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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건 어쩌면 엄마가 내보이는 생경함에 대한 말리의 반항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도망가…….”

그리고 어머니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대로 두면 예정대로 날이 밝자마자 화형에 처해지리라. 말리는 한참 동안 제 품에서 쓰러진 어머니를 내려다보다가, 비척비척 일어섰다. 달아나야 했다. 곧 날이 밝을 터였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토굴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고,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토머스와 마주쳤다.

“약속을 지켜야지.”

“…….”

피가 자신을 지켜 준다던 말은 거짓말이었다. 말리는 그대로 숲으로 질질 끌려갔다. 말리가 어렴풋이 짐작했듯, 토머스는 가슴을 만지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뭐야, 처녀가 아니잖아?”

열세 살 어린애를 제 몸뚱이로 짓누르며 오만 지저분한 짓을 저지른 것은 제 놈이면서, 토머스는 사뭇 지저분한 것을 만졌다는 듯 투덜댔다.

말리는 토머스에게 제가 읍내를 다녀오느라 겪었던 일을 설명하는 대신, 토머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덤불숲만 망연히 쳐다봤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토머스는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된다며 그녀를 내팽개치고 돌아섰다. 말리는 옷을 겨우 추스르고 비척비척 일어나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 바깥으로 달음질쳐 봐야 곧 마을 사람들에게 잡힐 것이 분명했다.

일곱 개의 밤과 일곱 개의 낮이 지난 후에야 말리는 숲의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었다.

숲에서 나온 말리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너른 들판과 건너편의 민가 여럿이었다. 그 민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말리는 문득 제 앞치마를 내려다봤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앞치마에는 갈색 핏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이런 옷을 입고 민가로 갔다간, 대번에 붙잡혀 관청으로 갈 게 뻔했다.

말리는 앞치마를 벗어 들고 다시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 직전에 찾아냈던 샘으로 갔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머리카락을 헹구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르는 동안 그녀는 구겨진 앞치마를 쥐어 들고 한참이나 응시했다.

지긋지긋했으나 버릴 수가 없었다.

“엄마아…….”

말리는 결국 앞치마를 쥐고 그대로 쭈그려 앉아 울었다. 울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건 나무들뿐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그녀는 다시 샘에서 세수를 했다. 부은 눈을 가라앉히고, 앞치마를 뒤집어 둘렀다. 그래도 핏자국이 가려지지 않아 그녀는 근처의 덤불에서 열매즙을 쥐어짰다. 갈색 핏자국은 빨간 열매즙으로 뒤덮여 얼룩처럼 보였다.

그녀는 결 나쁜 갈색 머리를 땋고 비척비척 일어서서 민가로 갔다. 그녀의 뒤를 쫓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 레일라 공주



말리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너무 졸릴 때면 정신을 차리기 위해 그녀가 종종 하는 짓이었다. 상전의 눈앞에서 하품을 할 수도, 그렇다고 한숨 잘 수도 없으니 그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운이 나빴다. 그녀가 모시는 상전에게 졸린 기색을 들킨 것이다.

“졸린가?”

자수를 놓던 금발의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리는 움찔해 그녀를 쳐다봤다. 투명한 푸른색의 눈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럴 때는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이다.”

여자가 여상하게 말했다. 언감생심 졸려서 눈 한 번 감은 것이 죽을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말리는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돌바닥에 무릎이 부딪치며 꿍, 하는 충격이 그대로 전해졌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무는 대신 외쳤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됐다. 일어나라.”

“……예…….”

말리는 눈치를 보며 일어나다가 뒤로 다시 넘어질 뻔했다. 기다란 시녀의 옷자락에 채 익숙해지지 않은 탓이다. 옆에 있던 다른 늙은 시녀가 쯔쯔 혀를 차는 시늉을 했다. 제 주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말리는 늙은 시녀가 자신을 깔보는 눈길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별도리 있으랴. 말리는 주섬주섬 일어나 옷자락을 정돈했다. 다시 내실에는 적막함이 감돌았다. 말리를 졸음에 이르게 했던 바로 그 적막함이었다. 금발의 여인은 별것 없다는 듯 다시 손을 놀렸다. 자수틀에 붉은 실이 느릿한 궤적을 그렸다.

‘저딴 게 뭐가 재미있다고 며칠째 하고 있는 거지.’

말리는 여인이 놓고 있는 자수틀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여인은 벌써 사흘째 저 자수틀을 붙잡고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그래도 양잿물에 손 담그는 것보다는 서 있는 게 나은가.’

말리 또한 사흘째 여인의 옆에 서 있었다. 멍하니 서서 그녀가 자수를 하는 것을 보다가, 여인이 목말라하면 물을 가져다주거나 다리를 주물러 준다. 가끔은 어깨도 주무른다.

그게 스무 살 된 말리가 하는 일이었다.

“네 이름이 무어냐.”

문득 여인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말리는 화들짝 놀라 답했다.

