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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17화
2. 서울, 광화문 (16)
프레드릭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시제보다 붙임성이 좋아 보였다. 인자하게 웃는 얼굴은 상대를 편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해웅은 자신을 어디까지 소개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제 직함을 소개했다.
“콘벤투스 한국 광고 캠페인을 맡고 있는 라이너스&매덥스의 서해웅 차장이라고 합니다.”
콘벤투스를 거론하자 프레드릭은 흥미롭다는 듯 작게 탄성을 냈다.
“광고 일이라니, 재미있는 일을 하시는군요.”
“별일 아닙니다. 이사님이랑은 같은 프로젝트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자주 뵙게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유능한 분이시죠. 서해웅 차장은.”
시제가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덧붙이고서는, 해웅의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해웅이 시제의 시선을 따라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빨갛게 퉁퉁 부어오른 유두에 잇자국이 새겨져 있었고 가슴이 멍 들어 있었다. 노골적인 섹스 후 상흔에 해웅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안효영 이 자식…….
시제가 팔짱을 낀 채로 재미있다는 듯 묘하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해웅은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면서 무의식중에 가슴을 가리기 위해 수건을 끌어 올렸다. 삽시간에 수건이 풀어지면서 앉아 있는 시제 앞으로 성기가 튀어나왔다. 시제와 낯선 남자가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성기가 드러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볼일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아, 아니,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해웅이 허겁지겁 수건으로 다시 하체를 가리고 뒤를 돌아섰다. 앞을 가리느라 방심한 나머지 엉덩이가 그대로 두 남자에게 노출되는 게 느껴졌다. 제기랄… 해웅은 한 손을 뒤로 빼 엉덩이를 가리려고 애썼지만, 이미 여과 없이 노출된 뒤였다. 해웅이 버둥거리는 사이, 시제가 일어났다. 해웅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시제가 옆에 비스듬히 선 채 한쪽 팔을 내밀어 문을 열어 주었다.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 봅니다.”
시제가 해웅의 귓가에 낮게 읊조리듯이 말했다. 해웅은 뭐라 대답할 생각이 나지 않아 그저 실실 웃으며, 관자놀이를 긁어 댔다. 올려다본 시제의 얼굴은 고압적인 분위기를 걷어 내고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해웅의 가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감염될 수 있으니 소독을 해야 할 것 같군요.”
“심각한 건 아닙니다…그냥…….”
“제가 해 드릴까요?”
시제의 손가락이 살짝 유두를 스쳤다. 해웅이 미간을 구기면서 아픈 신음을 내자, 시제가 이런,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손을 거두었다.
“별걸 다 걱정해 주시는군요. 정말 괜찮습니다.”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듯이 대꾸하고서는 아차 싶어 시제의 안색을 살폈다. 말투가 무례하게 들렸을까, 신경이 쓰였다. 시제는 더 이상 긴말 않고 어서 나가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웅이 부리나케 사우나 부스를 빠져나오는 동안, 시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시제는 나무 벤치에 앉아 다시 금발의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뭇 진지해 보이는 옆얼굴은 회의실에서 본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층 어둡고 진지한 표정으로 시제는 남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는지, 문득 시제가 고개를 들어 부스 유리창 너머 해웅의 시선을 응시했다. 장난기가 어느새 사라진 눈동자는 해웅이 어서 나가 주기를 바라는 듯 싸늘하고 고요했다.
***
콘벤투스 지사로의 첫 출근은 오랜만에 해웅을 긴장시켰다. 5년 전, 라이너스&매덥스에 입사하게 되어 첫 출근을 했을 때처럼 묘한 흥분과 긴장이 가슴을 죄여 왔다. 평소처럼 을지로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광화문으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익숙한 건물 로비를 통과해 30분 일찍 콘벤투스 건물 10층 회의실에 도착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노트북을 연결했다. 리모컨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등 뒤로 회의실 문이 열렸다. 외부인의 존재를 상기시키려는 듯 문이 열리면서 둔탁한 마찰음을 일으켰다. 류민주 대리인가 싶어 돌아보자, 흰 셔츠에 남색 슬랙스를 입은 크리스가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영문 잡지는 옆구리에 끼고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왔다. 해웅을 보자 그새 친해진 이웃사촌을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날씨 너무 좋던데요.”
