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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13화

2. 서울, 광화문 (12)





해웅의 말에 윤 대리가 바로 맞받아쳤다.

“그래 나 같은 남자들에게 걸려들면 안 된다니깐.”

해웅은 한숨을 쉬며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면서 슬쩍 이세민 차장의 눈치를 보고서는 화제의 중심을 그에게로 옮겼다.

“자, 주위를 둘러보면 윤 대리가 말하는 그런 곰 같고 말 잘 듣고 조신한 남자들, 우리 회사에도 있어. 이를테면 우리 피 대리나 이세민 차장이 아주 진국이고 좋은 남자지.”

“네네~”

윤 대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영혼 없이 대꾸했다. 윤 대리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던 이세민 차장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별안간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세민 차장이 숙맥같이 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해웅은 이마를 찌푸렸다. 밥상을 차려 줘도 숟갈도 얹지 못하는 바보천치 같으니.

해웅은 어느새 다 먹어 치운 음식들을 둘러보았다. 남자 셋과 여자 한 명이 부지런히도 먹어 치웠다 싶게 음식 한 톨을 남기지 않아 테이블 위는 깨끗하게 전멸된 상태에 가까웠다. 해웅이 디저트를 주문하기 위해 손을 올리자, 홀에서 지켜보고 있던 웨이터가 다가왔다. 윤원희 대리가 메뉴판에서 선택한 산딸기 셔벗과 라임 푸딩, 생강 아이스크림을 올린 뜨거운 팬케이크와 각자의 커피를 주문했다. 해웅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모처럼 여유로운 점심시간을 만끽했다.

“근데 그 시제 에크만 이사가, 해웅 차장님 장표에다가 뭐라 뭐라 부실하다고 딴지를 많이 걸었다면서요.”

어디선가 주워들은 피 대리가 조심스레 PT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해웅은 대꾸하지 않으려다가, 피 대리의 궁금해하는 표정에 못 이겨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뭐, 재수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시제 정도면 상대하기 양호하지. 적어도 물건을 집어 던지지는 않잖아?”

해웅의 말에 윤원희 대리와 피 대리가 눈을 마주치고는 피식 웃었다. 해웅이 입사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진상을 부리기로 유명한 광고주를 맡게 되어 첫 PT를 한 날 해웅은 발표하다 말고 물벼락을 맞았다. 말 그대로 광고주가 생수통을 집어 던지는 바람에 흠뻑 젖었던 것이다.

모 기업의 재벌 3세인 망나니 김 모 씨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혼날 때마다 광고 회사 직원들을 불러들여 깽판을 부렸다. 허울 좋게 마케팅 상무 자리에 앉아 TV 광고를 집행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일밖에 하는 게 없던 그가 첫 광고주였으니, 해웅으로서는 톡톡히 첫 신고식을 치른 셈이었다.

“자, 다들 이젠 쓸데없는 걱정 그만들 합시다. 시제 에크만은 내가 보기엔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야. 신랄하게 좀 깠다고 나쁜 사람이면 매일같이 광고주한테 비판받는 광고 일 어떻게 버티려고. 우리가 제대로 못 들고 갔으니 그런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거지.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일을 할 뿐이고, 우린 우리 일만 제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괜히 이상한 소문에 휘둘려서 여기저기 말 옮기고 다니지 말고, 다들 당분간 서로 도와주면서 김현식 국장님 옆에서 보필해 주도록 해요.”

해웅의 말에 다들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너무 진지했나?”

해웅이 슬쩍 묻자, 윤원희 대리가 디저트를 포크로 파헤치고 있다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닭살 돋게시리. 김현식 국장님의 영혼이 갑자기 빙의라도 된 거예요?”

“죽을 때가 되었나 보지. 나도 좀 점잖고 진지하게 말하면 안 돼?”

“얼굴만 봐도 화가 풀어지는 미모의 소유자이신데, 뭘 그렇게 노력하세요. 차장님은 외모가 재능인데.”

윤원희 대리가 한껏 놀리는 말투로 PT 때 해웅이 했던 말을 언급하자, 제아무리 뻔뻔한 해웅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턱에 호두 주름을 만들면서 민망함을 감추려고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아, 그래 내가 정말 아까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긴 했지. 제길. 괜한 소리 해서 시제 그놈한테 한 방 먹기나 하고.”

“시제 이사가 뭐라 그랬어요?”

“아냐, 됐어. 발표 석상에서 헛소리나 해 댄 내가 미친놈이지. 누굴 뭐라 해.”

