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외인도시 8화

2. 서울, 광화문 (7)





임명희 팀장은 깍지 낀 손을 유리 테이블에 얹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콘벤투스 마케팅팀을 진두지휘하는 팀장답게 관록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회의실에 앉아 있는 영업팀과 상품기획팀을 둘러보며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마케팅팀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인지도와 선호도를 더욱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당분간 더욱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시장은 아시아에서도 꽤나 까다로운 시장입니다. 단순히 실용성을 목적으로만 차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가치지향적 소비를 하는 만큼 브랜드의 고급화 전략이 더욱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유럽 브랜드는 명품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입니다. 콘벤투스 자체 브랜드 고유의 프리미엄 이미지 구축이 절실히 필요한 만큼 올해는 ATL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되 디지털 마케팅까지 확대해서, 특히 바이럴 부문에 더욱 주력할 생각입니다.”

“리오(REEOT)의 시제 에크만이라고 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갈색머리 백인이 나른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해웅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백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분명히 한국어였다.

시제라고 자신을 소개한 백인 남자의 한국어가 인상적이었는지 회의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일제히 그에게 주목했다. 시제는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서는 뉴욕식 영어로 빠르게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최근 한국 소비자들의 수입차에 대한 시선이 관대해지고 젊은 연령층에서도 합리적인 가격대의 소형 수입차들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들었습니다. 굳이 광고 예산을 태우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인지도 및 매출 상승은 견인되었으리라 생각되는데요.”

갈색머리 백인은 고개를 들어 해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비웃음이 입가에 얼핏 스쳤다.

“아시아 캠페인 중에서 성과가 제일 좋다는 평을 들어서 굉장히 기대하고 들었는데…….”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는 남자의 평에 모두가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턱을 괸 손을 거두고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의 앞에 놓인 양가죽으로 덮인 수첩을 넘기며 발표동안 기재했던 내용들을 훑었다.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이었지만 솔직히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남자는 해웅의 얼굴을 무감하게 훑더니 대꾸하기도 전에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금발머리의 남자가 그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말하자, 무슨 고민이라도 하는지 갈색머리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듯 긴 생각에 잠긴 남자의 느긋한 태도가 회의실 공기를 무겁게 압박했다.

“임명희 팀장님. 발표는 잘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저희가 이미 메일로 그간 받았던 내용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굳이 미팅을 소집해서 들을 정도의 내용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임명희 팀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영업팀과 상품기획팀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깐깐하고 괴팍한 성격에 꽤나 자존심 상했을 것이다. 해웅은 앞으로 수습해야 할 상황들이 그려지자 이마가 지끈거렸다. 김현식 국장을 쳐다보자, 그 역시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임명희 팀장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추가적으로 필요한 자료는 저희들이 리스트업 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평소 까칠하기로 유명한 임명희 팀장마저 갈색머리 남자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얼에 빠진 듯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회의실 분위기가 술렁거리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임명희 팀장이 입술을 깨물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와 임명희 팀장의 팽팽한 기 싸움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양쪽 눈치를 살폈다.

“커피가 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해요!”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쾌활한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갈랐다. 류민주 대리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케이터링을 들고 회의실 안에 들어서자 단숨에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남자와 임명희 팀장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영업부와 마케팅 사람들이 서둘러 일어나 회의실 뒤편에 마련된 케이터링을 향해 재빠르게 흩어졌다.

남자는 회의실 뒤편으로 몰린 사람들을 흘낏 쳐다보더니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오늘 미팅은 이만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 TF팀으로 정식 출근해 업무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임명희 팀장이 굳은 말투로 대답하며 김현식 국장을 쳐다보았다. 김현식 국장이 광고주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해웅은 한숨을 쉬었다. 회사에 들어가면 김현식 국장이 한 소리 하겠군. 잔뜩 힘을 주어 고장 나기 직전인 빌어먹을 포인터를 더욱 꾹 누르며 해웅은 발표 자료를 닫고 자리를 정리했다.

남자가 금발머리 백인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체구의 백인 두 명이 자리에 일어서자 케이터링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향했다. 마케팅팀 여자 사원들 입에서 탄성에 가까운 신음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북구 신화에 나올 법한 바이킹 후손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기라도 했는지 둘의 신장은 190센티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해웅의 정면에 바로 서자, 그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조각으로 해체되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자신의 존재감을 까칠한 방식으로 증명하지 않았더라면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첫인상은 좀 더 온화하고 부드러웠을 것이다. 눈앞에 선 남자가 풍기는 거친 야성성은 큰 키와 체격에서 비롯되었다. 육중함을 띤 직각을 이루는 어깨는 웬만한 성인 남자도 부딪히면 나가떨어질 만큼 단단해 보였고 턱은 강한 직선을 과시했다. 반면 이질적으로 푸른 홍채는 해웅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옅고 심한 한 호수처럼 창백했으며, 도톰하고 큰 입술은 아주 옅은 산호색을 띠었다. 야성성을 드러내는 체격과 달리 채도가 낮은 섬세한 이목구비는 황량한 순수성을 떠올리게 했다.

남자가 고개를 앞으로 숙이는 바람에 해웅과 그 사이의 공기가 더욱 조밀해졌다. 파충류같이 서늘한 홍채가 물살에 의해 깎인 비색빛 조약돌처럼 반질거렸다. 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드러난 팔은 구운 아몬드 빛을 띠었다. 태닝으로 바싹 태운 피부색 탓인지, 아니면 운동으로 부푼 가슴과 어깨 탓인지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그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해웅의 눈에는 생소함 그 자체였다.

남자가 천천히 팔을 움직여 주머니에 꽂은 명함을 건넸다. 희고 깨끗한 명함에는 양각으로 ‘Executive director, 시제 에크만’이 새겨져 있었다. 즉 이 남자는 리오(REEOT) 컨설팅의 임원급 간부인 셈이었다.

“뉴욕 컨설팅 리오의 시제 에크만이라고 합니다.”

나른하지만 명료한 어조로 갈색머리 백인이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플래티넘 블론드에 가까운 옅은 황금빛 머리색의 백인이 차분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리오의 크리스 마운트밴튼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라 자신을 소개한 자는 시제와 정반대 타입이었다. 옅게 태닝 한 피부와 햇빛에 담금질한 듯 찬연하고 선명한 밀밭 색 머리의 남자는 시티 오브 런던 금융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전형적인 백인 상류층 남성이었다. 남자의 입가에 걸린 온화한 미소와 달리 눈빛은 건조했다. 해웅에게 가볍게 악수를 청하는 남자는 만면에 예의 바른 미소를 갖추고 있었지만,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는 섬뜩하게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그것은 해웅에게 정체 모를 묘한 기시감을 일으켰다. 해웅은 그가 예의 바른 태도 이면에 감렬한 성질을 감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편하게 크리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크리스가 다시 예의를 한껏 차리며 크림처럼 부드럽고 물기를 머금은 미소를 지었다. 영국식 억양에서 포쉬 악센트가 강하게 느껴졌다.

“서해웅입니다. 필요하신 부분은 언제든 협조하겠습니다.”

해웅이 건넨 명함을 건성으로 받아 주머니 안에 꽂으며, 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한국말을 해야 하는데 아직 많이 못 배웠습니다. 앞으로 업무하는 동안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대화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행이군요.”

해웅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품평하던 시선이 아래로 이동해 어깨가 남는 블랙 재킷과 품이 크고 구겨진 면바지를 차근히 훑어 내려갔다.

“꽤, 인상적인 도입부더군요.”

“감사합니다.”

“외모에 꽤나 자신감이 있으시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