“어제는 푹 쉬셨습니까?”
“뭐, 호텔 들어가서 작업 좀 했죠. 시제가 워낙 워커홀릭이라서 쉴 틈을 도저히 주질 않네요.”
“같이 오시지 않았나 봅니다.”
“들를 데가 있다고 먼저 출발했는데 아직 도착 안 했나 봐요. 어디 간 거지?”
32도에 육박한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의 손에는 뜨거운 라테가 들려 있었다. 라테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테이블 의자를 꺼내는 그의 행동에서 어딘지 모를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해웅은 그에게서 종종 알 수 없는 이질성을 느꼈는데 그것은 시제나 다른 외국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한 거리감이었다. 크리스는 길고 날렵한 손가락을 이용해 흰 송아지 가죽 케이스에서 노트북을 꺼내더니 해웅이 메일로 보내 주었던 리서치 자료 파일들을 클릭했다.
“사실, 뉴욕에 있을 때 좀 읽긴 했는데 전 시제만큼은 다 못 읽었어요. 워낙 자료가 많아서 당분간 자료들 분석하기에도 힘들 것 같아요.”
“필요하신 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구독하고 있는 자료들뿐 아니라 만들어 놓은 시장 분석 리포트들도 제법 있습니다. 물론 매해마다 리서치 회사를 통해 자체적으로 소비자 조사도 하고 있고요.”
“하하… 읽을 게 너무 많아서 질식할 지경입니다. 살려 주세요.”
너스레를 떠는 크리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시제와 노트북을 들고 있는 류민주 대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류민주 대리가 활발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류민주 대리의 뒤를 이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시제는 목례만 가볍게 하고 반대편으로 걸어가 크리스 옆에 앉았다. 간절기용 얇은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얇은 은색 안경테를 코에 걸친 그는 어딘지 조금 지쳐 보였다. 어젯밤 마주쳤을 때와 다르게 냉기가 흘렀다. 딱히 지난밤 마주친 일을 거론하지 않는 편이 해웅의 입장에서도 편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시제는 상대하기 힘든 까다로운 남자인 것은 분명했다.
“보내 주신 자료가 생각보다 양이 많더군요.”
사과 로고가 하얗게 빛나는 잿빛 노트북을 켜자 특유의 경쾌한 시작음이 흘러나왔다. 검은 사약 빛을 띠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들이켜며 시제가 목을 이리저리 가누었다. 퍼즐을 끼워 맞추듯 목뼈가 두둑두둑, 무딘 비명을 질렀다.
“그건 그렇고, 서 차장님은 매일 이쪽으로 출근하시는 겁니까?”
시제의 목소리가 묘하게 신경질적이었다. 해웅이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던 시선을 들어 시제를 쳐다보자 안경알 너머 차가운 무기질 눈동자와 마주쳤다.
“일도 많으실 텐데, 매번 이쪽으로 출근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국 지사 쪽 요청이라면, 저희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옆에 앉은 류민주 대리가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사실 해웅이 필요한 사람은 시제가 아니라 류민주 대리였으니 시제의 돌발 발언에 난처할 법도 했다. 그러나 시제의 까칠한 분위기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어깨를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솔직히…….”
해웅이 류민주 대리를 슬며시 쳐다보고서는 대신 나섰다.
“말씀하시죠.”
“저 역시 이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기서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제가 있어 불편하시다면 오지 말까요?”
그 말에 시제는 가만히 해웅을 응시했다. 안경 너머 날카로운 안광이 흔들림 없이 해웅을 주시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형연한 안채에 날렵한 흥미가 스쳤다. 그러나 대답 대신 시제는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화면에 띄운 파일들을 훑어보는 사내의 얼굴에 비소가 흘렀다.
“할 일 없이 앉아만 있는 건 그쪽 회사 사장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죠. 저희한테가 아니라.”
“뭐 앉아만 있다 퇴근한다 한들 저야 월급만 받으면 상관없습니다. 회사에서 원하는 건 제가 이사님의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여기 상주해 있는 거니깐요. 제 업무의 많고 적음은 이사님이 저를 얼마나 이용하시고자 하는지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2. 서울, 광화문 (16)
프레드릭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시제보다 붙임성이 좋아 보였다. 인자하게 웃는 얼굴은 상대를 편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해웅은 자신을 어디까지 소개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제 직함을 소개했다.
