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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3화

2. 서울, 광화문 (2)





현백창 CD와는 스웨덴 자동차 브랜드 ‘콘벤투스’ 작업을 하면서 친해졌는데 해웅보다 나이는 많지만 제법 말이 잘 통했다. 영국 골드스미스 미대 출신인 현백창 CD는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어떤 연유에선지 공부했던 것과 다르게 광고업계로 들어왔다. 실상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영화 연출이었다. 현백창 CD는 영화판에서 일했던 해웅에게 처음부터 관심을 보였다. 충무로에서 주목하는 홍창화 감독과 오랜 동창이라는 것을 알자,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홍창화 감독의 열혈 팬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후 몇 번 작업을 같이하면서 현백창 CD가 해웅을 제작팀 회식에 부르기도 하고, 퇴근 후 지인들과 술 마시는 자리에까지 초대하기도 했다.

광고 회사 입사 후 초반, 해웅은 멋모르고 제작팀 사람들과 술 마시러 다닌 일을 무심코 말해 버리는 바람에 기획팀 사람들로부터 놀람과 부러움 섞인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부러움을 살 일인가 의아해했지만, 한참 회사를 다니고 나서야 기획과 제작은 업무 목적 외에 잘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광고 회사에서 제작팀은 친해지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크리에이티브 결과에 따라 캠페인의 결과가 달라지는 탓도 있었지만, 경영대나 광고학 등 문과 출신이 대부분인 기획자들은 카피라이터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갖고 있는 예술성이란 기질에 이끌렸다.

서로 다른 물성을 지닌 덕분도 있었지만, 사람들 자체가 뿜어내는 매력에 끌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물론 최대한 제작팀과 협조해 최상의 크리에이티브를 뽑아내야 하는 것도 큰 이유를 차지할 것이다. 그래서 기획팀은 제작팀과 회의를 가질 때마다, 끝나고 술 한잔하자며 채근대기도 하고, 밥 사 주겠노라며 영업용 법인카드로 유혹하기도 했다.

현백창 CD는 잡지를 덮고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슬쩍 해웅을 관찰했다. 하얀 피부와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다르게 살짝 각진 턱 때문에 해웅은 남자답고 잘생긴 인상을 풍겼다. 곱상하게 생겼다 싶었지만 해웅이 풍기는 분위기는 어딘가 건방지고 오만한 인상을 남겼다.

처음 해웅을 회의실에서 맞닥뜨렸을 때 그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은 이미지 역시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남자였다. 해웅은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거나 사근사근 배려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현백창 CD는 서해웅 차장이 볼수록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다른 기획팀 사람들과 다르게 제작팀과 적극적으로 친해지고 싶어 하는 구석이 없다는 점이 신선해서 해웅에게 끌렸다. 말투도 어딘가 뻣뻣하고, 눈빛도 불량스러워 뭐 이렇게 건방진 새끼가 있나 싶었다. 그러나 함께 일할수록 은근히 상대를 배려한다든지, 책임감이 강한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일의 성과가 좋을 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뒤끝 없이 솔직한 점에서 높은 점수를 샀다.

“서 차장님, 우리 집 인테리어 바뀐 것 좀 보실래요?”

현백창은 최근 용산으로 이사하면서 인테리어를 죄다 바꿨다며 핸드폰을 꺼내 싹 바뀐 인테리어 사진들을 보여 줬다. 그가 보여 주는 사진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씩 감탄사를 내뱉는 해웅이 속으로는 가구에 별 관심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만 보더라도 브랜드에 열광하거나 물욕이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런 무심한 태도와 옷차림 때문인지 해웅은 물질적 욕망에 솔직한 다른 광고인들과 다르게 검약하고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비에 한정해서였다. 해웅이 유명한 바람둥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강남과 이태원 클럽에서 그의 아랫도리가 아주 가볍고 문란하다는 풍문은 꽤나 놀아 봤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치 하나의 전설처럼 유명하다 했다.

“참, 그러고 보니 서 차장님, 뉴욕에서 공부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잠시 대학 다닐 때 교환 학생으로 1년 가 있었어요.”

