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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 시간에? 그리고 이 동네에 뭐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그건 네 사정이고. 아무튼 쉬는데 방해하지 마라.”

난 공부하는 중인데.

그래도 쟤가 집주인이니까, 불편은 내가 감수하는 게 맞겠지.

“……곡이 아저씨는 보통 언제 집에 오셔?”

“왜, 오면 내가 지랄했다고 이르게?”

“아니. 근처에 가게나 그런 거 어디 있는지 여쭤보려고.”

“언제 오는지 몰라, 존나. 맨날 들쭉날쭉해서.”

퉁퉁거리는 백지찬에게 알았다고 답하곤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씨발, 당장 집구석에 이 동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등 뒤에서 조잘거리는 볼멘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백지찬을 보았다.

“왜?”

내가 가만히 저를 보고 서 있자 백지찬이 흉흉한 투로 물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잖아.”

“너한테 말한 거 아닌데?”

“아.”

아니라니까 아닌 줄 알고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또 욕지거리가 들리기에 백지찬을 보았다. 같은 일을 두어 번 더 반복하고 나니, 백지찬에게 왜 그러는 거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뭘 물어? 그냥 꺼지지.”

“네가 자꾸…….”

“내가 어쨌다고!”

쟤는 왜 계속 화나 있지?

“근래 정서적으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

“있지, 씨발. 네가 이 집구석에 온 게 바로 그 일이다!”

백지찬이 소리를 뻑 지르며 일러 주기에, 순순히 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인 것 같아서.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쳤지만 페이지 속 글씨를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왔을 때 백지찬의 반응이 안 좋을 거라고 예상은 했어도,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이야.



***



새로 바뀐 방도 내 상황도 영 낯설어서, 결국 한숨도 못 자고 아침을 맞았다. 욕실로 가서 씻고 영어 공부를 하다 보니 배가 고파졌는데, 혼자 밥을 먹기가 조금 그랬다.

베란다 길을 걸어 새시 문 너머 백지찬의 방을 살폈다. 백지찬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찰나, 잘 감겨 있던 그의 두 눈이 거짓말처럼 번쩍 뜨였다.

“뭘 또 엿보고 있어, 기분 나쁘게.”

백지찬은 눈을 뜨기 무섭게 문을 밀고 나와서 불만을 토로했다.

“배고파서.”

“그럼 아무거나 꺼내서 처먹어!”

“넌 안 먹어?”

“편의점 가서 먹을 거야. 네가 만든 거 존나 맛없어서 두 번은 안 먹어.”

알았다고 말하고 돌아서자, 등 뒤에서 또 욕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왜 욕하냐고 물으면 또 꺼지라고 하겠지. 그래서 무시하고 내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 몇 분 후, 씩씩거리며 나타난 백지찬이 내 멱살을 잡고서 밖으로 나갔다.



도착한 곳은 편의점이었다. 백지찬은 그곳 음식을 다 쓸어 담다시피 해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나는 으깬 달걀이 든 샌드위치와 온장고에 있던 두유를 꺼낸 뒤, 백지찬이 계산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제 것을 계산하던 백지찬이 돌연 내 손에 있던 것까지 계산해 버렸다. 음식값을 주려 했으나, 그는 사납게 인상을 쓰며 거절했다.

“그냥 처먹어.”

막무가내 태도 때문에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받은 게 있으니 샌드위치 한 조각을 꺼내 백지찬에게 건넸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샌드위치를 휙 낚아채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개맛없네. 골라도 이런 걸 고르냐.”

“난 이것만 먹는데.”

“입맛 존나.”

백지찬은 내 입맛을 나무라곤 큰 사발에 든 컵라면에 치즈가 든 핫바, 그리고 고추장에 비빈 밥이 든 삼각 김밥을 먹어 치웠다. 그러곤 치킨 패티가 든 햄버거와 즉석 떡볶이 한 통도 깨끗하게 비웠다.

내가 기억하는 백지찬은 이렇게 잘 먹지 않았는데. 못 본 사이 몰라보게 커 버린 까닭이 여기 있는 것 같다.

어린 백지찬은 왜소하고 병약했다. 그래서 곡이 아저씨네 가면 아파서 누워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랬던 애가 건강해진 건 좋은데, 왜 안 바뀌어도 됐을 성격까지 사납게 바뀐 건지.

“뭐?”

내가 유감을 담아 쳐다보자, 열심히 먹던 백지찬이 날 보며 물었다. 나는 그의 입 주변에 묻은 참깨―햄버거 번 위에 있던 것이다―를 바라보다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입에 뭐 묻히고 먹는 버릇은 안 바뀌었네.”

백지찬의 입술에서 깨를 떼어 내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릴 적에도 백지찬은 곧잘 입에 뭘 묻히고 먹어서, 종종 입을 닦아 주곤 했었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이냐?”

