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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27화
2. 서울, 광화문 (26)
-크리스 마운튼밴튼. 생각보다 집안 배경이 대박이던데요. 영국 웨스트민스터 공작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가 6대 공작이고 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형이 웨스트민스터 7대 공작 작위를 받을 것 같습니다. 둘째인 크리스랑 달리 형은 점잖고 품위 있어서 언론 매체에 노출되어도 문제없을 정도로 사생활이 아주 깨끗하다고 해요. 반면 크리스는 영국에서도 난봉꾼이라고 불리면서 집에서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는데, 아마도 영국 언론 매체를 피해 미국에서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전통 공화당 정치가 출신의 첫째 딸과 결혼했는데 그쪽 집안도 철강 기업을 소유하고 있어서 아주 막대한 부를 형성했고 무기 산업에도 손을 대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정략결혼에 가깝게 결혼했지만 부부 금슬도 좋고 둘이 공식 석상에서 사이좋게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크리스 사생활이 난잡하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회사에서 신입 남자 사원을 성추문했다는 소문도 있고, 나라별로 섹스 파트너가 있다는 얘기도 있어요. 어쨌든 여자보다는 남자랑 추문이 좀 있었던 걸로 알려졌는데 부인은 여자만 아니면 큰 상관 안 한다는 말도 있고 체념했다는 말도 있어요. 지금 리오 컨설팅의 사장이 크리스의 삼촌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콘벤투스 매출이 영국에서 실적이 좋은 편인데 영국 정치계 쪽에 로비를 한다는 말도 있고, 영국 쪽은 크리스 집안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스웨덴의 옥센셰르나 기업의 군수용 항공기와 전차를 구입했던 것도 마운튼밴튼 집안의 영향력이 컸던 걸 보면 두 가문이 긴밀한 협력 관계가 있는 듯하고요. 이번 프로젝트에서 크리스가 키를 쥐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시제 에크만은? 알려진 정보 없어?”
-그게… 워낙 베일에 싸여 있어서. 시제 에크만이 의외로 별로 알려진 바가 없더라고요. 리오에 크리스보다 먼저 입사했고 빠르게 고속 승진해서 이사 자리에 있는 걸 봐서는 업무적으로 굉장히 유능하고 일을 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기획을 시제 이사가 대부분 진두 진행하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크리스가 컨설팅 쪽 경력은 짧은지라 아무래도 회사에서 시제를 붙인 듯합니다. 스탠퍼드에서 경제학 전공하면서 석사를 같이 전공했고, 이후 하버드에서 MBA를 했습니다. 아, 그리고 보스턴 컨설팅에서 근무하다가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뉴욕 시티뱅크 본사에서 금융 쪽으로 커리어를 쌓았고, 최근 뉴욕 리오에서 거액의 연봉으로 스카우트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력적으로는 뉴욕 콘벤투스 지사에서도 이의가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가끔 스웨덴 콘벤투스 본사에 시제가 직접 출장을 가서 보고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뉴욕 지사에서는 좀 불만인 것 같아요. 이번 프로젝트도 뉴욕이 아닌 스웨덴 콘벤투스 본사에서 직접 리오에 컨설팅을 의뢰한 데다 시제를 지명하는 바람에, 뉴욕에서도 이번 프로젝트가 당황스럽다고 하네요. 스웨덴 본사와 리오 컨설팅과의 관계가 생각보다 깊은 것 같습니다.
해웅은 문득 C호텔의 사우나에서 마주쳤던 백인 남자가 떠올랐다. 시제와 같이 있던 남자는 해웅이 자신을 콘벤투스 광고 캠페인을 맡고 있다고 소개하자 흥미로운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해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피 대리. 프레드릭이라고, 혹시 내부에 좀 알아보지 않겠어?”
-프레드릭이요? 음…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이름 같은데 무슨 일이죠?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시제도 스웨덴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시제는 그럼 아버지랑 어머니가 고향에 계신 건가?”
-시제 에크만 이사는… 제가 들은 바로는 뉴욕에서 어머니랑 같이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뉴욕에서 아티스트로 작업 활동 중이고, 스웨덴도 자주 건너간다고 알고 있어요. 가끔 한국에도 오는 것 같은데 워낙 유명한 아티스트라 세계적으로 대규모 전시회를 가지면서 순회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여름에도 잠깐 내한했다고 들었어요. 아, 그 시립 미술관에서 봄에서 여름까지 1970-1990 ‘첼시 호텔을 추억하며’라는 뉴욕 작가들의 대규모 전시전이 있었는데 시제 에크만 이사의 모친 작도 있다고 하던데요. 아버지는 이혼 후 스웨덴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고요. 시제 이사에 대해서는 좀 더 파악해 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콘벤투스 본사랑 관련된 소문 들어오는 게 있으면 바로 알려 주고. 난 이쪽이 왠지 계속 거슬려서 말이야.”
