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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2화

1. 프롤로그 (2)





해웅이 아, 하고 난처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혹시 맨해튼에서 일을 구하게 돼서 자리 잡게 된다면 집도 구해야 할 거고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도움 없이 혼자서 정착하려면 처음에는 고생하거든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특히 집 구하려다 보면 아무래도 처음 맨해튼에 자리 잡는 이방인들은 사기도 당할 수 있고. 보증인도 구하기 힘들 테니까…….”

남자의 말에 형식적인 감사 인사로 마무리했다. 남자는 아이를 끌어안고서는 무언가를 기대하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교환했다.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천진난만하게 해웅을 쳐다보는 여자아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얼굴로, 제 눈을 비벼 대며 커다랗게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결국 남자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차린 해웅이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건네받은 명함의 양면을 확인하고서는 그제야 남자가 씨익 웃었다. ‘꼭 연락해요’라고 아쉬운 듯 인사말을 건네고서도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던 남자가, 목에 코알라처럼 매달린 아이를 한 팔로 끌어안고서는 다른 한 손으로 전화하는 시늉을 했다. 해웅이 웃으며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안심하듯 부녀는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기차역을 나와 노란 택시들이 줄지어 있는 도로에 서자, 스퀘어로 구성된 블록마다 스트리트를 가리키는 초록색 바탕의 단순하고 직관적인 흰색 도로명이 눈에 띄었다. 가야 할 위치를 확인하고 뒤를 도는 순간 하얗게 작열하는 태양광선이 동공을 따갑게 찔러 댔다. 눈이 부신 나머지 몸을 비틀거리며 방향을 잃었다. 거대한 인파를 형성하며 줄지어 걷는 사람들 속에서 좌표를 잃고 이리저리 치였다. 숨을 들이켜자마자 얼음 조각이 박힌 것처럼 매섭게 찬 공기가 비강을 찔러 댔다.

너무 추우면 콧속이 언다더니, 바사삭 콧물이 어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잇달아 울리는 클랙슨이 고약한 소음을 빚고, 딛고 있는 땅은 지하철이 지나갈 때마다 떠들썩하게 진동을 했다.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도시가 꿈틀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10년 만에 온 뉴욕은 여전히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전의 해웅은 이 척박한 도시에서 저만 홀로 떨어진 이방인의 외로움을 느꼈지만 바쁘게 오가는 거리의 많은 사람들도 실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 도시의 태생이 아니었으며, 순박한 본질을 숨기고 태생이 뉴욕 출신인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어디론가 향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러시아에서 온 무용수이기도 하고, 가난한 미대생이거나 부유한 중국인 유학생이기도 했으며, 미국 남서부에서 부나방처럼 날아온 뜨내기이기도 했다. 한때 해웅이 그랬던 것처럼 살인적인 물가와 집세를 견디며, 도시의 거대한 역동성에서 좌초당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핫도그와 구운 캐러멜을 입힌 땅콩, 베이글과 커피 향이 거리를 걷는 행인과 관광객을 유혹했다. 카트차 위에 서서 꾸벅 졸고 있던 흑인이 영업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눈에 첫 방문객처럼 보이면서 사방을 둘러보는 순진한 낯빛을 띤 사람들에게 땅콩 봉지를 내밀었다. 막 튀겨 낸 캐러멜 땅콩에서 풍기는 뜨거운 단내가 거리를 진동했다. 허기가 져 잠시 흑인이 건네는 유혹에 망설였지만 이곳을 찾은 소기의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2. 서울, 광화문 (1)





