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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11화
2. 서울, 광화문 (10)
***
“차장님, 점심 드시러 가실래요?”
콘벤투스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이세민 차장이 해웅을 불렀다. 해웅은 ‘잠시만요’라고 짧게 답을 하고서는 자료들을 저장하고 컴퓨터 창을 닫았다. 뒤에서 윤원희 대리와 수다를 떨고 있는 이세민 차장의 옆에는 피승태 대리가 팔짱을 끼고서 한숨을 연달아 내쉬고 있었다. 해웅의 업무들이 저에게 이관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피 대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피 대리, 얼굴 펴. 그러다 주름지겠어.”
해웅이 한마디 하자, 피 대리가 고개를 퍼뜩 들더니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떨떠름한 얼굴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색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 기획1팀인데, 저가 도맡아 하던 굵직한 일들이 피 대리 어깨에 떨어지니 죽을 맛이겠지. 해웅은 가여운 눈빛으로 피 대리를 쳐다보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원흉이 저 TF 때문이다. 망할!
해웅이 자동문을 지나 승강기 앞에 서자 이세민 차장, 윤원희 대리, 피 대리가 나란히 해웅의 뒤를 병아리 삼총사처럼 줄지어 섰다.
“우리 뭐 먹을까요? 맛있는 거 먹어요. 국장님 허락도 받았으니 좋은 데 가요.”
“신난다! 이 근처에 갈 만한 좋은 데가 있나요?”
기획2팀의 이세민 차장이 윤원희 대리의 제안에 신난 듯 박수를 쳤다.
“F 센터 밑에 새로 오픈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던데 거기 갈까요?”
맛 좋은 데는 기가 막히게 잘 아는 윤원희 대리가 어디선가 또 들은 곳이 있어 가 보자고 보챘다. 해웅은 파스타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반박할 기운도 없어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윤원희 대리가 데려간 곳은 식물원 콘셉트의 카페로, 크리스털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곳곳에 설치되었고 이국적인 식물들이 테이블 근처마다 풍성하게 배치되어 열대림을 연상케 했다. 식민지 시대의 유럽 스타일이 잔존하는 동남아시아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기민하게 마케팅으로 재탄생시킨, 싱가포르식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해웅은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여기저기를 찍어 대는 윤원희 대리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런 윤원희 대리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는 이세민 차장을 보면서, 해웅은 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도 귀여운 면이 있구나 싶어 피식 웃고 말았다.
“배고픈데 우리 이제 요리 시킬까?”
해웅의 말에 윤원희 대리가 익숙하게 이것저것 메뉴판에서 인기 있는 음식들을 골라냈다. ‘이거, 이거, 이거……. 이것도 맛있어요’라고 재잘대는 윤원희 대리한테 해웅은 체념한 듯 ‘알아서 시켜 그냥’이라고 성의 없게 대꾸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윤원희 대리가 결국 올리브 홍합 찜과 네 가지 치즈가 들어간 파스타, 농어와 감자를 곁들인 해산물 스튜와, 여름 호박과 레몬 샐러드, 허브 크리스트 양고기 구이를 주문했다.
“저희, 샴페인도 시킬까요?”
“한잔씩들 할까요? 난 맥주.”
해웅이 메뉴판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다 스텔라 맥주를 가리키자 윤원희 대리의 입술이 뾰로통하니 튀어나왔다.
“에이, 차장님. 이탈리아 음식을 먹는데 맥주가 뭐예요. 와인 해요, 그냥.”
“난 와인 마시면 취해서 일 못해. 와인에 약하니깐 좀 봐줘.”
“한 잔도 못 마셔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차장님 술 센 거 다 아는데.”
답지 않게 윤원희 대리가 살살 애교로 구슬렸지만 해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와인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고 속이 메슥거리는지라, 해웅은 퇴근 시간도 아니고 점심시간에 낮술 마시고 회사에서 추하게 뻗고 싶지 않았다.
“소주, 맥주까지만 가능. 윤 대리 말대로 나란 사람 촌스럽고 고급스럽지 않잖아.”
“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다고. 한순간에 날 나쁜 여자로 만드네. 알겠어요. 어휴, 정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건 아주 타고났어.”
윤원희 대리의 기에 눌렸는지 이세민 차장과 피 대리는 ‘저희는 샴페인 마실게요’라며 그녀가 고른 주종을 따랐다. 그제야 조금 만족스러웠는지 윤원희 대리가 메뉴판을 접고서는 옆에 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콘벤투스 PT는 어땠습니까?”
