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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16화

2. 서울, 광화문 (15)





***



해웅이 잠에서 깨었을 때 시간은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도를 낮추어 아늑하고 어두운 이규제큐티브 룸은 에어컨을 틀어 다소 춥게 느껴질 정도였다. 밖으로 보이는 검푸른 하늘 아래 뱀의 꼬리처럼 긴 행렬을 이룬 차량들이 마포대교를 지나 저 멀리 공덕사거리까지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었다.

해웅은 이불을 들추었다. 그의 옆에서 쌕쌕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자고 있는 효영은 발가벗은 상태였다. 고개를 돌려 휴지통을 확인했다. 정액이 찬 콘돔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섹스의 잔상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졸려 죽겠는 상태에서도 잊지 않고 섹스를 하다니 제가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해웅은 협탁 위에 올려 있는 호텔 서비스 안내 바우처를 확인했다. 사우나는 자정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이규제큐티브 룸 투숙객은 무료로 이용 가능했다. 모처럼 호텔에 왔으니 탕에서 몸도 덥히고 땀도 빼고 싶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효영이 눈꺼풀을 반쯤 뜨고 해웅을 올려다보았다 졸음이 덜 깬 상태로 엉금엉금 해웅의 옆으로 기어와,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었다.

“나 사우나 하러 가야 해.”

“나 몰래 도망가려는 거 아니고?”

“그런 거 아니야. 모처럼 해서인지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찝찝해서 그래.”

“그럼 나 팔베개해 주고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가.”

“알았어.”

“오늘 평소랑 다르게 많이 흥분했던데 좋긴 좋았나 보네.”

문득 효영과의 관계 중 가학적인 욕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기억이 났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유독 섹스 맛이 좋았다. 며칠 동안 해웅을 짓누르고 있던 스트레스가 섹스의 형태로 발산되어 더욱 그런 듯했다.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해웅은 정신을 지배하는 쾌락에 압도되어 제 몸을 휘둘렀다. 열감에 젖은 몸이 완전히 소진되고 머릿속을 지배하는 온갖 잡념들이 비산되기를 바랐다.

피로가 쌓인 몸을 일으키자, 조금 전 난생처음 경험한 애널 섹스가 떠올랐다.

효영이 즉흥적으로 제안한 애널 섹스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넘어서 포만감이 밀려올 만큼 자극적이었다. 쾌락에 정신을 지배당할 만큼 강렬했던 섹스였다. 해웅은 잠시 벽에 몸을 기댄 채 나른하게 밀려오는 만족감을 만끽했다. 제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는 효영을 내려다보다, 해웅은 효영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그녀의 머리와 베개 사이로 팔을 넣어 주었다.



***



호텔 9층에는 투숙객을 위한 피트니스와 수영장, 사우나실이 모여 있었다. 그중 사우나실은 이규제큐티브 투숙객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는 VIP용으로, 그 외에는 회원제로 관리되었다. 해웅은 데스크에 효영이 투숙하는 객실 번호를 대고 사우나실로 입장했다. 밤이라 그런지 내부는 한산했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탈의실 옷장에는 뽀송뽀송한 배스 가운이 걸려 있었고 에비앙 생수와 오렌지 주스, 커피, 각종 어메니티들이 대리석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외국인 투숙객이 많은 호텔의 사우나 룸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투숙객은 사우나실에 입장할 때 가운을 걸치고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해웅은 가운이 답답하기도 하고 영 체질에 맞지 않아 상의는 벗은 채 하반신에만 간단히 배스용 수건을 둘렀다.

온탕과 냉탕 및 건식 사우나 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해웅은 허리에 두르던 수건을 벗고 온탕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벽에 기대었다. 보글보글 벽에서 거품을 내며 솟아오르는 뜨거운 물은 가볍게 해웅이 기댄 등을 밀어 내며 마사지해 주었다.

시원하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 근심 모두 저편으로 밀어 낸 것처럼 개운했다. 샤워 부스 안에서 속성으로 샤워기로 몸에 물만 바르고 허겁지겁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보니 탕에서 이렇게 망중한을 즐기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해웅은 물에 젖은 두 손을 뺨에 갖다 대고 머리까지 쓸어 올렸다. 뜨거운 물에 덥힌 두 손으로 뺨과 이마를 지압하며, 피곤에 절어 만성 두통에 시달리는 이마와 눈가를 어루만졌다.

