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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18화
2. 서울, 광화문 (17)
시제가 말없이 해웅을 쳐다보았다. 독한 말로 맞받아칠 줄 알았는데 시제는 예상외로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해웅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슬쩍 입가 끝이 올라가는 모양새가 요것 봐라, 얕잡아 보는 투였다. 해웅 역시 제 앞의 남자의 기에 눌리지 않고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한참 무언의 시선을 교환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제였다.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시제가 마우스 휠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체크 목록을 확인하는 듯 읊어 내려갔다.
“해야 할 일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 했기에 최대한 그쪽에 신세 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뿐인데, 마침 도와주시겠다고 하니 그럼 체면 차리지 않고 협조 요청하겠습니다.”
“네, 말씀만 하세요.”
“저희가 별도로 조사를 진행하지는 않을 거라 그쪽 회사에서 준 자료와 여기 한국 지사에서 그간 진행했던 조사들 기반으로 시장, 마케팅, 캠페인 분석 등을 토대로 브랜드 전략 방향이 도출될 겁니다. 시장 분석은 본사와 이쪽에서 주신 리서치 자료로 충분히 저와 크리스가 쓸 수 있을 것 같고, 광고 분석 부분에서 도움을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경쟁사 광고 동영상과 함께 분석 내용, 자동차 광고 트렌드, 현상, 그리고 앞으로의 캠페인 방향에 대한 제언 등을 첨언해 주시면 장표에 활용하겠습니다.”
해웅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시제의 입에서 방대한 자료 요청이 쏟아졌다. 눈 깜짝할 새에 엄청난 데이터와 장표들을 열거하더니, 한쪽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더 추가할 게 없나 고민이라도 하는지 시제가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크리에이티브 제언을 잊고 있었군요. 덧붙여 경쟁사 크리에이티브 광고와 아시아 글로벌 캠페인 분석까지 같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시제가 노트북 옆에 쌓아 둔 프린트한 자료를 뒤적였다. 더 이상 내버려 뒀다가는 제게 통째로 일을 시키려는 심사 같아서 해웅은 서둘러 마무리를 지었다.
“일단 류민주 대리님과 콘벤투스 하반기 마컴 업무도 지원하고 있으니 저는 그럼 당분간 류민주 대리님과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다른 브랜드 업무들을 팔로업 해야 하는지라 매번 출근은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류민주 대리와 조정해서 필요한 경우에만 출근하겠습니다.”
다급하게 들렸던 것일까. 시제가 서류를 뒤적이다 말고 동작을 멈추고서는 싱긋 웃었다. 해웅은 속으로 ‘여우 같은 새끼’라고 혀를 차면서도 상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영업용 미소를 잊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시제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긴 침묵이 회의실 공기를 흡착했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선명한 파장을 일으켰다. 크리스와 류민주 대리는 괜한 불똥이 자기들에게 떨어질까 싶어 입을 다물고 업무에 집중했다. 해웅 역시 괜히 한마디 했다가 방대한 과제를 떠안는 바람에 더 이상 나서지 않고 화면에 가득 찬 자료를 읽는 데 집중했다. 회의실 벽 한쪽에 걸려 있는 시계 분침이 회전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회의실 내부는 적막이 감돌았다.
핸드폰 알람이 12시를 울리자, 류민주 대리가 침묵을 깨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 점심 뭐예요, 서 차장님?”
허기진 음성은 갈급하게 해웅을 재촉했다. 김현식 국장이 콘벤투스 앞 호텔에서 대기 중이라는 문자를 확인하면서 해웅은 작업하던 장표를 저장하고 노트북 화면을 꺼 두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김현식 국장에게 곧 일행을 모시고 그쪽으로 출발하겠다는 문자를 전송했다.
“김현식 국장님이 건너편 호텔 2층의 레스토랑을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다들 한국 음식 좋아하십니까?”
“오, 드디어 첫 끼를 현지 음식으로 맛보게 되는군요. 한국 음식 아주 좋아합니다.”
크리스가 해웅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노트북을 닫았다. 침묵 속에서 오전 내내 업무에 열중했던지라 모두 피로한 상태였다.
