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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22화
2. 서울, 광화문 (21)
“그런 게 뭐가 궁금해?”
시제는 눈이 아려 와 테이블 위에 방치해 두었던 안경을 집어 들었다. 시력이 부쩍 나빠진 후로 그는 안경과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유난히 옅은 푸른색을 지닌 그의 홍채는 자외선에 민감해 햇빛이 강한 여름 한낮은 선글라스 없이는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최소 한 달은 잡아야겠지, 이 프로젝트?”
“그렇다고 봐야겠지.”
시제의 기계적인 응답에 크리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목까지 단단히 채웠던 셔츠 단추가 가슴골 한가운데까지 풀어져 그의 황동색 가슴 굴곡이 드러났다. 면 셔츠의 선을 따라 드러난 그의 몸은 황소를 잡는 투우사 같기도 하고, 팔뚝만 한 생선을 잡아 올리는 성난 뱃사람 같기도 했다. 내뱉는 숨을 따라 미려하게 움직이는 가슴 굴곡과 굵은 팔뚝은 아직 소년 같은 얼굴과 모순적인 공존을 이루었다.
“그 사람, 서해웅 제법 재밌는 사람 같은데. 보통 아시아인과 좀 다른 것 같아.”
“어떤 점이?”
“보통 아시아인들은 좀 내성적이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잖아? 그런데 서해웅은 자신감이 넘치고 유머도 잘하고 몸도 좋고. 매력 있단 말이야.”
“인종 차별주의자인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신기한데.”
시제의 지적에 크리스가 희끗하게 웃음을 비쳤다. 그의 말이 맞는 것도 아니지만 썩 틀린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는 묘하게 아시아 남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아시아인은 수줍고 내성적이고 일벌레들이었다. 그는 홍콩이나 중국, 한국 출신의 꽤 많은 컨설턴트들과 일을 함께했었고 그들을 제법 다룰 줄 알았다. 동양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고 일본인과 사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뼛속 깊숙이에는 전형적인 상류층 백인 남성의 자부심이 깔려 있었다.
크리스의 지나치게 친절한 태도와 양식 있는 말투는 그가 누리는 부와 계급적 신분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넌 아까 왜 그렇게 날 서게 해웅에게 대했어?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불쌍하게.”
“……내가 그랬나?”
“네가 원래 까칠한 건 알지만, 유난히 미스터 서한테 심해. 우리랑 같이 계속 일할 사람인데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래 보였군.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야.”
시제가 말없이 크리스 곁으로 다가왔다. 구두 굽 아래 뉴욕과 다른 색깔의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까만 머리의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연어 떼처럼 그들은 횡단보도를 건너 빠른 속도로 흘러 지나갔다. 어지러운 감각의 속도를 쫓던 눈이 피로감을 느꼈는지 시제는 고개를 돌렸다.
“회의실이 건조한가 보네.”
“우리도 슬슬 퇴근하자. 시차 적응 안 돼서 미치겠다. 졸려 죽겠어.”
“난 읽을거리를 들고 호텔 방에서 혼자 있을까 해. 넌 자려고?”
“저녁은 먹고 들어가자. 해웅한테 이 근처 어디 가서 저녁 먹으면 좋을지 물어볼까?”
“뭐 그러든가. 아까 스텔라한테 물어보니 이 근처에 맛있는 불고기 식당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좋고.”
“난, 해웅이 뭘 추천할지 궁금해. 얘기하다 보면 꽤 날 자극하거든.”
핸드폰에 저장해 둔 해웅의 번호를 찾아낸 크리스는 영어와 약간 공부해 둔 한국어를 섞어 가며 타이핑을 했다. 문자를 그대로 보낼까 고민하다 이리저리 수정하던 끝에 크리스는 발송 버튼을 눌렀다.
“관심 있어? 네 타입도 아니잖아.”
“글쎄. 볼수록 잘생기고 매력 있던데. 주위를 신경 쓰지 않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태도가 정복욕을 불러일으키거든.”
“전형적인 스트레이트 같은데 여기서 공연히 분란 일으키지 마. 정 급하면 평소 하던 대로 게이 바에 가서 욕구 처리하든가.”
크리스는 피식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시제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는 유부남이었지만 이미 은밀히 만나고 있는 애인이 뉴욕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다른 도시나 해외로 출장을 다닐 때마다 소위 현지처라 불리는 남자들을 통해 성욕 처리를 하곤 했다.
