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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15화
2. 서울, 광화문 (14)
여자아이는 설희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마지못해 고개를 까닥였다. 박하사탕처럼 둥글고 큰 눈은 낯설고 키 큰 남자를 경계하느라 바빴다. 해웅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조그만 생물체가 희한하게도 설희랑 닮은 것이 신기해 저도 모르게 몸을 숙여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컸네. 아주 어릴 때 보고 못 봤는데, 아이들 자라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네.”
“애가 요새 좀 낯을 가려. 삼촌 얼굴 다 까먹었나 보다.”
“나 기억 안 나니, 장미야?”
해웅이 조그만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맑게 웃는 모습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덥석 안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높아지자 아이는 당황해서 눈만 껌뻑거리며 해웅의 목을 무의식중에 끌어안았다. 해웅은 아이가 편하도록 한 팔로 업고서는 설희와 베이커리 숍을 나왔다. 설희의 한 손에는 투박한 건강식 호밀 빵이 담긴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다른 한 손에는 미니 트렁크 손잡이가 들려 있는 데다가 커다란 백팩까지 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배가 부른 데다 짐까지 많아 무겁고 힘에 부쳐 보였다. 해웅은 그녀의 손에서 트렁크를 빼앗아 대신 끌었다.
“너야말로 여긴 무슨 일이야?”
“여기 호텔에서 키즈 프로모션 한다고 해서 남편이 멤버십 끊어 줬어. 이따 저녁에 퇴근하면 오기로 했거든. 나랑 장미랑 먼저 체크인하고 수영장에서 놀려고.”
“수영장?”
“애들이 물놀이 좋아하잖아.”
“넌 임신했는데 물놀이해도 돼?”
해웅의 말에 설희가 멋쩍게 배를 끌어안았다. 감출 수 없이 부푼 배는 이미 임신 5개월은 넘어 보였다. 뒤뚱뒤뚱 걷는 설희가 신기하고 귀여워 저도 모르게 꽃다발을 든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기가 애기를 가졌네. 신기하다.”
“이런 데서 널 마주칠 줄 알았으면 좀 차려입고 나올 걸 그랬다. 장미 유치원에서 픽업하고 정신없이 오느라…… 옷차림이 좀 그러네. 화장도 못하고. 나 지금 살쪄서 못생겼지…….”
“무슨 말 같잖은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해웅은 꾸짖듯이 엄한 말투로 나무랐다. 이미 끝나 버린 남녀 사이에, 여전히 예쁘다거나 달콤한 말로 위로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웅은 이미 결혼한 유부녀에게 괜히 오해 살 표현으로 달래 주기보다,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무뚝뚝하게 외면하고 말았다.
“넌 여전히 똑같다. 나만 변하고.”
설희가 해웅의 굳은 표정을 살피더니 생글생글 웃었다. 느릿하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를 붙잡는 폼이 어딘가 안 좋아 보였다. 물놀이를 할 때가 아니라 쉬어야 할 것 같은데. 해웅은 설희의 창백한 낯빛이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몇 층이야? 데려다줄게.”
해웅의 말에 놀라서 설희가 두 손을 저었다. 정말로 그럴 필요 없다는 얼굴은, 해웅이 행여 저 때문에 불필요한 수고를 할까 봐 조심하는 듯했다.
“아니야, 정말로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장미 이제 내려 줘. 걔 버릇 잘못 들면 맨날 안아 달라고 보채서 오빠랑 내가 힘들어.”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데려다줄게, 그러면.”
해웅은 설희의 말을 무시하고서는 장미를 끌어안은 채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국적인 난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장식된 로비 중앙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자, 투숙객 전용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야!!”
엘리베이터에서 별안간 효영이 튀어나왔다. 놀란 나머지 해웅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짧은 반바지에 긴 해변용 로브를 걸친 효영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해웅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얜 누구야? 숨겨 놓은 딸이야?”
“너, 아까부터 나한테 반말하는데 내가 너보다 일곱 살 많다.”
“시끄럽고. 얜 누구야? 너 유부남이었니?”
효영이 뿔이 잔뜩 난 얼굴로 해웅을 노려보고 있는데 맞은편 모퉁이에서 설희가 뒤뚱거리 오리걸음으로 나타났다. 몸을 가누기 힘든지 가쁜 숨을 쉬다가 웬 여자가 저를 노려보자 놀란 듯 걸음을 멈추었다. 설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효영이 눈을 부라리며 설희의 전신을 훑어보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 여자가 네 마누라니? 너, 나 만나려다가 발각된 거야? 이거 아주 쓰레기네.”
