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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25화

2. 서울, 광화문 (24)





“진정하세요. 갑자기 흥분하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해웅 차장. 내 첫째 애가 국제중학교에 이번에 들어간 거 알지? 1년에 등록금이 4천만 원이야. 유학 보내 달라는 거 달래서 겨우 그쪽으로 집어넣었어. 이번에 콘벤투스가 우리 회사에서 나가게 되면 타격이 커. 임원 진급은커녕 자리 보존도 위험하다고. 그래도 서 차장은 젊고 미혼이잖아. 갈 데도 많고. 내 말 알지?”

“…….”

“시제 에크만 이사를 잡아. 어떻게든 그를 잘 구슬려서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페이퍼를 쓰게 해. 류민주 대리가 자네를 왜 그 TF팀에 무리해서 넣었는지 몰라? 나름 우리 배려한 거야.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해.”

“…국장님.”

“시제 에크만이 일부러 우리랑 거리 두려고 너한테 못되게 구는 거 내가 왜 몰라. 근데 서 차장은 그거에 휘둘리면 안 돼. 여자들은 잘도 구워삶잖아. 남자라고 다를 게 뭐 있어?”

“몸이라도 팔라는 소립니까? 광고주 잘 모시는 거랑 이건 엄연히 다른 문제 아닙니까. 그 컨설팅 새끼들이 제 광고주입니까?”

참고 있던 짜증이 솟구쳤다. 괜한 데서 뺨 맞고 와서 저에게 화풀이하는 김현식 국장한테 화가 났다. 그러나 김현식 국장 입장에서도 이래저래 해웅이 짜증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자꾸 그 백인 놈한테 휘둘려. Y대 나온 스마트한 두뇌 어디다 두고 생각이 없어. 머리 잘 굴려서 그 새끼랑 친해질 궁리를 해 봐. 회의실에서 일주일 24시간 내내 붙어 있으면 미운 정이라도 생길 거 아냐. 술을 같이 처마시든 술집에 데려가 접대를 하든, 뭘 어떻게 해서든 구슬려 보라고.”

김현식 국장이 물러날 기세 없이 성난 얼굴로 거칠게 쏘아붙이자, 결국 해웅은 제 상사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뭉툭해진 담배꽁초를 입술에서 떼어 내고 해웅은 김현식 국장이 원하는 대답으로 대신했다.



라일락 브랜드 마케팅팀과 회식 후 본사로 돌아왔을 때 시계는 이미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회사 임원들과 술자리가 있는 김현식 국장을 제외하고 이세민 차장, 윤원희 대리가 먼저 6인용 소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웅이 들어서자 윤원희 대리가 하품을 하다 말고 입을 막으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늦은 시간에 회의 소집을 했으니 예상한 대로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해웅은 빈자리에 앉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피는 어디 있어?”

“피가 뭐예요. 이름 놔두고.”

“피가 언제 이름 있었어? 아, 크리스티앙, 무슨 루이 14세 같은 이름이었는데?”

윤원희 대리가 피식 새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수더분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피 대리의 본명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화난 표정이 풀어지고 실죽 웃고 말았다.

“이 차장, 피 영어 이름이 뭐였지?”

“아마… 제임스였을 거예요. 아니, 크리스인가?”

이세민 차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안타깝게도 피 대리의 영어명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근한 시골 남자같이 생겨서는 반전으로 재미 교포 출신인 데다 영어명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신입 시절부터 팀원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결국 이름 대신 피라고 불리게 되었고, 대리로 진급하고서는 피 대리가 그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

“줄리앙 아니야? 이름이 되게 순정만화 삘이었는데.”

해웅이 흐릿한 기억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을 언급하자, 윤원희 대리가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맞다, 줄리앙 맞을 거예요. 와, 양심 없다 피 대리!”

그때 피 대리가 한 손에 먹거리를 가득 들고 회의실 유리문을 열었다.

“만두 왔습니다.”

“야, 다들 조용히 해. 쟤 섬세해서 상처받아.”

해웅의 말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피 대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만두와 떡볶이, 캔 맥주가 든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예고 없는 야근에 심통이 나서 불뚝성을 부리던 일도 잊고서 윤원희 대리가 신이 나서 포장 박스들을 꺼냈다. 갓 쪄낸 따끈따끈한 갈비 만두와 새우만두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와와. 맛있겠다. 역시 야식은 만두지!”

