
한참 동안 말없이 걸어가던 도중, 뒤에서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정장남이 원피스 여성을 부축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성분이 발을 접지른 것 같습니다!”
피어싱사내의 물음에 정장남이 빠르게 답했다.
“뭐야? 하아, 진짜. 걸을 수 있겠어?”
짜증이 한껏 담긴 목소리로 다시 묻자, 정장남은 팔을 X자로 만들며 부정적인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일단 원피스 여성에게로 모여들었다.
“이건 아무래도 인대가 늘어난 것 같은데…….”
대머리 아저씨가 근심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에도 복사뼈가 퉁퉁 부은 게, 보통 부상은 아닌 듯 보였다. 아무래도 산을 타기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을 신고 있어 제대로 접질린 모양인데…….
“아가씨, 걸을 수 있겠어요?”
“괘, 괜찮… 아윽!”
파마남이 심각한 어조로 묻자, 원피스 여성은 이러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괜찮은 척 일어서려다 이내 발목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 심각한 모습에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부상은 모든 일정이 어긋날 만큼 치명적일 테니까.
“별수 없네. 당신은 여기 남아. 구조대를 찾으면 말을 전해줄 테니까.”
“시, 싫어! 저를 놔두고 가지 말아요!”
“아씨, 엉겨 붙지 마! 사람을 보내준다 하잖아!”
“거짓말! 제가 걸림돌이니까 놔두고 가려는 거 다 알아요!”
“그럼 어쩌라고! 당신 하나 때문에 우리가 다 움직이지 못하게 생겼는데!”
“제, 제발 부탁이에요! 놔두고 가지 말아요! 뭐든지, 뭐든지 할게요!”
“뭐? 그 말 진짜야?”
순간, 피어싱사내의 눈이 원피스 여성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소름 끼치는 행동에 원피스 여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애써 몸을 가리지는 않고 입술을 악다문 채 수치심을 버텨냈다.
“야, 다시 말해봐. 그 말 진짜야? 엉?”
“하, 할게요. 하면 되잖…….”
“업히세요.”
그 순간, 더는 참을 수 없어 앞으로 나섰다.
“으으…….”
“이봐! 정신이 드나?”
힘겹게 눈을 뜨자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누군가가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남성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러닝셔츠에 사각 팬티만 입고 있었다.
이 아저씨… 행색이 왜 이러지? 마치 자다가 그냥 나온 것처럼…….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난 분명 기이한 현상 때문에 책 안으로 빨려 들어왔지! 다행히 죽진 않은 건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저는 분명 책 속에 빨려 들어가서…….”
난 이내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 냈다.
그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그래, 꿈인 게 확실하다.
“여기는 어디죠?”
가만 보니 사방에 새카맸다.
밤? 아니면 어딘가 밀폐된 장소에 갇힌 건가?
납치당한 것인지 모른다는 추측부터 시작해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고민하고 있자, 나를 깨운 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처음 떠올린 그게 맞아. 우린 책 안으로 빨려 들어왔네.”
중년인은 씁쓸하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난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돌아봤다.
그가 가리킨 곳엔 농구공만 한 크기의 지구가 떠 있었다.
아니, 지구뿐만이 아닌, 갖가지 행성과 유성 조각도 부유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곳도 바닥이 아니었다. 그저 컴컴한 어둠이라 표현해야 옳았다.
그래. 지금 내가 밤이나 밀폐된 장소라고 여긴 곳은 알고 보니 우주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컴퓨터 그래픽이었다.
요즘엔 방 자체를 그래픽으로 꾸며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도 있지 않은가. 지금도 틀림없이 그런 경우라 생각했다. 하지만 또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가짜가 아니네.”
중년인은 저 뒤에 작은 돌 조각을 툭툭 차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엔 나와 중년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모여 있는 사람들… 대충 훑어봤는데도 오백 명은 족히 넘어갈 것 같은 수였다.
“어이, 거기 누구 없어요! 누가 여기서 나 좀 꺼내줘!”
“이게 뭐야! 한창 책 받아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난 밤에 일 나가야 한다고! 어떤 새끼가 장난친 거야!”
괜한 허공에 소리치며 화내는 사람, 무서워서 벌벌 떠는 사람,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며 자료를 모으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이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책 속에 빨려 들어왔다는 건가?