잠시 멍하니 있던 백지찬이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친놈이. 뭐야, 이게…….”

편의점을 나올 때도 백지찬은 연신 입술 주변을 매만지며 당황스러워했다.

여하간 끼니도 해결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백지찬의 손이 다시금 내 멱살을 움켰다.

“……또 어디 가야 돼?”



백지찬은 말없이 어딘가로 향했고, 이번에 도착한 곳은 규모가 제법 큰 문구점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귀마개만 한 주먹을 사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더니 내 멱살을 다시 잡고 PC방, 노래방, 카페, 마트, 당구장 등등을 전전했다.

어디를 가든 그곳에는 백지찬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백지찬처럼 입이 거칠었지만, 대개는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중 영화관 오락실에서 만난 애는 백지찬을 보자마자 ‘연예인이 오셨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연예인?”

내가 의문을 표하기 무섭게, 백지찬이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며 친구를 나무랐다.

그의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요즘 인기 있는 SNS를 켜 사진 하나를 내게 보여 주었다. 사진 속 백지찬은 한껏 차려입은 채 느슨한 포즈를 잡고 있었다.

“야, 쩔지? 얘 팔로워도 존나 많아.”

“아…….”

딱히 SNS 문화를 잘 아는 것도 아니거니와 관심도 없는데. 백지찬의 친구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화면을 넘겨 가며 백지찬의 ‘#데일리룩’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 주었다.

“폰 다 부숴 버리기 전에 그만해라. 진짜!”

백지찬은 얼굴까지 시뻘게져선 연신 그만하라고 화를 냈다.

어차피 다른 사람한테 보여 주고 싶어서 공개적으로 올린 사진일 텐데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반응이 시큰둥해서 그런가.

“……멋있네.”

빈말은 잘 못하지만, 이러면 나을까 싶어 백지찬을 보고 말했다. 그러나 백지찬은 빨개지다 못해 타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당장 계삭 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



나는 신대엽이 싫다.

한때는 좋아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지금 내가 저 새끼만 보면 버튼이 눌려서 날뛰는 거다.

신대엽과의 악연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아마 대여섯 살 때쯤일 거다. 그 시절 나는 병약해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같은 데도 못 가고 집에서만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친구가 없어 항상 혼자서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와중에 아빠 친구인 석구 아저씨가 놀러 오는 일이 드문드문 있었고, 아저씨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아들인 신대엽과 함께였다.

신대엽은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책 읽는 거 좋아하고, 점잖은 것 같은데 엉뚱한 소리도 곧잘 하고, 무뚝뚝한 것 같은데 친절하기도 하고. 아, 또래에 비해 키가 존나 컸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아무튼 걔는 우리 집에 올 때면 내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말을 걸다가, 아픈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상대해 주지 않으면 제집에서 갖고 온 책을 읽곤 했다.

하루는 걔가 읽는 책이 재밌어 보이기에, 그 손에 들린 책을 뚫어지도록 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신대엽이 고개를 들었다.



‘읽어 볼래?’



신대엽은 내게 책을 건네주려 했지만, 나는 그것을 잡고 읽을 기운도 없다는 이유로 받지 않았다.



‘그럼…….’



고민하던 신대엽은 내 머리맡에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조심조심 내 몸을 잡아 일으켜 내가 제게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게끔 했다.



‘이러면 되나?’



펼친 책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신대엽이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그놈은 뒤에서 날 안은 자세로 동화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내 몸을 둘러싼 팔에서 느껴지던 온기도, 등 뒤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의 차분함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내가 신대엽이 놀러 오는 날만 오매불망 기다리기 시작했던 게.

이후로도 신대엽은 우리 집에 오면 내게 책을 읽어 주었고, 나는 이따금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그놈한테 안긴 채 깜빡 졸기도 했다.



‘……자?’



내가 꾸벅거리기 시작하면 신대엽은 항상 그렇게 묻곤 했다. 잠기운에 빠진 내가 대답하지 못하면, 원래 자리에 조심스럽게 눕혀 주는 손길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보내는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낯 뜨겁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석구 아저씨 혼자서만 우리 집에 오는 일이 많아졌다. 아빠가 왜 혼자 왔냐고 물을 때마다 아저씨가 내놓는 대답은 비슷했다.



‘엽이는 민성이랑 캠프 갔어.’

‘태준이네 집에서 하루 자고 온대.’

‘가온이네 식구들 놀러 가는 데 따라가서.’

‘성훈이 만난다고 꼭두새벽부터 나가더라.’




그래서 그 민성이, 태준이, 가온이, 성훈이가 누구냐고 아빠가 물으면, 아저씨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엽이 친구.’



친구. 그래, 씨발, 친구!