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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말리는 자신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처음 들었던 바대로 하녀가 된 것도 아니고, 공주의 시녀씩이나 되었다는 것에 처음에는 당황해 못 하겠다고 외쳤다.

“쇤네는 귀한 어르신은 못 모십니다! 애초에 그런 귀한 분을 모셔 본 적이 없어요!”

“할 수 있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하는 일은 없느니.”

하지만 그녀를 뽑은 중년의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부인은 디온의 시녀장이었다. 시녀부터 여성 관리까지 모두 도맡아 일을 보는 사람이었는데, 공주의 시녀 중 젊은 축이 없어 고민하다 하녀로 들어올 애가 있다 해 직접 보러 왔다 했다. 말리는 겁에 질려 자신이 소죽 쑤는 것 외에는 아무 교양이 없음을 어필했으나, 시녀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딱 사흘 동안 공주의 옆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운 후, 말리는 공주의 옆으로 끌려왔다. 공주는 시녀장에게 새 시녀를 소개받는 자리에서 “알았다.” 딱 한 마디만 했다.

그게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말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공주의 시녀들은 삼각뿔 모양 작은 모자를 쓰게 돼 있었는데, 아침마다 머리를 꼼꼼히 빗어 넘겨 모자를 쓰는 것이 말리가 이 성에 들어와 하는 일 중 가장 까다로운 일이었다. 말리는 이마에 잔머리가 많아 보기 좋게 머리를 빗어 넘기는 것이 퍽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사이 모자에서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그녀의 이마를 간질이고 있었다. 말리는 모자를 벗고 다시 머리를 정돈할 곳을 찾았다. 시녀들의 숙소는 성의 뒤쪽에 있었는데, 마구간에서 나와 숙소까지 들렀다가 공주의 내실로 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듯했다.

그녀는 두리번거린 끝에 인적이 없는 회랑 정원을 찾았다. 돌로 만들어진 네모난 회랑 안에는 작은 우물과 꽃밭이 있었는데, 사람이 없어 모자를 벗기 좋았다.

말리는 우물가로 가 얼굴을 비춰 봤다. 마구간으로 갈 때 뛰었더니 머리카락이 좀 많이 삐져나온 듯했다. 그녀는 모자를 벗어 우물가에 두고, 단단히 묶어 뒀던 머리를 푼 다음 두피를 긁었다. 하루 종일 모자에 눌려 있던 두피가 시원해졌다. 때마침 구름 사이에 있던 햇빛이 회랑 사이로 들어와 그녀를 비추었다.

머리카락을 잔뜩 흐트러뜨린 그녀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우물물에 비쳤다. 말리는 잠시 제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말리의 마지막 기억에 제 뺨은 움푹 패어 있었고, 눈동자 밑은 쑥 꺼져 있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성에서 잘 먹었더니 제법 볼만한 얼굴이 되었지 않은가.

머리를 긁으며 말리는 세상일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새벽같이 일어나 소죽을 끓이느라고 불가 앞에 쪼그려 앉아 꼬박꼬박 조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공주님 앞에서 꼬박꼬박 졸고 있다니.

‘신세가 좀 나아진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말리는 고개를 저었다. 소죽을 끓이다가 졸면 그대로 넘어져 잿불에 홀랑 앞머리를 태우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졸면 무릎이 깨진다. 앞머리를 태우는 것과 무릎이 깨지는 것 중에 나은 것을 고르는 게 무에 의미가 있단 말인가.

“뭐 하는 거냐.”

말리의 상념을 깬 건 차가운 목소리였다. 말리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금발의 공주가 시녀 두 명을 대동한 채 회랑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말리는 공주가 곧 마구간으로 갈 거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말리는 파르륵, 놀란 새처럼 팔을 휘저으며 황급히 모자를 쓰려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 그대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과를 받고자 함이 아니다. 뭐 하는 거냐 물었다.”

말리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가, 여전히 내리쬐는 햇볕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자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공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일까. 공주의 파리하니 마른 얼굴이 옆으로 살짝 비틀리는 광경에 그 순간 눈을 빼앗긴 건.

말리는 잠시 넋을 놓았다가, 공주가 이마를 찡그리자 다시 놀라 입을 열었다.

“흐, 흐트러진 모습으로 공주님 앞에 갈 수가 없어 우물가에서 모자를 고쳐 쓰고 있었…….”

“알았다.”

공주는 말리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시녀 둘이 책망하는 눈으로 그녀를 흘깃 보고는 공주 뒤를 따랐다. 말리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우물가에 둔 모자를 줍고는 그 뒤를 따랐다. 납작 엎드릴 때 무릎과 치맛자락에 묻은 흙을 터는 건 고역이었다. 다 풀어 헤쳐 놓은 머리카락 끝에도 흙먼지가 묻었다.

‘망할, 소죽 끓일 때야 흙이 묻든 모자를 쓰든 아무도 지랄 안 했는데.’

하지만 말리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루에 두 번, 흰 빵과 꿀이 들어간 죽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 흰 빵을 주는데 따르는 잔소리야 뭐 어떤가. 꿀이 들어간 죽은 무릎이 열 번 깨져도 좋을 만큼 호사스런 맛이었다.