“콘벤투스 한국 광고 캠페인을 맡고 있는 라이너스&매덥스의 서해웅 차장이라고 합니다.”
콘벤투스를 거론하자 프레드릭은 흥미롭다는 듯 작게 탄성을 냈다.
“광고 일이라니, 재미있는 일을 하시는군요.”
“별일 아닙니다. 이사님이랑은 같은 프로젝트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자주 뵙게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유능한 분이시죠. 서해웅 차장은.”
시제가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덧붙이고서는, 해웅의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해웅이 시제의 시선을 따라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빨갛게 퉁퉁 부어오른 유두에 잇자국이 새겨져 있었고 가슴이 멍 들어 있었다. 노골적인 섹스 후 상흔에 해웅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안효영 이 자식…….
시제가 팔짱을 낀 채로 재미있다는 듯 묘하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해웅은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면서 무의식중에 가슴을 가리기 위해 수건을 끌어 올렸다. 삽시간에 수건이 풀어지면서 앉아 있는 시제 앞으로 성기가 튀어나왔다. 시제와 낯선 남자가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성기가 드러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볼일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아, 아니,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해웅이 허겁지겁 수건으로 다시 하체를 가리고 뒤를 돌아섰다. 앞을 가리느라 방심한 나머지 엉덩이가 그대로 두 남자에게 노출되는 게 느껴졌다. 제기랄… 해웅은 한 손을 뒤로 빼 엉덩이를 가리려고 애썼지만, 이미 여과 없이 노출된 뒤였다. 해웅이 버둥거리는 사이, 시제가 일어났다. 해웅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시제가 옆에 비스듬히 선 채 한쪽 팔을 내밀어 문을 열어 주었다.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 봅니다.”
시제가 해웅의 귓가에 낮게 읊조리듯이 말했다. 해웅은 뭐라 대답할 생각이 나지 않아 그저 실실 웃으며, 관자놀이를 긁어 댔다. 올려다본 시제의 얼굴은 고압적인 분위기를 걷어 내고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해웅의 가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감염될 수 있으니 소독을 해야 할 것 같군요.”
“심각한 건 아닙니다…그냥…….”
“제가 해 드릴까요?”
시제의 손가락이 살짝 유두를 스쳤다. 해웅이 미간을 구기면서 아픈 신음을 내자, 시제가 이런,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손을 거두었다.
“별걸 다 걱정해 주시는군요. 정말 괜찮습니다.”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듯이 대꾸하고서는 아차 싶어 시제의 안색을 살폈다. 말투가 무례하게 들렸을까, 신경이 쓰였다. 시제는 더 이상 긴말 않고 어서 나가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웅이 부리나케 사우나 부스를 빠져나오는 동안, 시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시제는 나무 벤치에 앉아 다시 금발의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뭇 진지해 보이는 옆얼굴은 회의실에서 본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층 어둡고 진지한 표정으로 시제는 남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는지, 문득 시제가 고개를 들어 부스 유리창 너머 해웅의 시선을 응시했다. 장난기가 어느새 사라진 눈동자는 해웅이 어서 나가 주기를 바라는 듯 싸늘하고 고요했다.
***
콘벤투스 지사로의 첫 출근은 오랜만에 해웅을 긴장시켰다. 5년 전, 라이너스&매덥스에 입사하게 되어 첫 출근을 했을 때처럼 묘한 흥분과 긴장이 가슴을 죄여 왔다. 평소처럼 을지로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광화문으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익숙한 건물 로비를 통과해 30분 일찍 콘벤투스 건물 10층 회의실에 도착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노트북을 연결했다. 리모컨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등 뒤로 회의실 문이 열렸다. 외부인의 존재를 상기시키려는 듯 문이 열리면서 둔탁한 마찰음을 일으켰다. 류민주 대리인가 싶어 돌아보자, 흰 셔츠에 남색 슬랙스를 입은 크리스가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영문 잡지는 옆구리에 끼고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왔다. 해웅을 보자 그새 친해진 이웃사촌을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날씨 너무 좋던데요.”
