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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5화

2. 서울, 광화문 (4)





“서 차장이야 우리 회사 에이스고, 굵직한 브랜드들 다 성공적으로 비딩에서 따온 거 윗선에서 다 인정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이번 일, 사장님이 직접 챙기는 거 보면 얼마나 중대한 사항인지 알지 않나. 일만 잘 풀리면 서 차장 양어깨에 날개 다는 거야.”

가만히 김현식 국장의 말을 듣고 있던 해웅이 담뱃재를 털며 코웃음을 날렸다. 삐뚜름하게 서 있던 해웅이 곧게 등을 펴자 안 그래도 짧고 퉁퉁한 김현식 국장의 신장과 대비되어 더욱 거대해 보였다.

“국장님. 제가 언제 그런 쪽에 욕심 가지고 일했습니까?”

해웅이 따지듯이 반문하자, 김현식 국장이 담배를 들고 있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멋쩍게 이마를 긁적였다. 해웅이 야심을 가지고 조직에 헌신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가 광고업에서 버티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놈의 입버릇처럼 떠들어 대는 돈 때문일 것이다. 젊은 나이에 영광의 상처처럼 짊어진 빚만 아니었더라면, 조금만 기분 거슬린다 싶으면 진작 박차고도 나갔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에게 모질게 굴지 못하는 성정상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은 떠맡으리란 것도, 수년간 함께 지내면서 잘 파악하고 있었다.

광고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말도 안 되는 마감 일정과 별의별 업무 요청이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김현식 국장이 아는 한, 해웅은 그것들을 대충대충 넘기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조직을 언제든 떠날 것처럼 굴면서도 일단 제 손에 떨어지는 일들은 깔끔하게 매듭지을 줄 알았다. 해웅은 김현식 국장이 신뢰할 수 있는 라이너스&매덥스의 몇 안 되는 에이스였다.

해웅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이 회사에 막 입사했을 당시 모습이 떠올랐다. 젊고 시건방진 자세로 면접에 임했던 해웅은 눈길을 끄는 외모 덕에 입사하자마자 단번에 전 사원의 이목을 끌었다. 영화판에서 일하다 이직한 그의 경력은 과장되게 부풀어져, 영화배우 출신이 특채로 입사했다는 유언비어까지 돌았다. 어느덧 수년이 지나 김현식 국장 앞에서 불량하게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남자는 전보다 생기를 잃은 듯 피로한 얼굴이면서도 여전히 그놈의 성질머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김현식 국장은 해웅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나오기를 목 빼고 기다렸다.

‘누가 이기나 어디 두고 보자고. 서 차장.’

넉살 좋은 표정 뒤로 의뭉스러운 고집을 감추고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결국 해웅이 한숨을 쉬며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국장님…….”

“어, 그래, 그래. 서 차장!”

김현식 국장이 참다못해 조급함을 드러냈다. 해웅은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둔 빈 담뱃갑을 털털 털어 보더니, 국장을 향해 담배를 내놓으라고 손짓을 했다. 김현식 국장의 안주머니에서 약탈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서는 해웅이 가늘게 눈을 치켜떴다.

“콘벤투스 광고주 TF팀으로 차출되면 적게는 두 달, 많게는 6개월을 비딩이고 브랜딩이고 기획 업무는 손 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암. TF에 집중해야지.”

“회사도 손해지만 저 역시 타격이 큰 건 어쩌실 겁니까?”

해웅의 정곡에 김현식 국장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해웅은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뱉고는, 자신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는 김현식 국장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지금 맡고 있는 다른 브랜드 일들, 제 관할에서 벗어나게 되면 제 올해 영업 매출은 회사에서 보상해 주는 겁니까? 매해 영업 인센티브, 제가 제일 많이 받아 간 건 김 국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올해는 다른 AE들이 타 가는 모습을 손가락 빨면서 구경이나 하면 되는 겁니까?”

해웅이 제 속내를 쏟아 내고는 한숨을 내쉬며 담뱃재를 털어 냈다. 공허함을 띤 시선이 중정을 가로지르며 인사를 하는 한 무더기의 다른 팀 사람들에게 꽂혔다. 결심이 선 듯 해웅이 단단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뭐, 좋습니다. 제가 안 한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힘 빼지 않을게요. 반항해 봤자, 국장님 손바닥 위에서 허공에 주먹질하는 수준이니. 월급쟁이는 입 닫고 하라는 대로 충성해야죠.”

