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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6화

2. 서울, 광화문 (5)





알프레드 뮈세의 동명의 시를 모티브로 그려진 이 그림은 부도덕을 근거로 1987년 파리 살롱 전에서 출품을 거절당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앙리 게르벡스의 이름을 유럽 미술사 한 페이지에 장식해 준 대표작이 되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영어 가이드가 <롤라>의 미술사적 가치를 설명해 주었다. 대중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앙리 게르벡스는 <롤라> 이외에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의 대표작이 되어 버 린 <롤라>는 그 시대에는 지나친 선정성으로 주목받았고 현대에 와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업가의 비참한 결말을 통해 자본주의에 의해 몰락한 개인의 비극을 시사했다.

해웅은 <롤라>앞에서 벼랑 끝에 몰린 자신의 삶을 반추했다. 20대에 영화 제작사 대표가 되고, 연예인이라도 된 것처럼 들떠서 화려하고 방탕한 삶을 보냈던 해웅의 두 손에 남은 건 20여억의 빚이었다. 그림 속 롤라의 비참한 종말이 경종을 울렸다. 해웅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한참을 그림 앞에 서 있었다.

미술관을 나서는 발길이 물에 흠뻑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날 시떼섬의 노트르담 성당까지 한참을 걸어갔던 것 같다. 고색창연한 종탑에서 울려 퍼지는 맑은 종소리에 이끌려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거대한 장미창이 어둠 속에서 위용을 드러냈고,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 천주교인과 관람객 인파에 뒤섞여 휩쓸리듯 제단 앞으로 걸어 나가며 해웅은 처절한 고독함을 느꼈다. 종교를 믿지 않건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종교적 건축물은 웅장함으로 인간을 압도함으로서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러나 막상 해웅을 압도한 감각은 숭고함이었다. 미의 궁극적 경지가 숭고함이라고 주장하던 에드먼드 버크를 얼마나 비웃었던가. 그에게 아름다움은 직관적인 물성에 가까웠었다. 관능적이고 시각적이며, 감각적으로 그를 고양시키는 것에 국한했던 미의 감상이 처음으로 정신적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숭고함이 이런 것인가. 인간의 인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숭고한 아름다움에 비해 야욕이라는 테두리에서 갇힌 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보잘것없는가. 성스럽게 울려 퍼지는 고아한 찬송가는 해웅이 앞으로 겪을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따스하게 위로했다. 해웅은 시떼섬을 빠져나오며 귀국을 결심했다.



유난히 더웠던 파리의 여름이 생각나는, 긴 꿈을 꿨던 것 같다. 땀에 흠뻑 젖어 일어났을 때, 벽에 붙은 싱글 침대 위 조그만 창으로 더운 햇살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와 이불 위로 드러난 해웅의 얼굴과 사지를 뜨겁게 달궜다. 땀이 흐르는 팔을 책상 위로 뻗어 스탠드 형 선풍기를 켜고 다시 피곤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베개 깊숙이 파묻었다. 슬쩍 쳐다본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광화문에 위치한 콘벤투스까지 가려면 지금 일어나 샤워해야 한다. 해웅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방 한쪽 구석에 위치한 투명한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남짓 잤을 뿐인데 그사이에 이상한 꿈을 꾸고 말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꿈속 풍경은 희미하게 휘발되었으나 남은 감각들은 쓰고 고통스러웠다. 해웅은 얼마 남지 않은 샴푸 용기를 마지막까지 쥐어짜며 지긋지긋했던 파리의 잔상이 완전히 휘발되기를 바랐다.

좁은 고시원 방에 걸려 있는 옷들을 몇 벌 없었다. 대부분은 본가에 두고 나온 상태라 유행이 지나고 품이 큰, 멋없는 여름용 검은 정장 한 벌 외에 선택권은 없었다. 광고업계 특성상 캐주얼한 청바지 차림도 출근용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고 광고주 미팅을 갈 때에도 블랙 재킷만 걸치면 별 상관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류민주 대리가 격식을 차리고 오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옷에 관심이 없는 해웅조차 잠시 거울에서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 눈에도 영 별론데. 평소 옷 한 벌 좀 사 둘걸 그랬나.