피 대리의 질문에 해웅은 슬쩍 눈을 감았다 떴다.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는 오전 상황이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좋은 말을 듣지 못한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아 밥맛도 없었다. 해웅은 ‘그냥 그랬어’라고 짤막하게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피 대리를 보자니, 이놈이 무슨 죄인가 싶어 해웅은 가만히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뭐, 피 대리도 어차피 알고 있겠지만, 난 내일부터 콘벤투스가 있는 광화문으로 출근할 거야. 당분간은 내가 맡았던 생리대랑 화장품, 소주 광고는 피 대리랑 이세민 차장이 나눠서 해 줘야 할 거야.”
“네…….”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피 대리와 이세민 차장이 조용히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거기다 일을 더 얹어 주려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해웅은 팔짱을 끼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높였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예 손 놓을 생각은 없으니까. 가서도 계속 업무 팔로우 업 할 거고,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본사 출근할 겁니다. 길어 봤자 한 달 생각하고 있으니까.”
“두세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던데요. 그리고 여차하면 차장님 스웨덴 본사 가야 할 수도 있다고…….”
피 대리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누가 그래?”
해웅이 저도 모르게 날선 말투로 묻자, 피 대리의 처진 어깨가 더욱 쪼그라들었다. 눈썹은 팔자로 휘어진 채로, 부들거리며 반응하는 폼이 겁을 잔뜩 먹은 토끼 같아 보였다. 애를 너무 잡았나 싶어 목소리를 차분하게 깔며 말했다.
“쫄지 말고. 내가 김현식 국장도 아니고 왜 날 무서워해? 누가 보면 내가 피 대리 잡아먹는 줄 알겠어.”
“아, 쪼는 게 아니라요. 에효, 저도 자꾸 요샌 힘이 처져서.”
피 대리도 못 쉬고 일만 한 건 마찬가지이니, 무기력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해웅은 한숨을 내쉬며 피 대리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사내새끼가 돼 가지고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얼굴 하고 있지 마. 밥맛 없어진다.”
“아, 형.”
술 몇 번 같이 마시고 나서 해웅에게 곧잘 형이라 부르는 피 대리가 응석을 부렸다. 피 대리는 해웅이 저와 같은 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부쩍 해웅을 따르게 되었는데 일은 제법 잘하지만 업무 강도가 세면 스트레스로 예민해지곤 했다. 체격도 좋고 곰같이 생겨서는, 답지 않게 성격은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해웅은 덩치 좋은 녀석이 형, 형 거리면서 애교를 부릴 때마다 소름 돋는다고 구박했지만 피 대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헤죽헤죽 웃으며 해웅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해웅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문한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한꺼번에 먹는 걸 좋아하는 윤원희 대리가 일부러 여러 개를 동시에 세팅해 달라고 말했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끈한 홍합 찜과 여름 호박 샐러드가 세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스타가 연이어 나왔다.
“그냥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으니 걱정들 하지 말고. 일단은 밥부터 먹읍시다.”
이세민 차장이 부러 활기 있게 말을 하며 포크를 쑥 내밀어 홍합 찜을 헤쳐 댔다. 이세민 차장이 윤원희 대리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어 해웅은 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 근데 아까 그 백인 둘, 되게 잘생겼더라고요. 키도 엄청 크던데. 우리 회사 얼굴 마담이신 해웅 차장님보다도 큰 것 같던데. 그럼 대체 얼만 거야 키가?”
윤원희 대리의 말에 피 대리의 눈이 똥그래졌다. 안 그래도 곰이랑 토끼를 섞은 듯한 얼굴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동물처럼 과장되게 일그러졌다.
“해웅 형, 아니 서 차장님보다 더 크다고요? 그건 좀 징그럽지 않나. 해웅 차장님도 솔직히 좀 많이 큰데.”
“나보고 지금 징그럽단 소리야?”
“아, 사랑합니다, 형.”
피 대리가 바로 머리 위로 하트 표시를 그렸다. 해웅이 어이없다는 듯이 파스타를 돌돌 만 포크를 입에 물고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그렇게 징그럽게 크다고? 해웅이 확인을 받아 내려는 듯이 윤원희 대리를 쳐다보자, 윤원희 대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솔직히……라고 말을 흐렸다.
“솔직? 윤 대리가 안 솔직할 때도 있어? 말로 사람 죽이는 게 윤 대리 특기잖아.”
