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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4화
2. 서울, 광화문 (3)
“이대로 퇴근하시겠네요?”
“뭐, 사진 촬영하는 것 좀 보고, 그대로 퇴근하는 게 낫겠다 싶으면요. 그러면 우리 오늘은 따로 회의할 일은 없는 거죠?”
“네, 당분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나중에 업데이트해 줘요. 슬슬 우리도 하반기 크리 캠페인 구상도 해야 하니깐. 이렇게 여유로울 때 조금씩 아이디어 짜 놓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네, 알겠습니다.”
해웅은 먼저 일어나 자리를 뜨는 현백창 CD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우리 나중에 술 한잔해요”
“알겠습니다.”
술자리를 잡자고 먼저 제안하는 현백창 CD에게 해웅이 웃으며 싹싹하게 바로 대꾸했다. 다른 기획팀원들과 달리 해웅은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아, 정말 마시자니깐. 내가 매번 먼저 마시자고 하네”
해웅의 형식적인 대답에 현백창 CD는 서운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해웅은 살갑게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며 ‘에이, 물론이죠’라고 에두르곤 날짜를 잡는 시늉을 했다.
“저희 팀에서 맛있는 거 살게요.”
윤원희 대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현백창 CD가 ‘그래요’라고 끄덕이고서는 먼저 플레이 룸을 빠져나갔다.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뜨린 잡지들을 정리해 책꽂이에 다시 배치하면서 해웅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요새 한숨 많이 느신 거 알아요?”
“그런가. 좀 피곤해서.”
“피곤하실 만도 하죠. 요새 차장님 경쟁 비딩 몇 개를 하신 건지 원. 솔직히 이 정도로 일했으면 차장님 그냥 모른 체하고 얼른 휴가 가셔도 김현식 국장님도 할 말 없을걸요.”
그래도 프로젝트 몇 개를 같이해서 동지애라도 생긴 건지 윤원희 대리가 해웅의 편을 들어 주었다. 고집이 세고 워낙 본인만의 철학이 강해서 같이 일하면 곤란할 때가 있었지만 윤원희 대리는 같은 팀 동료로서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적어도 주변 눈치를 봐 가며 사람을 배려하는 구석이 있었다.
“농담 아니라, 정말 휴가 가세요. 지금 아니면 이제 또 8월부터 본격적으로 비딩 몰려드는데 차장님 이러다가 쓰러지신다니까.”
“휴가 가는 것도 다 돈 드는 일인데, 뭐.”
“돈 벌어서 뭐 해요. 이럴 때 쓰는 거지.”
“돈 벌어서 빚 갚아야지. 알잖아.”
윤원희 대리는 버릇처럼 빚 갚아야 한다고 말하는 해웅의 말에 질린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입사하고 내내 저 빚 타령을 들었다.
싱글이 빚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집을 사느라 대출을 받은 것도 아닌데. 해웅은 연봉 협상도 잘해서 입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업무 능력도 좋아 꼬박꼬박 인센티브도 받아 가는 마당에 자꾸 앓는 소리를 해 댔다. 그래도 사람들이랑 술 마시거나 밥 사는 일에는 통 크게 돈을 잘 쓰는 편이어서 좀스러운 부분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스스로에게 돈 쓰는 일에 인색했다.
윤원희 대리 눈에는 한참 유행이 지난 낡은 옷차림도 그렇지만, 문화생활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아 보이는 해웅의 주말은 이상하리만치 무미건조했다. 패션 스타일이나 외제차, 비싼 가전제품에 관심이 많은 광고 회사 사람들과 달리 자신에게 무언가 투자하는 기색이 없었다. 윤원희 대리는 코웃음을 치며 그놈의 빚, 빚, 하고 바가지 긁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광고하는 사람인데, 옷은 잘 입어야죠. 평범한 회사인도 아니고, 나름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한 직업이잖아요.”
