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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19화
2. 서울, 광화문 (18)
무슨 심정에서 귀엽다는 말을 저도 모르게 뱉었는지, 해웅도 제 혀를 치고 싶었다. 빈틈없는 모습만 보이던 시제가 처음으로 어리숙하게 당황하는 티를 내자, 처음으로 저 녀석도 사이보그가 아니라 사람이긴 한가 보다 싶어 헛말이 튀어나왔던 게 분명했다. 해웅은 슬쩍 뒤에 선 시제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시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퉁명스럽게 해웅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괜히 쳐다봤다 싶어 다시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크리스와 류민주 대리가 먼저 올라탔다. 해웅이 타고 시제가 뒤따라 발을 내딛는 순간 초과된 탑승 인원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먼저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덩치 큰 외국인을 주목했다. 이미 만석인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서, 시제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미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해웅과 크리스를 향해 시제가 고갯짓을 했다. 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크리스는 무언의 명령에 대답하는 대신 팔을 뻗어 잽싸게 버튼을 눌렀다.
“짐승이 인간이랑 한 엘리베이터를 탈 수는 없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크리스를 노려보던 시제의 얼굴이 닫힌 승강기 문 사이로 홀연히 사라졌다.
환한 햇살을 받으며 건물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류민주 대리가 종종걸음으로 긴 다리를 이용해 앞서 나가는 크리스를 뒤따랐다. 류민주 대리는 프로젝트의 리더인 시제의 기분이 상했을까 염려하는 눈치인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을까요?”
“시제요? 걱정 마세요. 저래 봬도 꽁한 타입은 아니에요. 그리고 여자한테는 엄청 잘하는 스타일이니깐, 스텔라는 걱정 안 해도 돼요.”
류민주 대리의 영어 이름인 스텔라로 친근하게 그녀를 부르며 크리스는 계단 한쪽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
“죄송해요. 여기 금연 구역이라, 담배 피우실 거면 저쪽 화단 옆 흡연 구역으로 가죠.”
류민주 대리가 건물 구석 쪽 흡연 구역을 손으로 가리키자,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쳤다. 해웅도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해웅도 담배 피우죠?”
“네.”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저와 시제는 편하게 이름을 불러 주세요. 우린 그게 익숙하니까요.”
“그런데, 왜 이사님… 아니, 시제 별명이 짐승인가요? 두 분이 굉장히 친하신가 봐요.”
류민주 대리가 궁금해하자, 크리스가 담배 필터를 깊게 빨아들이고서는 키득키득 웃어 댔다. 자신의 말이 우스운가 싶어 류민주 대리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크리스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친절한 말투로 설명했다.
“시제는 스웨덴인이거든요. 저는 영국 출신이고요. 우리끼리 장난으로 스웨덴 사람들을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스웨덴에서 수간이 합법이란 말이 있는데, 그걸로 장난치는 거죠.”
“수간, 이요……?”
놀란 나머지 류민주 대리가 말을 더듬었다. 해웅도 어디선가 인터넷에서 읽어 봤던 것 같아 한마디 하려다 잠자코 있었다. 스웨덴은 북유럽 네 국가 중에서도 제조업이 가장 발달하고 복지제도와 정책이 선진화되어 있는 강대국이지만, 그만큼 성문화도 개방적이고 문란하다고 들었다. 해웅은 길게 담배를 한 모금 빨고서는 건물 쪽을 향해 연기를 내뱉었다. 스웨덴 출신이라는 그가 어떤 연유로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그럼, 두 분 다 미국인이 아니십니까?”
해웅이 던진 말에 크리스가 끄덕였다.
“저는 워킹 비자를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전 언젠가 런던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만, 아직까진 뉴욕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런던은 답답하고 지루해서 당분간은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아, 그럼 시제 이사님도 언젠가는 스웨덴으로 돌아가셔야겠네요.”
“음. 글쎄요. 시제는… 모르겠습니다. 미국 영주권을 소지한 걸로 알고 있긴 한데. 스웨덴에 이혼한 아버지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편모 가정에서 자라선지 아버지 얘기는 별로 하려 들지 않아요.”
담배에 불을 붙이며 크리스는 회상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옥스퍼드 시골에서 대학 생활은 지겨웠어요. 미국에 대한 환상도 컸고, 어머니도 미국인이셔서 아무래도 미국 대학 생활에 동경이 있었거든요. 미국에서 취업을 하려다 보니 MBA 경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여러 학교를 고민 끝에 날씨도 좋고 놀기 좋은 서부로 가자, 결심했죠.”