효영이 언성을 높이며 해웅에게 삿대질을 하자 지나가던 투숙객들이 소음이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호텔 로비의 시선이 일제히 해웅과 효영에게로 향했다. 복도 끝에 서서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호텔 직원이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모습이 해웅의 시선에 걸렸다. 제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해웅은 효영의 손에 내던지듯이 꽃다발을 쥐여 주었다.
“그만해라. 창피하게 여기서 왜 큰소리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한 무더기 사람들이 쏟아져 내릴 때마다 다들 신기한 듯 해웅과 효영을 쳐다보고 지나갔다. 창피함을 견디다 못해 해웅은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은 채로, 다른 한 손으로 트렁크를 끌고 컨시어지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 해웅이 도망간다고 생각했는지 뒤를 쫓으며 효영이 악에 받쳐 한층 신랄하게 퍼부어 댔다.
“와, 이 새끼 도망가는 것 봐라. 유부남이 클럽 다니고, 나이트 다니고, 문자질 하고, 쓰레기짓 하고 다니니 좋냐? 싱글 행세하더니만 애까지 딸린 아저씨였네, 이거. 나한테 사과 안 해? 어딜 도망가? 야, 쓰레기 새끼!!”
“그만 좀!! 입 안 다물어? 사람 말 좀 들어, 제발!”
해웅은 컨시어지 데스크 앞에 트렁크를 세우고서는 효영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효영이 해웅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서는 씩씩 더운 콧김을 내뿜었다. 효영의 어깨너머 설희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때문에 별일에 다 휘말리는 것 같아 안쓰럽고 미안했다. 안고 있던 장미를 내려 주고 해웅은 설희의 이름을 불렀다. 설희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웃어 보였다.
“미안하다. 몸은 어때?”
“정말 괜찮아. 저분이 네 여자 친구니?”
그제야 설희가 해웅과 별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효영이 노기를 가라앉히고 홱 돌아서서 한마디 했다.
“아줌만 누구세요? 도우미예요?”
별안간 설희 얼굴이 벌게지더니 자신의 펑퍼짐한 면 원피스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해웅과 눈이 마주치자 설희가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러나 연신 귓바퀴 뒤로 잔머리를 넘기는 손가락은 퉁퉁 부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 전 여자 친구야.”
효영이 고개를 들어 해웅을 쳐다보았다. 해웅은 장미에게 몸을 숙여 머리를 쓰다듬었다. 맑고 고운 눈동자가 설희를 닮았다. 해웅은 장미의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서는 ‘나중에 보자’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설희야, 장미랑 즐거운 시간 보내.”
“어, 그래…… 고마워.”
설희는 주춤거리며 장미의 손을 쥐었다. 호텔 직원이 다가와 체크인 데스크로 안내하자 고개를 숙여 효영에게 인사를 하고서는 직원을 따라갔다. 해웅은 설희가 데스크로 완전히 이동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쳐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 효영을 바라보았다.
“저 아줌마가 전 여친이었다고? 서해웅, 별거 아니네. 네 수준이 저 정도였어? 하도 비싸게 굴어서 뭐 얼마나 대단하게 눈이 높나 싶었더니만.”
“효영아. 안효영.”
해웅이 낮게 목소리를 깔자, 효영이 눈을 갸름하게 치켜떴다. ‘뭐, 왜 목소리 깔고 난리야?’라는 투로 저를 쳐다보자 해웅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자꾸 그렇게 섹시하게 구니깐 내가 미칠 것 같잖아. 그러니 더 이상 자극하지 말고 이제 그만 올라가야지?”
효영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해웅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빙그르르 뒤로 돌렸다. 로브 주머니에 손을 넣자 카드키가 닿았다. 제 손에 잡힌 카드키를 꺼낸 뒤 해웅은 효영을 내버려 둔 채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엄청난 피로감이 엄습했다. 저를 피곤하게 하는 설희나, 효영이나, 만사 다 귀찮았다. 24시간 수면을 취하지 못한 몸은 당장 어딘가 눕고 싶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해웅은 졸음에 취해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누군가 툭 치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전신을 흐르는 피가 혈관을 통해 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휘청거리는 몸뚱이를 가까스로 추스르며 해웅은 카드키에 적힌 객실로 향해 어지러이 걸음을 옮겼다.
