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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9화

2. 서울, 광화문 (8)





“……네?”

“솔직히 좀 신기했습니다. 본인 입으로 잘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라서요.”

남자의 빈정거림에 머쓱해졌다. 사물을 감정하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 역시 불쾌했다. 그러나 현재로썬 기분 나빠할 처지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은 저이기 때문에 해웅은 의도적으로 헤픈 웃음을 흘렸다.

“아, 네. 뉴욕에서야 명함도 못 내밀 외모지만 애교로 봐주십시오. 발표로 시선 좀 끌어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하하하.”

시제는 웃음기 없는 마른 얼굴로 해웅을 빤히 쳐다보았다. 해웅은 버석하게 건조한 입술을 다물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진열된 상품을 감정하기라도 하듯 낱낱이 해웅의 전신을 훑어보던 무례한 시선은 이내 무감하고 건조한 표정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시제 옆에 서 손목시계를 확인하던 크리스가 촉박한 시간을 확인시키려는 듯 급한 고갯짓을 했다.

“시제, 점심 약속 맞춰서 이동하려면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저희는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이만 먼저 자리를 뜨겠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죠.”

해웅이 가볍게 목 인사를 했지만 시제는 회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해웅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을 때처럼 큰 보폭으로 순식간에 회의실 출구를 빠져나갔다. 크리스가 해웅에게 눈인사를 하고 시제의 뒤를 따랐다.

회의를 마치고 어느새 황량해진 회의실 내부는 마케팅팀과 윤원희 대리만이 남아 흐트러진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해웅은 돌아서기 직전 마주쳤던 시제의 무례한 시선을 곱씹었다. 평온한 푸른색 호수 너머 엄폐한 감정이 설핏 드러났던 순간, 해웅이 포착한 것은 무관심도 무감정도 아닌, 뒤틀린 적대심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이 앞으로의 긴 여정에 부정적인 첫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을 깨닫자, 허무함과 후회가 해웅의 가슴 한구석을 휩쓸었다.



***



프로젝터와 오디오 장비를 정리하고 있는데 씩씩대며 류민주 대리가 걸어왔다. 무례하고 오만한 자세로 일관했던 시제와 임명희 팀장의 기 싸움 탓에 팀 분위기가 최악인 모양이었다. 류민주 대리에게서 돌아가는 상황을 듣자니, TF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고 임명희 팀장이 일갈한 모양이었고, TF와 관련된 의전이나 지원 업무 대부분을 류민주 대리가 도맡게 된 듯했다.

마케팅 사관학교라 불리는 ‘P&K’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임명희 팀장은 젊은 나이에 고속 승진했고 냉혹하고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았다. 콘벤투스로 이직하고 나서 임명희 팀장 아래 많은 마케팅 팀원들이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제출하고 나가 버리자, 회사에서는 신입 사원 시절부터 근속 근무한 채은지 과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1년 출산 휴가라는 파격적인 고육지책을 제시했다.

일솜씨 좋기로 유명했던 채은지 과장의 부재로 인해 많은 업무들이 류민주 대리의 손을 거쳐 해웅에게 밀려 들어왔다. 콘벤투스 본사에서 한국 지사로 요청이 들어오는 마케팅 전략 기획서부터 대부분의 보고서 작업을 해웅이 대신 떠맡게 된 셈이었다.

“어휴, 너무너무 수고하셨어요.”

“대리님, 대체 저 사람들이 뭐라고 임명희 팀장까지 쩔쩔맵니까? 본사랑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김현식 국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류민주 대리의 눈치를 살폈다. 류민주 대리는 생각하기도 싫은지 짜증 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희 회사에서도 난리도 아니에요. 별 소문이 다 돌고 있는데, 컨설팅 회사 대표가 옥센셰르나 가문의 성골이라는 소문도 있고, 성골의 아주 친한 지인이라는 말도 있어요. 어쨌든 그 컨설팅 회사에서 온 사람들은 본사 CEO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그들의 의견이 본사에서 내리는 결정에 영향이 클 거란 말이 많아요. 그리고 이게 단순히 브랜드 마케팅 전략 방향 때문에 온 게 아니란 얘기도 있고요.”

