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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짐 정리를 마치고 점심을 먹는 대로 아빠는 내일을 위해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우리 아들,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쉽사리 차에 오르지 못하고 울적해하는 아빠에게, 나는 잘 지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해야 했다.

아빠는 한참 동안 내 곁을 서성거리다가 떠났고, 곡이 아저씨도 늦은 출근 준비를 했다.

“대엽아, 지찬이가 혹시라도 텃세 부리면 아저씨가 뭐라고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응? 그리고 지찬이 걔가 입은 좀 걸어도 막…… 나쁜 애는 아니야. 그건 보장해. 그러니까 둘이 잘 지내 줘. 아저씨가 제일 바라는 게 그거야.”

“……노력해 볼게요.”

“그래.”

아저씨는 내 등을 툭툭 두드리곤 서둘러 이곳을 떠났다.

생판 낯선 공간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자, 비로소 내 처지가 실감이 되었다. 그래도 한국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그것만 생각하면 되겠지.



***



방에 박혀서 자정이 되도록 공부하는 동안 곡이 아저씨와 백지찬 중 누구도 귀가하지 않았다. 솔직히 누가 있으면 불편하니까 차라리 안 오는 게 낫다.

책상 앞에 앉아 기지개를 켜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개학까지는 일주일쯤 남았고, 나는 이제 낯선 애들로 가득한 새 학교에 가야 한다. 1학년도 아니고 2학년이니까, 다른 애들끼리는 서로 잘 알겠지.

좀, 싫다.

전에 다니던 학교 애들은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애들이라 이런 기분도 느낄 일도 없었는데.

문득 오전에 헤어진 친구들이 떠올라 단체 메신저 대화방에 들어갔다. 애들은 여느 때처럼 사사롭게 떠들고 있었고, 내가 흔적을 남기자 새로 간 곳은 어떠냐고 득달같이 물어 왔다.



(talk)
신대엽 <별로>
까온 <왜?>
때쭌 <누가 괴롭힘?>
썽훈 <누구임 죽인다>
민쎵 <걍 낯설어서 적응 안 되는 거겠지ㅇㅇ 오바들은>
까람 <ㅇㅇ 되게 뒤숭숭하지 않냐>



애들 메신저 닉네임이 묘하게 통일성이 있기에, 언제 쌍자음으로 맞춘 거냐고 물으려던 순간 아래층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집에서 으레 하던 대로 돌아온 이를 반기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현관에서 백지찬이 운동화를 벗고 있었다.

“왜?”

백지찬이 나를 올려다보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버릇인데.”

“뭐가?”

“누구 오면 나와 보는 거.”

백지찬은 실소를 내뱉고는 신발을 벗는 대로 내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 아무튼 너 나한테 훈수 두지 마라. 존나 마음에 안 드니까.”

“……알았어. 그런데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잖아.”

“씨발, 내가 언제 시비 털었다고 난리냐?”

“아침에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백지찬은 내게 진탕 욕지거리를 퍼붓고는 제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야.”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백지찬을 부르자 그가 발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밥 안 먹어?”

“이 시간에 밥을 왜 먹어?”

“저녁 안 먹은 거 아니야?”

“아닌데?”

백지찬은 짜증스럽게 대꾸하고는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난 안 먹었는데. 너 올까 봐.”

백지찬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밥은 같이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안 먹은 걸 나보고 어쩌라고? 누가 기다려 달라고 했나.”

백지찬은 짜증을 내며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왔다. 적어도 나랑 저녁을 먹을 의사는 있는 모양이다.

곡이 아저씨네 주방은 넓고 복잡했다. 점심때 구워 먹고 남은 삼겹살에 밥이나 볶으려고 했는데, 밥 볶을 프라이팬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백지찬에게 물건의 위치를 물었더니, 자기가 어떻게 아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너희 집이잖아.”

“생전 여기서 뭘 만들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

백지찬은 심드렁하게 말하곤 홈 바 앞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여기 뒤져 봐도 돼?”

수납장 하나를 가리키며 묻자, 백지찬은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하곤 휴대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처음 골라잡은 수납장 안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컵과 접시뿐이었다.

“여기는?”

또 다른 수납장을 가리키며, 나는 다시 허락을 구했다.

“마음대로 하라니까.”

이번에 골라잡은 수납장 안에는 온갖 양념들과 밀가루가 들어 있었다.

“그럼 여기는?”

“씨발, 장난하냐? 귀찮게 하지 말고 알아서 해!”

내가 세 번째 수납장을 앞에 놓고 허락을 구했을 때, 백지찬은 결국 휴대폰을 놓고 버럭 화를 냈다.

“……여기 있다.”

마침 세 번째 수납장에 프라이팬이 있었다. 백지찬은 욕지거리를 하며 휴대폰을 다시 붙잡았다.

각종 양념이랑 프라이팬은 찾았고, 밥솥이며 낮에 먹은 삼겹살 남은 건 당장 눈에 보이니까 됐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김치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주방에 냉장고가 네 개나 된다는 것이다.

“냉장고는 열어 봐도 돼?”