해웅은 아까 자신을 비웃듯이 훑어보던 시제의 시선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평소처럼 그냥 발표나 할 것이지, 괜스레 도입부에서 이상한 소리를 해 대서 첫인상만 나빠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즉석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영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단어 선택을 한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오전에 일어난 모든 일을 깡그리 기억에서 삭제하고 싶었다.

“자자, 다들 이제 다 먹은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납시다.”

해웅은 핸드폰에 들어온 문자를 확인하더니, 계산서를 요청하기 위해 웨이터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시계가 어느덧 오후 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



[서 차장, 수고했어~ 밤새웠으니 오늘은 일찍 그만 퇴근해.]

점심을 먹고 들어와 대충 자리를 정리하는데 김현식 국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해웅은 내일 바로 콘벤투스로 출근할 수 있도록 노트북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방에 넣었다. 해웅의 맞은편 자리를 확인해 보니 밤을 꼴딱 새운 여파로 윤원희 대리가 고개를 흔들며 졸고 있었다.

“원희 대리, 별일 없으면 퇴근해. 밤새워서 피곤할 텐데.”

잠결에 해웅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윤원희 대리가 잠에서 깨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웅과 눈이 마주치자 무방비하게 졸고 있던 제 모습이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었다.

“어라. 완전히 졸아 버렸네요. 차장님도 퇴근하실 거예요?”

“나도 좀 가서 자려고. 밥 먹고 나니 정신없이 졸려 오네.”

해웅은 졸린 눈을 치켜뜨려고 노력했다. 사무실 밖은 아직 환했다. 모처럼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는데 이대로 고시원으로 돌아가려니 왠지 아쉬웠다. 체력만 멀쩡하다면 오랜만에 영화라도 한 편 보러 극장에 가고 싶은 날이었다. 해웅은 핸드폰을 꺼내 최근 개봉한 영화들을 확인했지만 딱히 보고 싶은 건 보이지 않아 다시 창을 닫았다. 놀고 싶긴 한데 오늘 같은 날 뭘 하면 좋을지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드라이브라도 나갔다 올까. 체력도 안 되는데…….”

갑갑한 고시원에 기어 들어가자니 날씨도 좋고 아직 해가 걸린 오후인지라 왠지 모르게 아까웠다. 일단 가방을 싸 들고 회사를 부리나케 탈출해야겠다 싶어 백팩을 등에 맸다. 윤원희 대리도 해웅의 퇴근하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작은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 서둘러 신발을 갈아 신고 있었다.

“그건 뭐야? 못생긴 신발 신다가 퇴근할 때 되니 하이힐로 바꿔 신네.”

“데이트하러 갑니다. 차장님은요?”

“뭐, 난…….”

해웅은 딱히 갈 데가 없어 말끝을 흐렸다. 여자 친구랑 헤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빈 시간에 만나서 데이트라도 할 텐데, 막상 혼자 뭔가를 하려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혼자 농구라도 하러 여의도나 갈까. 해웅은 차 트렁크에 굴러다니는 농구공이 떠올라 잠시 고민했다.

“거봐요. 내가 소개팅하라고 했지. 고소해라~ 그럼 전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윤원희 대리가 먼저 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복도 끝을 돌아 사라졌다. 해웅은 뭘 할까 고민하다 핸드폰 연락처를 훑어보았다. 얼마 전, 클럽에서 만났던 안효영이 떠올랐다. 연예인 지망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이국적이고 까무잡잡하게 생긴 여자는 이따금 해웅에게 문자를 보내 제 근황을 알리고는 했다. 사귈 마음은 없었지만, 가끔 만나 가볍게 섹스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해웅은 마지막으로 그녀가 남긴 문자를 찾아보고 답을 보냈다.

[뭐 하고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에서 띠링, 문자 착신음이 울렸다.

[호캉스 하려고 호텔 체크인 중.]

[어딘데?]

[알아서 뭐 하게? 오려고?]

[그렇게 말하니 가고 싶어지네. 나 안 보고 싶어?]

[내 문자 씹어 놓고, 어지간히 고추가 심심한가 봐?]

[심심하면 놀아 주려고?]

[질척이는 남자는 별론데.]

요것 봐라? 해웅은 잠시 고민했다. 지나치게 튕기는 걸 보니 이렇게까지 얘한테 매달려야 하나 싶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여자는 무슨. 그냥 친구들 불러서 술이나 마셔야겠다 싶어 해웅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운전석에 앉아 잠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핸드폰을 느릿하게 꺼내 확인해 보니 본가 전화번호였가 찍혀 있었다.

“엄마……?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