“차라리 평범한 직장인이면 정장만 입으면 되니깐 이런 소리 안 들을 텐데, 광고 회사 괜히 왔나 봐. 여긴 왜 이렇게 남의 옷차림에 관심들이 많은지.”
해웅의 뼈 있는 말에 윤원희 대리는 찔린 듯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지적질이 심했나 싶기도 했다. 해웅의 입에서 정작 단 한 번도 외모 평가가 나온 적이 없었는데 윤원희 대리는 심심하면 그의 옷차림을 가지고 아저씨 같다느니, 한물간 고학생 같다며 놀렸다. 심했나 싶어 해웅의 안색을 살폈지만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차장님, 저, 그냥 농담한 거예요. 삐지지 말기예요?”
“어허, 삐질 건데?”
그제야 피식 웃으며 해웅은 플레이 룸의 유리문을 열었다. 먼저 지나가라고 손짓을 하는 해웅을 조심스레 올려다보며 윤원희 대리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해웅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미소를 입가에 늘어뜨리며 윤원희 대리의 걸음을 쫓았다.
플레이 룸과 맞붙어 있는 카페에서는 직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해웅과 윤원희 대리가 아는 얼굴들이 여기저기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눈인사를 건넸다. 고소한 커피콩 향이 가득한 카페 유리창 너머로 윤기 없는 하늘에는 어느덧 오후의 색채가 덧씌워져 있었다.
***
불규칙한 호흡 사이로 담배 연기가 부푼 풍선 모양을 그리다 흩어졌다. 창에 낀 뿌연 성에가 바깥 풍경을 지워 나가듯, 서해웅과 김현식 국장이 뱉어 내는 담배 연기가 주위와 단절된 불투명한 안개를 형성했다. 사각 건물에 둘러싸인 중정 뜰을 가로질러 가던 직원들이 안개를 걷어 내려 손을 휘젓자, 무심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김현식 국장이 담배꽁초 끝에 붙어 있던 회백색 가루를 둔탁한 손놀림으로 털어 냈다.
“스웨덴 콘벤투스 본사에서 직접 의뢰하고 파견한 컨설팅팀이라 류민주 대리도 당황스러워하고 있네. 우리가 같이 대응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는데, 광고주 부탁을 낸들 어쩌겠나.”
김현식 국장의 체념에 해웅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못미덥게 쳐다보았다. 잇새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리 광고주 요청이라지만 월권 아닙니까. 우리가 콘벤투스 한국 지사 마케팅팀 부서도 아닌데 왜 그들의 TF팀에 묶여서 본사가 요청하는 일들을 대신 해 줘야 합니까? 국장님 선에서 쳐 냈어야죠.”
“사장님 통해서 내려온 건이라 나도 거절할 수가 없었네. 오전에 사장님한테 불려가서 일방적으로 전달받고, 무조건 대응해 주라는데 나도 이거 참…….”
“…….”
“나도 서 차장 볼 면목이 없어, 정말.”
김현식 국장의 미간에 짙은 고랑이 패였다. 눈가에 불룩하게 늘어진 지방 주머니와 양 볼에 처진 살집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늙고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해웅의 눈치를 보던 김현식 국장의 두터운 입술 사이로 힘겨운 날숨이 새어 나왔다.
“일단…… 서 차장이 내일 참석하되, 그쪽에서 말하는 것처럼 TF에 꼭 대응해 줄지는 상황 봐서 결정하는 건 어떻겠나.”
담배를 한 모금 빨던 해웅이 실소를 터뜨렸다.
“국장님, 이게 저한테 얼마나 좆같은 상황인지 알지 않습니까. 일 잘못 돌아가서 연말에 책상 빼게 되면 국장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이 사람이…… 다른 사람 들을라? 아주 큰일 날 소리 하는구먼.”