콘벤투스는 스웨덴 재벌 가문 중 하나인 옥센셰르나가가 거느리고 있는 여러 회사 중 하나인 자동차 제조 회사였다. 옥센셰르나가의 주력 회사는 방위 산업을 담당하는 텔룸노붐(Telum Novum)이고 그 외 항공 운항, 전자, 통신 장비, 핸드폰, 제약 등 첨단 전자 산업부터 실생활에 밀접한 가전제품까지 스웨덴 전 방위의 제조 산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의 재벌과 다른 점이라면 옥센셰르나가는 재단을 통해 경영권을 획득하는 구조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장 독특한 점은, 옥센셰르나가의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경영 및 경제와 관련된 트레이닝을 받고 검증된 경우에 한해 경영 후보로 선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문 경영인이 되었을 경우 월급 형태로 연봉을 받으며 기업의 배당금은 대부분 재단에 환원되어 투자 위원회에 의해 배당금은 투명하게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른 나라 재벌 이야기가 꽤 재미있을 법도 했지만, 해웅은 이미 PT에 온 기력을 소진한 상태라 류민주 대리가 전하는 말들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기계 장비와 노트북이 든 가방을 짊어지고 해웅은 류민주 대리가 건네준 커피를 한 손으로 받았다. 싱겁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면서, 제 옆에 서 있는 김현식 국장을 쳐다봤다.

“내일, 어쩌실 겁니까? 저 혼자 오면 되겠습니까?”

“일단, 미팅은 서 차장 혼자 참석하고, 점심시간에 맞춰서 내가 올게. 그치들 비위 좀 맞춰 주려면 점심은 근사한 데서 대접해야겠어.”

“뭐 그러시든가요.”

감흥 없이 대꾸하는 해웅을 바라보며 김현식 국장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이 사람이…… 이러니 일만 죽어라 하고 광을 못 팔지”

보기와 다르게 지나칠 정도로 욕심 없는 해웅의 성격이 오늘따라 영 달갑지 않은 김현식 국장이었다.

“류민주 대리님, 내일 저희랑 그 컨설팅에서 오신 분들이랑 같이 식사하시는 건 어떨까요?”

“저희야 좋죠. 국장님이 언제나 좋은 데 데려가 주셔서 고마운걸요.”

“좋은 레스토랑 예약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부탁하실 일 있으면 기탄없이 서 차장에게 연락해 주시고요. 본사에서 들리는 소식 있으면 저희에게도 바로바로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아무렴요. 국장님이랑 저희는 이제 한배를 탔는걸요.”

김현식 국장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류민주 대리를 따라나섰다. 김현식 국장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윤원희 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거운 오디오 장비를 양어깨에 짊어지었다. 해웅이 그녀의 한쪽 어깨에 들려 있던 스피커 가방을 빼앗아 대신 어깨에 걸쳤다. 윤원희 대리가 올려다보자, 해웅은 그녀의 어깨너머를 향해 장난스럽게 고갯짓을 했다.

“김 국장님은 다른 미팅 가시나 본데. 우리, 담배 하나만 피우고 갈까?”

“휴, 그러시죠.”

윤원희 대리가 양손에 무거운 장비 가방을 들고선 힘없이 대답했다.

PT가 있는 날은 언제나 그러하듯, PT 결과나 분위기가 본사로 귀가하는 팀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항상 결과가 좋은 것만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히 어깨에 주렁주렁 매달린 가방의 무게가 해웅의 기분마저 잔뜩 짓눌렀다.



소비 성향이 강하고 문화생활을 남들보다 한발 앞서 즐기는 지적 허영심이 있다면 광고업계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었다. 빠듯한 월급을 쪼개 적금과 예금, 펀드를 부으며 알뜰히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아가는 일반 직장인들과 달리, 해웅이 아는 광고업계 종사자들은 유흥과 문화생활을 즐기고 온갖 신제품과 첨단 기기들을 소비하는 데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광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소비 지향적이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한발 앞선 소비와 축적된 경험을 이용해 유려하고 탐미적인 방식으로 매혹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소비에 탐닉하는 트렌드 포식자들 외에 또 다른 부류들로는 경영 수업을 받기 위해 낙하산으로 들어온 기업의 자제들이나 회계가 싫어 마케팅으로 뛰어든 경영학 출신들이 있었다. 또 다른 부류는 한때 영화학도였거나, 영화 연출이나 제작에 종사하다 상업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광고업으로 전향한 경우인데 해웅은 이 세 번째 부류에 속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같이 어울려 다녔던 홍창화 감독 덕분에 해웅은 영화라는 장르에 매료되었다. 치기 어린 20대 시절, 영화업계에 운명처럼 끌려 들어갔다. 그러나 악마적인 재능을 가진 수많은 영화업계 종사자들과 비교하면 햇병아리에 불과했던 해웅은 연출가로서의 재능도, 제작자로서 사업 수완도 부족했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해웅이 치른 대가는 인생의 수업료라 미화하기에는 꽤나 뼈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