“마, 말리입니다.”

“마말리. 그래. 마말리야, 가서 마구간에 내가 조금 후에 파라디를 데리고 나갈 거라고 연통을 넣으렴.”

말리가 말을 더듬은 것을, 여인은 이름으로 착각한 듯했다. 하지만 말리는 차마 거기다 대고 제 이름이 말리라고 고하지는 못하고 다만 고개를 숙인 후 허리를 수그린 그대로 물러났다. 뒤로 걸음 하다가 걸려 넘어질 뻔한 건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끼이익.

방문이 닫히자마자 말리는 허리를 폈다. 방문 앞에 서 있던 시종 하나가 심술궂게 웃었다. 그야 공주의 앞에서는 허리를 수그리고 있던 시녀들이 문만 닫히면 바짝바짝 허리를 세우는 꼴이 우스워 보일 만도 했다.

말리는 코를 한 번 찡그리고는 시종은 본체만체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 성에 온 지 하루 만에 성 구조를 외워 마구간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으리, 레일라 공주님께서 파라디를 조금 후 데리고 나갈 거라 하셨어요.”

마구간이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아마 파라디는 말의 이름이리라. 마구간지기에게 그렇게 고하며 말리는 코를 훔쳤다. 아직 날씨가 싸늘했다. 불을 잔뜩 때 훈훈한 공주의 방과는 달리 마구간은 찬 바람이 조금씩 들었다. 중년의 마구간지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저는 공주님의 시녀이온데…….”

말리가 눈치를 보자 마구간지기가 코웃음 쳤다.

“네년이 공주님 시녀인 건 하는 말만 들어도 알겠다. 공주님 시녀 중에는 처음 보는 계집아이가 아니냐.”

“……일주일 전부터 공주님 시녀로 일하게 된 말리입니다.”

“말리라. 이름을 보아하니 평민인 게로구나?”

“예? 예…….”

“알았다. 가 봐라.”

마구간지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녀를 보냈다. 말리는 입을 몇 번 비쭉대곤 마구간을 나왔다. 뭐라도 시비를 걸 줄 알았는데, 평민이냐고 묻더니 그냥 보낸다. 벌써 몇 번째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말리는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텃세가 없는 곳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말리가 레일라 공주의 시녀가 된 건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보호해 줄 어른 하나 없는 계집애는 스무 살까지 쭉쭉 잘도 자랐다. 자라는 과정에서 별일 다 겪은 것은 비단 말리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해 본 일 안 해 본 일 없이, 부르튼 손이 보드라워질 틈도 없이 그렇게 살았다. 가끔은 여관의 하녀였고, 어떨 때는 도둑들의 바람잡이였으며, 대부분은 길바닥에서 구걸을 했다. 대충 일하다가 수틀리면 내빼기도 반복했다. 그렇게 흘러 흘러 말리가 도달한 곳은 그녀가 사는 왕국 디온의 수도였다.

말이 왕성이지 벨담의 제후국 신세였던 디온의 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돌로 쌓아 올린 투박한 성 근처에 있는 민가는 이천여 호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일자리가 있을 것 같아 헤매던 말리는 소죽을 쑤는 하녀로 근방의 농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법 큰 농장을 경영하던 농장주는 말리에게 1년에 은화 두 닢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한 달 후에 말리에게 갑자기 “성에서 일할 용의가 있냐?”라고 물었다. 무지렁이 주제에 용의라는 어려운 말을 쓴다 했더니, 성에서 나온 사람이 말하는 본새가 제법 기꺼웠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농장주는 성에서 일할 하녀를 소개받는 대가로 자신이 은화 한 닢을 받기로 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하녀에게는 1년에 보수로 금화 한 닢이 주어진다고 했다. 두고 볼 것도 없었다. 말리는 덥석 성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가 봐야 말 먹일 짚이나 자르겠지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성으로 간 말리는 웬 중년의 부인 앞에 섰다. 그 부인은 말리를 보더니 이것저것 물었다.

“부모님은?”

“집은?”

“다른 친척은 없고?”

셋 다 없다고 짤막하게 답하며 말리는 오만 생각을 다 했다. 가족도 집도 없어 아무도 보증하지 않을 처녀애를 성에서 과연 써 줄까? 부모님이 있다고 말했어야 하나?

하지만 부인은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침방으로 가라 했다. 말리는 다른 하녀에게 끌려 침방으로 갔다. 거기서 치수를 재고 옷을 맞춰 입었다. 보기만 해도 황홀한 면포 옷이었다. 말리는 거기서 더럭 겁을 먹었다.

‘이거, 하녀가 아니라 높은 어르신 침대에 밀어 넣는 것 아냐?’

말리의 추측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그녀는 높은 어르신의 침대를 봐 주게 되긴 했다. 하지만 그 높은 어르신은 그녀가 생각하던 늙고 배가 나온 남자가 아니라, 깡마르고 말이 없는 여자였다.

레일라 디온.

디온의 공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