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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7화

2. 서울, 광화문 (6)





뒤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일이었다. 사력을 다해 비상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해웅은 피로로 건조해진 눈동자에 바짝 힘을 주었다. 가뜩이나 땀에 젖은 와이셔츠가 펄펄 끓는 아스팔트에 녹아내린 젤리처럼 등에 철썩 들러붙어 숨을 옥죄였다. 10층 비상구 문을 열고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엘리베이터 문만 하염없이 쳐다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류민주 대리의 작은 등이 시선에 들어왔다.

“차장님!”

비상구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에 류민주 대리가 뒤를 돌아보고서는 어지간히 애가 탔는지 종잡을 수 없는 손짓을 하며 괴성을 질렀다. 해웅이 가쁜 숨을 정리하느라 벽을 짚고 기대어 서 있는 곳까지 류민주 대리가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헉, 헉. 제가 좀 늦었죠. 대리님.”

“차장님! 저 말려죽이시려고 이러는 거죠? 아이고야. 내가 못살아!”

앓는 소리를 내며 류민주 대리가 해웅의 등을 철퍼덕 손으로 치고는 이내 놀랐다. 손바닥에 묻어나는 축축하고 더운 물기의 정체를 확인하고서는 혀를 찼다.

“기왕 늦은 거 그냥 엘리베이터 타고 오시지. 완전히 땀으로 샤워하셨네.”

“하하하, 그럴 수야 없죠. 그나저나 민주 대리님, 블랙 원피스 참 잘 어울리세요.”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요? 아니, 근데 이 더위에 검은 재킷은 웬일로 입으셨대요. 얼굴 믿고 또 아무렇게나 입고 오셨네, 정말.”

류민주 대리의 못마땅한 시선이 와이셔츠 깃과 어깨에 고정되어 있더니, 해웅의 목덜미로 팔을 뻗었다. 해웅이 가쁜 숨을 가다듬는 사이 류민주 대리가 거들어 주듯 구겨진 재킷을 손으로 죽죽 잡아 폈다. 목덜미에 접힌 깃을 펴 주는 류민주 대리에게 해웅은 슬쩍 감사 윙크를 했다.

“고마워요.”

“미남계 써 봤자 소용없어요. 저한텐 안 통하니까, 이따 끝나고 봐요.”

“같이 들어가면 되나요, 대리님?”

“전 스타벅스에서 케이터링 받아서 들어가야 해요. 먼저 들어가서 PT 진행하세요.”

‘왼쪽으로 돌아서 두 번째 회의실이에요’라고 외치는 류민주 대리를 뒤로하고 해웅은 빠른 보폭으로 복도를 돌았다. 두 번째 회의실은 콘벤투스의 대회의실로 중요한 미팅이나 외부 에이전시들을 불러들여 연간 비딩 시 주로 이용하는 널찍한 공간이었다. 아마도 마케팅, 영업팀의 대부분 인원들이 대거 참석했을 것이다. 해웅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차가움이 감도는 회색빛 문을 열었다.

회의실에서는 윤원희 대리가 프레젠테이션 발표 자료를 띄어 놓고 스크린을 조정 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해웅을 보자마자 김현식 국장의 굳은 얼굴이 확 펴졌다. 본능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더니, 김현식 국장의 이마에 이내 다시 가로 주름이 잔뜩 접혔다. 해웅의 핸드폰에는 확인하지 않은 국장의 문자가 열댓 통 들어와 있었다. 재빠르게 회의실을 둘러보자 긴 테이블 양쪽에 마케팅팀과 영업팀, 그리고 상품기획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간혹 눈에 띄는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김현식 국장이 테이블 앞에 앉아 해웅과 국장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서 차장이 어제 새벽까지 자료 준비하고 밤을 새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가운데 앉아 있던 코랄 색 투피스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콘벤투스의 임명희 팀장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저희가 어제 갑작스레 요청해서 자료 급하게 만드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급하게 저희가 요청했음에도 대응해 주신 라이너스&매덥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희 쪽에서는 영업팀, 상품기획팀, 그리고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리오 컨설팅에서 두 분이 참석했습니다. 그럼 이제 간단히 소개하고 발표 시작할까요?”

평소 꼬장꼬장하고 평정을 잃지 않는 임명희 팀장조차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본사에서 감사하기 위해 보낸 사람들도 참석하였으니 한국 지사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해웅은 가쁘게 내뱉는 숨을 눌러 삼키며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을 연신 훔쳤다.

