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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도시 1화

-1부-

1. 프롤로그 (1)





기차는 비컨역에서 정차를 했다. 플랫폼 밖으로 짙고 푸른 허드슨강이 지평을 이루며 끝없이 펼쳐졌고 새하얀 얼음 덩어리들이 마시멜로처럼 강의 표면에 붙어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강이 어찌나 크고 넓은지 역사는 바다에 갇힌 작은 섬 같았다. 단출한 역사를 따라 흐르는 강을 제외하고는 주변에 어떤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살풍경에 이끌려 해웅은 잠시 보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업스테이트 뉴욕의 작은 마을인 비컨에 여행객이 어슬렁거리는 일이라고는 예전 같았으면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디아비콘 미술관의 위치와 건축적인 아름다움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여행객들은 맨해튼 기차 편으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허드슨강에 붙어 있는 이 작은 마을을 찾아왔다.

정차한 사이 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더티 블론드의 덩치 큰 백인 남자가 기차를 올라탔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다가 해웅의 건너편 빈 좌석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해를 구했다. 부녀가 자리를 잡는 사이 기차는 느릿느릿 다시 기지개를 켜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작은 역은 등 뒤로 멀리 사라지고 길고 긴 허드슨강이 다시 차창을 따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뉴욕에 관광하러 오셨나 보군요.”

해웅의 건너편에 앉은 백인 남자는 커다란 배낭에서 바나나, 라즈베리, 얇게 썰린 레몬과 오렌지, 염소 치즈가 담긴 유리통을 꺼내더니 친근하게 말을 걸며 조심히 내밀었다.

“같이 드실까요?”

해웅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건넨 유리통에서 과일을 집어 들었다.

“뉴욕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아, 어려 보여서 대학생인 줄 알았습니다. 아시아인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어서…….”

억센 독일어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그는 자신을 토마스 하네게라고 소개했다. 해웅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자 그는 해웅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서툰 어린아이처럼 해웅의 이름을 뇌까리며 입에 붙이더니, 어디 출신인지, 미국 어디어디를 다니고 있는지, 이것저것 물어 왔다. 해사한 미소를 짓는 그는 어딘가 해웅이 아는 남자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전 뉴욕의 작은 프로덕션에서 촬영 감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침 찍고 있던 다큐멘터리 한 편이 끝나 한가해진 터라 아이를 데리고 쉬러 왔거든요. 이혼한 아이 엄마가 여기서 살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뉴욕에 일이 있어서 왔다니, 무슨 일인지 궁금해지네요.”

“광고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뉴욕은 지인의 요청으로 면접도 있고, 만나야 할 사람도 있어서요.”

해웅이 말끝을 흐리자 그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혹시 애인이라도 찾으러 온 건가요?”

해웅은 오렌지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대꾸를 피했다. 어딘지 모르게 개인적인 주제를 불쑥 넘나든다는 느낌이었지만 무례하다고 생각되거나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제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기에 가볍게 그의 질문을 피해 갔다. 남자는 창밖으로 보이는 허드슨강의 느린 물살을 물끄러미 감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초 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뉴욕은 물가가 너무 비싸요. 전에 살던 베를린이 그리울 때가 있다니까요. 처음 맨해튼 프로덕션에 취직이 되었을 땐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는데 말이에요. 뉴욕이라니! 굉장하잖아요?”

“대단하신데요. 저라면 잘 다니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쉽게 건너올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해외에서 일도 해 보고 싶었거든요. 평생 베를린에만 있기엔 갑갑하잖아요. 처음에는 겁도 없이 맨해튼에서 높은 렌트비를 내고 살았어요. 결국 치솟는 집세를 감당할 수 없어서 브루클린으로 옮겼는데 지금은 브루클린도 워낙 집값이 많이 올라서 예전 같지 않아요. 다행이라면 집값이 폭등하기 직전에 좋은 집을 싸게 구입했다는 거예요. 그 돈으로 베를린에서 집을 구했더라면 훨씬 크고 좋은 데서 살았을 텐데. 뭐, 베를린도 물가가 많이 올라서 예전 같지 않긴 하지만요.”