2. 서울, 광화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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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님, 점심 드시러 가실래요?”
콘벤투스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이세민 차장이 해웅을 불렀다. 해웅은 ‘잠시만요’라고 짧게 답을 하고서는 자료들을 저장하고 컴퓨터 창을 닫았다. 뒤에서 윤원희 대리와 수다를 떨고 있는 이세민 차장의 옆에는 피승태 대리가 팔짱을 끼고서 한숨을 연달아 내쉬고 있었다. 해웅의 업무들이 저에게 이관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피 대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피 대리, 얼굴 펴. 그러다 주름지겠어.”
해웅이 한마디 하자, 피 대리가 고개를 퍼뜩 들더니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떨떠름한 얼굴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색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 기획1팀인데, 저가 도맡아 하던 굵직한 일들이 피 대리 어깨에 떨어지니 죽을 맛이겠지. 해웅은 가여운 눈빛으로 피 대리를 쳐다보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원흉이 저 TF 때문이다. 망할!
해웅이 자동문을 지나 승강기 앞에 서자 이세민 차장, 윤원희 대리, 피 대리가 나란히 해웅의 뒤를 병아리 삼총사처럼 줄지어 섰다.
“우리 뭐 먹을까요? 맛있는 거 먹어요. 국장님 허락도 받았으니 좋은 데 가요.”
“신난다! 이 근처에 갈 만한 좋은 데가 있나요?”
기획2팀의 이세민 차장이 윤원희 대리의 제안에 신난 듯 박수를 쳤다.
“F 센터 밑에 새로 오픈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던데 거기 갈까요?”
맛 좋은 데는 기가 막히게 잘 아는 윤원희 대리가 어디선가 또 들은 곳이 있어 가 보자고 보챘다. 해웅은 파스타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반박할 기운도 없어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윤원희 대리가 데려간 곳은 식물원 콘셉트의 카페로, 크리스털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곳곳에 설치되었고 이국적인 식물들이 테이블 근처마다 풍성하게 배치되어 열대림을 연상케 했다. 식민지 시대의 유럽 스타일이 잔존하는 동남아시아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기민하게 마케팅으로 재탄생시킨, 싱가포르식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해웅은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여기저기를 찍어 대는 윤원희 대리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런 윤원희 대리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는 이세민 차장을 보면서, 해웅은 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도 귀여운 면이 있구나 싶어 피식 웃고 말았다.
“배고픈데 우리 이제 요리 시킬까?”
해웅의 말에 윤원희 대리가 익숙하게 이것저것 메뉴판에서 인기 있는 음식들을 골라냈다. ‘이거, 이거, 이거……. 이것도 맛있어요’라고 재잘대는 윤원희 대리한테 해웅은 체념한 듯 ‘알아서 시켜 그냥’이라고 성의 없게 대꾸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윤원희 대리가 결국 올리브 홍합 찜과 네 가지 치즈가 들어간 파스타, 농어와 감자를 곁들인 해산물 스튜와, 여름 호박과 레몬 샐러드, 허브 크리스트 양고기 구이를 주문했다.
“저희, 샴페인도 시킬까요?”
“한잔씩들 할까요? 난 맥주.”
해웅이 메뉴판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다 스텔라 맥주를 가리키자 윤원희 대리의 입술이 뾰로통하니 튀어나왔다.
“에이, 차장님. 이탈리아 음식을 먹는데 맥주가 뭐예요. 와인 해요, 그냥.”
“난 와인 마시면 취해서 일 못해. 와인에 약하니깐 좀 봐줘.”
“한 잔도 못 마셔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차장님 술 센 거 다 아는데.”
답지 않게 윤원희 대리가 살살 애교로 구슬렸지만 해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와인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고 속이 메슥거리는지라, 해웅은 퇴근 시간도 아니고 점심시간에 낮술 마시고 회사에서 추하게 뻗고 싶지 않았다.
“소주, 맥주까지만 가능. 윤 대리 말대로 나란 사람 촌스럽고 고급스럽지 않잖아.”
“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다고. 한순간에 날 나쁜 여자로 만드네. 알겠어요. 어휴, 정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건 아주 타고났어.”
윤원희 대리의 기에 눌렸는지 이세민 차장과 피 대리는 ‘저희는 샴페인 마실게요’라며 그녀가 고른 주종을 따랐다. 그제야 조금 만족스러웠는지 윤원희 대리가 메뉴판을 접고서는 옆에 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콘벤투스 PT는 어땠습니까?”