“물론입니다. 저랑 윤원희 대리는 아까 소개해서 다들 아실 테고, 여기 콘벤투스 전략 기획 담당인 우리 회사 에이스 서해웅 차장입니다.”

김현식 국장이 서해웅을 재촉하듯 다급하게 손짓했다. 황송한 표정으로 굽실거리는 김현식 국장을 멍하니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피식 새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김현식 국장이 잔뜩 눈매를 접어 째려보았다. 해웅은 웃음을 참고서는 회의실 앞쪽으로 걸어갔다.

발표 석상에 서자 회의실 안을 채운 인원들이 시야 가득히 펼쳐졌다.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자 건너편에 앉아 있는, 못 보던 외국인 두 명이 눈에 밟혔다. 금발과 갈색 머리 백인 두 명. 저 둘이 뉴욕 컨설팅 회사에서 온 자식들인가 보군. 해웅은 평소와 다르게 한층 무거운 회의실 분위기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라이너스&매덥스의 에이스이자 회사의 얼굴을 담당하고 있는 서해웅 차장이라고 합니다.”

긴장을 풀기 위해 해웅이 너스레를 떨자 딱딱하게 앉아 있던 콘벤투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콘벤투스 브랜드 기획을 맡고 한국 지사를 출입하면서부터 여사원 사이에서 이미 해웅은 유명 인사였던지라, 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여사원들은 그의 움직임을 빈틈없이 눈여겨보고 있었다.

“제 지각으로 발표가 지연된 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윤원희 대리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띄우는 동안 가볍게 웃으시라고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풀어 보겠습니다. 제게는 여든이 넘으신 외할머니가 계십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외할아버지가 경성 제일가는 미남이었는데 연애 시절에 헤어질 뻔한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게 집중된 시선을 돌아보며 해웅은 애를 태우듯 느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안 헤어졌냐고 여쭈었더니, 기다리는 동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당장 헤어져야겠다!’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저만치서 걸어오는 모습이 어찌나 위풍당당하고 또 얼굴은 어찌나 조각처럼 잘생겼는지, 명동 거리의 멋쟁이 여성들이 죄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더랍니다. 잘생긴 얼굴만 봐도 화가 절로 풀리고 웃음이 났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미남이 아니셨다면 저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뻔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제 얼굴 보시고 부디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회의실에서 여기저기서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터지면서 한결 경직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그 정도로 미남인지는 모르겠는데?”

영업팀 팀장이 한마디 보태자 웃음을 참고 있던 사람들도 손뼉을 치며 웃어 댔다.

“네네~ 남자 의견은 받지 않겠습니다. 여성분들은 제 얼굴 보고 화도 푸시고, 좋은 시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정 안 풀리시면 개인적으로 연락 주시면, 제가 힘닿는 데까지 풀어 드리겠습니다.”

손을 번쩍 들고 금발의 한 외국인 마케터가 ‘번호 주세요’라고 영어로 외치자 회의실 내부는 박장대소가 터졌다. 다행히 이 정도면 잘 무마했겠다 싶어 해웅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포인터를 지그시 눌렀다.

“그럼, 시간도 늦고 했으니 바로 라이너스&매덥스에서 준비한 지난해 및 올 상반기 소비자 조사 결과를 공유해 드리고 광고 캠페인 내용 및 성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해웅은 회의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지각한 만큼 주어진 발표 시간은 더욱 단축해야 할 것이다. 20분 안에 발표를 끝내기 위해 꼭 짚어야 할 내용들과 건너뛸 부분을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솎아 내며 발표를 시작했다.



***



라이너스&매덥스에서 준비한 발표 내용들은 주로 3년간 광고 캠페인을 진행한 가시적인 성과들이었다. 인지도가 2% 남짓했으나 15%로 상승했고 시장 점유율도 6위권 안으로 진입했다. 인상적인 성과이긴 하나 본사 입장에서는 앞으로 계속 마케팅 예산을 태울지 고민할 것이다. 그에 대한 설득 논리를 만들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해웅이 어제 밤새 만든 자료들은 겨우 그간 캠페인 성과에 대한 요약에 불과했지만 전날 오후에서야 저들이 했어야 할 과제를 떠맡긴 만큼 콘벤투스 마케팅팀은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서해웅 차장님이 발표하신 대로 독일 차를 제외하고서는 한국 시장에서 유럽 차는 성공하기 힘든데 그래도 콘벤투스는 꽤나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