김현식 국장의 처진 눈이 요란하게 휘둥그레지며 해웅을 나무랐다. 김현식 국장도 콘벤투스 한국 지사에서 갑작스럽게 요청한 업무 대응에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 좋은 김현식 국장이 광고주와 대표 이사에게 휘둘려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떠안고 돌아오는 날이면, 해웅은 우유부단한 상사의 성격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일을 쉬고 있었음에도 광고업으로 불러 준 그에게 보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광고주의 무리한 요청들이 산적해 주말까지 반납하고 밥 먹듯이 야근을 반복하다 보니 작은 일에도 짜증이 치솟았다. 작년에는 무리한 업무 대응하다가 결국 대상포진까지 걸리고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았던가.
“이보게, 서 차장. 일단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내일 광고주 미팅 참석하도록 하게. 서 차장이 잘못되면 나도 잘못되는 건데 그 무슨 섭섭한 소릴 하나. 우리는 광고주가 원하는 것을 따라야 잘되는 거야. 콘벤투스 마케팅팀 잘 안 되면 우리까지 망해.”
“교과서 같은 말씀 하시고 있네요.”
탁탁, 담뱃재를 털며 해웅이 한껏 빈정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해웅은 제게 아랫사람인데 싸가지 없게 구는 걸 보고 있자니, 성격 좋은 김현식 국장이라도 화가 치밀 법했다. 그러나 밀려드는 업무를 감당하지 못해 지난달에도 기획팀에서 두 명이 사표를 쓰고 나가 버리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서해웅은 기획팀의 에이스로 단기간 내에 경쟁 PT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당연히 헤드헌터들에게는 스카우트 대상 1호일 것이다. 안 그래도 국내 최고의 광고 회사에서 눈독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마당에 서해웅마저 나가 버리면 작은 외국계 광고 대행사인 라이너스&매덥스에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현식 국장이 이끌고 있는 기획1팀은 중요한 실무를 쳐 낼 차장급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라, 해웅이 비딱하게 굴더라도 인내심을 새기며 살살 달랠 수밖에 없었다.
2. 서울, 광화문 (3)
“이대로 퇴근하시겠네요?”
“뭐, 사진 촬영하는 것 좀 보고, 그대로 퇴근하는 게 낫겠다 싶으면요. 그러면 우리 오늘은 따로 회의할 일은 없는 거죠?”
“네, 당분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나중에 업데이트해 줘요. 슬슬 우리도 하반기 크리 캠페인 구상도 해야 하니깐. 이렇게 여유로울 때 조금씩 아이디어 짜 놓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네, 알겠습니다.”
해웅은 먼저 일어나 자리를 뜨는 현백창 CD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우리 나중에 술 한잔해요”
“알겠습니다.”
술자리를 잡자고 먼저 제안하는 현백창 CD에게 해웅이 웃으며 싹싹하게 바로 대꾸했다. 다른 기획팀원들과 달리 해웅은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아, 정말 마시자니깐. 내가 매번 먼저 마시자고 하네”
해웅의 형식적인 대답에 현백창 CD는 서운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해웅은 살갑게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며 ‘에이, 물론이죠’라고 에두르곤 날짜를 잡는 시늉을 했다.
“저희 팀에서 맛있는 거 살게요.”
윤원희 대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현백창 CD가 ‘그래요’라고 끄덕이고서는 먼저 플레이 룸을 빠져나갔다.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뜨린 잡지들을 정리해 책꽂이에 다시 배치하면서 해웅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요새 한숨 많이 느신 거 알아요?”
“그런가. 좀 피곤해서.”
“피곤하실 만도 하죠. 요새 차장님 경쟁 비딩 몇 개를 하신 건지 원. 솔직히 이 정도로 일했으면 차장님 그냥 모른 체하고 얼른 휴가 가셔도 김현식 국장님도 할 말 없을걸요.”