탕에서 나와 해웅은 하반신에 수건을 두르고 건식 사우나 부스에 들어섰다. 핀란드식으로 꾸며진 내부에는 외국인이 두 명 앉아 있었다. 뿌연 수증기가 가득 차 있는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간신히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서는 주춤주춤 발을 내디뎠다. 좁은 내부를 차지하고 있는 덩치 큰 백인 두 명이 해웅이 들어오자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분명 서울인데도 불구하고 외국 어딘가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다. 지나치게 쳐다보는 느낌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아 해웅은 외국인 옆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았다. 그러나 옆에 앉은 외국인은 일부러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뚫어질세라 해웅의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해웅 씨입니까?”

해웅이 갑자기 불린 제 이름에,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은 외국인이 다리를 꼰 채 몸을 틀어 자신을 향해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 짓궂은 웃음이 걸린 채, 옅은 푸른색 눈동자는 해웅을 파헤칠 것처럼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시제 에크만이었다.

“여기 묵나 보죠?”

해웅은 무의식중에 그만 육성으로 욕을 외칠 뻔했다. 입을 틀어막고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오늘따라 이 호텔에 대체 무슨 기운이 있기에 설희에 이어 회사 사람을 반나체 상태로 사우나실에서 마주치게 되는지, 이쯤 되면 제 사주에 액운이라도 낀 건가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C호텔은 콘벤투스 본사 및 홍콩, 뉴욕 지사의 전용 투숙 호텔이었다. 광화문에 새 호텔이 지어지긴 했지만, 강북에 위치한 회사들이 상대하는 무역과 수출, 금융과 관련 바이어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투숙하니, 여기서 마주쳐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어쩐지 효영이 여기로 불러들일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 러브호텔로 갔어야 했는데 비즈니스 전용 투숙 호텔에 온 것 자체가 문제였다.

해웅은 건성으로 고개를 숙이고서는 어색하게 시제와 눈인사를 했다. 뽀얀 수증기 사이로 시제의 벗은 몸이 보였다. 조각칼로 그린 듯한 근육질의 몸은 지방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했다. 수영 선수 몸처럼 날씬하면서도 조밀하게 근육이 자리 잡혀 둔한 느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전형적인 운동선수의 몸이었다. 상박의 가슴과 팔 근육에서 머물러 있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시제의 하체로 옮겨졌다. 설마, 아예 벌거벗은 건 아니겠지… 해웅의 눈이 노골적으로 아래를 향하자, 시제가 빈정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수건 걸치고 있습니다.”

“아, 네네. 하하하… 여기서 뵙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른 시제는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 였는데, 수납 방향이 어딘지 분명히 보일 정도로 한쪽 허벅지 위가 뭉툭하게 솟아 있었다. 해웅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와… 역시 스웨덴의 위용….’

해웅은 헛기침을 하고서는 씩 웃었다. 회의실에서 봤을 때는 싸가지 없는 외국인이라는 첫인상 말고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가까이서 맨몸을 감상하다 보니, 옷을 입었을 때보다 마르게 느껴졌다. 일단 앉아 있는데 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니, 비현실적인 괴리감마저 느껴졌다. 해웅은 슬쩍슬쩍 몸매를 훑어보며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저도 한때 태릉선수촌을 목표로 운동깨나 했던 사람인지라 저렇게 몸매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해웅은 속으로 담배 끊는 놈보다 더 독한 놈이라고 중얼거렸다.

시제 옆에 앉은 금발머리는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백인 남자였다. 시제가 영어가 아닌 무언가 다른 외국어로 그에게 설명을 했고, 그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해웅을 향해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인사드린다는 게 깜빡했군요.”

시제 옆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 해웅에게 인사를 건넸다. 손을 뻗어 해웅에게 악수를 청하는 남자는 젊은 시절 한창 잘생겼을 법했고 나이가 든 지금은 부내와 여유가 흐르는, 상류층 백인 남성의 전형적인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관리가 잘된 얼굴은 나이에 비해 피부가 좋아 보였고 그의 눈동자 역시 시제처럼 푸른 색깔을 띠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프레드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