이미 일본과 중국에도 통화 한 통이면 불러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현지 파트너가 있었다. 이참에 한국에도 한 명 만들어 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 와 본 서울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크리스는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서류들을 챙겨 가방에 넣다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도 저만큼이나 문란한 주제에 유부남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가끔 자신에게 훈수를 둘 때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뒤늦게 반발심이 들어 시제를 향해 한 소리 내뱉었다.
“그래도 너처럼 서울로 여자 친구를 불러들이지는 않지.”
크리스의 말에 시제가 이마를 찡그리며 뒤를 돌아섰다. 하늘에 걸린 해를 등지고 선 시제의 얼굴에 불만족스러운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슨 말 같잖은 소리야. 걔가 왜 내 여자 친구야.”
“그런데 한국까지 쫓아온다고?”
크리스가 놀리듯이 되묻자 시제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야. 일본에서 화보 촬영도 있다고 하니 잠깐 들른다는 것뿐, 우린 이미 예전에 끝났어.”
“그래? 하지만 이자벨라는 너에게 미련이 남아 보이던데. 오죽하면 데본이 너만 보면 눈을 부라리겠어?”
시제는 저가 한때 사귀었던 이자벨라를 떠올렸다. 분명, 이미 오래전에 헤어진 사이임에도, 이자벨라와 시제는 관계가 불분명한 채로 섹스만 나누는 사이를 몇 년 유지한 적이 있었다. 둘 다 제법 잘 맞기도 했고, 이자벨라는 연인이 없으면 기본적으로 불안해하는 유형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제 옆에는 항상 저를 보호해 주고 감정을 공유할 사람을 필요로 했다. 시제는 이미 끝난 사이임에도 그녀의 곁에 있어 주느라 몇 년을 허비한 세월을 상기하며, 당분간은 연인이라는 구속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난 개인적으로 이자벨라처럼 너무 마른 스타일은 별로야. 넌 어째 그렇게 깡마른 슈퍼 모델들하고만 사귀냐.”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해 두지.”
크리스는 시제를 병적으로 마른 여자에 집착한다고 놀려 대곤 했지만 실상 패션 산업에 종사했다 보니 모델과 만날 일이 잦았을 뿐이었다. 시제는 크리스의 말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성적 취향이 크리스보다는 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너랑 취향이 겹치지 않아 다행이야. 난 글래머러스한 여자들이 좋거든. 남자도 그래. 좀 더 탄탄하고 근육이 있는 애들이 좋아. 그래서 해웅이 마음에 들어.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도 깔끔하고. 그 옷을 벗겨 보고 싶어진다니까.”
음란한 욕망을 서슴없이 내뱉는 크리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내려다보던 시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만하게 보지 마. 네가 미국에서 보던 얌전한 아시안 유형이 아니야. 한국에서 엘리트 코스만 밟고 부족함 없이 자란 데다 동성이든 이성에게든 인기가 많았을, 전형적인 쿼터백 스타일이야. 네가 남자와도 자는 걸 알면 경멸하면서 아웃팅 해 버릴지도 몰라. 결혼 생활은 유지해야지. 네 아버지 돈줄이잖아.”
아내 이야기가 나오자, 크리스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떠오른 듯 고개를 저었다. 결혼 생활은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집안끼리 아는 사이로 만나 재력과 정치적인 배경 등 여러 조건을 맞춰 진행한 형식적인 결혼이었지만, 크리스는 결혼 생활에 만족했다. 아내는 늘 저를 살뜰히 대해 주는 데다가 대외적인 집안 행사에 군소리 없이 항상 함께했으며, 그녀 앞으로 근사한 별장과 집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다.
집안 대대로 미국 공화당 정치 가문 출신인 아내는 사업 수완도 좋아 아기 용품과 관련한 사업 라인도 확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얼마 전 낳은 둘째 아들도 꽤 귀엽고. 최근 아내는 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저택을 대대적으로 내부 공사하면서 귀여운 아기방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크리스는 이 평온한 결혼 상태를 이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아내 귀에 들리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었다.
가끔 시제가 저를 향해 독설을 날릴 때면, 대체 왜 제 결혼 생활에 태클을 거는지 의문을 갖곤 했는데, 오늘따라 시제의 신경은 해웅에게 향해 있었다. 크리스는 이제 알겠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녹색 눈동자가 새로운 재밋거리를 발견한 듯 반짝였다.