“혹시… 아저씨도 그 가르벤 연대기란 책 속에 빨려 들어오셨나요?”
중년인은 내 물음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그 천 권 한정판 책 속에 빨려 들어왔다더군.”
“천 권… 그렇다면…….”
“나도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천 명의 사람이 모여 있겠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중년인은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나는 너무도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에게서 한정판 가르벤 연대기 책을 받아 납치되었다는 건가?
“아니,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책을 전해 주었다는 것부터 가능한 일인가? 버리는 자도 분명 있을 텐데…….”
“응? 무슨 소린가? 책을 전해주다니?”
“네? 아저씨는 정체 모를 사람에게서 책을 받지 않았나요?”
“음, 나는 그저 인터넷으로 평범하게 예약 구매했을 뿐이네만?”
그 말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그럼 어찌 된 일이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인상만 찌푸리고 있던 그때, 갑자기 허공의 일부분이 일그러지더니 작은 블랙홀이 생겨났다. 모두가 신기해하며 블랙홀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안에서 후드를 눌러쓴 사람이 불쑥 빠져나왔다.
“우왁! 저, 저게 뭐야!”
“사…람?”
온몸을 가리는 검은 로브와 단순히 후드를 눌러쓰고 있을 뿐인데도 유령처럼 보이는 얼굴과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분위기까지……. 거기에 낫만 들고 있다면 정말 사신이라고 착각할 만한 모습인지라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반면,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은 나에게 책을 전해준 바로 그자였으니까.
[나는… 운명을 바꾸는 자, 나레스.]
그자가 하는 말이 귓속에 윙윙 울렸다. 진동이 너무 심해 나도 모르게 귀를 막았는데, 그럼에도 ‘나레스’라고 자신을 밝힌 자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너희는 내 목적을 위한 실험자로 발탁되었다.]
“으윽, 무슨 소리야? 실험자?”
“오빠, 무서워.”
“괜찮아, 내 곁에 있어.”
난데없는 실험이란 말에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나레스는 고개를 살짝 위아래로 흔들며 다시 말했다.
[고로 천 명의 실험자에게 고한다. 그대들의 전장은 가르벤 대륙.]
“가르벤 대륙?”
“소설책에 나오는 대륙이잖아? 뭔가 연관이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우리도 그 책 속에 들어온 거잖아. 설마 몰래카메라나 그런 거냐?”
“이딴 거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그만두고 나 좀 꺼내줘!”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꺼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결코 몰래카메라 같은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레스란 자가 하는 말은 나와 동생이 소통하는 텔레파시와 비슷한 것이란 걸 알아차렸으니까.
[싸워라, 그리고 쟁취하라. 승리한 자, 단 한 명만이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자격을 얻을 수 있으리라.]
나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사람들의 몸이 작은 빛에 감싸이더니, 제각기 어디인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정말 빛과도 같아 눈으로 인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으으… 아이고, 머리야.”
“우욱! 속이 메스꺼워. 대체 여긴 또 어디야?”
“보아하니 숲 같은데?”
새로이 이동된 곳은 울창한 숲 안이었다.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진 건지, 지금 이 근처에 있는 건 나를 포함해 열 명가량의 인원뿐이었다. 그중에는 처음 나를 깨워준 중년인도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오늘 밤에 친구도 만나야 하는데……. 응? 뭐야? 통화권 이탈? 정말 가지가지하네!”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데다 입에 피어싱까지 한 남자가 거칠게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다들 식겁한 얼굴로 저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정말이야… 인터넷도 안 돼.”
“이러면 위치 추적도 불가능하잖아. 대체 여긴 어디지? 지리산? 백두산?”
“애초에 한국이 맞긴 한 거야?”
“…….”
파마한 남성이 불안에 떨며 묻자, 다들 서로 눈치만 살피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헛! 이, 이것 좀 보게! 손목에 이상한 표시가!”
그때, 처음 나를 깨워준, 예의 머리 벗겨진 중년인이 자신의 손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의아해하며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의 손목에 1,000이란 숫자가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내 손목을 들여다보았는데… 역시나 1,000이란 숫자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응? 이것 봐! 내 손목에도!”
“저도, 저도 있어요!”