천만 원을 호가하는 이탈리아 명품 정장도 고민 없이 턱턱 구입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빚을 떠안게 된 이후로 해웅은 꾸미기 위해 무언가를 사는 일을 포기했다. 본가에 더 이상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 모든 소비를 최소화했고 고시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나서는 검소한 삶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해웅의 차림새는 유행이 지나고 촌스러워졌다. 그나마 신장이 크고 훤칠한 용모 덕분에 낡고 오래된 옷들이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잘 차려입어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참석할 때는, 평소 패션에 전혀 신경 쓰지 않던 해웅조차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더위에 꼭 정장을 차려입어야 하나, 한참을 거울 앞을 서성이며 고민하다, 결국은 블랙 재킷만 걸치고 하의는 면바지를 착용했다.

경쟁 PT도 아닌데 꼭 정장을 입을 필요는 없겠지.

고민 끝에 그는 익숙하고 편안한 차림을 선택했다. 손목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확인하고 해웅은 서둘러 움직였다.



광화문 사거리에 위치한 스웨덴 자동차 브랜드 콘벤투스는 최근 3년간 아시아 시장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도했다. 그간 아시아 시장에서 침체 양상이었던 스웨덴 자동차 브랜드의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홍콩에 거점을 둔 아시아 지사에서 글로벌 마케팅 전략 및 커뮤니케이션 실행 매뉴얼을 각 아시아 국가 지사에 배포했다. 더불어 3년 동안 콘벤투스의 한국 캠페인은 서해웅이 속한 외국계 광고 회사 라이너스&매덥스가 대행했다. 상류층을 겨냥한 패션 잡지와 신문 지면 광고 위주로 진행했던 그간 자동차 브랜드 마케팅 관성을 깨고 콘벤투스는 바이럴 영상과 TV 광고 캠페인을 선보였다. 이로 인해 3년간 콘벤투스 한국 지사에서 연간 50억에 달하는 광고 예산을 집행했다.

그동안의 광고 캠페인 효율성을 검토하고 브랜드의 중장기적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스웨덴 본사에서 뉴욕에 본사를 둔 컨설팅 회사에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담당 임원과 브랜드 컨설턴트가 직접 한국 회사의 미팅에 참석할 뿐 아니라 장기간 체류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TF가 구성된 것이다. 전에 없는 파격적인 통보였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본사의 내부 감사 일정에 한국 지사에서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TF의 기간, 범위, 목적 등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뉴욕에서 파견 예정인 컨설팅팀이 도착해 직접 듣기 전까지는 콘벤투스 마케팅 팀장조차 본 TF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다.

결국 본사에서 의뢰한 TF의 숨은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라이너스&매덥스에서도 내부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라이너스&매덥스 대표 이사가 직접 지시하고 경영 위선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사안이다 보니 실무를 담당하는 김현식 국장도 자리 보존을 위해 불안할 만한 일이었다.



단순하면서도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금빛의 W타워는 몇 년 전 새로 건축되자마자 단숨에 광화문 일대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급부상했다. 강남에 한국 지사를 두고 있던 콘벤투스는 지난해 이 건물의 10층과 11층으로 이전했다. 을지로에 위치한 라이너스&매덥스와는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밤새 장표를 만들고 고시원에 잠깐 들러 눈을 붙이고 오는 바람에 해웅은 지각을 하고 말았다.

9시 10분. 해웅은 굳은 얼굴로 시간을 확인하고 보폭을 넓혔다. 데스크의 안내 직원을 지나 막 닫히려고 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급하게 눌렀다. 발을 내딛는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해웅을 쳐다보았다. 가뜩이나 지각해서 마음 급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이 스쳐 지나갔다. 손목시계는 이미 9시 10분을 넘어 15분을 지나고 있었다. 해웅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돌려 층별 버튼에 빼곡히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차장님. 어디세요? 다들 이미 와 있어요. 빨리 오세요. T.T]

핸드폰 화면에 뜬 같은 팀 윤원희 대리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두 계단씩 뛰어 올라갔다. 평소 웬만해서는 여유를 잃지 않는 해웅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제길. 어제 새벽까지 발표 자료를 세팅하느라 새벽 5시에야 퇴근했는데 그냥 밤을 새울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