2. 서울, 광화문 (21)
“그런 게 뭐가 궁금해?”
시제는 눈이 아려 와 테이블 위에 방치해 두었던 안경을 집어 들었다. 시력이 부쩍 나빠진 후로 그는 안경과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유난히 옅은 푸른색을 지닌 그의 홍채는 자외선에 민감해 햇빛이 강한 여름 한낮은 선글라스 없이는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최소 한 달은 잡아야겠지, 이 프로젝트?”
“그렇다고 봐야겠지.”
시제의 기계적인 응답에 크리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목까지 단단히 채웠던 셔츠 단추가 가슴골 한가운데까지 풀어져 그의 황동색 가슴 굴곡이 드러났다. 면 셔츠의 선을 따라 드러난 그의 몸은 황소를 잡는 투우사 같기도 하고, 팔뚝만 한 생선을 잡아 올리는 성난 뱃사람 같기도 했다. 내뱉는 숨을 따라 미려하게 움직이는 가슴 굴곡과 굵은 팔뚝은 아직 소년 같은 얼굴과 모순적인 공존을 이루었다.
“그 사람, 서해웅 제법 재밌는 사람 같은데. 보통 아시아인과 좀 다른 것 같아.”
“어떤 점이?”
“보통 아시아인들은 좀 내성적이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잖아? 그런데 서해웅은 자신감이 넘치고 유머도 잘하고 몸도 좋고. 매력 있단 말이야.”
“인종 차별주의자인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신기한데.”
시제의 지적에 크리스가 희끗하게 웃음을 비쳤다. 그의 말이 맞는 것도 아니지만 썩 틀린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는 묘하게 아시아 남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아시아인은 수줍고 내성적이고 일벌레들이었다. 그는 홍콩이나 중국, 한국 출신의 꽤 많은 컨설턴트들과 일을 함께했었고 그들을 제법 다룰 줄 알았다. 동양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고 일본인과 사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뼛속 깊숙이에는 전형적인 상류층 백인 남성의 자부심이 깔려 있었다.
크리스의 지나치게 친절한 태도와 양식 있는 말투는 그가 누리는 부와 계급적 신분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넌 아까 왜 그렇게 날 서게 해웅에게 대했어?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불쌍하게.”
“……내가 그랬나?”
“네가 원래 까칠한 건 알지만, 유난히 미스터 서한테 심해. 우리랑 같이 계속 일할 사람인데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래 보였군.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야.”
시제가 말없이 크리스 곁으로 다가왔다. 구두 굽 아래 뉴욕과 다른 색깔의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까만 머리의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연어 떼처럼 그들은 횡단보도를 건너 빠른 속도로 흘러 지나갔다. 어지러운 감각의 속도를 쫓던 눈이 피로감을 느꼈는지 시제는 고개를 돌렸다.
“회의실이 건조한가 보네.”
“우리도 슬슬 퇴근하자. 시차 적응 안 돼서 미치겠다. 졸려 죽겠어.”
“난 읽을거리를 들고 호텔 방에서 혼자 있을까 해. 넌 자려고?”
“저녁은 먹고 들어가자. 해웅한테 이 근처 어디 가서 저녁 먹으면 좋을지 물어볼까?”
“뭐 그러든가. 아까 스텔라한테 물어보니 이 근처에 맛있는 불고기 식당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좋고.”
“난, 해웅이 뭘 추천할지 궁금해. 얘기하다 보면 꽤 날 자극하거든.”
핸드폰에 저장해 둔 해웅의 번호를 찾아낸 크리스는 영어와 약간 공부해 둔 한국어를 섞어 가며 타이핑을 했다. 문자를 그대로 보낼까 고민하다 이리저리 수정하던 끝에 크리스는 발송 버튼을 눌렀다.
“관심 있어? 네 타입도 아니잖아.”
“글쎄. 볼수록 잘생기고 매력 있던데. 주위를 신경 쓰지 않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태도가 정복욕을 불러일으키거든.”
“전형적인 스트레이트 같은데 여기서 공연히 분란 일으키지 마. 정 급하면 평소 하던 대로 게이 바에 가서 욕구 처리하든가.”
크리스는 피식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시제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는 유부남이었지만 이미 은밀히 만나고 있는 애인이 뉴욕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다른 도시나 해외로 출장을 다닐 때마다 소위 현지처라 불리는 남자들을 통해 성욕 처리를 하곤 했다.