“그럼, 뉴욕 잘 알겠네. 우리 다음에 콘벤투스 광고는 뉴욕에서 찍었으면 하는데 어때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해웅은 웃으면서 돌려 대답했다. 현백창 CD가 얼마 전부터 뉴욕 타령을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해외 배경으로 근사한 그림을 뽑아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웨덴 자동차 브랜드를 굳이 뉴욕을 배경으로 촬영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해웅이 제 의견에 별 반응이 없자, 다시 휴대폰에 저장된, 세 살을 갓 넘긴 제 아이의 사랑스러운 사진을 보여 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해웅은 어린아이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대충 추임새를 넣으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아기 갖고 싶지 않아요, 서 차장님?”

“글쎄요. 제가 아직 경제적으로 자리가 잡히질 않다 보니. 그런 생각이 잘 들지 않네요. 요새 같아선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무슨 소립니까. 서 차장님이 결혼을 못한다니. 여자 보는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닌가.”

현백창 CD의 말에 해웅이 팔짱을 끼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마땅히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해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저 눈 안 높은데요’였다. 현백창 CD가 못마땅한지 끌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웬만한 소개팅 자리 다 뻥뻥 차는 거 소문 다 났던데, 뭘. 우리 팀 윤 카피가 소개팅해 준다고 했는데도 싫다고 한사코 거절했다며. 윤 카피 친구가 대학에서 아주 소문난 퀸카였다는데, 지금 아나운서 준비도 하는 중이고. 한번 가볍게 만나 보지 그래요.”

“제가 맨날 바쁘고 야근하느라 못 만나 주다 보니 연애를 해도 상대한테 피해만 주더라고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렇게 따지면 우리 회사 절반은 다 이혼하고 연애도 못해야지. 시간 만들고 쪼개 가면서 연애하는 거죠. 요새 한가한 직장인이 어디 있다고.”

“제가 그냥 마음의 여유가 안 되나 봅니다.”

얼마 전 끝난 연애가 떠올랐다. 지지부진하게 끌었던 관계를 끝내고 나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야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서운하다느니, 변했다느니, 이럴 거면 연애하지 말 것을 그랬다고 서운함을 토로하는 여자 친구를 달래 주느라 완전히 지쳐 버렸었다. 매일같이 그녀가 다니는 대학원 캠퍼스까지 찾아가 데이트하던 연애 초반과 달리, 일주일에 한 번 보기도 힘들어졌다. 여자 친구 입장에서는 남자의 행동이 변했으니 서운할 만했다.

30대를 넘어서자, 밀려드는 업무와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감은 나이와 비례하여 상승 곡선을 그렸다. 방전된 체력은 제게 오로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을 쳤다. 연애에 전력투구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내심 그녀의 이별 통보에 후련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만큼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학교에서 제일가는 미녀니 이 소개팅은 반드시 나가야 한다는 옆 팀 김희준 대리의 소개로 만났을 뿐이었다. 외적인 매력 외에는 딱히 끌리는 것은 없었던지라, 어차피 이 연애가 길게 가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연애가 끝나자 여의치 않을 때에는 클럽에 가서 하룻밤 상대를 구하기도 했다. 차라리 지금같이 연애에 집중할 수 없는 시기에는 적당히 원 나이트로 깔끔하게 성욕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딱히 아쉬울 것도 없이 편했다.

“차장님, 김현식 국장님이 찾으시는데요.”

해웅이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플레이 룸의 유리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윤원희 대리가 현백창 CD를 발견하고서는 꾸벅 인사를 했다. 현백창이 한 손을 들어 반갑게 아는 체를 하자 윤원희 대리가 ‘언제 저희 팀이랑 밥 드셔야죠’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뭐 때문에 찾는데?”

“잘 모르겠어요……. 아마 콘벤투스 일 때문 아닐까요? 요새 좀 이상한 소문이 들리던데.”

윤원희 대리가 어느새 해웅의 옆에 다가와 섰다. 윤원희 대리의 시선이 무감하게 원형 유리 테이블 위에 쌓인 잡지를 훑었다. 해웅은 일어나기 싫은 듯 끙, 소리를 내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급하게 부를 때는 긴급 업무가 발생해서일 텐데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해웅은 현백창 CD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나도 그럼 일어나야겠어요. 마침 조금 이따 스튜디오 갈 일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