비단 나뿐만은 아닌지, 여기저기서 당황스러워하는 반응이 나왔다.
“아까 나레스라 자도 그렇고, 손목에 있는 숫자도 그렇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중년인이 혼란스럽다는 듯 말하자, 나머지 이들도 불안한 눈빛을 드러냈다.
“에이 썅! 나레슨지 뭔지 알 바 없고, 난 가겠어!”
“이보게, 가다니? 어디를 말인가?”
피어싱사내가 거칠게 손을 털어내며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자, 중년인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어딜 가든 뭔 상관이야! 난 이런 곳에 처박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그러다 길을 잃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남이사! 꼰대 아저씨는 좀 짜져 있어!”
피어싱사내는 중년인의 우려 섞인 말에도 전혀 아랑곳 않은 채 저 혼자 수풀을 헤치며 사라져 버렸다.
“그런 무모한…….”
“저희는 이제 어쩌죠?”
갑작스런 일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자, 지금껏 잠자코 있던 안경 쓴 정장남이 차분한 음성으로 제안을 했다.
“벌써 오후입니다. 날이 어두워져 조난을 당하기 전에 우리도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GPS 확인도 안 되고, 지도나 하물며 나침반도 없는 마당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의 기울어진 방향이나 나이테, 이끼가 자라 있는 위치 등으로 대략적인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정말인가?”
중년인이 놀라 묻자, 정장남은 안경을 슬쩍 추켜올리며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정장남의 말투와 몸짓에서 신뢰할 수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기에 우리는 우선 산을 내려가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한쪽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나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주변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간단히 인원수를 체크할 겸 소개하자면, 저 앞에 혼자서 걷고 있는 피어싱사내를 시작으로 파마남, 대머리 아저씨, 원피스를 입은 여성,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는 중학생 남매, 정장남,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까지 포함해 총 여덟 명이었다.
“시발, 더럽게 덥네. 길은 또 뭐 이리 험난해?!”
피어싱사내는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거칠게 수풀을 헤쳐 나갔다. 그의 거친 욕설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이 이해도 되었다. 어째선지 이곳엔 사람이 만들어놓은 흔한 길조차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꺅!”
한참 동안 말없이 걸어가던 도중, 뒤에서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정장남이 원피스 여성을 부축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성분이 발을 접지른 것 같습니다!”
피어싱사내의 물음에 정장남이 빠르게 답했다.
“뭐야? 하아, 진짜. 걸을 수 있겠어?”
짜증이 한껏 담긴 목소리로 다시 묻자, 정장남은 팔을 X자로 만들며 부정적인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일단 원피스 여성에게로 모여들었다.
“이건 아무래도 인대가 늘어난 것 같은데…….”
대머리 아저씨가 근심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에도 복사뼈가 퉁퉁 부은 게, 보통 부상은 아닌 듯 보였다. 아무래도 산을 타기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을 신고 있어 제대로 접질린 모양인데…….
“아가씨, 걸을 수 있겠어요?”
“괘, 괜찮… 아윽!”
파마남이 심각한 어조로 묻자, 원피스 여성은 이러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괜찮은 척 일어서려다 이내 발목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 심각한 모습에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부상은 모든 일정이 어긋날 만큼 치명적일 테니까.
“별수 없네. 당신은 여기 남아. 구조대를 찾으면 말을 전해줄 테니까.”
“시, 싫어! 저를 놔두고 가지 말아요!”
“아씨, 엉겨 붙지 마! 사람을 보내준다 하잖아!”
“거짓말! 제가 걸림돌이니까 놔두고 가려는 거 다 알아요!”
“그럼 어쩌라고! 당신 하나 때문에 우리가 다 움직이지 못하게 생겼는데!”
“제, 제발 부탁이에요! 놔두고 가지 말아요! 뭐든지, 뭐든지 할게요!”
“뭐? 그 말 진짜야?”
순간, 피어싱사내의 눈이 원피스 여성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소름 끼치는 행동에 원피스 여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애써 몸을 가리지는 않고 입술을 악다문 채 수치심을 버텨냈다.
“야, 다시 말해봐. 그 말 진짜야? 엉?”
“하, 할게요. 하면 되잖…….”
“업히세요.”
그 순간, 더는 참을 수 없어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