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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23화
2. 서울, 광화문 (22)
“이제 알겠네. 네가 왜 해웅을 싫어하는지. 넌 예전부터 미국 고등학교의 쿼터백 스타일의 몸 좋고 골 빈 스타일을 혐오했지.”
시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도 처음 깨달은 것처럼 멍하니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이내 ‘아아, 그래’라고 수긍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제가 흐리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지도. 태생적으로 거만하고 사람 우습게 보는 것들을 보면 재수가 없거든.”
“그런 게 그 사람 매력이기도 한 것 아니겠어? 그리고 해웅은 머리도 똑똑하고 몸도 그렇게 무식한 스타일이 아닌데.”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가끔 저를 타인보다 냉정하게 평가하는 시제가, 왜 해웅을 싫어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크리스는 해웅이 어떤 면에서 저를 닮았다고 느꼈다. 해웅의 자신만만하고 때로는 상대를 깔보는 듯한 태도가 거슬렸던 거다. 시제는 부정하겠지만, 크리스가 보기에는 시제 역시 사람을 압도하고 거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가지는 감정은 역설적인 자기혐오였다.
그러고 보니 해웅의 눈빛은, 거칠 것 없이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순수했던 젊은 날의 시제를 떠올리게 했다. 대학 시절의 시제는, 지금보다 투박하고 순수했다.
[촬영 현장에 간다고 했죠? 바쁠 텐데 미안해요. 주말은 어디에서 밥 먹고 술 마시면 좋을까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크리스가 보낸 문자에 해웅은 아직 답은 없었다.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면서, 크리스는 더 이상 정신적인 쾌락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단지 색정적인 욕망을 충족하고자 습관적으로 클럽을 찾았고, 수많은 남자들을 제 욕망의 도구로 이용했다. 인스턴트식 단발성 섹스에서 더 이상 가슴 두근거릴 일이 없다 보니, 곧 그마저도 지루해졌다. 차라리 여러 명과 지속적인 파트너 관계를 가지면서 제 변태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이 더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의 애인들은 대부분 소방관, 경찰관, 목수, 정원사 등 몸 쓰는 일이나 블루칼라 직종에 종사했고 에스닉, 흑인, 아시아인과 같은 유색 인종이 대부분이었다.
크리스는 그들을 침대에 깔아 눕히고 제게 복종시킬 때, 온전히 성적으로 흥분했다. 그의 섹스 판타지는 서양 제국주의 시절 무서울 게 없이 식민지를 건설하던 유럽 남성의 오리엔탈리즘이었다. 겉으로는 식민지 감성을 자극하는 고갱의 그림에 무관심한 듯 행동하면서도, 유색 인종 남자들에게 성 시중을 받는 섹스판타지를 욕망했고, 파트너들과 왕과 성 노예와 같은 역할 놀이를 하며 기이한 성벽을 충족했다.
촌스러운 옷차림의, 건방진 동양인에게 묘하게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아직까지 성적인 호기심은 아니었다. 단지 평소 접하던 아시아인과 달라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호전적인 시선과 건방진 말투, 그리고 의도적으로 미소를 흘리는 바람둥이와 같은 습관이 크리스의 눈길을 끌었다.
크리스는 해웅이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는 데 익숙한 남자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허름한 옷차림을 뚫고 나오는 자신감이나 건방진 태도, 껄렁한 말투와 여유 있는 자세 같은 것들이 오히려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의 말에 권력을 부여했다. 해웅은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무심한 태도로 농담을 툭툭 내던지며 난봉꾼같이 말하는 방식이 오히려 구태의연한 광고업계에서 그의 존재를 돋보이게 했을 것이다.
크리스의 머릿속에서 뉴욕에서 마주친, 그저 그랬던 수많은 광고업계 종사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과열 양상을 띠는 광고업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광고 기획자들은 콘텐츠보다 PT 스타일에 차별화를 두었다. 스티브 잡스를 연상케 하는 실리콘 밸리의 힙스터 분위기, 비딱한 태도, 서부의 IT 개발자와도 같은 괴짜 스타일, 또는 히피 같거나 수도승 같은 분위기, 비현실적인 옷차림과 말투들이 그러했다. 변종된 방식으로 진화한 광고업계의 풍토는 어느새 내용의 본질보다 기이하고 튀는 스타일에 치중했다.