끝이 바짝 타들어 간 꽁초가 체념 섞인 한숨과 함께 휴지통 속으로 사라졌다. 김현식 국장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해웅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고, 걱정 말게! 위에서 엄연히 감안하지 않겠나. 자네가 맡은 브랜드들은 일단 피 대리랑 기획2팀 이 차장에게 맡겨서 서 차장 복귀할 때까지 문제없이 돌아가게 할 테니 걱정을 말아. 아이고, 우리 예쁜 서 차장!”

김현식 국장이 까치발을 하고서는 두꺼비 같은 손으로 해웅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쪽쪽 소리를 냈다. 제가 먼저 지고 들어오기를 기다린 김 국장이 얄미워, 해웅은 있는 힘껏 상사의 얼굴을 밀쳐 냈다.

“대낮부터 술 취했습니까? 순대 같은 입술 치우세요, 거, 좀!”

“앙탈은. 하하하. 내 맛있는 거 사 줄게. 오늘 뭐 먹을까?”

“장난하십니까? 내일 회의실 들어가서 PT하라면서요. 지금 올라가자마자 밤새 자료 만들어도 부족한 시간인데 저녁은 무슨 저녁입니까. 자료 만들기도 벅차 죽겠는 상황에.”

“야근하려면 저녁 먹어야지. 내 맛있는 거 사 준다니까. 서 차장 좋아하는 비싼 것 먹고 힘내서 하자고. 회? 한우?”

“됐다니깐요, 거참! 병 주고 약 주고 누굴 바보로 아시는 건지…….”

지랄 맞게 굴어도 좋다고 히죽히죽 웃는 김현식 국장의 얼굴을 보자니 해웅은 기껏 까칠하게 굴어 놓고서는 입 안에 씁쓸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직속 상사란 사람이 윗선과 아랫사람들에게 치이는 상황인 게 중간 실무자인 해웅의 입장에서는 달갑지만은 않았다. 윗선들 정치질에 힘없이 휘둘리는 김현식 국장이나 저나 어차피 결국은 실무 최전선에서 총알받이 신세인데 그에게 성낸다고 바뀌는 점은 없을 것이다. 월급쟁이가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이 회사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5년 차가 되었다. 정신없이 일만 하며 달려오다 보니 지나간 세월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싶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오후를 지난 태양의 불그스름한 시선이 드리워진 잿빛 사옥을 올려다보며 해웅은 목젖 위로 올라오는 쓴 감정을 애써 삼켰다.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폐부 깊숙이 흡입하고 구둣발로 꽁초 끝에 아슬아슬하게 달린 불씨를 잠재웠다. 김현식 국장의 바위같이 단단하고 뭉툭한 어깨에 제 손을 얹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마냥 웃는 국장의 얼굴 위로 어째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졌다. 같은 월급쟁이 처지라 그런가. 저나 김 국장이나, 돈 때문에 위아래로 치이는 인생이 오늘따라 서글프게 느껴졌다.



***



칸에 갔다가 파리에 들렀을 때였다. 영화 흥행은 저조했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지만 해웅은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았다. 파리 유학 중인 지인의 집에서 칩거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해웅과 막역한 사이였던 영화배우 차희준이 해웅을 위로할 겸 파리에 들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흥청망청 돈을 써 댔다. 잔고가 바닥날 때 즘에서야 해웅은 죽마고우인 홍창화 감독이 그토록 떠들어 댔던 파리에서의 삶이 지긋지긋해졌다.

지치고 무료한 어느 날, 키쉬 하나로 끼니를 때우고 무기력하게 파리 시내를 정처 없이 걷다가 튈트리 정원을 지나 오르세 미술관에 도달했다. 무더운 뙤약볕을 피하기 위해 입장한 미술관에서 해웅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림은 앙르 게르벡스의 <롤라(Rolla)>였다.

그림 속 젊은 남자는 난간을 붙잡고 넌더리가 나는 얼굴로 침실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침대에는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하얀 나신을 드러낸 매춘부가 잠들어 있었다.

롤라는 경제적 파산에 이른 사업가로 전 재산을 들고 마리온이라는 매춘부를 찾아갔다. 마리온은 한때 귀족이었으나 궁핍한 삶에 못 이겨 매춘을 하게 된 비운의 여성이었다. 남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 그녀와 관능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잠든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롤라는 잔인한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