-네네. 걱정 마세요. 조금이라도 접하는 정보가 있으면 바로 차장님께 문자 드릴게요.
“고마워, 피 대리.”
해웅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서는 입에 물고 있던 바닥에 떨어뜨려 구둣발로 비벼 껐다. 납작해진 담배꽁초를 주워 휴지통에 버리고서는 콘벤투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퇴근하기 두 시간 전, 시제는 해웅에게 뉴욕 지사와 화상 통화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정중하게 자리를 비워 달라고 요청했다. 해웅은 어차피 퇴근 시간에 임박한지라 일찌감치 짐을 정리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크리스와 시제랑 함께 저녁을 먹는 게 어떻겠냐고 문자를 보냈다. 화상 회의를 마치는 대로 픽업해서 괜찮은 레스토랑에 데려갈까 생각했는데 한창 회의 때문에 정신없는지 아직까지 답문이 없었다. 해웅은 초조하게 마지막 남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서는 무더위에 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7시가 다 되었을 때야 크리스에게 문자가 왔다. 해웅은 크리스를 기다리다가 인 부근 당구장에 가서 짜장면으로 저녁을 간단히 때우고 당구 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서 불은 짜장면을 한 그릇 먹고 나니 저녁 먹을 기분도 사라졌고, 크리스에게 연락 오기를 애시당초 포기한 상태였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은 핸드폰에서 띠링- 문자 전송음이 울리자 해웅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저야 좋죠. 해웅과 함께라면 대환영입니다.]
크리스에게 온 문자를 반복해서 읽었다. 연이어 전송된 문자는, 시제는 다른 약속이 있어 함께 참석하지 못한다는 형식적인 문장들로 채워져 있었다. 시제가 불참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웅은 내심 당황했다.
아무래도 시제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교묘하고 영리한 접근이 필요할 듯했다. 잔뜩 가시를 곤두세운 고슴도치 같은 남자에게 접근하려면 단번에 가까워지기를 기대하기보다 지인을 이용해 파고드는 우회 전략도 고려해 볼 만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크리스와 단둘이 만나 시제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의도 C호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크리스를 픽업하기 위해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높은 천정에서부터 오색의 빛을 내뿜으며 수직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통로 한가운데 차지하고 있는 보라색 난이 장식된 대리석 테이블 사이로 트렁크를 끌고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 비즈니스 투숙객들이 보였다.
해웅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핏이 좋은, 얇은 블랙 셔츠와 검은 슬랙스를 입고, 가죽으로 된 크림색 운동화를 신었다. 이렇게 옷차림에 신경 쓰는 일은 1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했다. 어떻게든 크리스의 환심을 사야만 한다. 시제를 구슬리려면 크리스가 해웅의 편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입술을 깨물며 해웅을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크리스에게 목례를 했다. 흰 리넨 셔츠와 짙은 인디언 핑크색 반바지를 입고 하늘색 양가죽 로퍼를 신은, 금발의 남자가 해웅을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날리며 걸어왔다.
“이게 웬일이지? 옷에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오늘 너무 멋지게 차려입었네요.”
“감사합니다. 크리스 의상도 멋진데요. 역시 안목이 남다르시네요.”
“윔블던 경기를 보러 갈 때 자주 착용하던 편한 복장이에요.”
“가실까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해웅이 몰고 나온 회사용 차량인 렉서스로 향했다. 해웅이 먼저 뛰어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자 익숙한 폼으로 크리스가 올라탔다. 그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동안 해웅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켰다.
“안전벨트 매셨으면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시죠.”
렉서스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차량 도로로 진입했다. 좌회전을 크게 돌아 렉서스는 매끄럽게 마포 대로에 진입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석양에 물드는 검푸른 한강을 바라보며 크리스는 낮게 탄식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이런 강을 매일 보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템스강보다 규모가 크긴 하죠. 그래도 허드슨강만큼 크진 않죠.”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큰 강은 아니니까요. 한강은 참 독특하군요.”
“과찬인데요.”
“이렇게 해웅과 함께 주말을 보내는 것도 설레고요.”