해웅이 그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어떤 ‘것’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고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그는 잘생겼지만 자신의 외모에 무심했다. 그것은 투박하고 원초적인 남성성을 띠었다. 그는 광고업계보다는 제조업과 같이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데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가 어떤 면에서 가식으로 점철된 광고업계를 비트는 솔직함으로 보였다.
그것은 시제가 갖고 있는 장점이기도 했다. 크리스는 시제가 지닌 순수성과 남성성이, 이 동양남자와 닮았다고 느꼈다. 시제가 좀 더 스타일이 좋고 세련되긴 했지. 크리스도 한때 그를 욕망하던 적이 있었다. 누군들 젊은 시절의 시제에게 욕망을 느끼지 않을까. 그러나 그 짧은 열병은 그저 성적 욕망에 가까웠을 뿐, 시간을 거쳐 형제애로 환치되었다.
크리스는 한국 지사에서 건네받은 해웅의 프로필을 노트북 화면에 띄웠다. 이력서에 첨부된 해웅의 사진은 아주 예전에 찍은 듯,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은 도발적이었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진 속 다듬어지지 않는 거친 눈빛을 가진 해웅을 보고 있자니, 시제의 지난 모습이 떠올랐다. 닮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젊은 시절 야망 하나로 삶의 무게를 버텨 온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묘한 기시감이었다.
핸드폰 화면 위로 깜빡 작은 빛이 명멸했다. 크리스는 발송인을 확인하고서는 재미있다는 듯이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먼저 간다’라고 한마디 하고서는 노트북 가방과 서류를 챙겨 들고 나가는 시제에게 형식적으로 손을 흔들고서는 화면 속 내용에 집중했다.
***
해웅은 이태원, 경리단길, 한강진과 한남동 등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들을 떠올렸다. 그는 외국인이 많은 장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해웅의 취향은 마포나 여의도, 또는 종로처럼 좀 더 편하고 술값도 싼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외국인들이 주말에 논다고 하면 세련된 이성도 적당히 만날 수 있고, 분위기도 자유롭고 이국적인 이태원이 제일 적합할 듯했다. 크리스에게 답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뒤에서 카랑카랑한 윤원희 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장님! 광고주께서 찾아요.”
10대 소녀의 아기자기한 감성으로 꾸며 놓은 공간에 여자 아이돌이 화이트 셔츠와 짧은 미니팬츠를 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연신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옆에 달라붙은 스타일리스트는 그녀의 가라앉은 머리에 풍성한 컬을 넣기 위해 드라이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팔짱을 끼며 촬영 감독 옆에서 타임 테이블을 살피고 있던 해웅의 클라이언트이자 촬영 중인 생리대 브랜드 광고주인 강보미 과장이 해웅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차장님, 이리 와 보세요.”
강보미 과장 옆에서는 해웅에게 인수인계 받았던 옆 팀의 이세민 차장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바지도 오프화이트 색상으로 맞추기로 하지 않았나요? 저렇게 베이지빛을 띠는 화이트 칼라는 저희가 애초에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너무 야해 보이잖아요. 우리 브랜드가 건강하고 청순한 1020세대 여학생들을 타깃으로 하는데, 엉덩이에 집중돼서 메시지가 안 보이는 데다가 브랜드 격도 떨어져 보이잖아요. 이래서 저희 콘셉트가 제대로 전달되겠어요?”
여 아이돌이 입은 바지는 지나치게 꽉 껴 보이는 데다 엉덩이 굴곡이 심하게 드러나 있었다. 비 활동기 시즌이라 방심한 탓인지 체중이 불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착용한 쇼트 팬츠가 딱 달라붙는 바람에 몸매가 더욱 도드라졌다. 모델 역시 착용한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울상을 지으며 세트장 구석에 세워진 스탠드 거울에서 옷차림을 점검했다.
“일단 의상은 교체하겠습니다. 촬영 때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같은 색상으로 비슷한 스타일을 여러 벌 준비해 놨습니다. 그리고 원래 각선미로 인기를 끄는 아이돌인지라 살짝 살집이 있는 건 큰 염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콘셉트랑 너무 안 맞는다 싶으면 미술팀에서 컴퓨터로 깎으면 되니까요.”
불만을 속사포처럼 내뱉고 씩씩대던 강보미 과장의 흥분한 숨소리가 차츰 줄어들었다. 해웅이 조곤조곤 설명하며 현백창 CD에게 고갯짓을 하자, 옆에서 해웅과 강보미 과장의 말을 듣고 있던 현 CD도 광고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바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
2. 서울, 광화문 (22)
“이제 알겠네. 네가 왜 해웅을 싫어하는지. 넌 예전부터 미국 고등학교의 쿼터백 스타일의 몸 좋고 골 빈 스타일을 혐오했지.”