공주가 그녀의 말, 파라디를 타고 나간 후에 말리는 다른 시녀들과 함께 깨가 뿌려진 빵을 나눠 먹었다. 마구간에 들른 기사 하나가 별식이랍시고 나눠 준 것이었다. 말리는 역시 이 일자리가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자리가 있을까?’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말리는 정녕 몰랐다.



* * *



말리는 제 주제에 공주의 시녀씩이나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텃세가 없던 이유를 곧 알게 됐다.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그래서 네가 공주님 시녀가 되었구나?”

세탁 일을 주로 하는 하녀가 한 말이었다. 자그마한 디온 성에서 말리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쉽게 친해졌고, 세탁실의 하녀애는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처럼 보이는 말리를 불쌍해하며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처음에, 말리는 혹시 이 왕성에는 고아만 공주의 시녀로 두는 해괴한 전통이 있나 싶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었다.

레일라 공주는 정략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것도 마녀의 저주를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벨담 왕국의 비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벨담 왕이 받은 저주. 하도 유명한 이야기라 저잣거리를 뒹굴던 말리조차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이야기였다.

벨담의 왕은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받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태어난 날, 그의 요람에 마녀가 나타나 소리쳤다.

‘왕자가 자라나 제 첫 아이의 울음을 듣기 전까지, 제 어미와 아비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그 얼굴을 내보인다면 그 자리에서 모두가 피를 토하고 죽으리라!’

마녀의 저주를 받은 왕자는 갓난아이 시절부터 얼굴을 가린 채로 자랐다. 왕자의 얼굴은 본디 베일로 가려져 있었으나, 얼굴이 궁금해 베일을 몰래 들쳐 보려던 시녀가 있었다. 시녀는 그 자리에서 들켜 매를 맞아 죽었으며, 그 후부터 왕자는 황금으로 된 가면을 쓰고 살았다. 왕이 될 때까지도.

벨담은 큰 나라였다. 제후국만 세 곳, 충성의 맹약을 바친 대영주들도 여섯이나 되었다. 말리가 있는 디온도 벨담의 제후국이었다.

그렇게 큰 나라의 왕인데도 그는 스물여덟 살이 될 때까지도 첫 아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녀의 저주를 받아 가면을 쓰고 다니는 왕은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제후국의 공주들이 왕비 후보가 됐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무사히 왕비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왕이 왕자였던 시절 왕자비로 낙점됐던 한 공주는 강제로 침실에 들여진 날 자진했다. 세월이 흘러 왕비 후보로 제후국의 둘째 공주와의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 또한 아프다는 이유를 대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단다. 결국 그 혼담도 무산됐다.

“암만 강제로 결혼했다 쳐도 자진할 이유가 있어? 어차피 시집가는 건 부모 마음이잖아.”

말리는 흙에서 뽑은 순무를 아득아득 씹으며 하녀애에게 물었다. 하녀는 쉿, 하고 목소리를 낮추라는 시늉을 하더니 소곤거렸다.

“그야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그렇지만! 암만 그래도 규중에서 곱게 자란 공주님들이 그 포악한 왕을 이겨 내겠니?”

“포악해?”

말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녀애는 “너는 아는 게 뭐니!” 하고 신경질을 내더니 다시 속삭였다.

“하루 종일 가면을 쓰고 살아온 삶이 얼마나 힘들겠니? 그래서 그런지 그 포악함이 말도 못한단다!”

“아, 그렇구나.”

순무를 대충 닦았더니 모래가 씹혔다. 으드득 소리가 이 사이에서 나기에 말리는 퉤, 하고 침과 함께 순무 껍데기를 땅에 뱉었다.

군주의 포악함이야 뭐 드문 일도 아니었다. 말리를 위시한 그네들에게는 군주가 포악하다는 말은, 여름에 비가 온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당연하고도 제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 자연재해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니 어느 계절이든 마찬가지이다. 비가 오지 않는 쨍쨍한 날처럼 좋은 군주도 있고, 비 오는 날처럼 성정이 안 좋은 군주도 있고.

하지만 하녀애는 말리의 그런 태연함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 반응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도리를 치며 소리 지르듯 속삭였다.

“매일 밤 잠자리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하도 얻어맞아 개처럼 기어서 나온댄다, 얘!”

그러나 하녀애에게는 불행하게도, 말리는 심드렁하게 ‘속삭이는 걸 소리 지르는 것처럼 하다니, 희한한 재주를 갖고 있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아무튼 레일라 공주는 그런 처지였다. 그녀는 왕비 소생도 아닌 첩실 소생이었으며, 어릴 적에는 성 밖에서 자랐다고 했다. 자연스레 성안에서의 처지도 팍팍했다. 게다가 벨담 왕국으로 곧 가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레일라 공주의 옆에 붙어 있던 젊은 시녀애들이 모두 도망을 치려 들었다.

마녀의 저주라는 말만 해도 무시무시한데, 그 옆에 딸려 갔다가 포악한 성격의 왕에게 걸려 무슨 경을 칠지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