“뉴욕에서 잘 가는 단골집이 몇 군데 있거든요. 특히 미트패킹에 있는 한국식 누들바랑 한국식 갈비도 좋아하고요. 아, 시제가 사는 트라이베카 쪽에도 요새 잘나가는 라이스 와인 바가 하나 있어요.”
크리스가 해웅의 근처로 오자 남성용 향수에서 풍기는 특유의 톡 쏘는 단내가 진동을 했다. 향수 한 통을 퍼부은 것처럼 강렬한 향이었다. 이 정도의 양을 제 몸에 퍼부어 댔으면 후각이 마비되어 음식 맛을 느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해웅은 내색하지 않고 크리스가 하는 말들이 퍽이나 흥미로운 척 생글생글 웃으며 장단을 맞췄다.
크리스는 꽤나 기분이 좋은지 음식에 대한 제 취향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까다로워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크리스는 생각보다 대화하기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무감정의 눈동자가 가끔 섬뜩함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적어도 시제처럼 야생 살쾡이 같은 공격성을 내보이는 일은 없었다.
“다들 언제 한번 뉴욕 오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어머 굉장한 미식가시군요.”
류민주 대리의 물음에 크리스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한 낙이죠. 이 일을 하면서 딱히 인생의 재미가 없거든요.”
크리스와 류민주 대리는 음식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맞아떨어지자 금세 친해져 아시아 음식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따금 크리스의 입에서 스시나 일본 문화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흘러나왔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해웅이 전에 알던 백인들 대부분은 일본 문화에 열광했다. 당장 뉴욕 미드타운에 널려 있던 유명한 우동집이나 이스트 빌리지에 형성된 저팬타운 골목만 보더라도 뉴요커 대부분이 일본 음식에 열광한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다만 아주 전형적인 백인 문화만을 향유할 것 같은 남자의 입에서 아시아 음식 문화가 거론된다는 것이 신기하긴 했다.
해웅은 한 걸음 뒤떨어져 서 있는 다른 백인을 돌아보았다. 시제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한국 음식을 싫어하나? 해웅은 시제의 굳은 입가와 멍하니 승강기 문을 응시하는 눈매에 시선을 멈추었다.
김현식 국장 욕을 그리 하더니, 결국 어느새 김현식 국장처럼 광고주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소심하게 광고주 표정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국장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자신의 모습과 그리 다른 것 같지 않아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한국 음식,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다른 데로 갈까요?”
“……네? 아, 뭐라고 했습니까?”
해웅의 말에 흠칫 놀란 듯 시제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항상 날 서게 무장해 있던 시제가 무방비한 모습을 보인 적이 처음이라 해웅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제를 쳐다보았다. 딴생각을 하다 퍼뜩 현실로 돌아온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그러나 이내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고 팔짱을 끼며 시제는 침착을 가장한 얼굴로 대꾸했다.
“잠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느라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겠습니까?”
“한국 음식 잘 드시는지 여쭤보았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한국 음식 좋아합니다.”
“특별히 못 드시는 음식 있으면 미리 알려 주십시오. 반영하겠습니다.”
“다 잘 먹는데, 아직까지 낸면은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냉면을 낸면이라 서투르게 발음하면서 진지한 표정을 짓는 시제를 보고 해웅이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터진 해웅의 웃음소리에 놀란 얼굴로 크리스와 류민주 대리가 돌아보았다. 해웅이 터진 웃음을 참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둘이 뭐 재밌는 얘기라도 했어요?”
“아. 아닙니다. 낸면이라고 발음하니 왠지 이사님이 귀여워서요.”
“시제가 귀엽다고요? 저런 짐승 같은 야만인에게 그런 깜찍한 표현을 쓰다니. 소름 끼치네요.”
해웅이 귀엽다고 표현하자 시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자한테 귀엽다고 표현하다니, 역시 해웅 차장님의 공격 범위는 차원이 다르네요. 소싯적 바람둥이 기술 나오는 건가요.”
류민주 대리가 재미있는 건수를 발견한 듯 잔뜩 신난 얼굴로 농을 걸었다.
“무슨 말을 못하겠네, 참…….”
해웅이 멋쩍게 대꾸하자 류민주 대리가 해웅의 팔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바람둥이~ 바람둥이~’라고 놀려 댔다.