“하……. 뭐 찾는데?”

백지찬이 휴대폰을 홈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내게 물었다.

“김치.”

“뭐 하자는 건데, 이게…….”

중얼중얼 신세 한탄을 하며, 백지찬은 냉장고에서 진공 포장지에 담긴 김치 한 팩을 꺼내다가 내 품에 던지듯이 건넸다.

“김치는 어디 있는지 아네.”

“찾아 줬으면 고마운 줄이나 알아라, 존나.”

“그러네. 고마워.”

나는 백지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밥을 볶았다. 그러는 동안 백지찬은 제자리로 돌아가 휴대폰을 만졌다.

“그나저나 남의 집구석에는 왜 눌러살러 왔냐?”

막 밥을 다 볶았을 때, 등 뒤에서 백지찬이 물었다. 나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그를 보았다.

“접시 꺼내?”

“뭐?”

“난 그냥 이 상태로 먹어도 상관없어서. 같이 먹는 거 싫으면 덜어 주려고.”

“설거지 더 하고 싶으면 따로 주든가.”

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까 두 번째로 뒤진 수납장에서 중앙이 오목하게 들어간 접시 하나를 꺼낸 뒤, 그 안에 볶음밥을 담아 숟가락과 함께 백지찬에게 건넸다.

“……씨발?”

볶음밥을 건네받은 백지찬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욕을 했다.

“왜.”

나는 정수기에서 냉수 한 컵을 빼다가 백지찬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는 볶음밥 접시와 수저를 든 채 물컵은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서 계속 서 있기만 했다. 그래서 볶음밥 위에 달걀 프라이라도 올려 줄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내게 된소리 욕을 퍼붓곤 홈 바 자리로 휑하니 가 버렸다.

“……욕먹을 짓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백지찬의 접시 옆에 물컵을 놔 주며.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볶음밥을 퍼먹던 백지찬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서 고개를 들었다.

“나 때문에 짜증 나도 2년만 참아. 나도 노력할 테니까.”

나는 냄비 받침 위에 프라이팬을 놓으며 백지찬에게 말했다.

“어른인 척 오지게 하네, 씨발.”

“내가 어른인 척하는 게 아니라, 네가 유치한 거 아니야?”

“뭐?”

“네가 날 싫어할 수 있다고는 보는데, 전에는 안 그랬잖아. 어렸을 때는 그래도 나 좋아하는 편 아니었나.”

백지찬 옆에 앉아 볶음밥을 먹으며, 나는 말했다.

“……아니거든?”

백지찬이 숟가락을 급작스럽게 놓으며 정색했다.

“그럼 내가 착각한 건가.”

머쓱해진 나는 대화를 더 시도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백지찬이 몸을 바들바들 떠는 걸 발견했다. 그의 목 뒤꼍이 무척 빨갰다.

“……매워?”

백지찬에게 물컵을 밀어 건넸지만, 그는 또 뭐가 문제인지 내게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곤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나는 그가 테이블 위에 두고 간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단 밥부터 먹고 뒷정리한 다음에 갖다줘도 되겠지.



밥을 먹고 뒷정리하는 동안, 백지찬의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려 댔다. 나는 설거지를 마친 후 휴대폰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내 방 앞에서 서성대는 백지찬이 보였다.

“여기 내 방인데.”

“……구경하는 것도 안 되냐?”

“돼. 그리고 너 폰 두고 갔어.”

백지찬은 내 손에서 휴대폰을 뺏듯이 가져갔다. 그러고는 쿵쿵 발을 구르며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부서지도록 세게 닫았다. 나는 굳게 닫힌 그의 문을 보고 서 있다가, 내 방으로 돌아와서 책상 앞에 앉았다.

아까 보던 책을 다시 펼치고서 얼마 후, 백지찬의 방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소음에 예민한 편은 아니라 무시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소음이 귀에 거슬리는 수준에 미쳤을 때, 고개를 들고 내 방에 난 두 개의 문을 보았다. 두 문 중 하나는 복도와 이어져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베란다와 이어져 있다.

두 문을 번갈아 보다가 베란다 문으로 나왔다. 일자형의 베란다는 내 방과 그 옆방을 잇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을 밟고 몇 걸음 나아가니 새시 문 너머로 백지찬이 보였다. 그는 오디오를 크게 켜 놓은 채, 바닥에 깔린 러그에 누워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문을 콩콩 두드리자, 백지찬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왔다.

“뭔데 멀쩡한 문 놔두고 여기로 들어오냐?”

“들어오려고 한 건 아니고.”

오디오 소리가 크니까 볼륨을 줄이거나 이어폰을 쓰라고 했더니, 백지찬은 화를 내는 건 둘째 치고 부탁한 것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어폰 없어? 빌려줄까?”

“그거 귀 아파서 안 써. 너야말로 거슬리면 귀마개 쓰든가.”

“……웬만큼 시끄러운 건 괜찮아서 그런 거 안 써, 평소에.”

“없으면 나가서 사 오든지.”

백지찬은 그렇게 말하곤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