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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14화
2. 서울, 광화문 (13)
-잘 있었니? 하도 연락이 없어서 내가 먼저 해 봤다.
해웅은 원망이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에, 자신이 먼저 연락을 안 한 지 한 달이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드린 지가 최근에 끝낸 프로젝트 시작 전이니 어머니가 서운한 소리를 할 만도 했다.
“죄송해요.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또 PT가 있어서 좀 바빴어요. 잘 계시죠?”
-우리야 별일 없지. 밥은 잘 챙겨 먹고?
“네, 저야 별일 없죠. 아버지, 건강은 괜찮으세요?”
-그냥, 뭐……. 너 와서 밥 먹었으면 하고 바라시는 눈친데, 언제 올 수 있니?
해웅이 집을 나온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다.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 후 홧김에 본가에서 나와 고시원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길게 나와 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막상 독립해서 살다 보니 비록 비좁은 공간이라도 혼자 지내는 시간이 편하기도 했고, 야근과 밤샘을 밥 먹듯이 하는 현업에 치이다 보니 차츰 본가로 가는 발길이 뜸해졌다.
“시간 내서 찾아갈게요. 아마 다음 달 초에나 될 것 같아요.”
-설희가 얼마 전에 찾아왔었다. 지 신랑이랑 과일 바구니랑 한우 가지고서는 인사하러 왔었어. 아주 잘 사나 보던데……. 너도 이제 그만 걔 잊고 결혼해야지.
“그게 언제 적 이야기예요. 저 설희 때문에 결혼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이젠 아주 미련 없는 거지, 그 아이한테?
“아, 정말……. 이런 얘기 하실 거면 저 전화 끊을 겁니다. 엄마는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옛날 얘기를 꺼내세요.”
해웅은 모처럼 통화한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졸업 후까지 근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설희와 교제했다. 워낙 오랫동안 교제했던 데다가 같은 동네에 살고 부모님들끼리도 아는 사이이다 보니, 둘이 헤어졌을 때 가장 아쉬워했던 사람도 해웅의 어머니였다.
딸이 없고 아들만 둘인 해웅의 어머니는 설희를 친딸처럼 예뻐했고 둘이 결혼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다 보니 설희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쉬운 마음에 종종 통화를 하며 관계를 유지했고, 마침 설희 부부가 근처로 이사를 오자 반찬도 해다 주곤 하는 것이었다. 해웅은 제 어머니의 행동이 그쪽 부부에게도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당부했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아들 몰래 설희와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걔가 아기도 낳고 예쁘게 잘 사는 걸 보니 속상해서 그래. 네가 뭐가 모자라서 아직 이러고 있는지…….
“결혼 안 한 미혼들은 다 모자란 사람들입니까? 그만하세요. 자꾸 그러실 거면 제가 설희한테 이제 둘이 만나지 말라고 전화할 겁니다.”
-어휴. 알았다, 알았어.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엄마 말을 좀 그냥 들어 주면 안 되니. 엄마가 무슨 그렇게 기분 나쁜 소리를 했다고, 신경질은……. 알았어. 하여튼, 조만간 아버지에게 전화 좀 드리고. 들르도록 하렴.
“알았어요. 죄송해요. 하여튼, 너무 걱정 마세요. 알아서 잘 살고 있으니까.”
-요새 애들 정말 무슨 생각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아니야. 또 잔소리한다고 뭐라 그럴라. 끊으마.
어머니가 흐릿하게 말을 접으며 전화를 끊자, 해웅은 괜히 신경질을 부린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그러게, 왜 설희 이야기를 꺼내 가지고.
설희가 전혀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람에 대한 정이나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해웅은 지난 인연은 후회해 봤자 부질없다고 모질게 마음을 먹고 깨끗하게 정리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설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남매처럼 자라면서 연애를 했던지라, 연애가 끝났을 때 즈음에는 희한하게도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긴 연애의 끝에서 반추해 보았을 때 설희와 보낸 시간들은 성인들의 연애처럼 농밀하고 뜨겁지 않았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첫사랑. 그것은 변질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순백하게 추억 속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해웅이 전화를 받자, 칼칼하고 허스키한, 유학생 특유의 영어 발음이 섞인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안효영이었다.
-너, 정말 밀당 잘한다. 내가 좀 뭐라 그랬다고 문자 딱 씹는 테크닉 봐. 사람 마음 아주 들었다 놨다 장난 아닌데.