7월 중순은 광고 회사 입장에서 보자면 애매한 계절이었다. 공장을 끼고 있는 제조업계는 6월 중순을 기점으로 생산 속도가 감소했다. 제조업계의 마케팅팀은 공장의 휴가 시즌에 맞춰 영업과 관련된 업무가 모두 한산해졌다. 광고주와 공생하는 광고장이들도 숨 바쁘게 돌아가는 상반기를 마감하고 하반기 사업 계획을 구상하기 전 숨 고르기에 돌입하며 기획팀 업무는 비교적 한산해졌다. 덕분에 광고 회사를 다니는 일부 직원들은 광고주의 휴가 기간과 맞춰 운 좋으면 여름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팀장님과 상사의 눈치를 봐 가며 몰래 항공편을 예매해 두었던 해웅의 옆 부서 사람들도 하나씩 동남아니, 유럽이니,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휴가 소진에 까다롭지 않은 ‘라이너스&매덥스’에서도 하나둘 여행을 다녀오거나, 여유롭게 사내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잡담을 즐기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해웅 역시 모처럼 꿀맛 같은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엊그제 하반기 경쟁 PT 하나를 마친 상태였다. 50억짜리 화장품 비딩을 따기 위해 한 달 내내 야근을 밥 먹듯이 한 데다 마지막 주 차는 퇴근도 반납하고 회사에서 쪽잠을 자 가며 광고 기획서를 완성했다. 덕분에 PT가 끝날 무렵에는 온몸이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근육통에 시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로젝트 중간에 만성 허리 디스크와 면역력 저하로 인한 원인 모를 알레르기 증후군까지 겪는 바람에, 해웅은 기획서를 쓰다 말고 영양 주사까지 맞아 가며 고군분투해야 했다.

어머니 말대로 의대를 갔어야 했다는 자조적인 한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존폐 직전까지도 붙들고 있던 사법 고시나 로스쿨을 준비했던 친구들은 어엿하게 변호사라도 되어 억대 연봉의 반열에 올랐다. 그들처럼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밤샘 야근할 맛이라도 났을 것이다. 광고 회사의 쥐꼬리만 한 연봉을 받으면서 개같이 일하려니 억울함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웅은 모처럼 비는 시간에 커피나 마시고 노닥거릴까 하여 사내 카페에서 아이스 라테를 주문하고 플레이 룸으로 들어갔다. 미술, 여행, 디자인, 외국 서적 및 잡지, 만화책 등이 한가득 배치된 플레이 룸은 직원들이 아이디어 구상 중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회사 차원에서 기획한 장소였다. 최근에는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플레이스테이션도 설치되었는데 어디까지나 홍보용에 불과했고, 실제 업무 시간에 게임을 즐기는 간이 부은 사람은 없었다. 플레이 룸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실상 이곳은 게임보다는 조용히 책을 보거나 부서 사람들이랑 올라와 가볍게 수다를 떨기에 적합한 용도로 쓰였다.

이 얼마 만의 여유인가. 해웅은 라테를 들이마시며 플레이 룸에 비치된 인테리어 잡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언감생심. 꿈에도 꿀 수 없는, 비싸고 아름다운 집과 디자이너 가구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명품이고 브랜드고 별 관심이 없었지만 눈은 즐거웠다.

해웅은 멍하니 사진을 감상하며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 해웅의 시선이 어느 한 사진에 꽂혔다. 따사로운 오렌지 빛깔 햇살을 머금은 집들이 늘어선 해안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풍경이었다. 밝고 여유로운 풍경이 꽤나 마음에 들어 해웅은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두었다.

언젠가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인생이 꽤나 살 만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현실은 서울에서 집 한 채도 살 수 없어 고시원을 전전하는 인생이지만. 해웅은 피식 자조하듯 웃으며 다시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패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뉴욕 사택을 소개하는 에디터 글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해웅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기도 전에 해웅의 앞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체격 좋은 남자가 털썩 앉았다. 군데군데 땀으로 얼룩진 카키색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는 제작팀의 현백창 CD였다.

“아이고, 해웅 차장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리서치 중?”

나른하게 웃으며 팔짱을 끼던 현백창 CD가 해웅이 보던 인테리어 잡지를 흘낏 쳐다보더니 ‘아아, 마크 제이콥스~’ 하고 아는 체를 했다.

“인테리어 좋아하시나 보다?”

해웅은 잡지를 닫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냥 볼 게 없어서요. 사진 구경 좀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제 대학 동창 녀석이 한국에 들어와서 수입 가구 구매 대행 사업을 하고 있는데 소개시켜 드릴까요? 유럽 디자이너 가구들을 주로 수입하고 있는데 임스나 르코르뷔지에랑 루이스 폴센도 구입할 수 있어요. 예쁜 의자도 있고. 한남동에 오픈했는데 구경 가고 싶으시면 위치 알려 드리도록 하죠.”

“뭐, 욕심은 나는데 아직 제집이랄 게 없어서요.”

해웅의 말에 현백창 CD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했다.

“아하. 그러시구나. 아직 싱글들은 이런 거에 관심 없긴 하죠. 결혼할 때나 돼야 인테리어든 뭐든 눈에 들어오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