시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도 처음 깨달은 것처럼 멍하니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이내 ‘아아, 그래’라고 수긍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제가 흐리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지도. 태생적으로 거만하고 사람 우습게 보는 것들을 보면 재수가 없거든.”
“그런 게 그 사람 매력이기도 한 것 아니겠어? 그리고 해웅은 머리도 똑똑하고 몸도 그렇게 무식한 스타일이 아닌데.”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가끔 저를 타인보다 냉정하게 평가하는 시제가, 왜 해웅을 싫어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크리스는 해웅이 어떤 면에서 저를 닮았다고 느꼈다. 해웅의 자신만만하고 때로는 상대를 깔보는 듯한 태도가 거슬렸던 거다. 시제는 부정하겠지만, 크리스가 보기에는 시제 역시 사람을 압도하고 거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가지는 감정은 역설적인 자기혐오였다.
그러고 보니 해웅의 눈빛은, 거칠 것 없이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순수했던 젊은 날의 시제를 떠올리게 했다. 대학 시절의 시제는, 지금보다 투박하고 순수했다.
[촬영 현장에 간다고 했죠? 바쁠 텐데 미안해요. 주말은 어디에서 밥 먹고 술 마시면 좋을까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크리스가 보낸 문자에 해웅은 아직 답은 없었다.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면서, 크리스는 더 이상 정신적인 쾌락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단지 색정적인 욕망을 충족하고자 습관적으로 클럽을 찾았고, 수많은 남자들을 제 욕망의 도구로 이용했다. 인스턴트식 단발성 섹스에서 더 이상 가슴 두근거릴 일이 없다 보니, 곧 그마저도 지루해졌다. 차라리 여러 명과 지속적인 파트너 관계를 가지면서 제 변태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이 더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의 애인들은 대부분 소방관, 경찰관, 목수, 정원사 등 몸 쓰는 일이나 블루칼라 직종에 종사했고 에스닉, 흑인, 아시아인과 같은 유색 인종이 대부분이었다.
크리스는 그들을 침대에 깔아 눕히고 제게 복종시킬 때, 온전히 성적으로 흥분했다. 그의 섹스 판타지는 서양 제국주의 시절 무서울 게 없이 식민지를 건설하던 유럽 남성의 오리엔탈리즘이었다. 겉으로는 식민지 감성을 자극하는 고갱의 그림에 무관심한 듯 행동하면서도, 유색 인종 남자들에게 성 시중을 받는 섹스판타지를 욕망했고, 파트너들과 왕과 성 노예와 같은 역할 놀이를 하며 기이한 성벽을 충족했다.
촌스러운 옷차림의, 건방진 동양인에게 묘하게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아직까지 성적인 호기심은 아니었다. 단지 평소 접하던 아시아인과 달라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호전적인 시선과 건방진 말투, 그리고 의도적으로 미소를 흘리는 바람둥이와 같은 습관이 크리스의 눈길을 끌었다.
크리스는 해웅이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는 데 익숙한 남자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허름한 옷차림을 뚫고 나오는 자신감이나 건방진 태도, 껄렁한 말투와 여유 있는 자세 같은 것들이 오히려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의 말에 권력을 부여했다. 해웅은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무심한 태도로 농담을 툭툭 내던지며 난봉꾼같이 말하는 방식이 오히려 구태의연한 광고업계에서 그의 존재를 돋보이게 했을 것이다.
크리스의 머릿속에서 뉴욕에서 마주친, 그저 그랬던 수많은 광고업계 종사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과열 양상을 띠는 광고업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광고 기획자들은 콘텐츠보다 PT 스타일에 차별화를 두었다. 스티브 잡스를 연상케 하는 실리콘 밸리의 힙스터 분위기, 비딱한 태도, 서부의 IT 개발자와도 같은 괴짜 스타일, 또는 히피 같거나 수도승 같은 분위기, 비현실적인 옷차림과 말투들이 그러했다. 변종된 방식으로 진화한 광고업계의 풍토는 어느새 내용의 본질보다 기이하고 튀는 스타일에 치중했다.