“서부 어디서 공부하셨습니까?”
뉴욕에서 교환 학생 경험이 있는 해웅이 조심스레 묻자 크리스가 ‘스탠퍼드’라고 짧게 답했다. 간결하게 대꾸하는 그의 표정에서 은연중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옥스퍼드 학부에 스탠퍼드 대학에서 MBA라…. 전형적인 영국 상류층의 엘리트 코스를 생각해 보니 크리스가 자부심을 가질 만도 했다.
“시제랑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어요. 서핑 하러 자주 가는 해변이 있는데, 몸 좋은 애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해변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죠. 먼저 말을 걸어서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같은 스탠퍼드 경제학과 학부생이었어요. 그때부터 알게 되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엮이고 있는 거 보면 징글징글하게도 끈질긴 인연이라는 게 따로 있나 봅니다.”
“그래도 대학교 친구분들끼리 이렇게 같이 일하는 모습이 되게 보기 좋은데요.”
류민주 대리가 칭찬해 주자 크리스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해웅은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시제에 대한 질문을 마저 건넸다.
“몸이 엄청 좋아 보이던데, 이사님은 별도로 운동하시는 겁니까?”
크리스는 ‘글쎄요, 그 자식 운동 중독이긴 하지’라고 짧게 답했다. 뜻밖의 추억이 떠오른 듯,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던 표정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아하! 맞다. 하도 오래되어서 까먹고 있었네. UC버클리 미대를 다니다가 편입인지, 재입학인지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 미대 갔을 때 아버지 쪽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스탠퍼드 같은 명문대는 편입이 불가능한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음, 잘은 모르지만 아마 가능할 겁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UC버클리랑 스탠퍼드를 동시 합격했던 것 같아요. 본인은 미술을 하고 싶어 했는데 집에서 반대가 심했다나. 아마 아버지 쪽에서 계속 경영 쪽으로 공부해야 밥 먹고 살 수 있다고 설득했던 것 같아요. 다행히 합격했던 전적이 있어서 참작이 된 건지, 아니면 다시 시험을 보고 재입학했던 건지, 저도 미국 입시에 대해서는 젬병이라 자세한 건 잘 모르겠군요.”
크리스는 필터 끝까지 타들어 간 꽁초를 휴지통에 버리고서는 팔짱을 꼈다. 배가 고픈지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회사 건물 입구를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한참 전에 내려왔어야 할 시제는 도무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미대는 돈도 많이 들고 졸업하고 나서도 경제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불투명하니까 아무래도 여러 현실적인 요건들을 고려해 스탠퍼드를 택했겠죠. 처음에 저 녀석을 봤을 때는 주말에는 모델 아르바이트하랴, 그림 그린답시고 온몸에 물감을 묻히고 화실 들락거리기 바빴는데 어느샌가부터 경제 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도서관에서 살더군요.”
크리스의 긴 설명이 끝날 때 즈음에야 건물 입구의 회전문이 토해 낸 많은 사람들 사이로 불쑥 솟은 시제의 얼굴이 보였다.
“아, 모델 아르바이트했던 건 비밀인데… 별소릴 다 했군요. 아는 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저 자식 워낙 그때 일 얘기 나오는 걸 싫어해서.”
그제야 해웅의 머릿속에서 각인되었던 선명한 근육의 굴곡과 짜임새들이 퍼즐처럼 맞아 들어갔다. 탄탄하게 빚은 시제의 몸은 과거의 영광이었다. 해변에서 그을린 것처럼 구운 올리브색 피부와 함께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규칙적으로 짜인 근육,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미백 치아 같은 것들은 한때 패션업계에 종사하면서 비롯된 노동의 잔재들이었다. 히어로물에 나올 법한 근육은 보통 사람의 의지로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인데, 그는 꽤나 오랫동안 그런 비현실적인 몸매를 유지해야만 돈을 벌 수 있는 업종에서 종사했던 것이다.
“크리스. 장난칠래?”
성난 입꼬리를 씰룩이며 다가오는 시제를 확인하고 크리스는 시제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손가락으로 손목시계의 자판을 가리켰다.
“우리 빨리 갈까요. 미스터 김이 기다리느라 완전히 지쳤겠는걸요.”