2. 서울, 광화문 (17)
시제가 말없이 해웅을 쳐다보았다. 독한 말로 맞받아칠 줄 알았는데 시제는 예상외로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해웅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슬쩍 입가 끝이 올라가는 모양새가 요것 봐라, 얕잡아 보는 투였다. 해웅 역시 제 앞의 남자의 기에 눌리지 않고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한참 무언의 시선을 교환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제였다.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시제가 마우스 휠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체크 목록을 확인하는 듯 읊어 내려갔다.
“해야 할 일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 했기에 최대한 그쪽에 신세 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뿐인데, 마침 도와주시겠다고 하니 그럼 체면 차리지 않고 협조 요청하겠습니다.”
“네, 말씀만 하세요.”
“저희가 별도로 조사를 진행하지는 않을 거라 그쪽 회사에서 준 자료와 여기 한국 지사에서 그간 진행했던 조사들 기반으로 시장, 마케팅, 캠페인 분석 등을 토대로 브랜드 전략 방향이 도출될 겁니다. 시장 분석은 본사와 이쪽에서 주신 리서치 자료로 충분히 저와 크리스가 쓸 수 있을 것 같고, 광고 분석 부분에서 도움을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경쟁사 광고 동영상과 함께 분석 내용, 자동차 광고 트렌드, 현상, 그리고 앞으로의 캠페인 방향에 대한 제언 등을 첨언해 주시면 장표에 활용하겠습니다.”
해웅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시제의 입에서 방대한 자료 요청이 쏟아졌다. 눈 깜짝할 새에 엄청난 데이터와 장표들을 열거하더니, 한쪽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더 추가할 게 없나 고민이라도 하는지 시제가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크리에이티브 제언을 잊고 있었군요. 덧붙여 경쟁사 크리에이티브 광고와 아시아 글로벌 캠페인 분석까지 같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시제가 노트북 옆에 쌓아 둔 프린트한 자료를 뒤적였다. 더 이상 내버려 뒀다가는 제게 통째로 일을 시키려는 심사 같아서 해웅은 서둘러 마무리를 지었다.
“일단 류민주 대리님과 콘벤투스 하반기 마컴 업무도 지원하고 있으니 저는 그럼 당분간 류민주 대리님과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다른 브랜드 업무들을 팔로업 해야 하는지라 매번 출근은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류민주 대리와 조정해서 필요한 경우에만 출근하겠습니다.”
다급하게 들렸던 것일까. 시제가 서류를 뒤적이다 말고 동작을 멈추고서는 싱긋 웃었다. 해웅은 속으로 ‘여우 같은 새끼’라고 혀를 차면서도 상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영업용 미소를 잊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시제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긴 침묵이 회의실 공기를 흡착했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선명한 파장을 일으켰다. 크리스와 류민주 대리는 괜한 불똥이 자기들에게 떨어질까 싶어 입을 다물고 업무에 집중했다. 해웅 역시 괜히 한마디 했다가 방대한 과제를 떠안는 바람에 더 이상 나서지 않고 화면에 가득 찬 자료를 읽는 데 집중했다. 회의실 벽 한쪽에 걸려 있는 시계 분침이 회전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회의실 내부는 적막이 감돌았다.
핸드폰 알람이 12시를 울리자, 류민주 대리가 침묵을 깨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 점심 뭐예요, 서 차장님?”
허기진 음성은 갈급하게 해웅을 재촉했다. 김현식 국장이 콘벤투스 앞 호텔에서 대기 중이라는 문자를 확인하면서 해웅은 작업하던 장표를 저장하고 노트북 화면을 꺼 두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김현식 국장에게 곧 일행을 모시고 그쪽으로 출발하겠다는 문자를 전송했다.
“김현식 국장님이 건너편 호텔 2층의 레스토랑을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다들 한국 음식 좋아하십니까?”
“오, 드디어 첫 끼를 현지 음식으로 맛보게 되는군요. 한국 음식 아주 좋아합니다.”
크리스가 해웅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노트북을 닫았다. 침묵 속에서 오전 내내 업무에 열중했던지라 모두 피로한 상태였다.