2. 서울, 광화문 (14)
여자아이는 설희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마지못해 고개를 까닥였다. 박하사탕처럼 둥글고 큰 눈은 낯설고 키 큰 남자를 경계하느라 바빴다. 해웅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조그만 생물체가 희한하게도 설희랑 닮은 것이 신기해 저도 모르게 몸을 숙여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컸네. 아주 어릴 때 보고 못 봤는데, 아이들 자라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네.”
“애가 요새 좀 낯을 가려. 삼촌 얼굴 다 까먹었나 보다.”
“나 기억 안 나니, 장미야?”
해웅이 조그만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맑게 웃는 모습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덥석 안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높아지자 아이는 당황해서 눈만 껌뻑거리며 해웅의 목을 무의식중에 끌어안았다. 해웅은 아이가 편하도록 한 팔로 업고서는 설희와 베이커리 숍을 나왔다. 설희의 한 손에는 투박한 건강식 호밀 빵이 담긴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다른 한 손에는 미니 트렁크 손잡이가 들려 있는 데다가 커다란 백팩까지 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배가 부른 데다 짐까지 많아 무겁고 힘에 부쳐 보였다. 해웅은 그녀의 손에서 트렁크를 빼앗아 대신 끌었다.
“너야말로 여긴 무슨 일이야?”
“여기 호텔에서 키즈 프로모션 한다고 해서 남편이 멤버십 끊어 줬어. 이따 저녁에 퇴근하면 오기로 했거든. 나랑 장미랑 먼저 체크인하고 수영장에서 놀려고.”
“수영장?”
“애들이 물놀이 좋아하잖아.”
“넌 임신했는데 물놀이해도 돼?”
해웅의 말에 설희가 멋쩍게 배를 끌어안았다. 감출 수 없이 부푼 배는 이미 임신 5개월은 넘어 보였다. 뒤뚱뒤뚱 걷는 설희가 신기하고 귀여워 저도 모르게 꽃다발을 든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기가 애기를 가졌네. 신기하다.”
“이런 데서 널 마주칠 줄 알았으면 좀 차려입고 나올 걸 그랬다. 장미 유치원에서 픽업하고 정신없이 오느라…… 옷차림이 좀 그러네. 화장도 못하고. 나 지금 살쪄서 못생겼지…….”
“무슨 말 같잖은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해웅은 꾸짖듯이 엄한 말투로 나무랐다. 이미 끝나 버린 남녀 사이에, 여전히 예쁘다거나 달콤한 말로 위로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웅은 이미 결혼한 유부녀에게 괜히 오해 살 표현으로 달래 주기보다,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무뚝뚝하게 외면하고 말았다.
“넌 여전히 똑같다. 나만 변하고.”
설희가 해웅의 굳은 표정을 살피더니 생글생글 웃었다. 느릿하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를 붙잡는 폼이 어딘가 안 좋아 보였다. 물놀이를 할 때가 아니라 쉬어야 할 것 같은데. 해웅은 설희의 창백한 낯빛이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몇 층이야? 데려다줄게.”
해웅의 말에 놀라서 설희가 두 손을 저었다. 정말로 그럴 필요 없다는 얼굴은, 해웅이 행여 저 때문에 불필요한 수고를 할까 봐 조심하는 듯했다.
“아니야, 정말로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장미 이제 내려 줘. 걔 버릇 잘못 들면 맨날 안아 달라고 보채서 오빠랑 내가 힘들어.”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데려다줄게, 그러면.”
해웅은 설희의 말을 무시하고서는 장미를 끌어안은 채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국적인 난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장식된 로비 중앙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자, 투숙객 전용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야!!”
엘리베이터에서 별안간 효영이 튀어나왔다. 놀란 나머지 해웅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짧은 반바지에 긴 해변용 로브를 걸친 효영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해웅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얜 누구야? 숨겨 놓은 딸이야?”
“너, 아까부터 나한테 반말하는데 내가 너보다 일곱 살 많다.”
“시끄럽고. 얜 누구야? 너 유부남이었니?”
효영이 뿔이 잔뜩 난 얼굴로 해웅을 노려보고 있는데 맞은편 모퉁이에서 설희가 뒤뚱거리 오리걸음으로 나타났다. 몸을 가누기 힘든지 가쁜 숨을 쉬다가 웬 여자가 저를 노려보자 놀란 듯 걸음을 멈추었다. 설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효영이 눈을 부라리며 설희의 전신을 훑어보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 여자가 네 마누라니? 너, 나 만나려다가 발각된 거야? 이거 아주 쓰레기네.”