2. 서울, 광화문 (26)
-크리스 마운튼밴튼. 생각보다 집안 배경이 대박이던데요. 영국 웨스트민스터 공작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가 6대 공작이고 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형이 웨스트민스터 7대 공작 작위를 받을 것 같습니다. 둘째인 크리스랑 달리 형은 점잖고 품위 있어서 언론 매체에 노출되어도 문제없을 정도로 사생활이 아주 깨끗하다고 해요. 반면 크리스는 영국에서도 난봉꾼이라고 불리면서 집에서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는데, 아마도 영국 언론 매체를 피해 미국에서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전통 공화당 정치가 출신의 첫째 딸과 결혼했는데 그쪽 집안도 철강 기업을 소유하고 있어서 아주 막대한 부를 형성했고 무기 산업에도 손을 대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정략결혼에 가깝게 결혼했지만 부부 금슬도 좋고 둘이 공식 석상에서 사이좋게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크리스 사생활이 난잡하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회사에서 신입 남자 사원을 성추문했다는 소문도 있고, 나라별로 섹스 파트너가 있다는 얘기도 있어요. 어쨌든 여자보다는 남자랑 추문이 좀 있었던 걸로 알려졌는데 부인은 여자만 아니면 큰 상관 안 한다는 말도 있고 체념했다는 말도 있어요. 지금 리오 컨설팅의 사장이 크리스의 삼촌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콘벤투스 매출이 영국에서 실적이 좋은 편인데 영국 정치계 쪽에 로비를 한다는 말도 있고, 영국 쪽은 크리스 집안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스웨덴의 옥센셰르나 기업의 군수용 항공기와 전차를 구입했던 것도 마운튼밴튼 집안의 영향력이 컸던 걸 보면 두 가문이 긴밀한 협력 관계가 있는 듯하고요. 이번 프로젝트에서 크리스가 키를 쥐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시제 에크만은? 알려진 정보 없어?”
-그게… 워낙 베일에 싸여 있어서. 시제 에크만이 의외로 별로 알려진 바가 없더라고요. 리오에 크리스보다 먼저 입사했고 빠르게 고속 승진해서 이사 자리에 있는 걸 봐서는 업무적으로 굉장히 유능하고 일을 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기획을 시제 이사가 대부분 진두 진행하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크리스가 컨설팅 쪽 경력은 짧은지라 아무래도 회사에서 시제를 붙인 듯합니다. 스탠퍼드에서 경제학 전공하면서 석사를 같이 전공했고, 이후 하버드에서 MBA를 했습니다. 아, 그리고 보스턴 컨설팅에서 근무하다가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뉴욕 시티뱅크 본사에서 금융 쪽으로 커리어를 쌓았고, 최근 뉴욕 리오에서 거액의 연봉으로 스카우트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력적으로는 뉴욕 콘벤투스 지사에서도 이의가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가끔 스웨덴 콘벤투스 본사에 시제가 직접 출장을 가서 보고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뉴욕 지사에서는 좀 불만인 것 같아요. 이번 프로젝트도 뉴욕이 아닌 스웨덴 콘벤투스 본사에서 직접 리오에 컨설팅을 의뢰한 데다 시제를 지명하는 바람에, 뉴욕에서도 이번 프로젝트가 당황스럽다고 하네요. 스웨덴 본사와 리오 컨설팅과의 관계가 생각보다 깊은 것 같습니다.
해웅은 문득 C호텔의 사우나에서 마주쳤던 백인 남자가 떠올랐다. 시제와 같이 있던 남자는 해웅이 자신을 콘벤투스 광고 캠페인을 맡고 있다고 소개하자 흥미로운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해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피 대리. 프레드릭이라고, 혹시 내부에 좀 알아보지 않겠어?”
-프레드릭이요? 음…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이름 같은데 무슨 일이죠?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시제도 스웨덴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시제는 그럼 아버지랑 어머니가 고향에 계신 건가?”
-시제 에크만 이사는… 제가 들은 바로는 뉴욕에서 어머니랑 같이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뉴욕에서 아티스트로 작업 활동 중이고, 스웨덴도 자주 건너간다고 알고 있어요. 가끔 한국에도 오는 것 같은데 워낙 유명한 아티스트라 세계적으로 대규모 전시회를 가지면서 순회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여름에도 잠깐 내한했다고 들었어요. 아, 그 시립 미술관에서 봄에서 여름까지 1970-1990 ‘첼시 호텔을 추억하며’라는 뉴욕 작가들의 대규모 전시전이 있었는데 시제 에크만 이사의 모친 작도 있다고 하던데요. 아버지는 이혼 후 스웨덴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고요. 시제 이사에 대해서는 좀 더 파악해 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콘벤투스 본사랑 관련된 소문 들어오는 게 있으면 바로 알려 주고. 난 이쪽이 왠지 계속 거슬려서 말이야.”