2. 서울, 광화문 (18)
무슨 심정에서 귀엽다는 말을 저도 모르게 뱉었는지, 해웅도 제 혀를 치고 싶었다. 빈틈없는 모습만 보이던 시제가 처음으로 어리숙하게 당황하는 티를 내자, 처음으로 저 녀석도 사이보그가 아니라 사람이긴 한가 보다 싶어 헛말이 튀어나왔던 게 분명했다. 해웅은 슬쩍 뒤에 선 시제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시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퉁명스럽게 해웅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괜히 쳐다봤다 싶어 다시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크리스와 류민주 대리가 먼저 올라탔다. 해웅이 타고 시제가 뒤따라 발을 내딛는 순간 초과된 탑승 인원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먼저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덩치 큰 외국인을 주목했다. 이미 만석인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서, 시제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미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해웅과 크리스를 향해 시제가 고갯짓을 했다. 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크리스는 무언의 명령에 대답하는 대신 팔을 뻗어 잽싸게 버튼을 눌렀다.
“짐승이 인간이랑 한 엘리베이터를 탈 수는 없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크리스를 노려보던 시제의 얼굴이 닫힌 승강기 문 사이로 홀연히 사라졌다.
환한 햇살을 받으며 건물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류민주 대리가 종종걸음으로 긴 다리를 이용해 앞서 나가는 크리스를 뒤따랐다. 류민주 대리는 프로젝트의 리더인 시제의 기분이 상했을까 염려하는 눈치인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을까요?”
“시제요? 걱정 마세요. 저래 봬도 꽁한 타입은 아니에요. 그리고 여자한테는 엄청 잘하는 스타일이니깐, 스텔라는 걱정 안 해도 돼요.”
류민주 대리의 영어 이름인 스텔라로 친근하게 그녀를 부르며 크리스는 계단 한쪽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
“죄송해요. 여기 금연 구역이라, 담배 피우실 거면 저쪽 화단 옆 흡연 구역으로 가죠.”
류민주 대리가 건물 구석 쪽 흡연 구역을 손으로 가리키자,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쳤다. 해웅도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해웅도 담배 피우죠?”
“네.”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저와 시제는 편하게 이름을 불러 주세요. 우린 그게 익숙하니까요.”
“그런데, 왜 이사님… 아니, 시제 별명이 짐승인가요? 두 분이 굉장히 친하신가 봐요.”
류민주 대리가 궁금해하자, 크리스가 담배 필터를 깊게 빨아들이고서는 키득키득 웃어 댔다. 자신의 말이 우스운가 싶어 류민주 대리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크리스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친절한 말투로 설명했다.
“시제는 스웨덴인이거든요. 저는 영국 출신이고요. 우리끼리 장난으로 스웨덴 사람들을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스웨덴에서 수간이 합법이란 말이 있는데, 그걸로 장난치는 거죠.”
“수간, 이요……?”
놀란 나머지 류민주 대리가 말을 더듬었다. 해웅도 어디선가 인터넷에서 읽어 봤던 것 같아 한마디 하려다 잠자코 있었다. 스웨덴은 북유럽 네 국가 중에서도 제조업이 가장 발달하고 복지제도와 정책이 선진화되어 있는 강대국이지만, 그만큼 성문화도 개방적이고 문란하다고 들었다. 해웅은 길게 담배를 한 모금 빨고서는 건물 쪽을 향해 연기를 내뱉었다. 스웨덴 출신이라는 그가 어떤 연유로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그럼, 두 분 다 미국인이 아니십니까?”
해웅이 던진 말에 크리스가 끄덕였다.
“저는 워킹 비자를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전 언젠가 런던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만, 아직까진 뉴욕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런던은 답답하고 지루해서 당분간은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아, 그럼 시제 이사님도 언젠가는 스웨덴으로 돌아가셔야겠네요.”
“음. 글쎄요. 시제는… 모르겠습니다. 미국 영주권을 소지한 걸로 알고 있긴 한데. 스웨덴에 이혼한 아버지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편모 가정에서 자라선지 아버지 얘기는 별로 하려 들지 않아요.”
담배에 불을 붙이며 크리스는 회상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옥스퍼드 시골에서 대학 생활은 지겨웠어요. 미국에 대한 환상도 컸고, 어머니도 미국인이셔서 아무래도 미국 대학 생활에 동경이 있었거든요. 미국에서 취업을 하려다 보니 MBA 경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여러 학교를 고민 끝에 날씨도 좋고 놀기 좋은 서부로 가자, 결심했죠.”
