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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26화

2. 서울, 광화문 (25)





“다들 이미 어디선가 들어서 아는지 모르겠지만, 콘벤투스에서 S 광고 기획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지금 예상하는 바는 컨설팅 기획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획될 가능성이 크고 제언 방향을 빌미로 광고 회사를 교체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아.”

피 대리가 다소 충격받은 표정으로 해웅을 쳐다보았다.

“저희… 퍼포먼스도 좋지 않았습니까. 작년에 광고 대상도 탔는데…….”

“그거랑은 별개의 문제지. 일단 우리가 5년 동안 맡았는데 그게 꽤 생각보다 길다고 느낄 수도 있고, 전략 방향을 좀 신선하게 바꾸고 싶은 내부 목소리도 있을 수 있고…. 아니 그것보단 정치적인 원인이 클 수 있어. 탑 급에서 이야기가 오간 것 보면 단순히 광고 캠페인 성과의 문제가 아닐 수 있지. 그렇다면 이건 우리가 아무리 날뛰어도 흐름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해웅의 말에 피 대리는 허탈한지 믿기기 힘든 얼굴로 ‘말도 안 돼’를 연신 중얼거렸다. 윤원희 대리는 화가 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짧은 경력이지만 광고판에 몸담으면서 해웅은 정치적인 이유로 광고 회사가 교체되거나 비딩에서 지는 경우를 허다하게 겪었다. 기업 간의 이익과 목적으로 자회사의 광고 회사를 기용하거나 다른 대기업의 인하우스 에이전시를 기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케팅이나 광고 전략 자체의 우수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업 생태계의 논리 역시 존재했다. 해웅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조금이라도 주변 광고계 동료들이나 마케팅 쪽에서 흐르는 이야기들이 있으면 팀에 공유해 줬으면 좋겠어. 일단 나에게 제일 먼저 말해 주고. 물론 나도 정보를 모으는 대로 우리 팀원들에게 공유해 줄 생각이야. 아주 민감한 것들은 백 프로 공유한다고 장담 못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차별 없이 우리 팀에 다 공유할 테니…….”

“정보를 모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솔직히 교체하려고 마음먹는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

이세민 차장이 작게 한마디 꺼냈다. S 광고 기획 출신인 이세민 차장은 저가 전에 몸담았던 회사와 벌어지는 일이라 그런지 주춤거리며 팀 내 눈치를 봤다. 이세민 차장은 업계 탑인 광고 회사를 다니다가 돌연 사표를 내고 코인 노래방 사업을 했던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코인 노래방이 흥할 때 비즈니스를 시작해 제법 재미를 본 후, 번 돈으로 1년 동안 세계 여행을 다녔고, 모아 둔 돈이 다 떨어지자 외국계 광고 회사인 라이너스&매덥스에 입사한 케이스였다.

비록 해웅보다 나이도 어리고 작년에 차장으로 진급했지만 이세민 차장은 신입 시절부터 광고 회사에서 차근차근 경력을 밟아 와 광고 경력 자체는 해웅보다 길었다. 올해 기획2팀으로 차출되기 전까지, 해웅과 같은 1팀으로 지내면서 해웅은 그에게 광고 실무도 배우고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 게다가 광고 경력이 더 짧은 해웅이 먼저 차장으로 진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존대를 하며 예의 바르게 구는 모습에, 해웅은 이 차장을 의지가 되는 인물로 점찍어 두었다.

“이런 정보를 모으는 목적은 첫 번째, 콘벤투스 하반기 캠페인이 비딩으로 오픈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두 번째, 콘벤투스 내부에서 어떻게든 현재의 마케팅 전략에 이의를 제기하고 기존의 전략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전략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고려해야 해. 그럴 경우 경쟁 PT에서는 콘벤투스 내부에서 계획하고 있는 전략 방향으로 기획서를 써야 채택 가능성이 높아질 거야. 셋째, S 광고 기획과 접촉했다는 것은 업계 최고의 광고 회사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대기업 인하우스 에이전시라는 것도 한몫했을 텐데, 그렇다면 좀 더 정치적인 목적이 있을 수 있어. 이렇게 윗선끼리 접촉하는 일은 드물거든….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일단 내가 말한 내용은 절대 다른 데서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끼리만 알고 있었으면 하고, 또 S 광고 기획과 관련해서 도는 소문이 있는지 업계 지인이나 네트워크를 통해 적극적으로 알아 줬으면 좋겠어.”