효영이 언성을 높이며 해웅에게 삿대질을 하자 지나가던 투숙객들이 소음이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호텔 로비의 시선이 일제히 해웅과 효영에게로 향했다. 복도 끝에 서서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호텔 직원이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모습이 해웅의 시선에 걸렸다. 제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해웅은 효영의 손에 내던지듯이 꽃다발을 쥐여 주었다.
“그만해라. 창피하게 여기서 왜 큰소리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한 무더기 사람들이 쏟아져 내릴 때마다 다들 신기한 듯 해웅과 효영을 쳐다보고 지나갔다. 창피함을 견디다 못해 해웅은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은 채로, 다른 한 손으로 트렁크를 끌고 컨시어지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 해웅이 도망간다고 생각했는지 뒤를 쫓으며 효영이 악에 받쳐 한층 신랄하게 퍼부어 댔다.
“와, 이 새끼 도망가는 것 봐라. 유부남이 클럽 다니고, 나이트 다니고, 문자질 하고, 쓰레기짓 하고 다니니 좋냐? 싱글 행세하더니만 애까지 딸린 아저씨였네, 이거. 나한테 사과 안 해? 어딜 도망가? 야, 쓰레기 새끼!!”
“그만 좀!! 입 안 다물어? 사람 말 좀 들어, 제발!”
해웅은 컨시어지 데스크 앞에 트렁크를 세우고서는 효영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효영이 해웅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서는 씩씩 더운 콧김을 내뿜었다. 효영의 어깨너머 설희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때문에 별일에 다 휘말리는 것 같아 안쓰럽고 미안했다. 안고 있던 장미를 내려 주고 해웅은 설희의 이름을 불렀다. 설희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웃어 보였다.
“미안하다. 몸은 어때?”
“정말 괜찮아. 저분이 네 여자 친구니?”
그제야 설희가 해웅과 별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효영이 노기를 가라앉히고 홱 돌아서서 한마디 했다.
“아줌만 누구세요? 도우미예요?”
별안간 설희 얼굴이 벌게지더니 자신의 펑퍼짐한 면 원피스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해웅과 눈이 마주치자 설희가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러나 연신 귓바퀴 뒤로 잔머리를 넘기는 손가락은 퉁퉁 부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 전 여자 친구야.”
효영이 고개를 들어 해웅을 쳐다보았다. 해웅은 장미에게 몸을 숙여 머리를 쓰다듬었다. 맑고 고운 눈동자가 설희를 닮았다. 해웅은 장미의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서는 ‘나중에 보자’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설희야, 장미랑 즐거운 시간 보내.”
“어, 그래…… 고마워.”
설희는 주춤거리며 장미의 손을 쥐었다. 호텔 직원이 다가와 체크인 데스크로 안내하자 고개를 숙여 효영에게 인사를 하고서는 직원을 따라갔다. 해웅은 설희가 데스크로 완전히 이동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쳐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 효영을 바라보았다.
“저 아줌마가 전 여친이었다고? 서해웅, 별거 아니네. 네 수준이 저 정도였어? 하도 비싸게 굴어서 뭐 얼마나 대단하게 눈이 높나 싶었더니만.”
“효영아. 안효영.”
해웅이 낮게 목소리를 깔자, 효영이 눈을 갸름하게 치켜떴다. ‘뭐, 왜 목소리 깔고 난리야?’라는 투로 저를 쳐다보자 해웅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자꾸 그렇게 섹시하게 구니깐 내가 미칠 것 같잖아. 그러니 더 이상 자극하지 말고 이제 그만 올라가야지?”
효영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해웅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빙그르르 뒤로 돌렸다. 로브 주머니에 손을 넣자 카드키가 닿았다. 제 손에 잡힌 카드키를 꺼낸 뒤 해웅은 효영을 내버려 둔 채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엄청난 피로감이 엄습했다. 저를 피곤하게 하는 설희나, 효영이나, 만사 다 귀찮았다. 24시간 수면을 취하지 못한 몸은 당장 어딘가 눕고 싶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해웅은 졸음에 취해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누군가 툭 치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전신을 흐르는 피가 혈관을 통해 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휘청거리는 몸뚱이를 가까스로 추스르며 해웅은 카드키에 적힌 객실로 향해 어지러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