“서부 어디서 공부하셨습니까?”
뉴욕에서 교환 학생 경험이 있는 해웅이 조심스레 묻자 크리스가 ‘스탠퍼드’라고 짧게 답했다. 간결하게 대꾸하는 그의 표정에서 은연중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옥스퍼드 학부에 스탠퍼드 대학에서 MBA라…. 전형적인 영국 상류층의 엘리트 코스를 생각해 보니 크리스가 자부심을 가질 만도 했다.
“시제랑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어요. 서핑 하러 자주 가는 해변이 있는데, 몸 좋은 애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해변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죠. 먼저 말을 걸어서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같은 스탠퍼드 경제학과 학부생이었어요. 그때부터 알게 되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엮이고 있는 거 보면 징글징글하게도 끈질긴 인연이라는 게 따로 있나 봅니다.”
“그래도 대학교 친구분들끼리 이렇게 같이 일하는 모습이 되게 보기 좋은데요.”
류민주 대리가 칭찬해 주자 크리스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해웅은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시제에 대한 질문을 마저 건넸다.
“몸이 엄청 좋아 보이던데, 이사님은 별도로 운동하시는 겁니까?”
크리스는 ‘글쎄요, 그 자식 운동 중독이긴 하지’라고 짧게 답했다. 뜻밖의 추억이 떠오른 듯,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던 표정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아하! 맞다. 하도 오래되어서 까먹고 있었네. UC버클리 미대를 다니다가 편입인지, 재입학인지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 미대 갔을 때 아버지 쪽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스탠퍼드 같은 명문대는 편입이 불가능한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음, 잘은 모르지만 아마 가능할 겁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UC버클리랑 스탠퍼드를 동시 합격했던 것 같아요. 본인은 미술을 하고 싶어 했는데 집에서 반대가 심했다나. 아마 아버지 쪽에서 계속 경영 쪽으로 공부해야 밥 먹고 살 수 있다고 설득했던 것 같아요. 다행히 합격했던 전적이 있어서 참작이 된 건지, 아니면 다시 시험을 보고 재입학했던 건지, 저도 미국 입시에 대해서는 젬병이라 자세한 건 잘 모르겠군요.”
크리스는 필터 끝까지 타들어 간 꽁초를 휴지통에 버리고서는 팔짱을 꼈다. 배가 고픈지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회사 건물 입구를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한참 전에 내려왔어야 할 시제는 도무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미대는 돈도 많이 들고 졸업하고 나서도 경제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불투명하니까 아무래도 여러 현실적인 요건들을 고려해 스탠퍼드를 택했겠죠. 처음에 저 녀석을 봤을 때는 주말에는 모델 아르바이트하랴, 그림 그린답시고 온몸에 물감을 묻히고 화실 들락거리기 바빴는데 어느샌가부터 경제 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도서관에서 살더군요.”
크리스의 긴 설명이 끝날 때 즈음에야 건물 입구의 회전문이 토해 낸 많은 사람들 사이로 불쑥 솟은 시제의 얼굴이 보였다.
“아, 모델 아르바이트했던 건 비밀인데… 별소릴 다 했군요. 아는 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저 자식 워낙 그때 일 얘기 나오는 걸 싫어해서.”
그제야 해웅의 머릿속에서 각인되었던 선명한 근육의 굴곡과 짜임새들이 퍼즐처럼 맞아 들어갔다. 탄탄하게 빚은 시제의 몸은 과거의 영광이었다. 해변에서 그을린 것처럼 구운 올리브색 피부와 함께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규칙적으로 짜인 근육,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미백 치아 같은 것들은 한때 패션업계에 종사하면서 비롯된 노동의 잔재들이었다. 히어로물에 나올 법한 근육은 보통 사람의 의지로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인데, 그는 꽤나 오랫동안 그런 비현실적인 몸매를 유지해야만 돈을 벌 수 있는 업종에서 종사했던 것이다.
“크리스. 장난칠래?”
성난 입꼬리를 씰룩이며 다가오는 시제를 확인하고 크리스는 시제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손가락으로 손목시계의 자판을 가리켰다.
“우리 빨리 갈까요. 미스터 김이 기다리느라 완전히 지쳤겠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