남자의 무릎 위에서 아이가 졸린 눈으로 ‘아빠, 나 피곤해’라고 중얼거렸다. 남자가 다정하게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맞춤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애정 표현에 서툰 해웅은 틈이 날 때마다 입을 맞추는 남자의 행동이 신기해서 부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해웅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이번에는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며 멋쩍은 듯 웃었다.

“제 욕심 때문에 애가 미술관에서 온종일 걸어 다녔거든요. 생각보다 미술관 내부가 너무 커서 빠르게 둘러본다고 봤는데 한참 걸리던데요. 가 봤어요?”

“아니요. 좋다는 얘기는 들어 봤는데 갈 기회가 마땅치 않았어요.”

“언제 한번 꼭 가 봐요. 맨해튼의 모마나 메트로폴리탄도 좋기는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휩쓸려 작품을 건성건성 보다 보면 허무해지잖아요. 때로는 내가 미술을 감상하는 것인지 사진을 찍으러 들른 것인지 헷갈린다니까요. 디아비콘은 한 작품, 한 작품 시간을 두고 감상하기 좋은 곳이에요.”

아이가 그의 품 안에서 잠들자 남자는 비로소 아이에게 시선을 돌려 짙은 잿빛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해웅을 훑어보았다.

잠시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어색하게 맴돌았다.

“아이가 참 예쁘네요.”

한마디 건네자 남자가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작은 천사’라고 중얼거리며 남자는 아이를 다시 꼭 끌어안았다.

나의 작은 아기 새.

남자의 다정한 속삭임은 누군가가 중얼거리던 말과 겹쳐졌다.



그래피티가 난잡하게 도배된 콘크리트 벽이 기차를 따라 달리고, 청명한 물색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있는 빌딩들 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흘렀다. 저 멀리서 도시의 부산함을 싣고 사이렌 소리가 달음박질쳤다.

어느새 연신 고개를 떨어뜨리며 졸고 있던 해웅이 좌석에 파묻던 몸을 일으켜 창밖 풍경을 확인했다. 해웅이 조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던지, 눈을 뜨자마자 건너편에 앉은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잘 잤어요?’라고 묻는 그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을 알아채고 해웅이 당황해서 손등으로 문지르자, 그가 익숙한 손길로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꼴사납게 자고 있었죠.”

“아뇨. 아이처럼 자고 있던데요.”

해웅은 어색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너무 피곤해서요’라고 중얼거리자 그가 그럴 수 있다며 맞장구쳐 주었다.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는 남자는 티슈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잠든 아이를 깨웠다.

어느덧 목적지를 알리는 터널로 기차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낡고 습한 지하 터널 구석구석에는 도시의 거친 숨결이 배어 있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지하로 미끄러지게 안착하는 순간 기차는 끼이이익- 금속이 마찰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남자의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이가 긴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을 치켜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자가 머리 위 짐칸에서 가방을 내리는 동안 아이는 지겨운지 기지개를 켜며 해웅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의 눈이 뭔가 웃긴 것이라도 발견한 듯 동그래졌다. 키득키득 웃더니 아이의 손이 빨갛게 부은 이마를 가리켰다. 부녀가 쌍으로 나의 얼간이 같은 모습을 감상했겠군. 해웅은 차창에 계속 이마를 찧으면서 졸았을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상상하며 미간을 좁혔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가까이 있는 북부 뉴욕 주에서 출발해 맨해튼에 막 도착한 암트렉 기차 내부는 어린아이 키만 한 백팩을 멘 유럽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다. 해웅은 백팩을 어깨에 짊어지고 기차 밖으로 나가기 위해 복도에 서 있는 부녀의 뒤를 따랐다.

기차에서 내리자 남자가 제 갈 길을 가기 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악수를 교환하고 나자 주머니 안쪽에서 연락처가 담긴 명함을 꺼내 건넸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연락해요. 술 한잔하는 것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