해웅이 그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어떤 ‘것’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고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그는 잘생겼지만 자신의 외모에 무심했다. 그것은 투박하고 원초적인 남성성을 띠었다. 그는 광고업계보다는 제조업과 같이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데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가 어떤 면에서 가식으로 점철된 광고업계를 비트는 솔직함으로 보였다.
그것은 시제가 갖고 있는 장점이기도 했다. 크리스는 시제가 지닌 순수성과 남성성이, 이 동양남자와 닮았다고 느꼈다. 시제가 좀 더 스타일이 좋고 세련되긴 했지. 크리스도 한때 그를 욕망하던 적이 있었다. 누군들 젊은 시절의 시제에게 욕망을 느끼지 않을까. 그러나 그 짧은 열병은 그저 성적 욕망에 가까웠을 뿐, 시간을 거쳐 형제애로 환치되었다.
크리스는 한국 지사에서 건네받은 해웅의 프로필을 노트북 화면에 띄웠다. 이력서에 첨부된 해웅의 사진은 아주 예전에 찍은 듯,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은 도발적이었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진 속 다듬어지지 않는 거친 눈빛을 가진 해웅을 보고 있자니, 시제의 지난 모습이 떠올랐다. 닮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젊은 시절 야망 하나로 삶의 무게를 버텨 온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묘한 기시감이었다.
핸드폰 화면 위로 깜빡 작은 빛이 명멸했다. 크리스는 발송인을 확인하고서는 재미있다는 듯이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먼저 간다’라고 한마디 하고서는 노트북 가방과 서류를 챙겨 들고 나가는 시제에게 형식적으로 손을 흔들고서는 화면 속 내용에 집중했다.
***
해웅은 이태원, 경리단길, 한강진과 한남동 등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들을 떠올렸다. 그는 외국인이 많은 장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해웅의 취향은 마포나 여의도, 또는 종로처럼 좀 더 편하고 술값도 싼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외국인들이 주말에 논다고 하면 세련된 이성도 적당히 만날 수 있고, 분위기도 자유롭고 이국적인 이태원이 제일 적합할 듯했다. 크리스에게 답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뒤에서 카랑카랑한 윤원희 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장님! 광고주께서 찾아요.”
10대 소녀의 아기자기한 감성으로 꾸며 놓은 공간에 여자 아이돌이 화이트 셔츠와 짧은 미니팬츠를 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연신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옆에 달라붙은 스타일리스트는 그녀의 가라앉은 머리에 풍성한 컬을 넣기 위해 드라이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팔짱을 끼며 촬영 감독 옆에서 타임 테이블을 살피고 있던 해웅의 클라이언트이자 촬영 중인 생리대 브랜드 광고주인 강보미 과장이 해웅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차장님, 이리 와 보세요.”
강보미 과장 옆에서는 해웅에게 인수인계 받았던 옆 팀의 이세민 차장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바지도 오프화이트 색상으로 맞추기로 하지 않았나요? 저렇게 베이지빛을 띠는 화이트 칼라는 저희가 애초에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너무 야해 보이잖아요. 우리 브랜드가 건강하고 청순한 1020세대 여학생들을 타깃으로 하는데, 엉덩이에 집중돼서 메시지가 안 보이는 데다가 브랜드 격도 떨어져 보이잖아요. 이래서 저희 콘셉트가 제대로 전달되겠어요?”
여 아이돌이 입은 바지는 지나치게 꽉 껴 보이는 데다 엉덩이 굴곡이 심하게 드러나 있었다. 비 활동기 시즌이라 방심한 탓인지 체중이 불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착용한 쇼트 팬츠가 딱 달라붙는 바람에 몸매가 더욱 도드라졌다. 모델 역시 착용한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울상을 지으며 세트장 구석에 세워진 스탠드 거울에서 옷차림을 점검했다.
“일단 의상은 교체하겠습니다. 촬영 때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같은 색상으로 비슷한 스타일을 여러 벌 준비해 놨습니다. 그리고 원래 각선미로 인기를 끄는 아이돌인지라 살짝 살집이 있는 건 큰 염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콘셉트랑 너무 안 맞는다 싶으면 미술팀에서 컴퓨터로 깎으면 되니까요.”
불만을 속사포처럼 내뱉고 씩씩대던 강보미 과장의 흥분한 숨소리가 차츰 줄어들었다. 해웅이 조곤조곤 설명하며 현백창 CD에게 고갯짓을 하자, 옆에서 해웅과 강보미 과장의 말을 듣고 있던 현 CD도 광고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바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