“질척이는 남자 싫다며. 넌 왜 질척이는데?”
-누가 질척거리는지에 따라 다르지. 은근히 속 좁네.
“네 안도 좁던데.”
해웅이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효영이 깔깔 웃어 댔다. 음악을 켰는지 재즈 선율이 배경 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곧 전화가 끊기고 효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C호텔 3215로 와. 참, 그리고 올라올 때 와인이랑 장미 꽃다발 사 오는 것 잊지 말기. 여기 전망이 너무 좋아서 테이블에 꽃다발 올려놓고 사진 좀 찍게.]
효영은 국회의원 아버지와 교육 재단을 운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모자람 없이 자란 전형적인 유학파 출신 아가씨였다. 해웅이 느끼는 ‘전형적’이라 함은, 소위 외국물 먹은 유학파들을 보고 느낀 어떤 공통점이며, 그러한 점들이 그들을 묶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효영은 직업이 딱히 없어도 집에서 받는 용돈만으로 충분히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한 달 생활비만 직장인 두세 달 월급을 훌쩍 넘는 주제에, 자기는 백수니 네가 밥을 사라는 식으로 해웅에게 당돌하게 접근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효영은 해웅보다 무려 일곱 살이나 어렸다. 철없고 무례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해웅이 종종 그녀를 만나는 이유는 솔직하고 뒤끝 없는 성격이라 피곤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의도에 위치한 C호텔에 도착하자, 정문 앞에서 테일 코트를 입은 호텔 직원이 해웅을 맞이했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열어 주는 직원에게 발레파킹을 맡기고 호텔 건물 입구에 들어섰다. 금융센터 가운데 자리 잡은 초고층 건물은 정오를 지난 햇빛이 반사되어 푸르스름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밝고 활달한 효영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해웅은 효영이 부탁한 꽃다발을 구입하기 위해 호텔 입구 오른편에 있는 베이커리와 플라워 숍으로 들어섰다. 플라워 숍 내부는 덴마크 출신의 유명한 플라워리스트가 디자인했다는 화려한 꽃다발과 부케들이 사방에 장식되어 있었다. 해웅은 눈에 보이는 대로 대충 짙은 보라색과 선명한 핑크색이 화려하게 섞인 꽃다발을 골랐다.
포장을 마친 점원에게 해웅은 카드를 건네고 결제를 완료했다. 꽃다발을 받아 들고 별생각 없이 핸드폰에 뜬 결제 내용을 확인하다가, 해웅은 기가 막혀 두 눈에 힘을 주고 재차 결제 금액을 확인했다.
‘뭔 부케가 하나에 15만 원이야?’
순식간에 작은 꽃다발 하나를 구입하는 데 한 달 기름값이 날아갔다. 그나마 작은 꽃다발을 골라 망정이지, 제법 크기도 크고 풍성한 것이 보여 ‘저건 얼마예요’라고 물으니 2, 30만 원이 훌쩍 넘어갔다. 차라리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셨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하루 이틀 관상용에 불과한 생화에 거액을 지불하니 속이 쓰렸다.
젠장, 괜히 여기 왔나. 그냥 친구나 만나서 술이나 마실걸. 제 손에 들린 거금의 앙증맞은 꽃다발을 쳐다보며 해웅은 뒤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플라워 숍에서 계산을 마치고 해웅은 짧은 복도로 연결된 베이커리로 이동했다. 와인 한 병은 가져가야 할 것 같아 고민 끝에 합리적인 가격대의 프랑스산 샴페인을 골랐다. 계산을 기다리는 동안 베이커리 너머 호텔 로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많은 외국인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어쩐지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와 있는 듯 이국적인 풍경을 빚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 또는 어딘가 동서양이 어지러이 혼합된 다른 대도시로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해웅은 잠시 낯선 장소가 주는 설렘에 빠져들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등을 건드렸다.
“해웅아!”
키 크고 마른 소녀. 해웅이 뒤를 돌자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웃음을 짓던 설희가 서 있었다.
“서, 설희? 네가 여기 웬일이야?”
해웅은 설희, 그리고 그녀 옆에 서 있는 조그만 여자애를 내려다보았다. 3살을 갓 넘긴 듯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설희를 똑 닮아 눈이 크고 살구빛 뺨이 발그레한 것이 또래 아이들보다 눈에 띄게 예쁘장했다.
“얘가 장미야?”
