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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시녀



· 일러두기
본 글은 그림 형제의 <거위치기 아가씨>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한 작품임을 밝힙니다.



1화





1. 마녀의 딸




왕은 제법 흡족해했다.

“그만한 소국의 공주라도 공주랍시고 도도하게 굴 줄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말리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입 안에는 불쾌한 감각이 아직도 남아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 힐끗 쳐다본 테이블에는 아름답게 상감된 꽃병이 있었다. 저 꽃병 위에 산처럼 수북이 꽂힌 흰 꽃들을 모조리 뽑아 치우고 그 물로 역한 비린내가 나는 입 안을 헹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 꼴을 남자 앞에서 보인다면 입을 헹구기도 전에 제 피로 남자의 손을 씻게 될 것이다.

말리는 제 핏줄을 떠올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을의 남자들을 홀리고 음탕하게 굴었다는 죄목으로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나저러나 죽을 거라면 그냥 지금 죽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으나 그녀는 곧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이것보다 더 구역질 나오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죽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죽을까, 죽고 싶다 같은 생각은 언제나 그녀의 머릿속 한쪽에 지박령처럼 붙박여 있었으나 그건 그저 추임새 같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조금 원망했다.

‘이왕 마녀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을 거면 진짜 요술이라도 가르쳐 주지 그랬어?’

나라를 전복시키거나 누군가를 죽이는 대단한 사술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매 순간 닥치는 곤욕스러운 상황을 대충 넘어갈 만한, 그런 사소한 요술이면 됐다. 이를테면, 눈앞의 남자를 그냥 재워 버린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짐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말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기민하게도 눈치챈 듯했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대국 벨담의 왕. 그가 아침부터 밤까지, 심지어는 잘 때도 쓰고 있다는 아름다운 황금 가면이 자신을 무도히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면에 뚫려 있는 눈구멍 안으로는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너머의 시선이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말리는 흠칫했다. 방에 들어오기 전, 시녀장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일이 있었다. 바로 왕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가면을 쓴 얼굴이라도 말이다. 하여 말리는 곧장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아랫도리가 눈에 들어왔다.

위엄 있게 갖춰 입은 상의와 달리, 하체는 온통 발가벗은 남자는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은 말해 무엇 하랴. 조금 젖은 채 축 늘어진 남자의 물건과 번쩍이는 의자의 조화가 우스꽝스러웠지만 우습기로 따지자면 지금 제 처지가 가장 우스꽝스러우리라. 말리는 고개를 숙이며 낮게 말했다.

“폐하의 침실이 아름다워 잠시 정신을 빼앗겼나이다.”

“뭐가 그렇게 아름답지?”

“……꽃병이…….”

말리는 황급히 대꾸했다. 남자의 고개가 꽃병 쪽으로 돌아갔다가 슬쩍 기울어졌다.

“그다지 아름다울 것도 없어 보이는데.”

“황금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것이 부유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러냐.”

왕이 픽 웃더니 설렁줄을 당겼다. 문이 열리고, 침실 옆에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들어와 왕의 발가벗은 하체에 아름답게 수놓은 담요를 덮어 주었다. 왕은 시녀 하나를 불러 말했다.

“저 꽃병을 공주에게 주어라.”

“……폐하.”

말리가 당황한 듯 남자를 불렀다. 남자가 픽 웃는 것이 가면 아래로도 똑똑히 보였다.

“내 마음에 든 상이다. 가지거라.”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녀가 침실 앞에 들 때까지도 뭐 하나 제대로 약속한 적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 잘난 것 한 번 빨아 주고 나니 저런 소리를 하고 있다. 저잣거리의 양아치들이나 왕이나 남자들이란 하등 다를 게 없는 생물인 모양이었다.

“공주인 줄 알았는데, 내 비로 들어온 것이 길거리의 창녀인 모양이다.”

말투에는 웃음이 배어 있었다. 말본새와는 다르게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왕은 왕인 모양이었다. 그냥 한 말이겠지만, 그럼에도 제 출신을 알아차리다니. 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잠자리를 돌보아 드릴까요.”

옆에 선 시녀가 나직하게 물은 다음 순간, 왕은 난폭하게 그 시녀의 머리를 밀쳤다. 뜻하지 않은 폭력에 시녀가 뒤로 나동그라졌고 말리는 흠칫했다.