-네네. 걱정 마세요. 조금이라도 접하는 정보가 있으면 바로 차장님께 문자 드릴게요.
“고마워, 피 대리.”
해웅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서는 입에 물고 있던 바닥에 떨어뜨려 구둣발로 비벼 껐다. 납작해진 담배꽁초를 주워 휴지통에 버리고서는 콘벤투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퇴근하기 두 시간 전, 시제는 해웅에게 뉴욕 지사와 화상 통화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정중하게 자리를 비워 달라고 요청했다. 해웅은 어차피 퇴근 시간에 임박한지라 일찌감치 짐을 정리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크리스와 시제랑 함께 저녁을 먹는 게 어떻겠냐고 문자를 보냈다. 화상 회의를 마치는 대로 픽업해서 괜찮은 레스토랑에 데려갈까 생각했는데 한창 회의 때문에 정신없는지 아직까지 답문이 없었다. 해웅은 초조하게 마지막 남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서는 무더위에 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7시가 다 되었을 때야 크리스에게 문자가 왔다. 해웅은 크리스를 기다리다가 인 부근 당구장에 가서 짜장면으로 저녁을 간단히 때우고 당구 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서 불은 짜장면을 한 그릇 먹고 나니 저녁 먹을 기분도 사라졌고, 크리스에게 연락 오기를 애시당초 포기한 상태였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은 핸드폰에서 띠링- 문자 전송음이 울리자 해웅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저야 좋죠. 해웅과 함께라면 대환영입니다.]
크리스에게 온 문자를 반복해서 읽었다. 연이어 전송된 문자는, 시제는 다른 약속이 있어 함께 참석하지 못한다는 형식적인 문장들로 채워져 있었다. 시제가 불참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웅은 내심 당황했다.
아무래도 시제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교묘하고 영리한 접근이 필요할 듯했다. 잔뜩 가시를 곤두세운 고슴도치 같은 남자에게 접근하려면 단번에 가까워지기를 기대하기보다 지인을 이용해 파고드는 우회 전략도 고려해 볼 만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크리스와 단둘이 만나 시제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의도 C호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크리스를 픽업하기 위해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높은 천정에서부터 오색의 빛을 내뿜으며 수직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통로 한가운데 차지하고 있는 보라색 난이 장식된 대리석 테이블 사이로 트렁크를 끌고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 비즈니스 투숙객들이 보였다.
해웅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핏이 좋은, 얇은 블랙 셔츠와 검은 슬랙스를 입고, 가죽으로 된 크림색 운동화를 신었다. 이렇게 옷차림에 신경 쓰는 일은 1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했다. 어떻게든 크리스의 환심을 사야만 한다. 시제를 구슬리려면 크리스가 해웅의 편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입술을 깨물며 해웅을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크리스에게 목례를 했다. 흰 리넨 셔츠와 짙은 인디언 핑크색 반바지를 입고 하늘색 양가죽 로퍼를 신은, 금발의 남자가 해웅을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날리며 걸어왔다.
“이게 웬일이지? 옷에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오늘 너무 멋지게 차려입었네요.”
“감사합니다. 크리스 의상도 멋진데요. 역시 안목이 남다르시네요.”
“윔블던 경기를 보러 갈 때 자주 착용하던 편한 복장이에요.”
“가실까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해웅이 몰고 나온 회사용 차량인 렉서스로 향했다. 해웅이 먼저 뛰어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자 익숙한 폼으로 크리스가 올라탔다. 그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동안 해웅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켰다.
“안전벨트 매셨으면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시죠.”
렉서스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차량 도로로 진입했다. 좌회전을 크게 돌아 렉서스는 매끄럽게 마포 대로에 진입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석양에 물드는 검푸른 한강을 바라보며 크리스는 낮게 탄식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이런 강을 매일 보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템스강보다 규모가 크긴 하죠. 그래도 허드슨강만큼 크진 않죠.”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큰 강은 아니니까요. 한강은 참 독특하군요.”
“과찬인데요.”
“이렇게 해웅과 함께 주말을 보내는 것도 설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