“뉴욕에서 잘 가는 단골집이 몇 군데 있거든요. 특히 미트패킹에 있는 한국식 누들바랑 한국식 갈비도 좋아하고요. 아, 시제가 사는 트라이베카 쪽에도 요새 잘나가는 라이스 와인 바가 하나 있어요.”
크리스가 해웅의 근처로 오자 남성용 향수에서 풍기는 특유의 톡 쏘는 단내가 진동을 했다. 향수 한 통을 퍼부은 것처럼 강렬한 향이었다. 이 정도의 양을 제 몸에 퍼부어 댔으면 후각이 마비되어 음식 맛을 느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해웅은 내색하지 않고 크리스가 하는 말들이 퍽이나 흥미로운 척 생글생글 웃으며 장단을 맞췄다.
크리스는 꽤나 기분이 좋은지 음식에 대한 제 취향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까다로워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크리스는 생각보다 대화하기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무감정의 눈동자가 가끔 섬뜩함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적어도 시제처럼 야생 살쾡이 같은 공격성을 내보이는 일은 없었다.
“다들 언제 한번 뉴욕 오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어머 굉장한 미식가시군요.”
류민주 대리의 물음에 크리스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한 낙이죠. 이 일을 하면서 딱히 인생의 재미가 없거든요.”
크리스와 류민주 대리는 음식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맞아떨어지자 금세 친해져 아시아 음식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따금 크리스의 입에서 스시나 일본 문화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흘러나왔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해웅이 전에 알던 백인들 대부분은 일본 문화에 열광했다. 당장 뉴욕 미드타운에 널려 있던 유명한 우동집이나 이스트 빌리지에 형성된 저팬타운 골목만 보더라도 뉴요커 대부분이 일본 음식에 열광한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다만 아주 전형적인 백인 문화만을 향유할 것 같은 남자의 입에서 아시아 음식 문화가 거론된다는 것이 신기하긴 했다.
해웅은 한 걸음 뒤떨어져 서 있는 다른 백인을 돌아보았다. 시제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한국 음식을 싫어하나? 해웅은 시제의 굳은 입가와 멍하니 승강기 문을 응시하는 눈매에 시선을 멈추었다.
김현식 국장 욕을 그리 하더니, 결국 어느새 김현식 국장처럼 광고주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소심하게 광고주 표정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국장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자신의 모습과 그리 다른 것 같지 않아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한국 음식,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다른 데로 갈까요?”
“……네? 아, 뭐라고 했습니까?”
해웅의 말에 흠칫 놀란 듯 시제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항상 날 서게 무장해 있던 시제가 무방비한 모습을 보인 적이 처음이라 해웅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제를 쳐다보았다. 딴생각을 하다 퍼뜩 현실로 돌아온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그러나 이내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고 팔짱을 끼며 시제는 침착을 가장한 얼굴로 대꾸했다.
“잠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느라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겠습니까?”
“한국 음식 잘 드시는지 여쭤보았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한국 음식 좋아합니다.”
“특별히 못 드시는 음식 있으면 미리 알려 주십시오. 반영하겠습니다.”
“다 잘 먹는데, 아직까지 낸면은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냉면을 낸면이라 서투르게 발음하면서 진지한 표정을 짓는 시제를 보고 해웅이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터진 해웅의 웃음소리에 놀란 얼굴로 크리스와 류민주 대리가 돌아보았다. 해웅이 터진 웃음을 참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둘이 뭐 재밌는 얘기라도 했어요?”
“아. 아닙니다. 낸면이라고 발음하니 왠지 이사님이 귀여워서요.”
“시제가 귀엽다고요? 저런 짐승 같은 야만인에게 그런 깜찍한 표현을 쓰다니. 소름 끼치네요.”
해웅이 귀엽다고 표현하자 시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자한테 귀엽다고 표현하다니, 역시 해웅 차장님의 공격 범위는 차원이 다르네요. 소싯적 바람둥이 기술 나오는 건가요.”
류민주 대리가 재미있는 건수를 발견한 듯 잔뜩 신난 얼굴로 농을 걸었다.
“무슨 말을 못하겠네, 참…….”
해웅이 멋쩍게 대꾸하자 류민주 대리가 해웅의 팔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바람둥이~ 바람둥이~’라고 놀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