“응, 장미야.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2. 서울, 광화문 (13)
-잘 있었니? 하도 연락이 없어서 내가 먼저 해 봤다.
해웅은 원망이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에, 자신이 먼저 연락을 안 한 지 한 달이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드린 지가 최근에 끝낸 프로젝트 시작 전이니 어머니가 서운한 소리를 할 만도 했다.
“죄송해요.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또 PT가 있어서 좀 바빴어요. 잘 계시죠?”
-우리야 별일 없지. 밥은 잘 챙겨 먹고?
“네, 저야 별일 없죠. 아버지, 건강은 괜찮으세요?”
-그냥, 뭐……. 너 와서 밥 먹었으면 하고 바라시는 눈친데, 언제 올 수 있니?
해웅이 집을 나온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다.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 후 홧김에 본가에서 나와 고시원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길게 나와 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막상 독립해서 살다 보니 비록 비좁은 공간이라도 혼자 지내는 시간이 편하기도 했고, 야근과 밤샘을 밥 먹듯이 하는 현업에 치이다 보니 차츰 본가로 가는 발길이 뜸해졌다.
“시간 내서 찾아갈게요. 아마 다음 달 초에나 될 것 같아요.”
-설희가 얼마 전에 찾아왔었다. 지 신랑이랑 과일 바구니랑 한우 가지고서는 인사하러 왔었어. 아주 잘 사나 보던데……. 너도 이제 그만 걔 잊고 결혼해야지.
“그게 언제 적 이야기예요. 저 설희 때문에 결혼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이젠 아주 미련 없는 거지, 그 아이한테?
“아, 정말……. 이런 얘기 하실 거면 저 전화 끊을 겁니다. 엄마는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옛날 얘기를 꺼내세요.”
해웅은 모처럼 통화한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졸업 후까지 근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설희와 교제했다. 워낙 오랫동안 교제했던 데다가 같은 동네에 살고 부모님들끼리도 아는 사이이다 보니, 둘이 헤어졌을 때 가장 아쉬워했던 사람도 해웅의 어머니였다.
딸이 없고 아들만 둘인 해웅의 어머니는 설희를 친딸처럼 예뻐했고 둘이 결혼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다 보니 설희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쉬운 마음에 종종 통화를 하며 관계를 유지했고, 마침 설희 부부가 근처로 이사를 오자 반찬도 해다 주곤 하는 것이었다. 해웅은 제 어머니의 행동이 그쪽 부부에게도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당부했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아들 몰래 설희와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걔가 아기도 낳고 예쁘게 잘 사는 걸 보니 속상해서 그래. 네가 뭐가 모자라서 아직 이러고 있는지…….
“결혼 안 한 미혼들은 다 모자란 사람들입니까? 그만하세요. 자꾸 그러실 거면 제가 설희한테 이제 둘이 만나지 말라고 전화할 겁니다.”
-어휴. 알았다, 알았어.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엄마 말을 좀 그냥 들어 주면 안 되니. 엄마가 무슨 그렇게 기분 나쁜 소리를 했다고, 신경질은……. 알았어. 하여튼, 조만간 아버지에게 전화 좀 드리고. 들르도록 하렴.
“알았어요. 죄송해요. 하여튼, 너무 걱정 마세요. 알아서 잘 살고 있으니까.”
-요새 애들 정말 무슨 생각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아니야. 또 잔소리한다고 뭐라 그럴라. 끊으마.
어머니가 흐릿하게 말을 접으며 전화를 끊자, 해웅은 괜히 신경질을 부린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그러게, 왜 설희 이야기를 꺼내 가지고.
설희가 전혀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람에 대한 정이나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해웅은 지난 인연은 후회해 봤자 부질없다고 모질게 마음을 먹고 깨끗하게 정리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설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남매처럼 자라면서 연애를 했던지라, 연애가 끝났을 때 즈음에는 희한하게도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긴 연애의 끝에서 반추해 보았을 때 설희와 보낸 시간들은 성인들의 연애처럼 농밀하고 뜨겁지 않았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첫사랑. 그것은 변질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순백하게 추억 속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해웅이 전화를 받자, 칼칼하고 허스키한, 유학생 특유의 영어 발음이 섞인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안효영이었다.
-너, 정말 밀당 잘한다. 내가 좀 뭐라 그랬다고 문자 딱 씹는 테크닉 봐. 사람 마음 아주 들었다 놨다 장난 아닌데.