그래도 프로젝트 몇 개를 같이해서 동지애라도 생긴 건지 윤원희 대리가 해웅의 편을 들어 주었다. 고집이 세고 워낙 본인만의 철학이 강해서 같이 일하면 곤란할 때가 있었지만 윤원희 대리는 같은 팀 동료로서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적어도 주변 눈치를 봐 가며 사람을 배려하는 구석이 있었다.
“농담 아니라, 정말 휴가 가세요. 지금 아니면 이제 또 8월부터 본격적으로 비딩 몰려드는데 차장님 이러다가 쓰러지신다니까.”
“휴가 가는 것도 다 돈 드는 일인데, 뭐.”
“돈 벌어서 뭐 해요. 이럴 때 쓰는 거지.”
“돈 벌어서 빚 갚아야지. 알잖아.”
윤원희 대리는 버릇처럼 빚 갚아야 한다고 말하는 해웅의 말에 질린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입사하고 내내 저 빚 타령을 들었다.
싱글이 빚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집을 사느라 대출을 받은 것도 아닌데. 해웅은 연봉 협상도 잘해서 입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업무 능력도 좋아 꼬박꼬박 인센티브도 받아 가는 마당에 자꾸 앓는 소리를 해 댔다. 그래도 사람들이랑 술 마시거나 밥 사는 일에는 통 크게 돈을 잘 쓰는 편이어서 좀스러운 부분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스스로에게 돈 쓰는 일에 인색했다.
윤원희 대리 눈에는 한참 유행이 지난 낡은 옷차림도 그렇지만, 문화생활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아 보이는 해웅의 주말은 이상하리만치 무미건조했다. 패션 스타일이나 외제차, 비싼 가전제품에 관심이 많은 광고 회사 사람들과 달리 자신에게 무언가 투자하는 기색이 없었다. 윤원희 대리는 코웃음을 치며 그놈의 빚, 빚, 하고 바가지 긁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광고하는 사람인데, 옷은 잘 입어야죠. 평범한 회사인도 아니고, 나름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한 직업이잖아요.”
“차라리 평범한 직장인이면 정장만 입으면 되니깐 이런 소리 안 들을 텐데, 광고 회사 괜히 왔나 봐. 여긴 왜 이렇게 남의 옷차림에 관심들이 많은지.”
해웅의 뼈 있는 말에 윤원희 대리는 찔린 듯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지적질이 심했나 싶기도 했다. 해웅의 입에서 정작 단 한 번도 외모 평가가 나온 적이 없었는데 윤원희 대리는 심심하면 그의 옷차림을 가지고 아저씨 같다느니, 한물간 고학생 같다며 놀렸다. 심했나 싶어 해웅의 안색을 살폈지만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차장님, 저, 그냥 농담한 거예요. 삐지지 말기예요?”
“어허, 삐질 건데?”
그제야 피식 웃으며 해웅은 플레이 룸의 유리문을 열었다. 먼저 지나가라고 손짓을 하는 해웅을 조심스레 올려다보며 윤원희 대리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해웅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미소를 입가에 늘어뜨리며 윤원희 대리의 걸음을 쫓았다.
플레이 룸과 맞붙어 있는 카페에서는 직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해웅과 윤원희 대리가 아는 얼굴들이 여기저기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눈인사를 건넸다. 고소한 커피콩 향이 가득한 카페 유리창 너머로 윤기 없는 하늘에는 어느덧 오후의 색채가 덧씌워져 있었다.
***
불규칙한 호흡 사이로 담배 연기가 부푼 풍선 모양을 그리다 흩어졌다. 창에 낀 뿌연 성에가 바깥 풍경을 지워 나가듯, 서해웅과 김현식 국장이 뱉어 내는 담배 연기가 주위와 단절된 불투명한 안개를 형성했다. 사각 건물에 둘러싸인 중정 뜰을 가로질러 가던 직원들이 안개를 걷어 내려 손을 휘젓자, 무심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김현식 국장이 담배꽁초 끝에 붙어 있던 회백색 가루를 둔탁한 손놀림으로 털어 냈다.