이미 일본과 중국에도 통화 한 통이면 불러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현지 파트너가 있었다. 이참에 한국에도 한 명 만들어 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 와 본 서울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크리스는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서류들을 챙겨 가방에 넣다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도 저만큼이나 문란한 주제에 유부남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가끔 자신에게 훈수를 둘 때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뒤늦게 반발심이 들어 시제를 향해 한 소리 내뱉었다.
“그래도 너처럼 서울로 여자 친구를 불러들이지는 않지.”
크리스의 말에 시제가 이마를 찡그리며 뒤를 돌아섰다. 하늘에 걸린 해를 등지고 선 시제의 얼굴에 불만족스러운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슨 말 같잖은 소리야. 걔가 왜 내 여자 친구야.”
“그런데 한국까지 쫓아온다고?”
크리스가 놀리듯이 되묻자 시제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야. 일본에서 화보 촬영도 있다고 하니 잠깐 들른다는 것뿐, 우린 이미 예전에 끝났어.”
“그래? 하지만 이자벨라는 너에게 미련이 남아 보이던데. 오죽하면 데본이 너만 보면 눈을 부라리겠어?”
시제는 저가 한때 사귀었던 이자벨라를 떠올렸다. 분명, 이미 오래전에 헤어진 사이임에도, 이자벨라와 시제는 관계가 불분명한 채로 섹스만 나누는 사이를 몇 년 유지한 적이 있었다. 둘 다 제법 잘 맞기도 했고, 이자벨라는 연인이 없으면 기본적으로 불안해하는 유형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제 옆에는 항상 저를 보호해 주고 감정을 공유할 사람을 필요로 했다. 시제는 이미 끝난 사이임에도 그녀의 곁에 있어 주느라 몇 년을 허비한 세월을 상기하며, 당분간은 연인이라는 구속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난 개인적으로 이자벨라처럼 너무 마른 스타일은 별로야. 넌 어째 그렇게 깡마른 슈퍼 모델들하고만 사귀냐.”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해 두지.”
크리스는 시제를 병적으로 마른 여자에 집착한다고 놀려 대곤 했지만 실상 패션 산업에 종사했다 보니 모델과 만날 일이 잦았을 뿐이었다. 시제는 크리스의 말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성적 취향이 크리스보다는 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너랑 취향이 겹치지 않아 다행이야. 난 글래머러스한 여자들이 좋거든. 남자도 그래. 좀 더 탄탄하고 근육이 있는 애들이 좋아. 그래서 해웅이 마음에 들어.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도 깔끔하고. 그 옷을 벗겨 보고 싶어진다니까.”
음란한 욕망을 서슴없이 내뱉는 크리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내려다보던 시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만하게 보지 마. 네가 미국에서 보던 얌전한 아시안 유형이 아니야. 한국에서 엘리트 코스만 밟고 부족함 없이 자란 데다 동성이든 이성에게든 인기가 많았을, 전형적인 쿼터백 스타일이야. 네가 남자와도 자는 걸 알면 경멸하면서 아웃팅 해 버릴지도 몰라. 결혼 생활은 유지해야지. 네 아버지 돈줄이잖아.”
아내 이야기가 나오자, 크리스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떠오른 듯 고개를 저었다. 결혼 생활은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집안끼리 아는 사이로 만나 재력과 정치적인 배경 등 여러 조건을 맞춰 진행한 형식적인 결혼이었지만, 크리스는 결혼 생활에 만족했다. 아내는 늘 저를 살뜰히 대해 주는 데다가 대외적인 집안 행사에 군소리 없이 항상 함께했으며, 그녀 앞으로 근사한 별장과 집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다.
집안 대대로 미국 공화당 정치 가문 출신인 아내는 사업 수완도 좋아 아기 용품과 관련한 사업 라인도 확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얼마 전 낳은 둘째 아들도 꽤 귀엽고. 최근 아내는 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저택을 대대적으로 내부 공사하면서 귀여운 아기방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크리스는 이 평온한 결혼 상태를 이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아내 귀에 들리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었다.
가끔 시제가 저를 향해 독설을 날릴 때면, 대체 왜 제 결혼 생활에 태클을 거는지 의문을 갖곤 했는데, 오늘따라 시제의 신경은 해웅에게 향해 있었다. 크리스는 이제 알겠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녹색 눈동자가 새로운 재밋거리를 발견한 듯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