“마음에 들었다고 말해도 말뜻을 못 알아들어.”

왕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시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빠르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가라.”

“예.”

시녀들은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말리는 자신도 나가야 하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왕은 그녀를 내보내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

“더 잘하면 더 좋은 것도 주겠다.”

양치는 요원할 모양이었다.

말리는 살짝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왕에게 다가가 그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담요를 젖혔다. 벌거벗은 남자의 하체가 다시 드러났다. 고개를 숙이자 잘그락, 말리의 머리에 장식돼 있던 보석들이 난폭하게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머리에 보석을 달고 왕의 좆을 빠는 삶이라니.

마녀의 딸 주제에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 * *



말리의 어머니는 화형 되어 죽던 날 새벽에 피 세 모금을 토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숲에서 약초를 캐어다 잡화점에 내다 팔며 살았다.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탓에 일부러 아침마다 진흙을 바르고 숲에 나가던 어머니는, 말리가 열 살이 넘은 후부터는 말리의 얼굴에도 흙을 발랐다. 하지만 그런 게 두 모녀를 지켜 주진 못했다.

오만 놈이 숲 언저리에 있는 모녀의 집에 들락거렸다. 집의 문은 결코 스스로 열린 적 없지만 강제로 열린 적은 몇 번 됐다. 말리의 어머니를 부르는 이름이 창녀에서 마녀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적어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랬다.

왕국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규모의 작은 나라였다. 어머니를 촌장이 토굴에 가두었을 때, 열세 살의 말리는 읍내로 내달렸으나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마을에서 읍내로, 읍내에서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말리는 열세 살이 겪을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역겨운 일들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 토굴로 돌아간 것은 어쨌든 제 어머니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토굴을 지키는 놈팡이 토머스는 말리에게 “가슴 한 번 만지게 해 주면 네 어미와 작별 인사 정도는 하게 해 주마.”라고 말했다. 흙투성이로 지저분해진 데다가 이틀 내내 잠 한숨 못 잔 말리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토머스를 노려보며 가슴을 열어젖혔다. 채 여물지도 않은 가슴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훑어보던 토머스는 “지금 말고, 조금 이따가.”라며 토굴 문을 열어 주었다. 말리는 윗옷을 제대로 여미지도 않고 그대로 토굴 안으로 굴러떨어지듯 들어갔다.

며칠째 토굴에서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쓰러져 있던 어머니는 말리가 건넨 물을 받아 삼키자마자 입을 열었다.

“도망가…….”

어이가 없었다. 당최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열세 살 여자애가 돈 한 푼 없이 홀로 도망쳐 봐야 당할 일이 뻔할 뻔 자였다. 그러나 말리는 토머스의 눈빛을 떠올리고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열세 살 여자애가 홀로 이 마을에 남아 봐야 당할 일은 어차피 같으리라.

가만히 무릎 꿇고 앉아 눈알을 굴리는 말리를 간신히 토굴 벽에 기대앉은 채 내려다보던 어머니는 안쓰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기침을 했다. 쿨럭, 하는 밭은기침에 핏덩이가 터져 나왔다.

“엄마!”

말리는 당황해 그녀가 입고 있던 낡고 더러운 앞치마로 어머니의 입을 닦았다. 계속해 터져 나오는 기침에 어머니는 앞치마에 두어 번 더 피를 토했다. 검은 핏자국이 번져 나갔고, 어머니는 그녀의 품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 어머니를 내려다보던 말리에게 다시금 같은 말이 떨어졌다.

“도망쳐, 말리야…….”

“엄마가 이런데 어떻게 도망을 쳐!”

반쯤은 진담이었고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살기는 틀렸다는 걸 말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라도, 내 몸뚱이 하나라도.

그런 생각들이 말리의 머리를 메웠다.

하지만 어떻게 지키지?

그렇게 생각하는 말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어머니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 피가 널 지켜 줄 거야…….”

기가 막힌 말이었다. 피 따위가 어떻게 사람을 지킨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눈은, 그때만큼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형형하게. 제 딸만큼은 죽게 놔두지 않겠다는 듯.

그 순간 말리는 어쩌면 마을 사람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진짜 마녀일지도 모르겠다고.

피아를 구별할 수 있을 적부터 따라 온 제 엄마가 그렇게 낯설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말리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피 따위가 날 어떻게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