“스웨덴 콘벤투스 본사에서 직접 의뢰하고 파견한 컨설팅팀이라 류민주 대리도 당황스러워하고 있네. 우리가 같이 대응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는데, 광고주 부탁을 낸들 어쩌겠나.”
김현식 국장의 체념에 해웅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못미덥게 쳐다보았다. 잇새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리 광고주 요청이라지만 월권 아닙니까. 우리가 콘벤투스 한국 지사 마케팅팀 부서도 아닌데 왜 그들의 TF팀에 묶여서 본사가 요청하는 일들을 대신 해 줘야 합니까? 국장님 선에서 쳐 냈어야죠.”
“사장님 통해서 내려온 건이라 나도 거절할 수가 없었네. 오전에 사장님한테 불려가서 일방적으로 전달받고, 무조건 대응해 주라는데 나도 이거 참…….”
“…….”
“나도 서 차장 볼 면목이 없어, 정말.”
김현식 국장의 미간에 짙은 고랑이 패였다. 눈가에 불룩하게 늘어진 지방 주머니와 양 볼에 처진 살집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늙고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해웅의 눈치를 보던 김현식 국장의 두터운 입술 사이로 힘겨운 날숨이 새어 나왔다.
“일단…… 서 차장이 내일 참석하되, 그쪽에서 말하는 것처럼 TF에 꼭 대응해 줄지는 상황 봐서 결정하는 건 어떻겠나.”
담배를 한 모금 빨던 해웅이 실소를 터뜨렸다.
“국장님, 이게 저한테 얼마나 좆같은 상황인지 알지 않습니까. 일 잘못 돌아가서 연말에 책상 빼게 되면 국장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이 사람이…… 다른 사람 들을라? 아주 큰일 날 소리 하는구먼.”
김현식 국장의 처진 눈이 요란하게 휘둥그레지며 해웅을 나무랐다. 김현식 국장도 콘벤투스 한국 지사에서 갑작스럽게 요청한 업무 대응에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 좋은 김현식 국장이 광고주와 대표 이사에게 휘둘려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떠안고 돌아오는 날이면, 해웅은 우유부단한 상사의 성격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일을 쉬고 있었음에도 광고업으로 불러 준 그에게 보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광고주의 무리한 요청들이 산적해 주말까지 반납하고 밥 먹듯이 야근을 반복하다 보니 작은 일에도 짜증이 치솟았다. 작년에는 무리한 업무 대응하다가 결국 대상포진까지 걸리고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았던가.
“이보게, 서 차장. 일단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내일 광고주 미팅 참석하도록 하게. 서 차장이 잘못되면 나도 잘못되는 건데 그 무슨 섭섭한 소릴 하나. 우리는 광고주가 원하는 것을 따라야 잘되는 거야. 콘벤투스 마케팅팀 잘 안 되면 우리까지 망해.”
“교과서 같은 말씀 하시고 있네요.”
탁탁, 담뱃재를 털며 해웅이 한껏 빈정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해웅은 제게 아랫사람인데 싸가지 없게 구는 걸 보고 있자니, 성격 좋은 김현식 국장이라도 화가 치밀 법했다. 그러나 밀려드는 업무를 감당하지 못해 지난달에도 기획팀에서 두 명이 사표를 쓰고 나가 버리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서해웅은 기획팀의 에이스로 단기간 내에 경쟁 PT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당연히 헤드헌터들에게는 스카우트 대상 1호일 것이다. 안 그래도 국내 최고의 광고 회사에서 눈독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마당에 서해웅마저 나가 버리면 작은 외국계 광고 대행사인 라이너스&매덥스에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현식 국장이 이끌고 있는 기획1팀은 중요한 실무를 쳐 낼 차장급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라, 해웅이 비딱하게 굴더라도 인내심을 새기며 살살 달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