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외인도시 21화

2. 서울, 광화문 (20)





해웅은 놀란 나머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가까스로 꾹 다문 입에서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 의견은 묻지도 않고 귀중한 주말까지 저 자식들을 위해 봉사하라니, 김현식 국장의 뻔뻔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해웅이 제 상사를 한껏 노려보았지만 이미 국장의 머릿속에 해웅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처.음. 듣는데요? 김현식 국장님?”

김현식 국장은 해웅의 말을 무시하며 달짝지근한 태도로 크리스 앞에 놓인 빈 잔을 채워 주었다. 해웅이 확 제 상사의 허벅지를 꼬집고 말자, 김현식 국장이 사나운 신음 소리를 내며 제 몸을 푸드덕거렸다.

“일부러 시간을 내셔서 저희를 의전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혼자 다니는 게 편합니다.”

해웅의 심기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시제가 김 국장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아이고, 정말 거절 안 하셔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저희가 불편해서 그럽니다. 일하지 않는 시간만이라도 혼자 보내고 싶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만나 뵐 사람들도 있고요.”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만,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우리 서 차장이 말은 저렇게 해도, 의전 하나는 끝내주게 잘합니다.”

극구 사양하는 시제에게 더 이상 권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김현식 국장이 못내 아쉬운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해웅이 그렇게 잘 놉니까? 왠지 시간 되실 때 같이 어울려 보고 싶은데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크리스가 흥미가 발동한 표정으로 대화의 중심을 해웅에게로 돌렸다. 후식으로 내어진 사과 셔벗을 스푼으로 휘젓다 말고 해웅이 적당히 웃으며 둘러댔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한국 속담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과장된 소문일 뿐이죠.”

“참나, 서 차장이 20대에 청담동 클럽 일대 휘어잡던 일화 모르는 사람도 있어? 반반하게 생겨서 연예인 스카우트하려고 학교 앞에서 기획사 매니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던 얘기는 나도 건너 들었구먼. 오죽하면 얼굴로 우리 회사 들어왔겠어요?”

“어머머! 저도 들었어요, 국장님.”

김현식 국장의 말에 류민주 대리가 신이 나서 보탰다.

“저도 잠실 출신이라 아는데요. 강남에서 5대 남신이 있었는데 그중 세 명이 지금 톱스타인 장진희, 손영민, 오형규구요. 남은 두 명 중 한 명이 지금의 서해웅 차장님이라고 들었어요. 전설의 바람둥이로 유명하던데요. 클럽의 모든 여자들이 해웅 차장님 때문에 눈물을 쏙 뺐다고.”

“오, 그렇습니까? 이거 흥미로운데요.”

김민주 대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도 한편으로 믿기지 않는 듯 크리스가 해웅의 얼굴을 재빠르게 스캔했다.

잘생기긴 했지만 이미 30대를 넘은 얼굴은 피로에 절어 그늘져 있었고 아무렇게나 걸친 옷들은 한참 유행이 지난 것들이었다. 단정하고 서늘하게 잘생긴 얼굴은 때로 귀여운 느낌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시아인 특유의 동안에서 비롯되는 분위기라 여겨졌다. 서구인의 미적 잣대로는 가늠할 수 없는 해웅의 어떤 점이 연예인으로 캐스팅 할 정도로 미색의 용모이며 천하의 난봉꾼이 될 수 있는지, 돌연 크리스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비법 좀 가르쳐 주시죠.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이름난 바람둥이가 될 수 있습니까?”

해웅의 와인 잔에 쨍- 하고 그의 와인 잔을 부딪치며 크리스는 해웅을 향해 바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루해 마지않던 남자의 얼굴이 원색적인 흥미로움으로 한껏 고무되었다.

“고백받았다고 모두 사귀어야 하는 법은 없으니깐요.”

해웅이 어깨를 올리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라, 이거 구미가 당기는군요. 그러고 보니 체격도 좋고 피부도 좋은 게 인기 많을 만하군요. 코가 특히 참 예뻐요. 이런 코는 할리우드 여배우들도 성형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날렵하고 갸름한 콧날인데 말이죠.”

크리스가 장난스럽게 해웅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피부도 참 매끄럽고 곱네요. 신기하다. 남자 손이 이럴 수가 있나?”