“질척이는 남자 싫다며. 넌 왜 질척이는데?”
-누가 질척거리는지에 따라 다르지. 은근히 속 좁네.
“네 안도 좁던데.”
해웅이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효영이 깔깔 웃어 댔다. 음악을 켰는지 재즈 선율이 배경 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곧 전화가 끊기고 효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C호텔 3215로 와. 참, 그리고 올라올 때 와인이랑 장미 꽃다발 사 오는 것 잊지 말기. 여기 전망이 너무 좋아서 테이블에 꽃다발 올려놓고 사진 좀 찍게.]
효영은 국회의원 아버지와 교육 재단을 운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모자람 없이 자란 전형적인 유학파 출신 아가씨였다. 해웅이 느끼는 ‘전형적’이라 함은, 소위 외국물 먹은 유학파들을 보고 느낀 어떤 공통점이며, 그러한 점들이 그들을 묶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효영은 직업이 딱히 없어도 집에서 받는 용돈만으로 충분히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한 달 생활비만 직장인 두세 달 월급을 훌쩍 넘는 주제에, 자기는 백수니 네가 밥을 사라는 식으로 해웅에게 당돌하게 접근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효영은 해웅보다 무려 일곱 살이나 어렸다. 철없고 무례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해웅이 종종 그녀를 만나는 이유는 솔직하고 뒤끝 없는 성격이라 피곤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의도에 위치한 C호텔에 도착하자, 정문 앞에서 테일 코트를 입은 호텔 직원이 해웅을 맞이했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열어 주는 직원에게 발레파킹을 맡기고 호텔 건물 입구에 들어섰다. 금융센터 가운데 자리 잡은 초고층 건물은 정오를 지난 햇빛이 반사되어 푸르스름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밝고 활달한 효영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해웅은 효영이 부탁한 꽃다발을 구입하기 위해 호텔 입구 오른편에 있는 베이커리와 플라워 숍으로 들어섰다. 플라워 숍 내부는 덴마크 출신의 유명한 플라워리스트가 디자인했다는 화려한 꽃다발과 부케들이 사방에 장식되어 있었다. 해웅은 눈에 보이는 대로 대충 짙은 보라색과 선명한 핑크색이 화려하게 섞인 꽃다발을 골랐다.
포장을 마친 점원에게 해웅은 카드를 건네고 결제를 완료했다. 꽃다발을 받아 들고 별생각 없이 핸드폰에 뜬 결제 내용을 확인하다가, 해웅은 기가 막혀 두 눈에 힘을 주고 재차 결제 금액을 확인했다.
‘뭔 부케가 하나에 15만 원이야?’
순식간에 작은 꽃다발 하나를 구입하는 데 한 달 기름값이 날아갔다. 그나마 작은 꽃다발을 골라 망정이지, 제법 크기도 크고 풍성한 것이 보여 ‘저건 얼마예요’라고 물으니 2, 30만 원이 훌쩍 넘어갔다. 차라리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셨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하루 이틀 관상용에 불과한 생화에 거액을 지불하니 속이 쓰렸다.
젠장, 괜히 여기 왔나. 그냥 친구나 만나서 술이나 마실걸. 제 손에 들린 거금의 앙증맞은 꽃다발을 쳐다보며 해웅은 뒤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플라워 숍에서 계산을 마치고 해웅은 짧은 복도로 연결된 베이커리로 이동했다. 와인 한 병은 가져가야 할 것 같아 고민 끝에 합리적인 가격대의 프랑스산 샴페인을 골랐다. 계산을 기다리는 동안 베이커리 너머 호텔 로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많은 외국인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어쩐지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와 있는 듯 이국적인 풍경을 빚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 또는 어딘가 동서양이 어지러이 혼합된 다른 대도시로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해웅은 잠시 낯선 장소가 주는 설렘에 빠져들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등을 건드렸다.
“해웅아!”
키 크고 마른 소녀. 해웅이 뒤를 돌자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웃음을 짓던 설희가 서 있었다.
“서, 설희? 네가 여기 웬일이야?”
해웅은 설희, 그리고 그녀 옆에 서 있는 조그만 여자애를 내려다보았다. 3살을 갓 넘긴 듯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설희를 똑 닮아 눈이 크고 살구빛 뺨이 발그레한 것이 또래 아이들보다 눈에 띄게 예쁘장했다.
“얘가 장미야?”
“응, 장미야. 삼촌한테 인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