“콘벤투스 영업팀에 제 대학교 동창이 있어요. 제가 계속 그 친구한테 물어볼게요. 아마 마케팅팀보다는 영업팀이 정보는 더 빠를 수 있어요. 직접 본사 출장도 많이 다니고 내부 사정은 아무래도 영업팀이 더 빠르니까요.”

윤원희 대리 말에 해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조회사 차원에서 보면 마케팅팀은 영업의 지원 부서에 불과했다. 알짜배기 정보는 영업팀에서 가장 먼저 흐르고 그들 사이에서 비밀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해웅은 피 대리를 쳐다보았다. 이런 비업무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요청하는 게 해웅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말 미안한데 피 대리, 콘벤투스 뉴욕 지사에 있다는 지인에게 정보를 계속 물어봐 줬음 좋겠어. 아무래도 그쪽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을 쥐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단 말이지. 나는 좀 더 큰 판의 흐름이 있을 것 같아.”

“네, 물론입니다. 제가 계속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차장님. 이를테면… 어떤 큰 흐름이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도저히 그려지지가 않아서…….”

피 대리가 순진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해웅은 다리를 꼬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불길한 예감이 맞을 때가 있었는데 이런 경우가 그랬다. 괜히 말로 내뱉었다가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 해웅은 입을 꾹 다물고는 생각에 빠졌다.

“뭐… 별건 아니야. 그냥 계속 생각에 빠지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니깐…….”

다른 세 명들이 모두 광고업에만 종사했었던 것과 달리 대기업 영업 출신이었던 데다 한 회사를 차려 대표로 일한 적이 있는 해웅은 윗선에서 이루어지는 의사 결정이 얼마나 은밀하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진행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해웅은 잔혹한 기업생태의 흐름을 직접 목도했었다. 그곳은 좀 더 교묘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의사 결정들이 그렇게 성과 위주로 순진하게만 돌아가지는 않았더랬다.

사소한 마케팅 의사 결정도 단순히 좋은 제언서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물며 마케팅 CMO는 회사 내부에서 실 권력도 약한 존재이지 않는가. 실제로는 영업팀 임원이나 CFO가 실권을 쥐고 휘두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상한 생각이 든단 말이지. 마케팅팀 전체가 날아갈 수 있거나, 자동차 라인 자체가 철수되거나, 뭐 그런 극단적인 상황까진 가지 않겠지만… 기업 논리란 예측할 수 없으니까.”

해웅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입에서 조금씩 흘러나온 말들이 충격적이었던지 피 대리와 윤원희 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윤원희 대리가 이마를 짚고 심각한 표정으로 벽에 설치된 하얀 보드를 응시했다.

“아니. 내 말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다들 너무 심각해졌잖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 PT로 설사 흘러가더라도 반드시 따올 테니깐 다들 미리 겁먹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해웅의 말에 윤원희 대리가 이마를 잔뜩 찡그렸다.

“차장님 자신감이 너무 넘치시는 것 아니에요? 아깐 뭐 우리가 아무리 날뛰어도 흐름을 바꿀 수 없다느니 비관적으로 이야기하셨잖아요.”

“흐름을 바꿀 수 없다고 했지, 내가 언제 진다고 했어? 흐름이 바뀌어도 이기면 그만이지. 비딩이야 숱하게 열리는 거고. 어차피 5년 차라 비딩 할 때도 되었어. 우리가 너무 오래 해 먹었지.”

해웅은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에 일어섰다.

“그만 일어납시다. 시간이 늦었네.”



야간 회의 소집 이후 피 대리와 윤원희 대리가 뉴욕과 한국 지사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해웅은 조금씩 두 남자에 대한 퍼즐을 맞춰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