평소 얌전한 이세민 차장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를 보자 신이 났는지 포장 박스를 열고 가지런히 만두들을 정렬했다. 나무젓가락과 단무지, 간장을 보기 좋게 배치하고서는 윤원희 대리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포토 타임이었다. 가녀린 손가락이 재빠르게 사진을 보정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동안 해웅은 참을성을 새기며 기다렸다. 참다못해 나무젓가락이 새우만두로 향하자 윤원희 대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욧! 하나 더 찍어야 해요!”

“윤 대리, 내 얼굴이랑 같이 올리면 팔로잉 늘 텐데?”

“차장님 좋은 말 할 때, 족발 거두시죠.”

해웅이 투덜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풀탭을 따 맥주를 한입 들이켜는 동안 마침내 사진 찍기를 끝냈는지 윤원희 대리가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그녀의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세 남자의 젓가락이 앞다투어 새우만두를 향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새우만두는 금세 동이 나 버렸다.

해웅은 와인과 스테이크가 나오는 프렌치 레스토랑의 요리보다 맥주와 분식이 좋았다. 라거 한 캔을 금세 비우고 흑맥주 캔을 따서 마시자 묵직하게 얹혀 있던 갈증이 비로소 해갈되는 듯했다. 하루 종일 촬영장에서 광고주에게 시달리고 작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이놈의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이렇게 같은 팀 식구들이랑 오순도순 모여 떠들다 보면, 생각보다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구나 싶었다.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며 분식을 먹어 치우는 세 마리의 아기 새들을 보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회의의 목적도 잊고 해웅은 잠시 망중한을 즐겼다.

배가 부른지 윤원희 대리의 떡볶이를 먹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장정 셋이서 남은 빨간 고추장 국물에 싹싹 비벼 오징어튀김까지 먹어 치우고서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차장님, 그런데 우리 왜 모인 거예요?”

배가 부르자 피 대리가 잔해들을 정리하며 해웅에게 넌지시 물었다. 해웅은 한 시간 내에 빨리 해치워야겠다고 계산하며 등받이에 기대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우리가 매주 수요일에 팀 회의를 하는데 내가 당분간 참석할 수 없어서 팀 내 정보도 업데이트하고, 콘벤투스 관련해서 이야기할 겸 모이자고 했어. 다들 오늘 촬영장에서 수고하느라 힘들었겠지만 힘내서 빨리 정리하고 집에 갑시다. 한 시간 내로 끝낼게요.”

해웅이 맡았던 라일락 브랜드 하반기 광고 촬영과 브랜드 전략은 기획2팀의 이세민 차장이, 해외 브랜드 A사 가전제품 청소기 광고 프로모션은 윤원희 대리가 인수인계 받은 상태였다. 해웅이 메신저로 틈틈이 팔로업 해야 할 투 두 리스트와 인수인계 자료들을 넘기긴 했지만 제대로 잘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급하게 들어온 30억짜리 해외 화장품 디지털 프로모션 및 팝업 스토어 전략은 피 대리가 맡기로 했다. 피 대리가 전략 초안을 쓰면 해웅이 검토해서 기획서 수정을 해 주기로 한 상태였다.

“OT는 다녀왔어?”

해웅이 묻자 피 대리는 내일모레 다녀올 예정이라고 답했다. 해웅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라일락 브랜드 지면 촬영은 오늘 확인했으니 향후 디지털 캠페인과 TV 광고는 이세민 차장과 함께 팔로업 할 예정이었다. 간단히 현재 진행된 상황을 서로 공유하고 나서 해웅은 팔짱을 낀 상태로 소기의 목적인 콘벤투스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콘벤투스 류민주 대리랑 뉴욕 컨설팅 쪽 사람들이랑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에 잠깐 국장님하고 이야길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회사 차원에서 심각한 것 같아서 여러분들에게 공유하려고 해.”

콘벤투스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해웅을 쳐다보았다. 해웅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어디까지 얘들에게 공유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아니 그보다, 조금이라도 콘벤투스 내부 정보를 긁어모으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입단속을 시키면서도 주변 정보원을 확보하기 위한 지침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