해웅의 반응을 즐기는 듯 덩치 큰 남자가 손을 쓰다듬는 감각이 묘하게 소름이 끼쳤다. 해웅이 슬며시 손을 잡아 빼자 크리스가 히죽 웃으며 이번에는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동안 크리스에게서 느껴졌던 낯선 위화감이 본능적으로 떠올라 해웅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해웅은 옆에서 능글능글하게 웃고 있는 크리스를 노려보고서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시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지배인이 우윳빛 백자 그릇에 식혜를 담아 내어오자, 두 손으로 받아 입가에 갖다 대는 정적인 행위가 오히려 해웅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불편하면서도 시선에 밟혔다. 그를 둘러싼 공기층은 조밀해졌다가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로 희박해졌다. 마치 존재 자체가 자유자재로 주변의 공기를 흡입하는 것 같았다.

“유년기는 어땠습니까?”

시제가 그릇에 시선을 떼지 않고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난데없는 질문에 해웅은 물음표를 던졌다.

“무슨 뜻입니까?”

해웅이 시제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가슴이 천천히 들썩였고 내뱉은 호흡들이 분절되어 불친절한 간극을 형성했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시제가 손가락으로 버릇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백자 그릇을 톡톡 건드렸다. 또다시 그만의 느릿한 세계로 침잠하는 듯 시제의 시선이 테이블 모서리를 목적 없이 표류했다.

“어릴 때도 체격이 컸습니까? 한국인 사이에서도 신장이 큰 편 같은데요.”

“뭐, 그렇습니다. 항상 컸던 걸로 기억합니다.”

“재미있는 유년기를 보냈겠네요. 몸집이 크니 아이들도 잘 따를 테고, 남자들 사이에서 서열도 세고, 약한 애들 좀 괴롭히기도 하고. 학교에서 인기 많았겠네요.”

해웅이 난해하다는 듯이 저에게 묻는 의미를 재차 확인했다. 무례한 내용과 달리 남자의 얼굴은 나른하고 명상적이었다.

“아무래도 남자아이들이 다 그렇죠.”

해웅은 고민 끝에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시제의 눈매가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좀 전까지 남자가 게걸스럽게 탐식하던 생선 등처럼 갸름한 눈매가 긴 호를 이루었다.

“꽤나 즐거웠나 봅니다.”

씰룩이는 턱 근육이 정체불명의 적대감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무슨 뜻이냐고 채 묻기도 전에 교양 있는 말투로 남자가 날카로운 대화를 매듭지었다.

“즐거운 점심이었습니다. 이렇게 극진하게 대접해 주시니 라이너스&매덥스와 앞으로 진행될 일들이 매우 기대가 됩니다.”

남자가 던지는 날카로운 언어들이 해웅의 무딘 감각을 자극했다. 무례한 언어는 어떤 의도성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분한 점은, 그가 왜 제게 적의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웅이 물고기라면 남자는 창살을 던져 붉은 핏덩이 속에서 살을 발라내는 야만적이고 거친 어부였다. 사포로 무딘 비늘을 걷어 내 뼈째 발가벗겨 버리듯이 굴다가도 한 발짝 물러서 융기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교묘했다.

저 여우같이 교활한 남자의 의중을 밝혀내고 싶다.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남자에게 해웅은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계산서를 집어 들고 일어서는 김현식 국장에게 시제는 음식이 아주 맛있었다며 예의 바르게 칭찬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바대로, 시제는 해웅에게 오후 내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오후의 콘벤투스 회의실 풍경은 평온했다. 다른 광고주의 지면 촬영 현장에서 급하게 지원 요청이 들어오는 바람에 해웅이 먼저 퇴근을 한 데다, 류민주 대리도 마케팅팀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크리스와 시제는 속도를 올려 업무에 집중했다. 라이너스&매덥스에서 보내 준 자료는 주말 내 꼬박 읽어도 모자랄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데다 마케팅팀에서 전달해 준 내부 기밀 자료는 회의실 구석에 박스 채 쌓여 있었다.

밖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어스름히 그림자가 질 때쯤에야 시제 에크만은 책상 위에 쌓아 둔 자료에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는 지친 얼굴로 테이블에서 일어나 창밖 서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스타벅스 매장에서는 커피를 들고 잰걸음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국 사람들은 퇴근 시간에도 저렇게 커피를 마시는구나, 크리스는 뉴욕과 사뭇 비슷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바라보며 피로한 눈을 감았다 떴다.

“집에 갈 시간에도 커피 매장에 사람이 꽉 차 있어.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저렇게까지 커피 중독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