“어제는 푹 쉬셨습니까?”
“뭐, 호텔 들어가서 작업 좀 했죠. 시제가 워낙 워커홀릭이라서 쉴 틈을 도저히 주질 않네요.”
“같이 오시지 않았나 봅니다.”
“들를 데가 있다고 먼저 출발했는데 아직 도착 안 했나 봐요. 어디 간 거지?”
32도에 육박한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의 손에는 뜨거운 라테가 들려 있었다. 라테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테이블 의자를 꺼내는 그의 행동에서 어딘지 모를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해웅은 그에게서 종종 알 수 없는 이질성을 느꼈는데 그것은 시제나 다른 외국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한 거리감이었다. 크리스는 길고 날렵한 손가락을 이용해 흰 송아지 가죽 케이스에서 노트북을 꺼내더니 해웅이 메일로 보내 주었던 리서치 자료 파일들을 클릭했다.
“사실, 뉴욕에 있을 때 좀 읽긴 했는데 전 시제만큼은 다 못 읽었어요. 워낙 자료가 많아서 당분간 자료들 분석하기에도 힘들 것 같아요.”
“필요하신 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구독하고 있는 자료들뿐 아니라 만들어 놓은 시장 분석 리포트들도 제법 있습니다. 물론 매해마다 리서치 회사를 통해 자체적으로 소비자 조사도 하고 있고요.”
“하하… 읽을 게 너무 많아서 질식할 지경입니다. 살려 주세요.”
너스레를 떠는 크리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시제와 노트북을 들고 있는 류민주 대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류민주 대리가 활발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류민주 대리의 뒤를 이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시제는 목례만 가볍게 하고 반대편으로 걸어가 크리스 옆에 앉았다. 간절기용 얇은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얇은 은색 안경테를 코에 걸친 그는 어딘지 조금 지쳐 보였다. 어젯밤 마주쳤을 때와 다르게 냉기가 흘렀다. 딱히 지난밤 마주친 일을 거론하지 않는 편이 해웅의 입장에서도 편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시제는 상대하기 힘든 까다로운 남자인 것은 분명했다.
“보내 주신 자료가 생각보다 양이 많더군요.”
사과 로고가 하얗게 빛나는 잿빛 노트북을 켜자 특유의 경쾌한 시작음이 흘러나왔다. 검은 사약 빛을 띠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들이켜며 시제가 목을 이리저리 가누었다. 퍼즐을 끼워 맞추듯 목뼈가 두둑두둑, 무딘 비명을 질렀다.
“그건 그렇고, 서 차장님은 매일 이쪽으로 출근하시는 겁니까?”
시제의 목소리가 묘하게 신경질적이었다. 해웅이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던 시선을 들어 시제를 쳐다보자 안경알 너머 차가운 무기질 눈동자와 마주쳤다.
“일도 많으실 텐데, 매번 이쪽으로 출근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국 지사 쪽 요청이라면, 저희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옆에 앉은 류민주 대리가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사실 해웅이 필요한 사람은 시제가 아니라 류민주 대리였으니 시제의 돌발 발언에 난처할 법도 했다. 그러나 시제의 까칠한 분위기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어깨를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솔직히…….”
해웅이 류민주 대리를 슬며시 쳐다보고서는 대신 나섰다.
“말씀하시죠.”
“저 역시 이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기서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제가 있어 불편하시다면 오지 말까요?”
그 말에 시제는 가만히 해웅을 응시했다. 안경 너머 날카로운 안광이 흔들림 없이 해웅을 주시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형연한 안채에 날렵한 흥미가 스쳤다. 그러나 대답 대신 시제는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화면에 띄운 파일들을 훑어보는 사내의 얼굴에 비소가 흘렀다.
“할 일 없이 앉아만 있는 건 그쪽 회사 사장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죠. 저희한테가 아니라.”
“뭐 앉아만 있다 퇴근한다 한들 저야 월급만 받으면 상관없습니다. 회사에서 원하는 건 제가 이사님의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여기 상주해 있는 거니깐요. 제 업무의 많고 적음은 이사님이 저를 얼마나 이용하시고자 하는지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