피 대리의 질문에 해웅은 슬쩍 눈을 감았다 떴다.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는 오전 상황이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좋은 말을 듣지 못한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아 밥맛도 없었다. 해웅은 ‘그냥 그랬어’라고 짤막하게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피 대리를 보자니, 이놈이 무슨 죄인가 싶어 해웅은 가만히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뭐, 피 대리도 어차피 알고 있겠지만, 난 내일부터 콘벤투스가 있는 광화문으로 출근할 거야. 당분간은 내가 맡았던 생리대랑 화장품, 소주 광고는 피 대리랑 이세민 차장이 나눠서 해 줘야 할 거야.”
“네…….”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피 대리와 이세민 차장이 조용히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거기다 일을 더 얹어 주려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해웅은 팔짱을 끼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높였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예 손 놓을 생각은 없으니까. 가서도 계속 업무 팔로우 업 할 거고,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본사 출근할 겁니다. 길어 봤자 한 달 생각하고 있으니까.”
“두세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던데요. 그리고 여차하면 차장님 스웨덴 본사 가야 할 수도 있다고…….”
피 대리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누가 그래?”
해웅이 저도 모르게 날선 말투로 묻자, 피 대리의 처진 어깨가 더욱 쪼그라들었다. 눈썹은 팔자로 휘어진 채로, 부들거리며 반응하는 폼이 겁을 잔뜩 먹은 토끼 같아 보였다. 애를 너무 잡았나 싶어 목소리를 차분하게 깔며 말했다.
“쫄지 말고. 내가 김현식 국장도 아니고 왜 날 무서워해? 누가 보면 내가 피 대리 잡아먹는 줄 알겠어.”
“아, 쪼는 게 아니라요. 에효, 저도 자꾸 요샌 힘이 처져서.”
피 대리도 못 쉬고 일만 한 건 마찬가지이니, 무기력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해웅은 한숨을 내쉬며 피 대리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사내새끼가 돼 가지고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얼굴 하고 있지 마. 밥맛 없어진다.”
“아, 형.”
술 몇 번 같이 마시고 나서 해웅에게 곧잘 형이라 부르는 피 대리가 응석을 부렸다. 피 대리는 해웅이 저와 같은 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부쩍 해웅을 따르게 되었는데 일은 제법 잘하지만 업무 강도가 세면 스트레스로 예민해지곤 했다. 체격도 좋고 곰같이 생겨서는, 답지 않게 성격은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해웅은 덩치 좋은 녀석이 형, 형 거리면서 애교를 부릴 때마다 소름 돋는다고 구박했지만 피 대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헤죽헤죽 웃으며 해웅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해웅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문한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한꺼번에 먹는 걸 좋아하는 윤원희 대리가 일부러 여러 개를 동시에 세팅해 달라고 말했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끈한 홍합 찜과 여름 호박 샐러드가 세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스타가 연이어 나왔다.
“그냥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으니 걱정들 하지 말고. 일단은 밥부터 먹읍시다.”
이세민 차장이 부러 활기 있게 말을 하며 포크를 쑥 내밀어 홍합 찜을 헤쳐 댔다. 이세민 차장이 윤원희 대리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어 해웅은 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 근데 아까 그 백인 둘, 되게 잘생겼더라고요. 키도 엄청 크던데. 우리 회사 얼굴 마담이신 해웅 차장님보다도 큰 것 같던데. 그럼 대체 얼만 거야 키가?”
윤원희 대리의 말에 피 대리의 눈이 똥그래졌다. 안 그래도 곰이랑 토끼를 섞은 듯한 얼굴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동물처럼 과장되게 일그러졌다.
“해웅 형, 아니 서 차장님보다 더 크다고요? 그건 좀 징그럽지 않나. 해웅 차장님도 솔직히 좀 많이 큰데.”
“나보고 지금 징그럽단 소리야?”
“아, 사랑합니다, 형.”
피 대리가 바로 머리 위로 하트 표시를 그렸다. 해웅이 어이없다는 듯이 파스타를 돌돌 만 포크를 입에 물고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그렇게 징그럽게 크다고? 해웅이 확인을 받아 내려는 듯이 윤원희 대리를 쳐다보자, 윤원희 대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솔직히……라고 말을 흐렸다.
“솔직? 윤 대리가 안 솔직할 때도 있어? 말로 사람 죽이는 게 윤 대리 특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